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812)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812화(812/920)
812. 연주차 (4)
이건 아닌데.
족히 수천 명은 모인 듯한 군중의 틈바구니에서, 지브릴 디오프는 생각했다.
“지브릴! 오랜만이다. 어떻게, 전쟁 끝날 때까지 살아 있었네?”
“······.”
“이런 데서 다 만나고. 우리가 인연이긴 했나 봐, 의미가 좀 남다르기는 해도.”
‘이건 아닌데.’
“뭐야? 간만인데 인사 한마디 없이. 전투의 피로가 아직 덜 풀린 건가?”
“······.”
······묘하단 말이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컴컴하게 어둠이 내린 밤하늘은 어쩐지 단출하고 허전하게만 느껴졌다.
성사(聖事)의 시간이었다.
잔잔한 흥분과 이를 억누르는 엄숙함에 휩싸인 채로, 제국군과 신국민이 뒤섞인 인파가 판테온 광장의 중심을 에워싸고 있었다.
남자는 찌뿌드드함이 사라지지 않는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낯익은 공녀가 눈에 들어왔다.
“······파트마.”
“드디어 아는 체를 하네. 설마 한 번 약혼까지 했던 여자를 잊었나 했잖아.”
어두운 피부의 미인이 낮게 킬킬거리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브릴은 자신의 두 번째 약혼녀였던 파트마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그녀도 이번 전쟁에 참전한 줄은 미처 몰랐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다른 집안에 시집갈 생각이라고는 없었고, 오히려 병약한 언니를 대신해 가문을 물려받을 야망에 부풀어 있었던 당돌한 공녀였다.
잃을 것이 없었던 지브릴은 기꺼이 의좋은 자매의 연막이 되어주기로 했다.
어릴 적부터 두 사람과 허물없이 지냈으니 못 할 것도 없었다.
평생 유람이나 하고 싶었던 파트마의 언니가 더더욱 약한 척을 하며 부모를 설득하는 동안, 파트마는 그 유명한 디오프 공작가의 약혼자를 끼고 다니며 온갖 행사에 얼굴을 비추어 입지를 넓혀 나갔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자 백작가의 가주인 부친이 먼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파트마의 언니는 소가주 자리에서 물러나자마자 짐을 싸서 따뜻한 남부로 내려가 버렸고, 언제나 집안의 사고뭉치였던 바람둥이 파트마가 빈자리를 차지했다.
두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파혼했다.
“······표정이 왜 그래? 처음으로 바람맞은 살롱 풋내기같이.”
“······.”
꽤 재미있는 연극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뭐야, 정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그러면 치유 신관들한테 가보든가.”
한때의 동지를 만난 반가움에 싱글거리던 파트마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브릴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런 거 아냐.”
신관은 필요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마나 휴지기는 제때 가졌어?”
“8급 마법사가 쉬워 보이지, 아주.”
“하! 잘난 척하긴.”
곧바로 한마디 쏘아준 파트마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손마다 작은 초롱을 든 신국민들이 점점이 어스름을 밝히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거대한 영혼체가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내 등불의 바다가 우르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 주었고, 이란의 영령은 품에 소중히 무언가를 안고서 판테온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브릴 디오프는 그것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
-쉬이, 네 숙명은 이제 모두 끝났단다······. 가엾은 아이.
엘리서 페네티안.
더는 낫에 찔려 있지도, 피를 흘리거나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은 왕세녀의 시신.
영령의 뒤편으로는 애도의 화륜(花輪)을 든 크리스타너 페네티안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중년인의 낯은 이미 텅 비어 어떠한 표정도 그리고 있지 않았다.
어린 왕족과 귀족들이 깊숙이 고개 숙이고 뒤를 따랐다.
나라의 마지막 뿌리를 잃은 백성들이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흐흑, 으으으윽······.”
『전하께서, 전하께서 어찌······. 흐윽······.』
“······.”
다만 코르넬리서 페네티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브릴은 그것이 과연 누구의 뜻이었을지를 헤아리다가 억지로 생각을 끊어냈다.
“······폐하께서 국장을 열어주신다기에 어느 정도이려나 했는데, 이만한 대규모일 줄은.”
팔짱을 낀 파트마가 조용히 감탄했다. 남자는 속으로만 동의했다.
국왕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내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치러지는 장례였다.
이보다 급한 사안이 없기는 했으나, 이렇듯 대인원이 모이는 행사는 으레 엄청난 위험이 수반되었다.
극단적으로는 역공이 시작될 수도 있었고 왕도 귀족이나 백성들의 반동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명백히 존재하는 여러 불안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리크 리에스테르는 의식의 진행을 허락했다.
이는 그녀의 진실한 애도와 정복자로서의 자신감, 그리고 페네티안 신국에 대한 포용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대담한 결단이었다.
지브릴은 오촌 어르신의 그릇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아마 그에게 권한이 있었더라면 그녀와 같은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아아, 아으으······!”
이윽고 판테온의 정문에 다다른 영령이, 누군가를 맞아 잠시 자세를 낮추었다.
상대는 키가 작고 체격이 단단한 민머리의 신관이었다.
지브릴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가슴 치며 오열하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차마 큰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꺽꺽거리는 모습에 백성들이 대신 하나둘 울음을 터뜨렸다.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잃거나, 찬 바닥에 엎드러져 울부짖는 이들도 있었다.
마법사는 무감한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자꾸만 까닭 모를―평생을 난봉꾼으로 살았다고는 하나 인격마저 막돼먹지는 않았다―불만이 고개를 드는 탓이었다.
“······.”
······다 알겠는데. 당신들 지금 뭐 잊고 있는 거 없나?
그는 스스로도 무엇을 잊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화살을 밖으로만 돌렸다.
“오, 지브릴. 남의 장례식에서 그런 표정 지을 바엔 선발대로 귀국하는 게 좋겠다.”
‘너 정말 상태 안 좋아 보이네.’ 보다 못한 파트마가 직언했다.
남자는 순간적으로 삐끗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러는 넌. 뭐 잊은 거 없어?”
이게 뭐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아까부터 이딴 감정이 드는 건데?
“······.”
당연히 파트마는 황당해했다. 지브릴은 대답 대신 혀를 차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째서 이토록 초조하고 짜증스러운 기분이 몸뚱이를 잠식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옛 연인은 한참이나 그를 빤히 보더니, 다시 한번 너른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래, 무어. 전쟁통에 전우 잃은 게 너뿐이겠니. 나도 친구들 여럿 보냈다.”
“······내가 실언했어.”
“미안하면 나중에 찾아오든가. 서로 잠자리나 데워주면 좋지.”
파트마가 씩 웃으며 말하고는 멀어졌다.
지브릴은 고개를 주억거려 인사한 뒤 눈을 돌렸다.
어느새 외부 공개 의식의 마지막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까스로 축도를 끝낸 신관이 작은 종을 울리자, 크리스타너 국왕이 죽은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어 세드리크 리에스테르가 제국 황실을 대표하여 하얀 꽃다발을 들고 왕세녀 앞에 섰다.
마법사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어린 불티야.
“······.”
-기억하니?
영령이 다정한 목소리로 황태자를 불렀다. 어둑히 가라앉은 시선이 위를 향했다.
사내의 눈에는 예전 같은 생기가 돌지 않았다.
-굴을 나가면, 빛이 든단다.
-그러면 오랜 추억이 퍼져.
-수액처럼, 햇살처럼, 온몸으로······.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으니.
“······.”
세드리크와 지브릴은 물론이고, 광장의 누구도 신물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령은 부드러이 미소하며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훗날 달빛이 들면 이해할 거야.
-굶주린 씨눈에 힘을 부어주련?
“······.”
신성한 존재가 엘리서의 시신을 태자 앞에 내보였다.
세드리크는 눈동자만을 굴려 찬찬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왕세녀는, 누가 봐도 죽은 사람 같지 않았다.
뺨에는 건강한 혈색이 돌았으며 잠든 것처럼 보이는 얼굴은 몹시 평온했다.
좋은 꿈을 꾸는지 입꼬리 또한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피부를 뒤덮은 핏자국도 없었고, 모왕(母王)이 손수 땋아 내린 머리는 단정했다.
오직 몸통을 꿰뚫었던 끔찍한 낫의 흔적만이 그녀가 망자임을 알리는 유일한 단서였다.
묵묵히 애도한 태자는 왼손을 들어 성스러운 불꽃을 일으켰다. ‘화르르르!’
“······.”
-사아아아아······!
그가 왕세녀에게 꽃불을 건네는 몸짓을 취하자, 한순간 망자의 몸을 둥글게 감싼 막이 미색(米色)의 빛을 뿜어냈다.
놀란 군중이 탄성을 터뜨렸다.
“오오오······!”
-사르르르······
이내 광채가 가라앉고, 성화(聖火)를 흡수한 막은 다시금 투명하게 변했다.
세드리크는 무감각한 얼굴로 영령을 올려보았다.
‘고맙구나.’ 상냥하게 인사한 신물의 뿔이 그를 향하여 느릿느릿 기울었다.
연민하는 손끝은 아마색의 튤립을 피워냈다.
-싸르르, 싸르르······
-가련하게도······.
그때였다.
“역시, 달이 뜨지 않는군요.”
“······뭐?”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났다. 지브릴은 미간을 찌푸리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린 예언자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빛 자수가 놓인 로브는 어둠 아래서도 은은하게 반짝였다.
“······여섯 날개를 지닌 주신의 천사가 황금빛으로 이 땅에 강림했고, 달을 품은 몸으로 사라졌습니다.”
모데스트 바카리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이게 뭔······.
“무슨 헛소린데? 그런 것도 계시인가?”
“밤하늘에 달이 뜨지 않고 있습니다, 디오프 공자.”
청소년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위를 가리켰다.
지브릴은 그제야 지금까지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
아니, 무수히 많은 위화감의 주석(註釋) 중 하나를 확인했다.
하늘에는 정말로 달이 없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는 달이 있었습니다. 오늘이라면 필시 하현달이 떠야 합니다.”
“······.”
그냥 구름에 가려진 것 아니겠느냐고 대꾸하려 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은 지브릴도 알고 있었다.
플뢰르 드 리스는 제국 점성술의 정점에 있는 집단이었다.
그의 얼빠진 낯짝을 확인한 바카리가 도도하게 턱을 까닥였다.
“만약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면, 대륙은 재난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봐, 꼬마 단장님. 느닷없이 나한테 그런 소릴 해도······.”
“폐하께 고해야겠습니다. 마침 근처에 계셨으니 공자도 동행하시지요.”
“뭐? 내가 왜······.”
“장차 큰일을 하실 분이라면 매사에 책임감을 가지시는 게 좋습니다.”
“······뭐?”
되묻기만 대체 몇 번을 하는 건지.
지브릴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단장은 꾸역꾸역 제국 귀족들을 비집고 사라졌다.
마법사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예언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제길.”
하릴없이 사람 틈바구니로 몸뚱이를 욱여넣었다.
어차피 집중할 거리가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이봐! 쪼끄만 게 왜 저렇게 빨라. 같이 가자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쟁 이후의 삶은 이미 시작되었다.
남자의 자수정 귀걸이가 한순간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
달이 없어도 밤은 깊어 갔다.
늦은 시각, 황제의 막사에서는 또 다른 이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흑,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 한마디 말씀도 없이 떠나실 거라고는······.”
“······.”
널찍한 나무 탁자에 놓인 것은, 작고 손때 묻은 헝겊 인형이었다.
엘리서 페네티안의 국장을 마무리한 프레데리크는 떠난 자의 흔적을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가인의 손을 붙잡은 이자벨이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있었다.
“전투가 끝날 즈음······. 하난 폐하의 힘이 저의 몸을 떠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그저 평소처럼 인형에 깃들어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저 또한 지금까지 어떠한 기운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가인이 나지막이 고했다.
황제의 거친 손끝은 잠시 인형의 단추를 짚었다.
“······이전에도 이러한 적이 있느냐.”
“······.”
이자벨이 차마 답을 내놓지 못하고 머리를 내저었다.
그녀의 하얀 뺨 위로는 새로운 물 자국이 끊임없이 남았다.
황제를 지척에서 보필하는 대주교들이 조심스레 의견을 올렸다.
“폐하. 일찍이 하난 루마이얀 폐하의 뜻을 받들어, 우리 신관들이 사막의 사령들을 위한 대규모 성사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 영혼은 주신의 곁으로 돌아가 안식하였다고 믿었습니다만······.”
“······하난 폐하께서 왕도까지 이끌고 오셨던 넋들을 생각하면, 다수는 대륙에 남아 그분을 기다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주군을 기다렸다.”
프레데리크가 중얼거렸다. 영혼을 잃어버린 인형에는 이제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먼저 돌아가 안식을 취하지 않고, 주군의 혼과 함께 떠나고자 기다렸다······.”
“그릇에 남은 고대의 에테르를 모두 소진하시고, 그대로 주신의 곁으로 가신 것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
황제는 말없이 눈을 감고 기도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녀의 곁이 또 한 칸 비어 있었다.
이자벨은 어깨를 떨며 오래도록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