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825)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825화(825/920)
쌍둥이자리 (8)
그날 저녁.
“고객님, 신분증 한 번만 보여주시겠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여기 필수 부분은 모두 동의 체크해 주시고요. 이쪽이랑 다음 장에 사인 한 번씩만 부탁드립니다.”
“네.”
통신사 직영 대리점을 방문한 나는, 덜덜거리는 손으로 핸드폰 기기 변경을 위한 태블릿 화면에 서명하고 있었다.
그즈음에는 정말이지 영혼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오늘 내가 무슨 정신으로 회사 일을 마무리하고 짐을 챙겨서 정시 퇴근까지 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도 세계선을 건너온 직후의 며칠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던 듯싶었다.
나는 오후에 있었던 법무팀 내부 회의에서도 부지런히 발언했고, 지난 며칠간 부사수님과 함께 검토한 신규 금형 발주 계약서의 초안에 관해서도 빠짐없이 발표했다.
그러니까 퇴근할 때까지도 회사에는 별일이 없었는데······.
‘예서 대리님, 목에······.’
‘네?’
······아니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여기 목에, 깃털 같은 게 있는데요······.’
‘아? 헉!’
문제의 파일을 열어보자마자 너무 식겁한 바람에, 셔츠 목깃 사이로 깃털이 세 장이나 삐져나왔으니까.
무려 세 장!
‘감사합니다. 제가, 제가 어젯밤에 패딩을 입어서······.’
‘패딩을요?’
‘······추위를 많이 타서요.’
지금은 무려 사월인 데다가, 셔츠 안에서 주먹만 한 패딩 깃털이 나왔으니 무조건 어제 안 씻은 놈이라고 오해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부사수님은 참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웃어넘겨 주었지만 내 심장은 이리 뒹굴었다가 저리 뒹굴었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하마터면 회사에서 날개를 펼칠 뻔했잖아.
정현서 방에 불사조 깃털 굴러다닌다고 잔소리할 계제가 아니었다고!
게다가 그 한글 파일은 도대체 뭔데?
‘□□ □□□ □□□□ □□□ □.hwp’
······왜 내 핸드폰에 그런 게 들어 있는 거야? 왜······.
‘「“□□□.”
미친, 깜□이야. 어깨가 절로 움□□다.
소리를 쫓□ 눈을 돌□ 곳에는 낯선 사람이 □었□.
“□구신데 저희 집에······.”
“푹 주□셨□니까.”
“네?”
한 명이 아니□다······.」’
······초반 몇 장을 읽어본 게 전부지만, 흐름이 너무 익숙했다.
깨진 글자가 많긴 해도 맥락을 파악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건······.
‘「“불편□신 데는 없는지요. 황□ □단사들이 신국 왕실의 평□을 참□□여 만든 옷입□다.”
“꼭 맞네요. 괜□아요.”」’
······좀 지난 일이긴 해도, 그건 분명히 뱅자맹과 내가 나누었던 대화였다.
아무렴 빙의 첫날 같은 충격적인 시간을 잊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고객님, 기기 이쪽에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나의 기록인가? 아니, 그러니까 그쪽 세계선의 ‘이야기’인가?
그게 어떻게 내 폰으로 들어왔지?
흔적이라면 당연히 형의 컴퓨터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고객님.”
“······.”
잠깐만, 설마 실시간으로 거기에 새로운 내용이 쓰이고 있는 건가?
형이 우리의 시간을 지켜보던 그때처럼?
아, 정예서, 단세포 등신 같은 게! 그걸 회사 컴퓨터로 제일 먼저 확인했어야지.
혼자 식겁해선 멀쩡한 마우스 부술 뻔하고 날개 깃털이나 뽑고 다니고!
“······고객님?”
“핫,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나는 어깨가 튀어 오를 정도로 놀라며 눈을 들었다.
그러자 상냥하게 웃은 직원이 새로운 핸드폰을 내밀었다.
“골라주신 클라우드 화이트 색상으로, 기기 변경 및 개통 완료되셨고요. 구매 사은품과 더불어 서비스로 강화 유리 필름 부착해 드렸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너무 예쁘네요.”
······나는 낯선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마주 미소 지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단 하나의 의문뿐이었지만.
그 파일 여기다가 옮겨도 되나?
*
-뚜둥!
젠장!
‘예기치 못한 오류로 인해 파일을 복사할 수 없습니다. 이 오류가 계속 표시되면 오류 코드를 사용하여······.’
아까도 보았던 오류 메시지가 떴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의 마감을 무사히 마친 정현서는 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안 되네.”
“그러게, 안 되네······.”
또다시, 우리는 형의 방에 모여 있었다.
정은서는 본인의 방에서 <퇴사했더니 이계 공녀>를 복습하느라 바빠 아저씨들의 비밀 모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같은 소설을 읽는 사람들과 음성 채팅을 하면서 내용을 곱씹어 본다는데, 자세한 진행 방식은 나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컴퓨터, 노트북, 새 폰으로 옮기는 건 전부 실패했고······. 스위치 앱을 써도 문제의 파일은 이사가 안 되고 덜렁 남아 있어. 무조건 여기에만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뭐지? 다행이긴 한데 왜 하필 이 폰이야?”
나는 구형 스마트폰을 노려보며 정신 나간 놈처럼 중얼거렸다.
집에 와서 형과 대화를 나누어 보니 비로소 모든 사실관계가 또렷해졌다.
문제의 네모네모 파일, 원래는 형의 데스크톱에 있었잖아.
물론 당시에는 모두가 세계선 덮어쓰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퇴계공이든 우리 세계든 제대로 지켜내기 위해서는 저장하지 않는 쪽이 맞았지만.
그렇다고 냅다 파일이 이쪽으로 튄다고?
“디오프 공자에게 도움을 받으셨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네······?”
간이 의자에 걸터앉은 요한 경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나는 그의 팔목을 잡고서 영차 몸을 일으켰다.
추기경은 오늘도 집게 핀으로 머리를 틀어 올려 몹시 단정해 보였다.
푸른 용의 비늘 같은 남자의 눈동자가 과거의 어느 시점을 더듬는 듯했다.
“‘폰이 살아났다’라고 하시면서, ‘충전’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은데요.”
“······아!”
짝! 절로 박수가 튀어나왔다. 그랬지! 왕도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
“형, 나 8급 마법사 친구한테 부탁해서 전기 마법으로 폰 충전했었어! 전격(電擊)이 그 사람 특기거든. 혹시 그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그럴듯한 이론이네. 마나는 ‘주신이 쓰고 남은 힘’이니까.”
“주신이 쓰고 남은 힘, 맞아. 그곳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어. 우리 스승님도.”
“게다가 너희 세계선의 존재 자체도 주신의 바람을 기반으로 하니······. 신의 기운이 깃든 물건에 세계가 피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대피가 제대로 이루어진 건지는 몰라도.’ 팔짱을 낀 정현서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세상에, 처음으로 해답다운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단전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오래간만에 활짝 웃는 얼굴로 요한 경을 돌아보았다가 폰을 내려다보았다.
‘주신이 쓰고 남은 힘.’ 핸드폰은 애초에 그쪽으로 넘어갈 때부터 나와 함께한 몇 안 되는 소지품 중 하나인데,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단서가 될 줄은 몰랐다.
아직은 무엇도 확실하지 않지만 실낱같은 희망이 생긴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때 충전해 달라고 부탁하길 참말 잘했다.
진짜 진짜 고마워요, 지브릴! 대륙 최고의 제비!
“단서를 제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요한 경. 그러면 이제 그거 확인해 보자, 형. 스크롤이 막 올라가는지. 형이 우릴 지켜보고 있었을 때처럼, 저 파일에 실시간으로 친구들 이야기가 쓰이고 있는지.”
“그래.”
“왠지 그럴 것 같아. 느낌이 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는 세계니까 내 폰으로 도망쳐 온 게 분명하다고.”
정현서가 오류 창을 닫기 위하여 마우스를 쥐었다. 바로 그 순간―
“어?”
잠깐만.
“왜.”
“형, 저 오류 메시지······. 아까도 저런 내용이었던가? 오류 코드 다음에.”
“······.”
나는 검지를 뻗어 모니터 한군데를 가리켰다.
미간을 좁힌 형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우리는 침묵에 휩싸인 채로 글자를 읽었다.
‘예기치 못한 오류로 인해 파일을 복사할 수 없습니다. 이 오류가 계속 표시되면 오류 코드를 사용하여 이 문제에 대한 도움말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오류 3BOZHENA01:’
“······.”
“······.”
“······.”
‘개연성의 부족으로 요청된 작업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보제나에 관한 오류?”
“뭐라는 거야······.”
하마터면 똑바로 선 채로 심장을 토해낼 뻔했다.
써늘한 밤공기가 우리 형제의 목덜미를 설핏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몇 초가 흐른 뒤에야 그것이 요한 경의 힘이었음을 깨닫고는 눈을 깜빡거렸다.
황급히 올려다본 추기경의 옆얼굴 역시 미약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재빨리 그의 팔꿈치를 붙들고서 에테르를 불어넣어 주었다. 진정하세요.
“헤릿은 괜찮을 겁니다, 경.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보제나는 그때 분명히 소멸되었으니까요. 정현서, 창 닫고 파일 다시 열어봐 줘.”
-딸깍딸깍!
짤막한 더블클릭에 곧바로 한글 프로그램이 실행되었다.
문제의 파일이 열리자마자 나는 부랴부랴 스크롤바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형의 말로는, 저 막대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작아지면서 위로 올라가야 정상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상황이 진행되고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니까, 파일의 내용도 쭉쭉 늘어나는 게 맞는다고······.
“어······.”
주신 맙소사.
“어어······.”
“움직인다.”
오른쪽 가슴에도, 뱃속에도, 다리와 발바닥까지도 심장이 붙은 기분이었다.
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다시피 하며 어린아이처럼 파안했다.
“우와아악! 움직인다! 요한 경, 막대가 움직여요!”
‘헤릿과 친구들이 건너편에 있어요!’ 거실 맞은편 방에 정은서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나는 한껏 목청을 올려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이 심했을 요한 경 역시 우리 형제를 향하여 밝은 웃음을 돌려주었다.
그가 진심으로 안도하는 낯을 보니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내내 물에 빠져 있다가 겨우 뭍으로 올라온 사람처럼, 나는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모니터를 돌아보았다.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다 왔습니다. 정말로 이제······.”
다 왔다. 다 온 거나 마찬가지다.
아직은 건너갈 방법도 모르고 좋은 생각도 나지 않지만, 어쨌든 친구들은 가까이에 있으니까.
누구도 환상 속의 세계선으로 멀어지지 않았어. 오히려 그 반대였던 거야.
모두가 줄곧 내 주머니 안에······.
-딸깍!
“잠깐.”
스크롤바를 잡아 아래로 내리던 정현서가 말했다.
나는 멈칫하며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이거 좀 이상한데.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뭐? 왜?”
형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긴장하여 주먹을 쥐었다 폈다.
“여기, 네가 낫에 찔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직전까지는······. 대충 내용이 보여. 깨진 글자가 많기는 해도.”
“응. 그러네.”
낮에 회사에서 잠깐 확인했던 것처럼, 네모네모 파일의 칠십 프로 정도는 멀쩡했다.
꼼꼼히 읽어보면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깨진 부분은 나와 요한 경의 기억으로 충분히 메꿀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정현서 역시 그날 새벽 내내 읽었으니 파일의 내용을 대충 알 것이다.
아니, 따지고 보면 빈칸을 반드시 채우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다.
당사자인 우리가 기억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그다음, 아래쪽으로는.”
형이 스크롤 막대를 잡고서 밑으로 쭉 내렸다. 그리고······.
“······.”
······.
“하나도 안 보이지. 여기서부터는 전부 깨져서 읽을 수 있는 게 없어.”
“······.”
“······.”
나는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섰다. 형의 말대로 눈앞에 펼쳐진 페이지는 그저······.
‘「“형······. 내가 거□서 쓰던 수첩□ 없어.”
□시에 나의 핏기도 싹 빠져나□는 기분이었□.
*
□ □□. □ □□□□□ □□ □□.
□□□□ □□ □□ □□······.」’
이어지는 모든 것이 네모였다.
내가 해독할 수 있는 문자는 단 한 글자도 없었다.
절망이 나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