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833)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833화(833/920)
다르타냥과 달 사냥 (5)
잠시 후. 내 손에는 딸기 한 대야를 담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형에겐 조금 늦어진다는 연락을 하고, 반대편 출구 쪽에 맛있는 과일가게가 있어서 그곳까지 들르고, 편의점에 가야겠다는 동생과 다시 지하철 역사 안으로 내려왔을 때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사방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너그러우신 둘째 오라버니’의 카드로 아이돌 샌드위치를 결제한 정은서는 내게 팔짱을 끼고서 똥강아지처럼 통통거리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이럴 때면 정말로 중학교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딸기 향 좋다. 맛있겠다.”
“그러게, 형도 좋아하겠다. 정현서 딸기 킬러잖아.”
“어. 큰오빠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딸기 좋아했대.”
“그래? 왜 난 몰랐냐.”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지하 통로를 가로질렀다.
정은서가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나도 이번에 요양병원 갔을 때 처음 들었어. 엄마 임신하고 나서 입덧이 너무 심했는데, 딸기는 진짜 기가 막히게 쑥쑥 들어갔대. 근데 나중에 입덧 없어지고 만삭됐을 때도 그랬대. 한 대야를 반나절 만에 해치웠는데도 딸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 혼자 힘들게 딸기 사 와서 먹은 적도 있대. 아빠 일하러 가신 동안에.”
“그랬군. 그래서 형이 딸기 학살자구나.”
“그니까. 드디어 7대 불가사의 하나 풀림.”
곧바로 웃음이 터졌다.
우리는 실없이 킥킥거리며 에스컬레이터가 보이는 출구 방향으로 걸었다.
그런데 은서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는 듯했다.
“······작은오빠야.”
“음?”
돌아본 꼬맹이의 낯이 제법 심각해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싸한 느낌이 들었다.
“······요한 삼촌 있잖아, 큰오빠 친구라고 했지? 전 직장 동료라고.”
“어? 어어, 그렇지······.”
주신 맙소사, 망했다. 나 거짓말 진짜 못 하는데.
하필이면 은서랑 둘만 있을 때 요한 경 관련 주제가 나오다니!
나는 최대한 빠르게 안면 근육을 풀어보려 애썼다.
침착해, 정예서. 별일 없을 거야. 괜찮아.
“왜 갑자기 입을 씰룩거려? 얼굴에 쥐 났음?”
“아니······. 미안.”
그냥 동생 앞에서 주둥이만 뒤틀어 댄 꼴이 되고 말았다.
내가 별 이유 없이 딸기 봉지를 다른 손으로 바꿔 드는 동안, 정은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역사 안에서 모든 속내를 다 털고 갈 참인지 녀석은 아예 발을 멈추고 출구 근처에 자리를 잡은 모양새였다.
“딱 봐도 엄청 좋은 분인 거 같거든? 큰오빠한테 깍듯하고 오빠한테도 잘하고, 한참 어린 나한테도 정중하게 잘해주시고. 키 크고 잘생기셨는데 집안일까지 막 나서서 해주시고.”
“어어, 그거는 그런데, 네가 불편하면······.”
나는 반사적으로 마른세수하려다가, 그런 행동이 동생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고는 잽싸게 손을 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은서가 불편할까 봐 형과 요한 경과 나는 아침저녁으로 동선을 세세하게 정해서 움직이고 있었는데―다행히 두 개의 욕실이 분리되어 있고, 세탁기도 원래 요일을 정해서 따로 돌리기에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모두가 예상했던 것보다 요한 경의 체류가 훨씬 길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낯선 남자 손님이 집에 장기간 머무르는 건 당연히 은서에게 큰 부담이겠지.
슬슬 나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동안 은서도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고, 요한 경의 ‘귀국 일정’ 같은 건 전혀 묻지 않았잖아. 하지만 이젠 슬슬 한계인 모양이고······.
세상에. 요 며칠 생각이 많아 보이던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나는 미안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네가 불편하면, 오빠가 이따 큰오빠한테 얘기해 볼게. 바로 근처에도 숙박업소가 있고 잠실역 쪽으로 가면······.”
“아니, 아니. 요한 삼촌이 나갔으면 좋겠다는 건 아니고! 하나도 안 불편하다고 하면 거짓말인데 절대로 그런 문제는 아니야. 진심임. 진짜 문제는 따로 있어.”
“진짜 문제······?”
나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한 터라 반응의 전환이 느렸다. 그게 뭔데?
“······놀라지 마.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한 번에 들어.”
“어, 어······.”
정은서가 똘똘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새삼 가인 씨와 표정 쓰는 게 닮았다.
“아무래도 요한 삼촌이······. 초능력자인 것 같아.”
“컥!”
순간적으로 에테르가 튀었다!
“쉿!”
-짝!
동생이 조용히 하라며 등짝을 때렸다.
절묘하게 손이 안 닿는 구역만 노린 일격에, 나는 비 오는 날 외출한 지렁이처럼 온몸을 비틀어 댔다.
아파! 미친, 손가락에서 에테르 샌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그분이 막 염력 비슷하게······. 근데 염력은 아니야. 약간 바람? 그런 쪽인 거 같은데. 아무튼 공중에 물건 띄우고 이러는 거 봤다고.”
“헉······.”
-사르르······
언제? 언제 봤지? 요한 경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는데.
은서는 일반인이니―주신이기도 하지만 일단은―잠깐 방심하셨던 걸까?
나는 어버버하며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바지에 손바닥을 문지르는 척 에테르를 숨기려 애를 썼다.
기어이 들켰다는 생각에 심장이 단모리장단으로 덩 덕덕쿵덕쿵 뛰어대기 시작했다!
“나 진짜 구라 아니거든? 정신에 이상 있는 것도 아니고, 헛것 보지도 않았어. 완벽하게 정상적인 상태에서 목격한 거야.”
“어우······. 그랬구나······.”
“심지어 그 후로 한 번 더 봤어. 어젯밤에 거실에서.”
“이야······. 그랬구나······.”
그랬구나? 당장 ‘그랬구나’가 적절한 반응 맞나? 괜찮나? 은서가 이걸 지금 알아도 되는 건가?
영원히 비밀로 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우리가 적당한 타이밍을 놓친 건 사실이지만―이런 식의 선공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천하의 뻥쟁이 정현서라면 모를까 나한테는 너무 갑작스러운 시련이었다!
“잠깐, 오빠 눈이 왜 그래?”
“어? 뭐가? 아, 잠시만. 눈에 뭐 들어갔다.”
정예서, 미친놈아! 보라색! 너 에테르 쓰면 눈알 보라색 되잖아!
나는 허둥지둥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깜빡이는 척했다.
힘의 제어는 이제 전문가 수준으로 능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에테르가 없는 세계라 그런지 한번 풀어지면 한도 끝도 없이 풀어져서······!
“······내 말 진지하게 들은 거 맞아? 그냥 장난으로 여기는 눈친데?”
“아니? 절대 아니지. 오빠도 현재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중이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사안의 중대성을 동일하게 판단하고, 앞으로도 면밀히 지켜봐야 한다고 믿어.”
“······무슨 입장 표명을 백악관 대변인처럼 함?”
“하하하······.”
나는 차마 동생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아직도 눈동자가 보라색일까 봐―재빨리 웃어넘겼다.
정은서의 탐탁지 않은 눈빛이 따끔따끔 뺨에 와 닿았다.
그때였다.
“게다가 이번 주부터는 꿈에······.”
-퍽!
“아!”
“엇!”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그만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은서와 강하게 부딪혔다.
다행히 막내가 넘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상대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달그락!
“어이쿠,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급하게 나오느라고 미처 못 봤습니다. 괜찮으세요?”
남자 역시 딸기를 사 가는 길이었는지, 찬 바닥에서 상큼한 과일 향이 물씬 올라왔다.
다만 그는 자신과 부딪힌 어린 학생이 걱정되어 딸기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은서는 팔뚝을 문지르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양 웃어 보였다.
남자는 서울말을 했지만 억양에 약간의 사투리가 배어 있었다.
“괜찮아요. 옆으로 부딪힌 거라 별로 안 아파요.”
“그래도 너무 세게 부딪히신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통행로에 서 있었는데요.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는 동안, 동생이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딸기를 남자의 봉지에 주워 담았다.
안타깝게도 몇 개는 뭉크러져서 맛있게 먹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남자는 얼른 허리를 구부리고 나와 함께 딸기를 담았다.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고맙습니다. 우리 와이프가 임신 중인데 딸기를 너무 좋아해서······. 급하게 사서 들어가는 길이었거든요. 정신 없이 걷다가 뛰다가 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몇 개는 못 먹게 돼서······. 저희 거 한 줌 드릴게요.”
“엄마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깜짝 놀란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의 수더분한 반응에 밝게 웃으며 우리 딸기를 챙겨 주었다.
“제 동생이 아기 거 몇 개 먹었다고 생각할게요. 댁에 가서 아내분이랑 맛있게 드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여러 차례 꾸벅거렸다.
마지막으로 은서에게도 인사하고 서둘러 출구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은 무척 바쁘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어느새 나의 백팩에서 물티슈를 꺼낸 정은서가 바닥의 딸깃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내려보았다가 다시금 남자가 멀어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몇 초 스치듯이 본 게 전부지만, 어쩐지 낯이 익었는데······.
“혹시 그때······.”
얼마 전 지하철에서 만났던 만삭의 여자분이 떠올랐다.
나는 설핏 미소 지으며 가방을 고쳐 멨다. 어쩌면 두 분이 부부일 수도 있겠다.
아닐 수도 있지만.
“······정예, 우리 올라가서 마저 얘기하자.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까.”
“어어, 그러자.”
참, 그러고 보니까 엄청나게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었지.
우리는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손잡이를 톡톡 건드리는 막내의 손놀림이 어째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평소처럼 녀석의 뒤에 선 채로 마른침만 꼴딱꼴딱 삼켰다.
작은 사고로 잠시 느슨해졌던 긴장의 실이 다시금 팽팽하게 당겨진 느낌이었다.
“후우······.”
······뭐라고 하지.
은서가 먼저 어려운 말을 해줬으니까, 역시 이대로 나도 속 시원하게 사실을 털어놓는 게 맞으려나?
아니면 그 전에 형에게 먼저 의견을 구해야 할까?
본인이 주신이라는 사실을 알면 막내는 어떤 식으로든 죄책감을 느낄 거고, 충격을 받을 텐데.
지금이야 건강하게 대학에 다니고 있지만 재작년까지만 해도 병원을 드나들며 고생한 앤데······.
그렇다고 여기서 애매하게 둘러대면 거짓말을 더 쌓는 것밖에 안 돼.
그건 미래의 은서에게 더욱 큰 상처를 줄지도 모르고.
‘크라운맥주’.
어렵다······. 음?
“······크라운맥주?”
빨간 바탕에 하얀 글씨. 큼직큼직하고 정직한 폰트.
나는 반듯하게 내걸린 출구 바깥의 간판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동네에 저렇게 오래된 광고판이 있었던가?
“우와. 정예, 저거 봐. 완전 옛날 신문같이 생겼다.”
‘요즘 마케팅은 저렇게도 하는구나.’ 먼저 인도로 나온 은서가 한곳을 가리켰다.
나는 노점상에 종류별로 놓인 종이신문을 보며 입을 헤 벌렸다.
오색으로 인쇄된 전면 광고가 행인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잠깐만, 저건······.
‘세계적인 종합관광 레저 유통단지’
‘-롯데월드(LOTTE WORLD)-’
‘지금 우리나라에 세워지고 있읍니다’
······뭐?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나라!’
‘롯데월드가 마침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롯데월드 어드벤쳐-
7월 12일 오픈’
나는 황급히 시선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거리의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높이가 낮았고 규모도 작았다.
숫자 역시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적었으며, 무엇보다 외양 자체가 판이했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출구를 잘못 보고 나온 수준의 오류가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서울올림픽 기념 축제’.
세로로 기다란 현수막, 머리에 까만 상모를 쓴 호돌이가 눈에 들어왔다.
말문이 턱 막혔다.
“······은서야, 이쪽으로 와 봐.”
그래. 지하철 역사 안에서 느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그릇을 통째로 뒤흔들고 있었다.
나는 동생의 손목을 덥석 잡고서 부랴부랴 역사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주변을 휘둘러본 막내의 표정 역시 심상치 않게 굳어가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자 지하철 출구에 박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지하철 2호선’.
‘(217) 신천’.
“······말도 안 돼······.”
‘실례지만 집이 신천이세요?’
“미쳤어. 설마. 설마······.”
전신에 소름이 내달린다.
‘그럼 의도하신 바는 아니지만, 대지 속성의 에테르가······. 일종의 독(毒) 속성으로 특화하는 결과를 얻으신 거네요. 맞습니까?’
하난 루마이얀 폐하.
‘-그래. 무덤 내부와 바깥의 시간이 달랐던 점 역시 그러한 연유일 것이다.’
‘에테르가 시간의 흐름에도 영향을 준다는 뜻입니까?’
쿵, 쿵, 쿵······!
‘-못 할 것이 있을까. 짐의 무덤은 오랜 세월 고도로 응축된 에테르의 늪이었다.’
“······오빠, 우리 다른 역에서 잘못 내렸나? 여기는 분위기가 영 딴판인데?”
“정은서, 빨리 내려가. 당장!”
‘-너희가 말한 공간의 뒤틀림 또한 에테르의 작용이었을 터.’
-싸아아아······!
손끝에서 금빛 에테르가 터져 나왔다.
나는 미친놈처럼 동생을 붙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