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849)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849화(849/920)
지금 너를 찾아가고 있어 (6)
“······아이고야. 간호해 주실 필요는 없었는데.”
가인이 왕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곤란한 마음이 앞서 괜스레 뒤통수를 긁적이게 되었다.
코끝을 맴도는 모래 냄새, 서느런 새벽 공기 위로 은은한 그의 향기가 덧대어져 있었다.
얇은 휘장이 살랑거리며 아름다운 얼굴을 반쯤 가렸다가 다시 드러냈다.
성기사는 문득 눈앞의 남자가 눈 속에서 피어난 복수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전쟁통의 숲에서 이따금 본 적이 있는, 작고 노란 꽃.
“음······. 깨워서 방으로 보내드려야겠지.”
단순히 쓰러진 것뿐이라, 고열이나 몸살 같은 흔하디흔한 증상조차 없었다.
오래 지켜볼 필요가 없는 일회성 실신이었고 아침에 밥이나 든든하게 챙겨 먹으면 금방 잊힐 소동이었다.
그걸 빤히 아는 황태자와 디오프는 당연하다는 양 그녀를 홀로 두었는데, 코밑의 왕자님은 이리 늦은 시간까지 불편하게 앉아 곁을 지키고 있으니 썩 미안했다.
저런 자세로 자면 목 무진장 아프실 텐데. 허리에도 엄청 안 좋고.
“큼, 큼.”
-부스럭
“······.”
일단 물 한 방울을 만들어 내서 꿀꺽꿀꺽 마시고, 발치의 바구니 안에서 잠든 신수들을 확인한 뒤, 슬쩍 상체를 일으켜 남자를 깨우려는 찰나 가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인제 보니 팔짱을 낀 그의 손에 조그마한 소지품이 들려 있었다. 저건······.
그 수첩이다. 왕자님이 ‘신성 기록’이라고 부르며 품에서 떨어뜨려 놓질 않는.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났다.
가인은 자신의 청력이 과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저 때문에 잠에서 깨지는 않았을까 긴장했다.
아니, 어차피 깨우려고 했으니까 깨어나셔도 크게 상관은 없긴 한데, 저 수첩 내용이 진짜 궁금했단 말이야.
대놓고 물어볼 자신은 없고, 되게 소중한 물건 같아서 보여달라고 부탁드리기도 좀 그렇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진심 어디서 봤는데. 아는 수첩인데. 그러니까······.”
‘예서 씨.’
······아.
“······저거 아무래도 ‘예서 씨’가 쓰던 물건 같은데.”
누군가 모든 기억이 돌아왔느냐고 묻는다면, 백 퍼센트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가인은 자신이 올바른 길목으로 들어섰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모르긴 몰라도 육십, 아니, 칠십 프로쯤은 본래의 저를 되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몇 시간 더 자고 일어나면 훨씬 좋아질지도 모르지.
여전히 눈앞은 흑백인 데다 깨진 성반을 도로 붙일 방법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고, 물거울 속의 추기경 선배님은 걸핏하면 뜻 모를 농담이나 던져 대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지만······.
-짝!
“······그렇다고 남의 소지품을 함부로 들춰보면 되냐? 정신 차리자.”
가인은 차가운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세게 한 대 쳤다.
아까 쓰러지기 직전에 돌아온 기억이 무척 많았다.
파장이 워낙 강렬했으니, 바로 옆에 있었던 태자의 그릇도 분명히 공명했을 것이다.
날이 밝으면 식사하면서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면 되는 거였다.
못된 생각으로 왕자님 수첩 훔쳐볼 생각일랑은 접어두고.
“보여드릴까요?”
“아뇨, 아뇨. 저 그런 거 안 봐도 알아서 착착······. 워매.”
놀란 성기사는 하마터면 베개를 쥐어뜯을 뻔했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왕자가, 잠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흑백으로 물든 시야에서 그의 머리칼이 백색과 회색을 오가며 반짝거렸다.
가인은 한참이나 입을 뻥긋거리다가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방에서 편하게 주무셔도 되는데요. 전 추기경이라 진짜 멀쩡합니다.”
“혹시 몰라서요. 신체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곁에 있었습니다.”
“······.”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아유, 아니에요. 절대로 그런 말씀은 아니었어요. 그냥 저 때문에 피곤하실까 봐.”
양손을 휘두르며 절레절레 머리를 내젓자, 왕자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 웃으며 협탁의 조명을 밝혀 주었다.
그동안 성기사는 멍하니 그의 옆얼굴을 구경하고 있었다.
분명히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인데, 저런 표정은 또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천사가 몸을 빌리고 있었을 때의 왕자님과 눈앞의 왕자님은 안면 근육을 쓰는 방법부터가 다른 듯싶었다.
가인은 어느새 그의 품속으로 사라진 수첩을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
눈 뜨자마자 사기적인 미모의 남성에다 문제의 수첩까지 목격했더니,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실신하기 직전처럼 영주성 높이의 해일에 휩쓸리는 느낌까진 아니었지만, 지금도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깊이였다.
어디로 헤엄쳐 가야 확실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지, 그보다 구체적인 질문은······.
‘이 남자가 진실로 원하는 건 무엇일까?’ 바로 그거지.
“왕자님은 왜······. 천사님을 찾으세요? 뭐 하나 여쭤봐도 됩니까?”
“하하. 문장의 순서가 뒤바뀌었네요.”
그의 눈꼬리가 유쾌한 호선을 그렸다.
금세 잔잔해진 눈동자 바닥에는 가인이 영원토록 헤아리지 못할 과거의 시간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그게요, 사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꼭 여쭈고 싶었습니다. 차원 너머로 사라진 천사님이 왕자님께 은총을 부어주었고, 그래서 왕자님이 깨어나셨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요컨대 지금은 왕자님이 그분한테 감사함을 느끼는 상황인 거죠. ‘내가 큰 신세를 졌다.’”
“네.”
“하지만, 천사님이 오랫동안 왕자님의 몸을 빌려서 생활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네.”
“그리고 심지어······. 그분은 왕자님을 사칭했는데요. 제 기억에 오류가 있는 게 아니라면요. 아마 본인의 몸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 그랬던 것 같은데.”
“상당 부분 떠올리셨군요.”
왕자가 우아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대답했다.
“그래서 크리스텔 경은 그분이 싫으십니까?”
그러자 가인이 정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그녀의 무의식이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명제였다.
“아뇨, 아뇨.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저는······.”
“······.”
나는······.
‘강해질게요. 이왕이면 대륙에서 제일.’
‘그러면 제 친구가 이런 꼴 안 당해도 되고.’
“······저는 그분을······. 예서 씨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은 부르는 순간 생명이 되며, 문장은 내뱉는 순간 마법이 된다.
왕자를 똑바로 보는 가인의 바닷빛 눈동자에 느릿느릿 확신이 차오르고 있었다. ‘쏴아아아······.’
“······우리 모두가 예서 씨를 좋아했어요. 맞아요. 태자 전하도 그랬고, 황제 폐하나 추기경 전하도 그분을 진심으로 아끼셨어요. 하다못해 저쪽 방에 있는 제비 놈도 신경 쓰는 티가 났으니까 말 다 했죠. 신수들도, 헤릿도, 엄마도, 엘리자베트 경은 물론이고 프랑수아 후작님도······. 다들 정말로 좋아했어요.”
진짜로.
‘함가인.’
‘······예?’
‘제 흔적. 제일 중요한 거니까 왕자님한테만 알려드릴게요.’
······기억 속 가인은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건넸다.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널따란 추억 벌판의 저편에서, 갈색 머리 남자가 이쪽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 표정은 몹시도 익숙했으므로 금방 그녀의 뺨으로 옮겨붙었다.
살포시 미소한 가인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보고 싶어요. 갈수록 보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네.”
“그런데 왕자님은 왜······.”
다시 한번 남자와 눈길이 맞닿았다. 가인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왕자님도 그분을 잘 아세요? 좋아하니까 되찾고 싶으신 겁니까?”
“그런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
난해한 대답이었다.
조명을 받은 남자의 얼굴 절반이 밝게 빛났으나, 다른 반쪽은 달의 뒷면처럼 컴컴하여 묘한 감상을 주었다.
가인은 열심히 말을 골랐다.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만약 천사님이 돌아오면 왕자님의 자리가······.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질 수도 있잖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알던 왕자님이 사실은 왕자님이 아니라, 그분이었다는 진실을 모두가 알게 되니까 말입니다.”
“네.”
“그래도 그분을 다시 만나고 싶으세요?”
“네.”
“······.”
그야말로 벽창호가 따로 없었다.
가인은 난생처음으로 눈앞의 왕자와 세드리크 리에스테르에게 비슷한 구석이 있음을 깨달았다.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숨기고 싶은 건 지독하게 숨기는구나······. 성격 한번······.
“아, 정정하죠. 저는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예?”
“하지만 그는 이곳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왕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어처구니를 잃은 문장이 뇌를 거치지 않고 툭 떨어져 나왔다.
“······그러면 왕자님은요?”
“······.”
그는 처음으로 즉답하지 않았다. 가인은 재빨리 물음표를 연타했다.
“아니, 들어보십시오. 왕자님께도 가족분들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코르넬리서 왕녀님이나 모친은요? 그립지는 않으세요? 왕도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하다못해 고향인 페네티안 땅에 머무르고 싶다거나······.”
“······.”
“그런 욕심은 없으세요? 원하는 거. 갖고 싶은 거. 앞으로의 계획.”
“······.”
“왕자님 나름의 이유로 천사님을 챙기시는 건 좋은데요. 그러면 왕자님 자신도 잘 챙겨주시는 게 맞죠. 이제 전쟁도 끝났는데. 안 그렇습니까?”
“······오래전에는 원하는 게 있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저한테만 말씀해 보십쇼.”
가인이 한껏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반가운 지난날의 액자를 발견한 사람처럼 부드러이 웃었다.
그러고는 문득 손을 내밀었다.
-덥석!
성기사는 반사적으로 신관의 손을 맞잡았다. 참, 요 왕자님에겐 에테르가 없는데.
“뭐, 당장 천사님이 우선이라면 이것도 괜찮죠. 어쨌든 왕자님의 손을 잡으면 기억이 팽팽 돌아오긴 하거든요. 감사합니다.”
“······.”
“저 대답 강요하는 성격 아닙니다? 리 모 씨처럼 맘에 드는 답변 안 내놓는다고 인상 쓰고 다니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뒤늦게 너무 들이댔다고 생각한 가인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꺄오오오
“깜짝이야. 로피!”
응접실로 통하는 문가에서, 명백히 사람을 부르는 고양이 울음이 들렸다.
가인은 화드득 눈을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잠옷마저 올 블랙인 사내가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어어, 마침 잘 오셨네!”
그녀가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바구니의 신수들이 칭얼거리기 시작했으나 참말 미안하게도 지금은 저놈을 윽박지르는 일이 먼저였다.
“전하! 와서 왕자님 손잡으세요. 아, 또 어디 가! 여기까지 왔으면 그냥 좀 하자!”
“하하하.”
“이분이라고 기분이 좋으시겠니? 그래도 대의를 위해서 협조해 주시는 건데? 전하야!”
맑고 높은 울림 사이로, 남자의 기분 좋은 웃음이 배어들었다.
예서 페네티안은 낯선 행복을 느꼈다.
*
그리고, 페네티안 왕도.
리에스테르 본영의 심장부.
“폐하, 조금 전 오렐리 부티에 전하께서 당도······.”
-펄럭!
“프레데리크!”
입구를 가린 천이 크게 팔락이고, 추기경은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성큼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반려를 깊이 끌어안았다.
비로소 허파가 열리며 긴 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