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854)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854화(854/920)
안 되면 되는 거 해라 (4)
세드리크는 문득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
젖은 달빛을 느낀 듯했건만 찰나의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귤색 눈동자가 한참이나 밤하늘을 헤아렸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둠이 불에 녹은 송진처럼 시커멨다.
달그림자 역시 어스름을 장막처럼 둘러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태자는 오랫동안 사막의 야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장딴지를 기어오르던 레아가 머리를 갸웃할 때까지도.
-낑?
“······아무것도.”
가인과 세 남자, 소년과 신수들과 굴뚝새 한 마리는 널찍한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기골트 카라반사라이는 사막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규모 숙박소인 데다 기골트 마을의 치안이 좋아 연중 공실을 찾기 힘들었는데, 최근에는 전쟁으로 유동 인구가 크게 줄면서 방이 제법 남아돈다고 했다.
덕분에 달 사냥 일행은 침실만 네 개에다 거실까지 딸린 가장 큰 특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큰일 없으면 내일 오후쯤 경계의 신전에 닿을 거고. 들어가자마자 바로 소원의 성반 상태 확인해 보면 되겠네요. 깨진 건 딱풀로 붙이든 조각처럼 짜 맞추든 해보고. 여기서부터는 진짜 지도 꺼낼 일이 없다. 보라색 연기만 쭉 따라가면 되니까.”
“계획이 단순해서 좋긴 한데. 그건 교황청 병력이 우릴 통과시켜 줄 때의 이야기 아닌가?”
“그쪽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가인과 지브릴이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쳐둔 채로 진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예서 왕자가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제비꽃을 닮은 눈동자가 신비로운 빛깔로 호선을 그렸다.
“그러면 잠들기 전에 짐을 점검할까요?”
“네, 뭐.”
“그러고 나서 악수하는 시간을 갖죠.”
“······네, 뭐. 악수도 좋죠.”
가인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취침 준비를 끝마친 다섯 사람은 차근차근 마지막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치즈며 육포를 비롯한 식료품은 이제 거의 바닥난 상태였는데, 내일 출발할 때 헤릿의 간식과 더불어 사놓으면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말들의 식량과 생필품도 마찬가지였고, 물이나 과일이야 항상 충분하니······.
-부스럭!
“맞다! 저 황도에서부터 하난 폐하를 모시고 왔어요. 다들 보셨던가?”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고.”
“오케이.”
헝겊 인형을 양손으로 받쳐 들었던 가인이 냉큼 수긍하고서 다시 가방을 챙겼다.
헤릿 역시 조그마한 내의며 손수건을 개어 넣느라 열심이었다.
그즈음 왕자가 황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괜찮으시다면 저의 돼지 조각상을 돌려받고 싶습니다.”
“······.”
“······.”
“······.”
“······.”
이내 거실이 불 꺼진 난로처럼 써늘해졌다.
가인은 스리슬쩍 볼살을 깨물며 두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코르넬리서 왕녀가 왕자님에게 선물한 ‘제육이’는, 현재 태자의 보석함 안에 들어 있었다.
하마터면 검문소에서 대대적으로 공개될 뻔했던 상자의 뚜껑을 열고 돼지 조각상을 쏙 넣어버린 게 바로 왕자님 본인이었으니까.
이후 몇 시간이 지나도록 별말씀을 안 하시길래 가인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슬슬 회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세드리크는 한참이나 왕자를 노려보더니 묵묵히 자신의 짐에서 보석함을 꺼내 놓았다.
여기서 뭐라고 한마디 잘못 얹었다가는 그가 보석함을 다시 치울 것 같아서, 가인은 기를 쓰고 입을 다물었다.
······곁눈질로라도 내용물 훑지 말자. 궁금해도 훔쳐보지 말자.
꽤 중요한 물건 같으니까. 다비드 님이 따로 챙겨주시는 거 봤잖아.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무기 아니면 어마어마한 사연, 둘 중 하나일걸.
전자면 차라리 낫지만 후자면 진짜 분위기 애매해진다.
아니, 솔직히 무기라면 너무 궁금하긴 한데······.
-달칵!
쉽게 열린 상자 안에서 제육이가 들려 나왔다.
왕자는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서 깨끗이 닦고는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 보석함에는 무엇이 들었습니까?”
와, 대박. 왕자님이 대놓고 물어보심!
“······.”
“이것은 제 동생이 선물한 조각상이고, 크리스텔 경에게는 하난 폐하의 헝겊 인형이 있습니다. 헤릿은 헤인스 경과 뒤엠 후작님의 여러 소지품을 방주에 간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야, 너도 빨리 뭐 하나 말해.”
‘퍽!’ 가인이 지브릴의 옆구리를 찌르며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별안간 갈빗대가 부러질 뻔한 마법사는 오만상을 썼다.
“뭐? 난 누구처럼 숨기는 거 없다고. 내가 얼마나 개방적인······.”
“기왕 이렇게 된 거 아무거나! 좀!”
가인은 이제 그를 갈아 마실 기세로 쑥덕거렸다.
“다비드 님이 비장하게 보석함 건네주시는 거 봤잖아. 달 사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건데 진실 게임 한판 하고 다 같이 열어보는 게 낫지!”
-아우!
티테가 까만 눈을 빛내며 지느러미발을 찰랑거렸다.
아기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차마 짜증스러운 표정을 길게 유지하지 못하고······.
“······하. 이거, 귀걸이.”
자신의 자수정 귀걸이를 건드리며 툴툴 내뱉었다.
젠장. 어지간하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귀걸이가 왜. 전 여친 예물임?”
“······그 천사가 축복을 부어준 물건이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충 기억나는 장면이 있어.”
“뭐?”
가인의 눈이 똥그랗게 뜨였다. 태자 역시 드물게 놀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브릴은 다시 한번 속으로만 욕을 뇌까렸다. 제길.
“그분이 직접······. 야, 그러면 너 요새 거짓말 탐지기로 거듭난 게 마법이 아니었네?”
“그런 특기는 듣도 보도 못했고.”
“나도 한 번 차보자. 아, 한 번만! 아니면 구경만 할게!”
“꿈도 꾸지 마.”
가인이 잽싸게 귀걸이를 만져보려 했지만, 지브릴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싸움판이 벌어지려는 분위기에 신난 페리와 레아가 엉덩이를 씰룩씰룩했다.
세드리크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일별하고는 고요히 자신의 보석함을 들여다보았다.
다비드가 어찌나 빼곡하게 수납하였는지, 뚜껑 부분을 제외하면 돼지 조각상이 들어갈 만한 자리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안에 든 물건은 하나하나가 또렷한 기억을 품고 있었다. 오래도록 살핀 적이 없는 파편들이었지만 지금도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것은······.
‘세이디, 오늘은 새 마도구를 챙겨가자.’
‘아버지?’
‘너를 위해 깎은 나팔이란다.’
저잣거리의 광대패처럼 우스꽝스럽게 소매를 펄럭인 국서가, 어린 아들 앞에 조그마한 상아 나팔을 꺼내 보였다.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는 따스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이 넘쳐났다.
땀을 뻘뻘 흘리던 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덩달아 입을 달싹거렸다.
아버지는 암흑의 방을 드나들어야 하는 소년을 위해 늘 새로운 선물을 가져와 주었다.
단 하루도 허투루 판단하거나 대강 준비하는 법이 없이. 비밀스럽게.
그저 사랑하는 아이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싶어서.
‘내 아들. 너는 혼자가 아니야.’
이 나팔을 불면 특별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세드리크. 너는 훗날 더욱 강해질 운명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대륙에 단 한 점뿐인 최상급 마석 다이아몬드, 주홍빛을 품은 오백오십 캐럿.
이는 언젠가 어머니께서 피투성이 입술로 속삭이며 쥐여 주신 보물이었다.
이것은 다시 아버지께서 떠주신 양말. 그리고 이쪽은······.
‘우리 어여쁜 대자님. 언젠가는 네 하늘에도 무지개가 뜰 거란다.’
-웨웅
대모님이 읽어 주시던 이야기.
‘친애하는 공자님, 꿈은 당신의 마음이 만드는 바람이랍니다.’
‘고약하게 굴지 마시고, 꿈을 믿으세요.’
‘그러면 언젠가는 당신의 무지개가 웃으며 다가올 거예요.’
“이봐, 성석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에테르 없다니까!”
-꾸!
“아, 그냥 가까이서 보기만 할게! 손 안 댈게! 언약! 진짜 언약한다, 내가!”
“당신 지금 눈알이 기름칠한 것처럼 번들거린다고. 알아?”
······‘맑고 푸르른 요정’과 ‘붉고 뜨거운 공자’가 등장하는 무지개 동화책.
세드리크는 가인과 지브릴의 몸싸움이 번지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표지를 쓸어보았다. 로피는 킁킁 책의 냄새를 맡아보더니 그의 손등을 핥아 주었다.
낡고 빛바랜 소설은 한때 세드리크가 문단을 통째로 외울 만큼 자주 듣고 또 읽었던 것이었다.
다만 그의 기억은, 천사가 달을 품고 날아가기 전부터 조각조각 깨어지고 찢어진 부분이 많았다.
태자는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상념에 스스로를 불사르지 않으려고 이를 사리물었다.
‘놔라, 내가 살릴 수 있다! 내가 살릴 수 있어! 이거 놔!’
“······.”
‘전하! 전하, 제발! 차라리 저희를 죽이십시오!’
‘아아아악! 니키!’
‘-쏴아아아······’
막힌 천장에서 비가 쏟아지는 듯했다. 세드리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건조한 사막의 밤 위로 맹렬한 기억의 폭우가 들이치고 있었다.
그는 흔들리는 그릇을 단단히 잡아두고자 온몸을 곧추세웠다.
환영 속의 피 냄새가 그의 후각을 마비시킬 듯 퍼져나갔다.
곧 찢어지는 비명이 들린다.
‘[저주한다! 너를 이렇게 만든 자가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후드득······!’
빗물이 아닌, 핏물에 젖어 드는 익숙한 감촉.
전신이 끈적해지고 무거워지며 이내 익사에 가까운 감각이 그를 끌어내렸다.
세드리크는 침착히 숨을 내쉬려 노력했다.
보석함에서 손바닥만 한 책과 패물을 꺼내어 소파에 내려놓고, 차분한 손길로 상자 바닥을 더듬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태자님.’
“······.”
사내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요.’
그는 천천히 자신의 손에 잡힌 것을 내려다보았다.
귓전의 빗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우산이 느릿느릿 위로 걷히며 순한 눈망울이 모습을 드러낸다.
‘불 속성 추위 걱정하시는 신관님은 우리 궁주님밖에 없을 겁니다.’
‘가인 씨······.’
화재에도 살아남은 기억들이 재와 함께 팔랑거리며 뒤섞인다.
‘······태자님 덕분에, 헤릿에게 좋은 친구가 생겼습니다.’
‘아이가 어른들의 굴레에서 벗어나 아프지 않을 수 있었어요.’
하나하나가 황금빛으로 반짝거린다. 튤립밭을 노니는 나비처럼.
작은 날갯짓은 바람을 만들어 낸다.
‘그건 선물로 받은 거야? 크고 예쁘네.’
‘정말 감사합니다.’
‘국서 전하께서 챙겨주셨을 거야. 그렇지? 몰래.’
빠르게, 더욱 빠르게······. 바람은 태풍이 되어 휘몰아친다.
‘세드리크! 제발 정신 차려! 우린 돌아가야 해!’
‘-쩌저저적!’
‘주신 강림 대축일이 얼마 안 남았나 보다.’
‘저희 시간 완전 많습니다!’
‘너는 괜찮아질 거야, 세이디. 혼자가 아니니까.’
‘-휘이이잉······!’
빛 둘레에서, 어둠 속에서, 구름 밑에서, 달빛 위에서―그는 어린 세드리크와 자라난 세이디에게 번갈아 속삭인다. 오직 진실한 온기만을 담아.
‘세드리크! 내 손 잡아!’
‘-파아아아······!’
‘[푹 자고 일어나면, 몸이 아주 가벼울 거야.]’
신탁을 거는 말씨에는 약간의 거짓도 묻어 있지 않다.
‘[그리고 너는 우릴 기억하지 못할 테고.]’
‘무슨······!’
남자는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소년을 영원히 축복한다. 따뜻한 에테르가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세드리크 리에스테르의 온전한 그릇이 주신의 주문(呪文)을 바수고 으스러뜨리고 파훼해 나가며 그날의 기억을 복기해 낸다. 손끝에 걸리적거리는 낯선 문물의 흔적이 그의 혼을 사로잡는다. 이내 천사의 입술이 소리 없이 들썩인다.
‘[고해소에서 보자.]’
‘괜찮아? 어디 아파?’
‘-싸아아아······!’
‘나는······. 고해를 받고 있어. 신관이거든.’
마법에 걸린 시공간이 중첩된다. 빛을 잃은 금발이 갈색으로 어두워지고, 땅의 빛깔로 가라앉았던 눈동자는 다시금 황궁의 튤립처럼 피어난다. 이는 신의 조화에 가까운 일이다. 감히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내는 그의 마지막 인사를 기억한다.
‘[새해 복 많이 받아!]’
-바스락!
‘헉.’ 증기처럼 뜨거운 숨이 쏟아져 나왔다.
“······.”
세드리크는 망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싸구려 초콜릿 부스러기가 장갑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그릇과 공명한 가인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를 관찰했다.
예서 왕자는 예의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운명처럼 세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사내는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를 내뱉었다.
“······‘세레니테’.”
-콰아아앙―!
“헤릿, 엎드려!”
그때, 맹렬한 굉음과 함께 창밖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카라반사라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