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86)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86화(86/920)
#086 파드트루아의 유령 (1)
“그럼 그 녀석이 소공작이군. 오라비 놈이 아니라.”
프레데리크 황제가 시크하게 말했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에바 블랑케르 공녀가 소공작이라고 하신 겁니까?”
“그래. 수목의 신궁이 빛을 낸다는 건, 자신을 섬길 자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그때 꼬마에게 장수의 축복을 내린 거야.”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설명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뜨거워’ 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얼굴이 얼핏 그녀의 아들과 닮아 있었다.
나는 집게를 쥐고, 내 몫으로 나온 얼음 그릇에서 작은 조각 하나를 들어 그녀의 잔에 넣어주었다.
부티에 추기경이 나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내 머릿속은 그간 주워들은 정보를 끼워 맞추느라 분주해졌다.
‘블랑케르 소공작은 대대로 신물의 은혜를 받았으니까요. 장수하는 게 저 집안 특징입니다.’
프랑수아 뒤엠 후작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블랑케르 공작가에서 수호하는 신물 ‘수목의 신궁’은, 미래의 가주가 될 사람에게 만수(萬壽)를 내린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큰아이가 소가주가 되고 나면 신물이 애프터서비스로 은총을 주는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에바는 우연히 신물을 접촉한 자리에서 한 큐에 선택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블랑케르의 식솔을 책임질 사람은 에바가 되어야 했다.
“로베르 블랑케르 소공작은, 자신이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동생의 입을 막은 거군요. 이후에도 아이가 자신감을 갖고 나설까 봐 줄곧 괴롭혔고요.”
“앞뒤 정황을 보면 그런 것 같구나. 자리를 빼앗기기 싫었겠지. 강대한 마력도 타고났으니, 공녀만 조용히 있으면 그대로 작위를 물려받을 거라 생각했을 거야.”
“놈의 평판을 생각하면 놀랍지도 않군.”
추기경과 황제가 차례로 대답했다.
그간 혼자 속앓이 했을 아이를 생각하니 화가 나서 양손에 열이 올랐다.
나는 차가운 유리잔을 꾹 붙들었다.
어두운 오렌지빛의 금목서꽃이 얼음과 함께 수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에바의 붉은 곱슬머리가 떠올라 절로 마음이 내려앉았다.
“왜. 에바 블랑케르를 공작으로 세우고 뒤에서 권력 놀음이라도 해볼 심산인가?”
그때 황제가 무시무시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체리색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하고 있었다.
“내가 적국의 왕자를 코앞에 두고 너무 방심한 건가 싶은데.”
“아뇨, 아닙니다. 저는 단지 에바를 도와주고 싶어서 여쭤본 것뿐입니다.”
“프레데리크, 적당히. 왕자님을 놀리는 건 별궁에서 끝내기로 했잖아.”
추기경이 그녀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뗐다.
황제가 코웃음 치며 커피에 입술을 묻었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그녀 특유의 농담이었음을 깨달았다.
등줄기에 오소소 돋았던 소름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장난 두 번 했다간 사람 잡겠네······.
“답변 감사드립니다. 다망하신 폐하께 직접 여쭐 생각은 없었습니다. 폐를 끼쳐 송구합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맞은편 소파에 앉은 황제는 그저 턱을 한 번 까닥일 뿐이었다.
추기경이 그녀를 대신해 다정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상황은 그녀가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악녀라고 하기엔 98%쯤 부족한 에바를 만난 게 벌써 이틀 전이었다.
소공녀는 그날 신전에서 엘리자베트 경의 초대를 받았고, 이후 줄곧 황도의 무테 백작저에 머물고 있었다.
소공작 놈이 황도를 떠나기 전까지 소백작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어제부터는 신전에 와서 1시간씩 청소를 하기 시작했는데, 걸레와 수건을 구별하지 못해 하인의 도움을 받았다.
오늘은 황궁 산지기 아녜스가, 내게 이팝나무 꽃을 자랑하러 왔다 잘못 걸려 에바의 선생님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나대로 머리가 복잡했다.
소녀의 이야기를 들은 뒤 알렉상드르 국서가 쓴 <와장창! 이브의 대모험>을 재차 훑었지만, 책은 묘하게 불친절했다.
국서는 자신의 영지인 이블린을 ‘우리 집 뒷마당’이라 표현했고, 수목의 신궁을 설명하면서도 본가의 이야기는 일절 써놓지 않았다.
어린 아들을 위해 집필한 동화이기에 사실보다 판타지적 요소가 많기도 했다.
‘화성의 혜검’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엔, ‘혜검을 뽑으려면 불같은 성품을 지녀야 한다’는 엉뚱한 해설이 쓰여 있었다.
······세드리크 황자를 보면 아주 틀린 설명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신물이나 신수처럼 수수께끼에 싸인 존재는 아무리 책을 파도 명확한 답을 찾기가 힘들었다.
하긴 그런 게 있었다면 대륙의 신물은 전부 주인을 찾았을 것이다.
신수도 지금처럼 보기 힘들지는 않았겠지.
‘전하. 시작하기 전에 질문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눈빛이 진지하구나. 재미있을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추기경의 수업 시간이 되자마자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연례 기도회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매번 짬을 내고 있는 그녀는, 에바의 사연을 듣고 무척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이어,
‘나도 신궁(神弓)을 직접 본 적은 없단다. 블랑케르 가문은 아주 폐쇄적이거든. 하지만 그 집안에 관해 조금 아는 사람이 있어.’
하고 의뭉스럽게 말했다. 그러고는 시종 나탈리를 부르더니,
‘프레데리크에게 잠깐 와달라고 해주련? 아주 급한 일이라고도 전하고.’
······라는 엄청난 대사를 내뱉었다.
이것이, 내가 제국의 황제를 네이버 지식인처럼 쓰게 된 경위였다.
알렉상드르 국서는 블랑케르 소공작이 되기 하루 전, 사랑의 도피를 하고 가문에서 쫓겨났다.
황제의 말에 따르면, 국서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그때까지 신궁과 접촉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상드르는 우리 셋 중 가장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장수의 축복을 받았다면 아마 국혼을 포기했겠지?”
추기경이 그렇게 물으며 따뜻한 커피를 머금었다. 황제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난데없이 추기경 집무실에 불려왔는데도, 심지어 급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전혀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블랑케르 꼬마가 소공작이 되는 건 본인의 심지(心志)에 달렸다.”
그녀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시원한 금목서차로 목을 축였다.
짙은 꽃내음이 뇌를 콕콕 찌르는 듯했다.
대륙의 작위와 재산 상속은 맏이 ‘우선’이었다.
다시 말해 맏이에게 문제가 있거나, 맏이가 상속을 원하지 않을 때는 그다음에 태어난 아이에게 차례가 돌아갔다.
소가주의 결격 여부는 보통 부모가 직접 판단하지만, 다른 형제자매가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
즉, 에바는 언제든 블랑케르 공작 부부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알릴 수 있었다.
수업 끝나자마자 가서 얘기해줘야겠군.
“마침 내 아들을 모욕하기도 했으니 더 끌어내리기 수월할 거고.”
“그러네. 소공녀가 훗날 공작이 되면 세드리크도 조금은 덕을 보려나?”
황자의 엄마와 대모가 벌써부터 지분 주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눈길을 돌렸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무섭다니까.
“손에 들고 계신 게 무엇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아무 말이나 했다.
황제가 대답하지 않아도 좋고, 답을 들으면 사소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으니 좋았다.
“그러고 보니 이게 있었군.”
황제가 중얼거리며 금빛 카드를 추기경에게 건넸다.
단안경 아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게 뭔데?”
“오페라 개막 공연 초대장. 모레 시간 있나?”
“있을 리가.”
뭔가 했더니 공연 티켓이었다.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름별궁에서도 느낀 거지만, 이럴 때의 둘은 황제나 추기경 같은 대단한 분들이 아니라 그냥 자매 같았다.
나는 살짝 미소를 띠며 나탈리가 두고 간 테이블 위의 디저트를 살폈다.
황제가 나가면 다시 혹독한 수업을 하게 될 테니, 그전에 간식 배를 채워놓을 계획이었다.
“얼굴은 비추는 게 좋겠지. 황실에서 후원하니까.”
“로라 편에 일찍 전달하지 그랬어.”
“직접 얘기하려다 바빠서 잊었어. 6월은 늘 정신이 없다고.”
포도 퓌레를 넣고 통통하게 부풀린 보랏빛 수플레.
노릇노릇한 캐러멜 아래 큼직한 사과 조각들이 포개어 있는 타르트 타탱.
딸기와 망고 조각을 얹은 일 플로탕트······.
“그렇게 잊어버릴 정도면 중요한 일정은 아니네.”
“그래. 하지만 모른 척하기엔 규모가 제법 커.”
커? 여기서 제일 큰 건 타르트지. 너로 정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이프로 디저트를 살살 자르기 시작했다.
새콤달콤한 향이 벌써부터 코끝을 자극했다.
“어쩔 수 없네. 세드리크를 보내자.”
“그래야겠군. 기도회 외엔 이달 일정이 없을 테니.”
“잠깐만, 프레데리크. 표가 두 장이잖아.”
나는 한 입 크기로 썬 사과 파이를 가득 물었다.
쫀득쫀득하고 꾸덕꾸덕한 사과가 혀 위에서 가장 먼저 녹아내렸다.
그냥 구운 게 아닌 건지, 아삭거리는 식감이 남아 있어 무척 만족스러웠다.
바닥의 페이스트리가 바삭바삭 부서지며 두 볼을 가득 채웠다.
진하고 고소한 버터의 풍미엔 은은한 향이 섞여 있었고, 이내 쌉싸름한 캐러멜 맛이 마무리를 깔끔하게 장식했다.
너무 맛있어서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포장 되나.
“왕자님.”
“네, 전하.”
“원하니? 줄까?”
“그럼 저야 좋죠. 감사합니다.”
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추기경이 ‘다행이야’ 하고 말을 받았다.
그러자 황제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잘됐군. 황제를 오라 가라 했으니, 밥값해라.”
······잠깐만요. 뭔 소립니까?
*
먹을 것에 눈이 돌아가서 메인 남주 놈과 엮였다. 쪽팔려서 어디다가 말도 못 한다.
“<파드트루아의 유령>이라니, 요즘 난리잖아요!”
가나엘이 엄청나게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동글한 황금색 눈동자가 샹들리에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의상실 사람들의 예복 시중을 받았다.
화장은 필요 없고 제일 무난한 옷이면 된다고 말을 해놨더니, ‘무난한’ 예복 일곱 벌을 가져와서 대보는 바람에 난감했다.
“왕자님, 잘 드신다더니 살이 안 붙습니다. 품이 남아요!”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사과했다.
실장님이 혀를 끌끌 차며 미싱처럼 옷핀을 꽂았다.
내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동안, 뱅자맹은 소책자 하나를 들고 내 옆으로 와서 읽어주기 시작했다.
레서판다 세 마리가 로봇청소기처럼 바닥을 빨빨거리며 관심을 호소했다.
뚝심이는 나 대신 의자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파드트루아의 유령>은, 황실의 후원을 받는 아탈 오페라단의 대표 레퍼토리입니다. 매년 이맘때쯤 개막을 하지요. 파드트루아 극장의 코르 드 발레였던 다프니스가, 지하에 숨어 사는 유령 작곡가 클로에의 지도를 받아 유명 발레리노로 성장하는 내용입니다. 다프니스의 포로가 된 클로에를, 그녀의 옛 친구인 지젤이 구출하면서 이야기가 끝나지요.”
“······.”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코르 드 발레’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흐름만 들어도 느낌이 싸했다.
이거 그거잖아. 아니, 제목부터 진짜 그거잖아.
“혹시 유령 작곡가가······. 하얀 반가면을 쓰고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왕자님께서도 아시는군요.”
모를 수가 없는데요.
저희 집에 정은서가 사다 놓은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기념 라이브 공연 블루레이가 있습니다.
“매년 모든 공연이 매진이라, 4층 좌석을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런데 최근 며칠 사이에 큰일이 터져서 더 화제예요.”
그렇게 말한 가나엘이 데미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길을 텄다.
힘겹게 오가던 시종들이 신수를 보고 절했다.
나는 ‘퇴계공’ 작가의 거침없는 패러디에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은서가 재밌게 읽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조금······.
성의가 부족한 거 아닌가? 괜찮나?
“큰일이라니?”
“리허설 때마다 진짜 유령이 나타나서, 배우들의 영혼을 쏙쏙 빼먹었답니다.”
“가나엘.”
“그치만요, 뱅자맹 님. 하마터면 공연을 취소할 뻔했대요!”
뱅자맹이 소년을 말렸고, 나는 뱅자맹을 돌아보았다.
황제와 추기경이 자리할 뻔한 곳인데 설마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막을 올리겠나 싶었다.
아니다, 황족이 오니까 꾸역꾸역 공연을 강행하는 건가?
“뜬소문입니다. 황도 수비대가 나서서 수색했지만 마수의 기운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공연 홍보의 일환이 아닐까 합니다.”
중년인이 차분하게 답했다. 그럼 그렇지.
나는 턱을 끄덕이며 소매 속의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엊그제 내 이야기를 들은 에바가 블랑케르 공작 부부에게 쓴 편지였다.
먼저 읽어보라고 내게 찔러준 건데, 꼭 상소를 첨삭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인터미션도 있을 테니 그때 각 잡고 읽어보면 될 듯싶었다.
박스석은 혼자 앉나? 그럼 황자 놈 얼굴 안 봐도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