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883)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883화(883/920)
가호 (6)
깜빡······.
······깜빡.
두 눈꺼풀이 느릿느릿 감겼다가 다시 떠올랐다. 가인은 멍하니 생각했다.
내가 방금 색을 보았던가?
「······역시 당신이었군요. ‘가인 씨’.」
그녀가―난생처음 만나는 공녀가 상냥하게 말을 붙였다.
그러나 아득해진 정신은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머릿속이 온통 뿌옜다.
가인의 망연한 시선이 상대의 모습을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턱 아래 리본을 묶은 보닛이 매우 앙증맞았다.
두 뺨과 이마는 아직 어떠한 세상 풍파도 겪지 않은 아이처럼 희었고, 찰랑이는 드레스와 오른팔에 낀 소풍 바구니는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망사 장갑을 낀 손가락이 우아했으며 입가에 맺힌 미소는 유월의 앵두처럼 반짝였다.
이제 겨우 열여섯, 열일곱이나 되었을까. 크리스텔 드 사르네즈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다.
그로부터 몇 초가 더 흐른 뒤에야 가인은 깨달았다.
“······.”
자신은 이 사람의 빛깔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지만, 둘에게는 구태여 그런 확인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귀하신 분께 이런 말씀은 실례겠지만, 많이 지쳐 보이네요. 당신도 그렇고 등에 업히신 분도······.」
“······아······.”
「그리고 로메로 선황 폐하와 저 아이도 말이에요.」
뜨겁게 끓인 우유 거품처럼 부드럽고, 박새의 솜털같이 결이 고운 목소리. 가인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음색이었다.
진정으로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에 그녀는 퍼뜩 눈길을 돌렸다.
갑옷 차림의 다섯 로메로가, 제각각 헤릿의 다리며 날갯죽지에 기대앉아 쉬고 있었다.
깊이 잠든 소년의 가슴팍이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추기경의 등에 업힌 초보 대마법사 역시 마나가 바닥난 탓인지 온몸이 늘어져 있었다.
가인은 자꾸만 입속에 고이는 침을 꿀떡 삼켰다.
“그······.”
말이, 언어가, 제대로 된 문장이 혀로 올라오지 못하고 연거푸 목구멍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어쩐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어서 괜히 시선을 더듬거리게 되었다.
인사해야 하는데. 당연히 이쪽에서 먼저 살갑게 인사하는 게 맞는데.
「······가인 씨?」
“······.”
오래전에는, 아마도 빙의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그즈음에는 가인도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했었다.
이를테면―언젠가 만약 이 몸의 주인이 돌아온다면, 한 번쯤 ‘진짜’ 크리스텔을 만나게 된다면 자신은 뭐라고 이야기할까.
역시 죄송하다고 사과부터 해야 할까? 하지만 자유 의지로 여기 들어온 것도 아닌데?
아니지. 그래도, 그래도 역시 미안하다고 하자. 내가 너의 몸을 빌려서 여러 폐를 끼쳤다고, 사람 된 도리로 그런 말부터 하자. 그래야지.
아무렴 생판 모르는 사람의 모든 걸 마음대로 누리고 살았는데 그게 예의잖아. 그러고 나면······.
「간절히 부르는 마음이 들려서, 평소 드나들지 않던 길목으로 와 보았는데. 그러기를 잘했어요. 호젓한 별과 별 사이에서 당신을 만나다니요.」
“······.”
그러고 나면,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더라······.
「저어.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운이 나게 해드릴 수 있어요. 자리를 깔아드릴 테니 이쪽으로 앉아 보세요.」
“······고마워요.”
「······.」
그래. 나는 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동안, 그동안 내가 신세를 너무 많이 졌어요. 정말 고마워요.”
「······.」
문장은 길을 잃은 파도처럼 쏟아져 나온다.
“고마워요. 나는······. 다 고마워요, 그냥······.”
······기회를 줘서. 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설령 그것이 너의 의지가 아니었을지라도, 설혹 너는 그렇게 떠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고 해도.
그래도 여전히, 나는 너에게 감사하다고.
너의 낙조(落潮)로 인하여 나는 만조를 누리게 되었다고.
너로 말미암아 나는, 삶의 다음을 얻었다고.
“······난······.”
더는 궁핍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다고.
무력하게 분노하며 집에 틀어박히거나, 박탈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고.
가끔이지만 제법 멋진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마워요. 첫날부터······. 사실 맨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요. 만약에 당신을 만나면······.”
······덕분에 가족이 생겼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꼭. 미안해요,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집이 참 따뜻하지요.」
불현듯, 공녀가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가인은 비로소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맑은 눈동자가 추기경을 향하여 곱게 휘어지고 있었다.
장갑을 벗은 손가락이 피투성이 뺨에 흐르는 물방울을 조심조심 닦아주었다.
“······.”
‘집이 참 따뜻하지요.’ 그즈음에야 그녀의 말뜻을 헤아렸다.
잔뜩 구겨지는 낯을 웃음으로 펴느라 표정이 엉망이 되었다.
가인은 코맹맹이 소리로 겨우겨우 대답했다.
“······네, 참 따뜻해요.”
「······.」
“너무, 너무 따뜻해서 가끔은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로······.”
「다행이에요.」
크리스텔이 가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어린 눈빛에는 따스한 진심 외에 무엇도 녹아 있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에요.」
“······.”
「저도 이제, 이곳이 집이에요.」
아······.
「이따금 소란스러운 사건이 벌어지곤 하지만, 나름대로 따듯한 공간이랍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많아서 조금은 바쁘기도 하고요. 앗······!」
-보스락!
그 순간, 공녀의 바구니에서 정체불명의 조그만 것이 볼쏙 튀어나왔다.
가인은 세드리크를 업고서도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재빨리 그것을 낚아챘다. 어딜―!
-덥석!
「윽, 이것 놓으시게! 제발 놓아주시게······!」
“허······?”
그것은 아주 조그만 주교관을 머리에 눌러쓴, 아주 조그만 신관이었다.
손아귀에 붙들리자마자 울상 지으며 버둥거리는 것에 마음이 약해져서 그만―
-쏙!
힘이 빠져 버렸다!
「어머나!」
‘톡!’ 바닥으로 떨어진 신관 조각은 한참이나 끙끙거리는 듯하더니, 다시 잡힐세라 허겁지겁 어딘가로 꽁무니를 뺐다.
크리스텔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손끝으로 입가를 가렸다. ‘저리 혼자 계시면 힘드실 텐데······.’
“······방금 그건 뭐였대요?”
놀란 가인이 꺼벙하게 물었다. 그러자 공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돌보는 조각 중 하나랍니다. 이레너 스네이더르 교황 성하의 파편이에요.」
“······네? 누구의 뭐라고요?”
기어코 추기경이 거한 삑사리를 냈다.
크리스텔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양 까르르 웃었다.
*
잠시 후.
그들은 성간 한복판에 어여쁜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이는 가인의 상황에 썩 걸맞은 소품은 아니었지만, ‘잔별의 공녀’ 크리스텔과는 몹시도 아리땁게 어우러졌다.
-사아아아······
“그러니까, 이렇게······. 평소에는 성간의 조각들을 돌보면서······.”
「제 도움이 필요한 분들만요. 그리 많은 수는 아니랍니다.」
가인의 물음에 공녀가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다섯 조각의 로메로를 가만가만 서로 꿰매어 주고 있었는데, 이것은 가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 원리를 알지 못할 기적이었다.
이윽고 하나가 된 검지 로메로는 이제 손바닥 한 뼘 길이로 커져 있었다.
물론 눈에 보이는 바늘땀이나 실밥 따위는 전혀 없이!
「이번에도 신세를 졌군, 잔별의 공녀.」
「별말씀을요. 영광은 저의 것입니다.」
반짇고리를 챙긴 크리스텔이 이번에는 길게 누운 세드리크와 헤릿을 들여다보았다.
가인은 손바닥이 척척해지는 것을 느끼며 잔뜩 긴장했다.
상처 하나 없는 공녀의 섬섬옥수가 태자와 헤릿의 심장을 차례로 짚어 보았다.
“······괜찮을까요? 둘 다 완전히 괜찮아야 하거든요. 물론 한쪽이 피를 많이 쏟긴 했는데, 궁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진짜로 큰 문제가 없어야 해서······.”
「마나 휴지기는 아닌 듯하고, 태자 전하께서는 탈진으로 인해 실신하신 듯싶어요. 제가 느끼기에 이분의 그릇 상태는 무척 양호해요.」
“하아······. 감사합니다······.”
「신의 은총으로 이 아이도 마찬가지네요. 마침 저에게 몇 가지 약이 있답니다.」
크리스텔의 눈망울이 한순간 빤짝하고 빛났다. 보탬이 될 수 있어 들뜬 얼굴이었다.
공녀는 바구니에서 자그마한 약병 두 개를 꺼내 보였다.
「바로 지난 책갈피에, 어느 부군의 조각을 꿰매어 드리고 답례로 받은 것이에요.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이 어찌나 고우시던지!」
‘바스락, 바스락.’ 이어 공녀의 드레스 자락이 이쪽저쪽으로 바삐 움직였다.
가인은 벙벙히 그녀가 하는 양을 구경했다.
크리스텔은 태자의 심장 위로 약병 하나를 쪼르르 붓더니, 한 방울도 남지 않도록 야무지게 톡톡 털어낸 후 다음 약병을 헤릿의 가슴께에 쫄쫄 부었다.
그 내용물은 액체가 아닌 ‘기운’이었으므로 그들의 옷자락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한 뼘 로메로가 근엄히 다가와 두 사람의 낯빛을 살폈다.
「어디 보자, 또 무엇을 드리면 도움이 될까······. 아, 그렇지!」
“······.”
그리고 크리스텔은,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가인은 세드리크와 헤릿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서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구니를 뒤지는 손길이 분주하기만 했다.
아마 꿈속의 꿈도 이보다 비현실적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정말로, 어떻게?
“당신은 괜찮아요?”
「······네?」
반짝, 공녀가 고개를 들었다. 가인의 입술 사이로 여과되지 않은 문장이 흘러나왔다.
“······나한테 몸을 뺏겼잖아요. 벌써 몇 년째.”
「······.」
작은 손이 우뚝 멎었다. 가인은 뭐에 씐 사람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순백의 너른 공간이 몹시도 헛헛하게 느껴졌다.
“이제, 이제 이자벨도······. 엄마도 못 만나고······. 심지어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 사람이 대역죄인이기 이전에 당신의 친부라는 사실은 항상 기억하고 있거든요, 나.”
「······.」
“나 모르는 곳에서 나쁜 아빠가 죽는 거. 그거 되게 이상한 경험이잖아요. 나도 한 번 겪어봐서 잘 알아요.”
「가인 씨.」
“나는 당신한테 늘 고맙고, 미안하고, 그게 너무 당연한 건데······. 당신이 나에게 잘해주는 건 절대로 당연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괜찮은지······.”
「······.」
“내가 밉지는 않아요? 나는 진짜 그래도 괜찮거든요. 꼴 보기 싫다고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인데······. 원망하고 싶으면 마음껏 해도 괜찮아요.”
‘당신 원망이라면 평생 들을 준비가 돼 있어요. 진심으로.’ 그러자 크리스텔은 아주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양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더니······.
「······‘팬’.」
“······네?”
가인이 눈을 끔뻑거렸다. 크리스텔은 조금 어색한 발음으로 다시 말했다.
「······‘팬’이오. 저는 가인 씨의 열성 팬이에요. 이렇게 쓰이는 단어 맞지요?」
‘성간의 경계까지 나아갔다가 배운 말이에요.’ 공녀가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추기경은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에요. 가끔은 엄마가 많이 보고 싶어요.」
“······.”
「엘렌도, 영주성 사람들도, 사르네즈 해안의 모래성과 색색의 조개껍데기도······.」
“······.”
「······다들 진심으로 그립지만, 응. 역시 엄마가 제일 보고 싶어요.」
“······.”
가인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그즈음 세드리크의 손가락이 작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제가 이곳에 머무르게 된 건 가인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
「가인 씨가 제 몸의 주인이 된 것도, 결코 가인 씨의 바람이 아니었지요. 그러니 만일 제가 누군가를 원망해야 한다면, 그건 성간이 온통 검어지는 날까지도 당신이 아니에요.」
“······.”
「그리고 저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가인이 크게 뜨인 눈을 들었다.
눈앞의 소녀가 그녀의 거친 손등을 감싸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슬퍼하기보다는,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어요.」
“······.”
「길을 잃고 떠도는 조각들을 큰길로 데려다주고, 누군가 별 아래 지쳐 있으면 다과를 내어 드려요. 로메로 폐하처럼 산산이 부서진 조각은 제가 직접 꿰매어 주지요. 이래 봬도 손이 꼼꼼하다고 칭찬을 받는답니다.」
「만인주지의 사실이지.」
선황이 말을 보탰다.
「종종 쉬는 시간이 생기면, 어느 쉼표에 앉아서 가인 씨의 모험을 읽어요. 요즈음 성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무용담이거든요.」
“······.”
가인은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크리스텔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너무 재미있어요. 웃다가 눈물이 난 적도 있을 만큼 재미있어요.」
「슬픈 이야기가 나오면 같이 울고, 즐거운 이야기가 나오면 같이 노래해요. 조각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답니다.」
「가인 씨는 제 이름을 영웅의 것으로 만들어 주셨지요. 세상에, 저라면 전장에 나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태어나서 잡아본 칼이라곤 부엌칼이 전부거든요.」
「당신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멋지고 근사해요. 이곳 조각들은 당신과 꼭 닮은 저를 부러워하기도 한답니다.」
「아! 흑요성게를 해방하여 주실 때는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던지요!」
「그러다 보니, 책장이 넘어가면서 자연히······.」
“······.”
공녀가 추기경을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가인은 소녀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팬’이 되었어요.」
“······.”
「저는 항상······. 당신을 응원하고 있답니다.」
‘아아, 부끄러워라.’ 소녀는 화들짝하며 기사에게서 물러나 두 뺨을 감쌌다.
가인은 이제 정말로 개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아니······. 저기······.”
크리스텔 드 사르네즈가 나의 팬? 이게 현실?
「참. 저는 왕자 전하처럼 그렇게, 그런 사람은 아니어요. 오해는 말아 주세요.」
“예? 무슨 왕자요?”
가인이 멍텅구리처럼 되물었다. 그때였다.
“······머리가 울리는군. 입 다물어.”
바로 아래쪽에서, 싸가지 밥 말아 먹은 황태자의 중저음이 울렸다.
크리스텔이 이런 무뢰한은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세상에나!’하고 놀랐다.
가인은 솔직히 좀 쪽팔렸다. 이 애한테는 이쁘고 좋은 것만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