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884)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884화(884/920)
가호 (7)
그러니까 우리가 ‘그 존재’를 만난 것은, 완벽한 우연이었다.
「······아야!」
“······아야?”
가인 씨와 세드리크의 이름을 부르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성간을 떠돌고 있는데, 별안간 바닥 쪽에서 콩알만 한 신음이 들렸다.
일단 요한 경의 목소리는 절대로 아니었다.
나와는 서른 걸음 이상 떨어져서 걷고 있는 그가 별안간 발치에서 나타날 리도 없었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급히 아래를 살펴보았다. 뭐지?
“······어?”
꼬마? 아니, 이쪽은 꼬마 수준이 아니잖아.
입안의 약과를 꿀떡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윽······.」
“세상에······.”
······엄지 공주? 진짜로 그런 건가? 아이고, 이럴 때가 아니지.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오시는 걸 미처 못 봤네요.”
나는 허겁지겁 몸을 낮추고 정중히 사과했다.
상대는 나의 엄지손가락만 한 ‘사람’이었는데, 난생처음 보는 호사스러운 주교관을 쓰고 있었고 차려입은 복장도 굉장히 화려했다.
엉덩방아를 찧고 아파하는 얼굴은 몹시 앳되어 보였다.
이제 겨우 열여덟, 열아홉? 어린아이잖아.
「······괜찮네. 나는 멀쩡하니 자네도 갈 길 가시게.」
이윽고 소녀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말투는 완전 어르신이네.
나는 정체 모를 신관이 짚고 일어날 수 있도록 살며시 검지를 대 주었다.
하기야 이곳은 수많은 인물의 설정 조각이 머무르는 공간이자, 세계의 ‘여백’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쪽도, 누군가의 한 조각일지도······.
“괜찮으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저,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녀가 자리를 뜨기 전에 재빨리 기회를 잡았다.
조금 까칠하시기는 해도, 성간에 들어온 뒤로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다.
잘하면 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근처에서 분홍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미인이나 검은 머리 미남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 남자는 눈이 주황색인데, 키가 크고 어깨도 떡 벌어져서 한 번 마주치면 평생을 잊기 힘든 인상입니다. 희대의 미장부······.”
나는 열심히 설명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신관님, 주교관과 의복에 보라색 무늬가 있네요. 이건 교황 성하만이 쓸 수 있는 색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맙소사. 겨우 달아났더니 그자의 동료를······.」
소녀 신관은 사색이 되어 중얼중얼했다.
나는 그제야 미간을 좁히고서 그녀를 더욱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 인가? 아니, 역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거 하난 분명해.
이 사람, 교황의 복장을 하고 있어. 이렇듯 어린 낯의 교황이라면 설마······.
“그사이 포로를 잡으셨군요, 궁주님.”
“으악!”
기척 없이 다가온 요한 경의 말에 식겁했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오셨지?
내가 경악하는 사이 엄지 교황은 하동지동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
-덥석!
“어딜.”
「어어어!」
“우와악!”
요한 경이 어린애를 한 줌에 잡았어! 정확히는 한 줌도 아니고 반의반 줌이네!
“마침 잘됐네요. 저도 저쪽에서 포로를 하나 잡았거든요.”
「이거 놓으시게! 제발 놓아주시게, 나는 한시가 급하네!」
“포로를 잡으셨다고요?!”
「제발 부탁이네, 막아야 하는 자들이 있어······!」
그러자 싱긋 웃은 남자가 반대편 손에 쥔 것을 보여 주었다.
나는 또 하나의 조각 사람을 보고는 두 눈알이 튀어나올 뻔한 경험을 했다.
입술이 바짝 바를 정도로 턱이 쩍 벌어졌다.
이쪽은 앳된 교황과 달리 무척 얌전했고, 두려워하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차분한 태도로 요한 경의 손가락에 양팔을 올려두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연하디연한 빛깔의 눈동자와 대비되는, 쨍한 에메랄드빛 머리카락······.
‘-쩌저적!’
‘「발레리, 나의······.」’
‘-콰드드득!’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그는 나의 지인이었다.
그날 이후로 단 하루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
“······니콜라 퐁필리 부군······?!”
「······주신이시여. 어찌 귀인께서 아직 이곳에 계십니까?」
그의 눈망울 또한 큼직이 뜨였다. 아름다운 신관은 나를 명백히 알아보고 있었다!
한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고 심장이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정은서 맙소사, 눈앞에서 기적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나는 인사를 건넬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다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요한 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언젠가 말씀하신 적이 있는······. 세 자매의 낫에 파괴당했던 분인가 보군요.”
“네, 그때, 그때 분명히 검은 잉크를 쏟으며 산산이 조각나서······. 가루가 되어 흩어지셨는데······. 그대로 소멸하신 줄로만 알았는데, 어떻게······.”
진짜 어떻게······! 나는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헤벌쭉하는 입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영영 못 보게 된 줄 알았는데!
신이시여, 우리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이분이 두 번 다시 발레리 선황 폐하를 만나지 못하게 된 줄 알고 얼마나······!
「이리 상봉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저는 수천 개의 조각으로 깨어져 성간 너머까지 뿔뿔이······.」
「이것 좀! 제발!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가문이 끔찍한 짓을 저지를 거란 말일세!」
-······우우우······
그때, 성간을 길게 울리는 기묘한 소리가 있었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들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하던 두 조각도 빠르게 조용해졌다.
-뿌우우우······
“······.”
“······뿔피리 소리?”
멀리, 아주 아득한 곳에서 전장의 악기가 울고 있었다.
같은 소음을 포착한 요한 경의 눈빛 또한 녹색으로 어둡게 가라앉았다.
까닭 없이 가슴이 울렁거리고, 문득 어떠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입술 너머 본능적으로 흘러나오는 이름이 있었다.
“······세드리크?”
*
가인의 목구멍을 타고, 달디단 타르트 부르달루 조각이 꿀떡 넘어갔다.
“······오, 맛있어요!”
「다행이에요. 곧 가인 씨의 그릇이 힘을 얻어 기력을 회복하실 거랍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어떻게 성간에 이런 타르트가······? 여기 맛집 차리셔도 되겠는데요?”
「호호호.」
크리스텔이 소풍 바구니에서 꺼내준 파이며 음료는, 하나같이 맛이 뛰어난 데다 일행에게 원기를 불어넣어 주는 신묘한 능력을 품고 있었다.
이제 마나 휴지기는커녕 각성 상태에 돌입한 것으로 보이는 세드리크 리에스테르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금 전 깨어난 헤릿 역시 착하게 루아얄을 잘라 먹으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공녀는 이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일종의 ‘권능’으로 추정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곳에 가장 처음부터 있었던 존재이기에, 지금껏 성간의 누구도 그녀를 공격하거나 괴롭히려 든 적이 없었다고도 했다.
그건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잔별의 공녀’라 불리는 크리스텔에게도 마음 깊이 두려워하는 상대는 있었다.
「······그 세 노파는, 따로 또 같이 다니면서 무명의 영혼들을 부수고는 했어요.」
“하······.”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헤릿은 눈을 깜빡이며 가인의 안색을 살폈다.
「또 어느 날은 그들을 권속으로 삼아 뜻대로 부리기도 하고······.」
“별······.”
「저에게는 항상 깍듯한 자매였지만, 저는 그들이 무섭고 어려워 피해 다니기 바빴답니다.」
“······.”
안 돼, 순수한 애들 앞에서 욕하면 안 돼.
가인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타르트에 올라간 배를 서걱서걱 씹어댔다.
이어서 헤릿이 건네준 루아얄 한 입도 맛있게 왕 먹었다.
하여간 그놈의 할망구들이 죽어서도 사람 속을 뒤집어 놓네.
미친 것들, 우리 궁주님도 낫으로 심장을 찔러서 쫓아내더니······.
「질서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작은 조각들을 멀리멀리 추방하기도 했지요. ‘신성한 공간에는 불필요하다’라고 말하면서요. 저는 도망자 신세가 된 이들을 바구니에 잔뜩 숨겨주기도 했는데······. 늘 무섭고 조마조마해서 혼났답니다.」
‘심장이 콩닥콩닥했어요.’ 크리스텔이 작게 웃으며 자신의 가슴께에 양손을 포개 얹었다.
가인은 그녀를 보며 문득 떠오르는 문장을 입 밖으로 냈다.
이번에도 여과 없는 표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가 꼭 알아주었으면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 공녀도 이곳 조각들의 영웅이네요.”
「······아······.」
소녀의 눈망울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칼 한 자루 쥐어 본 적 없는걸요.」
“이름을 얻어서 역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별이 아니라도, 명성 없이 성간을 떠도는 잔별이라도 당신이 이렇게 든든히 지켜주고 있잖아요. 혼자 무서울 텐데도 어딘가로 달아나지 않고.”
「······.」
영혼이 단단한 사람. 강철 깃털을 품은 새.
“낯을 가리는 성격이니 분명 숨고 싶을 때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나서서 이곳 사람들을 돌봐주고 있잖아요. 먼지처럼 작은 존재도 소중히 대해 주면서······.”
「······.」
“가장 늦게 절망하는 사람으로 살면서.”
이자벨 랑부예의 딸.
“나는 그런 분들을 영웅이라고 부르거든요. 아마 내가 로메로 선황 폐하나 다른 조각이었으면 당신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을 거예요. 너무 의지하고 싶어서.”
「······.」
“당신은 강해요, 크리스텔.”
「······.」
공녀는 가인의 칭찬에 양손을 맞잡으며 어쩔 줄을 몰라 하더니, 마침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보일락 말락 턱을 주억거렸다.
그녀의 붉어진 뺨이 흑백의 시야로도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조그만 입술에는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즈음 세드리크는 자신의 마도구와 짐을 점검하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가인은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크리스텔의 손등을 조심스레 감쌌다.
“저기······.”
「······.」
“당신만 괜찮다면, 엄마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어요.”
그러자 공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같지만 전혀 다른 두 개의 시선이 맞닿았다.
언젠가 이자벨은, 누구보다 먼저 크리스텔의 ‘장례식’ 이야기를 꺼낸 바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딸을 이제는 편히 쉬게 해주고 싶다고. 혹시나 사랑하는 아이의 혼이 저의 미련 때문에 이승을 떠돌고 있을까 봐.
가인이 앞으로도 크리스텔의 빈자리를 챙기느라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녀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맹세코 가인은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동안 가장 힘겨워한 사람은 오히려, 그 말을 입에 올리기까지 오랜 시간 고뇌했을 이자벨일 테니까.
“······아주 먼 곳에서······.”
「······.」
“당신이 영웅이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나는 그게 자랑스럽다고.”
「······.」
크리스텔은 떨리는 눈망울로 한참이나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 고마워요. 저는······.」
눈물이 그녀의 뺨을 긋고 달아난다.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이어 환한 웃음이, 샛별처럼 빛나는 함박웃음이 어린 얼굴에 가득 맺혔다.
가인은 대답 대신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공녀의 몸에는 어떠한 온기도 없었지만, 추기경은 도리어 그것이 반가웠다.
그녀 역시 냉기를 품은 지 오래되었으므로 닮은 점을 찾아서 기꺼웠다.
크리스텔 또한 가인을 꼭 안고서 축복을 내려 주었다. 맞닿은 두 사람의 심장 사이에서는 눈부신 빛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아아아······!
“······잠깐만요, 이게 뭐예요?”
놀란 가인이 코 막힌 소리로 물었다. 크리스텔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의 ‘권능’ 중 하나랍니다.」
“네? 무슨 권능이 또······. 그냥 성기사 하셔도 되겠는데?”
「여러분의 에테르처럼 위대한 능력은 아니지만, 조각을 숨겨서 달아나기에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사아아아아······!
빛살은 더더욱 휘황해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둘 사이에서 둥그런 형태를 빚으며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공녀는 평화로운 낯이었지만 추기경은 이것을 두 손으로 떠받쳐야 하나 싶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서 묵묵히 크리스텔의 찻잔을 비우던 로메로가 코웃음 쳤다.
-파아아아아······!
「과연, 공녀는 세드리크의 계획을 알고 있구나.」
“네?!”
터져 나오는 광휘 속에서도 가인은 귀를 의심하며 목청 높였다.
저 새끼한테 계획이 다 있다고요?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못 들었고!?
“전하! 뭔데!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우우우웅······!
가인은 언젠가부터 우뚝 서 있는 황태자의 등에 대고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 순간―
-울렁!
성간의 새하얀 공백이, 파도처럼 크게 요동쳤다.
성기사의 푸른 눈알이 왕방울만 해졌다. 방금······?
「저, 실은······. 조금이지만 성간의 여백을 ‘접을’ 수 있답니다.」
크리스텔이 수줍게 고백했다. 가인의 조동아리가 떡 벌어졌다. 뭐를 접어요?
「소중한 분을 찾고 계신다고 하셨지요.」
「원하시는 곳으로 모셔다드릴 수 있어요.」
-우우우우웅······!
“우왓!”
-파파파팟······!
어느덧 수박만 해진 빛의 구슬은, 이제 더는 ‘구슬’의 형태가 아니었다.
실눈을 뜬 가인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팔락이는 그것들의 정체를 어렵사리 알아보았다.
처음에는 얇은 리본 뭉치처럼 보였고, 다음 순간에는 길게 자른 종잇장처럼 보였지만······.
-뿌우우우우!
“미친, 깜짝이야!”
-쏴아아아아······!
펄쩍 솟아오른 추기경이 곁자리의 소년을 부랴부랴 보듬었다.
방금 그것은 성간을 통째로 울릴 만큼 무시무시한 나팔 소리였다.
그러나 헤릿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시선으로 태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인은 재빨리 그가 불고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저건······.
-뿌우우우우······!
“상아 나팔······.”
······알렉상드르 국서 전하께서 생전에 아드님에게 깎아 주셨다는, 마도구 나팔이었다.
다비드 님이 챙겨준 보석함에 들어있던 물건.
저걸 불면 특별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했는데······!
-뿌우우우우우······!
-지이이이잉!
“어우!”
귀청 떨어지겠네!
소리는 곳곳으로 둥글게 둥글게 달리고, 부딪히는 벽 없이 계속해서 뻗어 나갔다.
세드리크는 피가 말라붙은 몸뚱이로 흔들림 없이 나팔을 불고 있었다.
가인은 대마법사의 강력한 마나 파동이 천지 사방으로 퍼지며 빈틈없이 바닥을 휩쓰는 것을 보았다.
-우우우우, 우우우우, 우우우우······!
“잠깐만, 설마 저거······!”
-파파파파파······!
아래쪽에서 터져 나오는 크리스텔의 권능, 그들의 머리 위로 휘몰아치는 마력, 흰빛과 잿빛의 미친 듯한 소용돌이―정신 없이 폭발하는 힘의 향연 속에서 가인은 문득 직감했다. 아아······.
어쩌면.
-뿌우우우우우!
“······헤릿! 잘 봐! 아빠 근처에 계시는지 잘 봐!”
“응! 응!”
-지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파파파파팟!
두 사람은 빛의 협주곡 너머로 실눈을 뜨고, 서로를 껴안은 채 모든 감각을 시야에 집중했다. 순백색, 온통 하양뿐인 성간을 내다보며 조금도 희망을 내버리지 않았다. 기실 그 자리의 누구도 소망을 내던지지 않았다. 끝없는 성간을 훑어내는 나팔 소리, 소리를 따라 흐르는 마나에 모든 마음을 실어 보냈다. ‘휘이이잉!’ 그들의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리고, 서로를 부둥킨 손끝이 희게 질리고, 단단히 깨문 입술에서 기어이 피가 비칠 무렵―
-······반짝!
“······.”
아득히 머나먼 곳에서, 금빛 등불이 점멸했다.
-······반짝, 반짝!
가인은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헤릿의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반짝, 반짝반짝!
그녀는 그 빛깔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싸아아아아······!
-파파파파파팟······!
-톡!
그리고 마침내, 좌표를 인지한 공녀의 손끝이 권능의 빛 한가운데를 짚었을 때―
‘「바로 지난 책갈피에, 어느 부군의 조각을 꿰매어 드리고 답례로 받은 것이에요.」’
-울―렁!
그것은 완벽한 책갈피의 모습으로 바뀌어,
공녀의 뜻과 손짓에 따라 책장을 건너뛴다.
“미친······?”
―바로 이렇게.
-파바바바바바밧······!
“우아아아악!”
“우와아아!”
-휘오오오옷!
그들을 감싸고 있던 모든 여백이 세로로 홀쭉해지더니, 다시금 앞으로 팽하고 튕겨 나간다!
-쌔애애애애앵!
“허어어억! 너무빨라너무빨라너무빨라너무빨라!”
“우와아아!”
“큿!”
“이거어디까지날아가는거예요이거어디까지날아가는거예요이거어디까지날아가아아악!”
-우우우우우웅―!
가인의 비명이 가장 높은 음을 찍는 것과 동시에, ‘접힌’ 여백은 느닷없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울―렁!
일행을 둘러싼 공간이 또다시 넓적하게 늘어지고, 물풍선처럼 바닥으로 축 처지는 순간―
[세상에, 가인 씨!]“······.”
······믿을 수 없는 부름이 들렸다.
가인은 엉망진창이 된 꼴로 눈앞의 천사를 바라보았다.
[주신 맙소사! 세드리크······!]-와락!
“아······.”
갈색, 금색, 보라색······.
세상의 모든 빛깔을.
대륙의 모든 온기를.
“헤릿!”
“아아······. 아아아······! 아빠―!”
그날, 아이는 마침내 ‘아빠’를 부르며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