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90)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90화(90/920)
#090 그에게는 비밀이 있다 (1)
-푹!
뭐가 뭔지 재깍 파악이 안 됐다.
나는 눈앞을 가로막은 사내와, 그의 하얀 머리칼이 천천히 무너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윽······.”
“헤인스 경.”
뇌의 판단보다 내 목소리가 더 빨랐다.
풀썩, 하고 요한 헤인스 경이 극장 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당황한 크리스텔이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습을 복제하던 마수, ‘에스프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헤인스 경, 피가 납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입니다.”
그의 하얀 셔츠 옆구리가 순식간에 시뻘겋게 젖고 있었다.
내 말소리며 손끝이 모두 조금씩 떨렸다.
나는 곧장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그간 외워둔 ‘지혈’의 치유 서클을 그렸다.
당황한 탓에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무사히 해냈다.
시동어(始動語)를 읊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언하건대, 주신의 샘물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사아아아······
푸른 에테르 서클이 나타났다.
나와 헤인스 경을 감싼 원형(圓形)이, 느릿느릿 시계 방향으로 돌며 하늘빛 입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알갱이들은 헤인스 경의 옆구리로 분주하게 모여들었다.
크리스텔이 후다닥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커다란 눈동자는 경악과 죄책감으로 촉촉해져 있었다.
“어떡해요, 선생님. 저 때문에. 어떡해. 죄송해요.”
“공녀 때문이 아니에요······. 제가 말하는 걸 잊은 거죠.”
헤인스 경이 뒤편의 객석에 몸을 기댔다.
피가 확실히 멎어 가는지, 그의 셔츠 얼룩은 더 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에스프리는, 아주 어릴 적에 보고 처음이라. 놈에게 이빨이 있다는 걸 깜빡했어요. 죽일 때 조심해야 하는데······.”
“그게 뭐예요. 오징어 이빨도 아니고······.”
크리스텔이 인상을 찌푸리며 우는 듯 웃는 듯 말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괜찮아요. 당신 탓이 아니야.
“그럼 지금 이빨이 몸에 박힌 겁니까? 혹시 독이 있나요?”
내가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만일 그렇다면 ‘해독’ 서클을 열면 된다.
놈은 하급 마수였으니 내가 외운 입문용으로도 충분히,
“독은 없어요. 그런데, 음······.”
그가 난감하다는 듯 미소했다. 민트색 눈동자에 또렷한 고통이 비쳤다.
“살을 조금씩 파고드네요. 아무래도 저를 관통할 셈인가 봐요.”
나와 크리스텔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엘리자베트. 백작저에 부친이 와 있나?”
짧은 침묵을 깬 것은 세드리크 황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실내로 들어온 엘리자베트 경이, 황자의 옆에 서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가 단호한 눈빛으로 친구에게 말했다.
“와 계셔. 우리 집으로 가자.”
*
“헤인스 경, 무테 백작저는 오페라 극장에서 5분 거리라고 합니다. 황궁보다 훨씬 가까워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내가 빠르게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지혈’의 치유 서클은 줄곧 유지한 채였다.
처음에는 피가 멎는 듯싶었지만, 이빨이 환자의 몸을 파고들며 계속해서 새로운 상처를 내고 있었다.
통증이 심할 텐데도 마차에 누운 헤인스 경은 놀라울 만치 조용했다.
내 옆자리에 탄 가나엘이 상비약으로 챙겨온 진통제를 내밀었다.
이 정도의 부상엔 잘 듣지 않겠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가나엘, 나는 여기 남아서 현장을 정리해야 해.”
엘리자베트 경이 마차 문을 잡고 서서 말했다.
내 신탁의 효과로, 다행히 극장 앞은 크게 소란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황실 부근위대장의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가나엘은 침착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댁에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응, 너만 믿을게.”
소백작이 소년과 한 손으로 깍지를 꼈다 놓았다.
이어 나와 헤인스 경에게 묵례하고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작은 스푼으로 진통제를 덜어 헤인스 경에게 먹인 뒤, 그의 목을 살짝 들어 입안에 물을 흘려 넣었다.
“진통제입니다.”
“지금도 참을 만한걸요.”
“대주교급 성기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요.”
내 말에 그가 피식했다. 평소에도 조금 피곤한 낯빛인데 지금은 아예 파리해 보였다.
나는 슬쩍 창밖을 살폈다.
황자를 태운 황실 마차가 앞서 달리고 있었고, 뒤로는 뱅자맹이 합석한 사르네즈 공작가의 마차가 보였다.
호위 인력을 태운 마차도 눈에 들어왔다.
“무테 변경백의 부군이 의사인 줄은 몰랐어요.”
헤인스 경이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퇴계공’ 세계관에서 의술을 쓰는 건 치유 신관뿐만이 아니었다.
황궁의 태의들처럼 내외과 진료를 보는 평범한 의사도 존재했다.
특히 평민들은 지위와 경제적 문제로 치유 신관을 만나기 어렵기에, 어지간하면 일반 의원을 찾는다고 들었다.
신관처럼 순식간에 몸을 고치진 못해도 어쨌든 낫게 할 수는 있으니까.
나는 환자를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헤인스 경.”
“뭐가요?”
“저를 구해주신 거요. 마수의 이빨이 제 가슴팍으로 날아오는 걸 봤습니다.”
그가 눈꼬리를 살짝 휘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의 대답에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할 일’이란, 그가 엘리서 왕세녀의 의뢰를 받아 나를 지키는 행위를 의미했다.
그걸 여태 몰랐던 것도 아닌데······.
“그래도 어느 정도는 몸을 사리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가 의외라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서양 중세풍의 세계관에서, 기사가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지키는 건 분명 명예로운 행동일 터였다.
그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내가 죽을 뻔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하는 건 심각한 모순이었다.
하지만 나는 21세기를 살던 보통의 한국인이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 다치고 아파하는 건, 솔직히 무서웠다. 미안함도 컸다.
아무리 여기가 소설 속이라고 해도.
“저는 기사가 아니고 피를 본 적도 많지 않아서요. 심약하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저를 지키지 말아달라는 미련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헤인스 경도 건강하셨으면 합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도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심란했다.
“······왕자님께서는 듣던 대로,”
-히히힝!
말 울음이 헤인스 경의 문장을 끊었다.
창밖을 보니, 웅장한 무테 백작저가 밤의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차가 느려지며 철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곧 저택 내부로 진입한 행렬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바깥쪽에 앉은 가나엘이 즉시 마차 문을 열었다. 백작저의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황실에서 어인 일로, 칼라마르 공자님?”
“네, 저예요. 아버님께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있다고 전해주세요. 앞선 마차에는 황자 전하께서 타고 계십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기사가 정중히 예를 차리고는 빠르게 몸을 놀려 사라졌다.
가나엘이 나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엘리자베트 경하고 친한 사이인 건 알았는데, 이제 보니 남매 수준이네.
*
헤인스 경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들것에 실렸고, 즉각 엘리자베트 경의 부친인 미셸 무테 경의 집무실로 옮겨졌다.
수술 준비 때문에 미셸 경이 직접 우리를 맞지 못했지만 황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한숨 돌리며 백작저 시종들의 인사를 받았다.
다들 가나엘이 아주 친근한 눈치였다.
“예서 왕자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이곳의 손님인 에바 블랑케르가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나와 있었다.
나는 그제야 소공녀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와,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에바, 잘 있었습니까?”
말을 놓아달라고 하는 걸, 차마 그렇게는 못 하고 이름을 부르기로 합의했었다.
내 인사에 에바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오빠가 없어서 조용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왜 엘리자베트 경은 안 오시고, 일행 분들이······. 힉!”
흑갈색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화,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사르네즈 공녀······.”
아이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허리를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분명 소공작의 결투 장소에서 본 얼굴들일 텐데도,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가운의 소매며 허리끈을 쉼 없이 만지작거렸다.
그날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게 용할 노릇이었다.
종교적 반려 자리를 원한다더니, 과연 진심으로 상대를 동경해온 듯했다.
“안녕하세요, 블랑케르 공녀. 접때는 제대로 인사를 못 했네요. 백작저에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크리스텔이 씩 웃으며 아이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녀가 소공작에게 엄청난 악의를 보였던 터라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동생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했다.
크리스텔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옷, 옷 갈아입고 올까요?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곧 잘 거잖아요. 지금도 괜찮습니다. 귀여운데.”
주인공의 말에 에바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변했다.
황자는 묵묵히 응접실로 향했다. 제집처럼 편해 보이는 게 자주 와본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시종들이 부지런히 커피와 다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로부터 30분 정도가 흘렀다.
“제가 너무 흥분했었나 봅니다. 그놈을 냅다 베는 게 아니었는데.”
크리스텔이 커피 잔을 노려보며 중얼댔다.
나는 손톱 거스러미를 자꾸 괴롭히는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 말렸다. 그러다 피난다.
“공녀,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으니 마음 놓고 이것 좀 드셔보세요. 밤 조림이 맛있습니다.”
빈 접시에 밤 조림 두 알과 프레지에 한 조각을 올려 내밀자, 그녀는 포크로 밤을 푹푹 찌르더니 한 입에 와앙 넣었다.
양볼이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스트레스 받으면 많이 먹는 타입이구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였어도 죄스러운 마음이 들 것 같았다.
이빨의 존재를 몰랐다고 해도,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일단 내 손끝에서 벌어진 일로 사람이 다쳤으니까.
크리스텔은 잔정이 많으니 앞으로도 오늘의 일이 마음에 걸릴 터였다.
-똑똑
“들어와.”
노크 소리에 황자가 즉답했다.
문을 연 시종 뒤로 낯선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짧게 깎은 진회색 머리와, 깊은 회색 눈이 돋보이는 남자였다.
황자가 드물게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우리도 몸을 일으켰다. 저 사람이군.
“미셸 경.”
“전하.”
두 남자가 악수했다.
미셸 무테 경은 허리를 살짝 숙였지만, 다른 손으로 황자의 손등을 토닥이는 걸로 보아 가까운 사이인 듯싶었다.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제거한 이빨도 곧장 불태웠지요. 요행히 장기 손상은 없었고, 환자는 기본적으로 몸이 튼튼하니 금방 회복할 겁니다.”
“수고했습니다.”
황자가 대답했다. 나와 크리스텔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치유력을 써주신다면 사나흘 안에 나을 상처입니다. 예서 왕자님.”
미셸 경이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인사했다.
나는 마주 고개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사흘을 목표로 노력해보자.
“어디 보자, 내 예비 사위도 와 있구나.”
이어 미셸 경이 내 뒤쪽으로 팔을 뻗었다. 네?
“아버님.”
가나엘이 대답했다. 응?
“그래, 그새 키가 큰 것 같아.”
미셸 경은 온화하게 웃으며 가나엘을 한 번 끌어안았다.
두 뺨에 번갈아 쪽쪽 소리를 내기도 했다.
······어?
*
“확실히 본 거지?”
“······.”
세드리크에게선 답이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그것이 긍정의 의미임을 알았다.
오페라 극장의 극장주와 비서를 황도 수비대에 인계하고, 근위대를 시켜 목격자 진술을 확보하고, 뒷수습까지 끝낸 뒤 귀가하니 밤 12시였다.
환자인 헤인스 경이야 그렇다 쳐도 세드리크와 예서 왕자, 크리스텔 공녀까지 백작저에서 묵게 될 줄은 몰랐다.
집에 친구를 우르르 들인 건 오랜만이라 재미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오페라 개막 공연 관람은 분명 별것 아닌 일정이었을 텐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커졌을까 싶었다.
세드리크, 왕자님, 크리스텔. 이렇게 셋이 모이면 꼭 사건이 터진단 말이지.
“얼마나 뒤져볼까?”
“출생 시점부터 현재까지.”
“뭐야, 그렇게 심각해?”
황자는 부연하는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맑은 달빛이 백작저를 다정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극장에서 자신이 본 광경을 똑똑히 기억했다.
공녀의 검에 맞은 하얀 이빨과, 그것이 그리던 비정상적인 궤적.
튕겨나간 각도는 기이했으며 뒤이은 성기사의 행동은 수상했다.
공기 속성의 대주교급이, 어째서 자신의 몸을 방패로 쓴단 말인가?
에테르의 본능보다 몸이 더 빨랐다고 말할 셈인가?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이빨을 구석으로 처박아버릴 수 있는 자였다.
놀란 왕자와 공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듯했으나 황자는 달랐다.
프레데리크 리에스테르의 아들은, 본 것을 못 본 척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거슬리는군.”
그가 낮게 말했다. 편히 잠들지는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