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904)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904화(904/920)
종막과 서막 (6)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난 것 같았다.
-싸아아아······!
“······.”
“······.”
“······.”
우리가 법정으로 들어서자마자 수백 쌍의 시선이 와르르 꽂혀 들었고, 실내는 쩡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서클을 열지는 않았지만 맘먹고 에테르를 개방했으니, 지금쯤 나의 뒤통수엔 번쩍번쩍하는 후광이 매달려 있을 터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 주먹을 쥐었다 펴며 눈을 깜빡거렸다.
눈길 닿는 곳마다 온통 사람, 사람, 사람······. 방청석도, 증인석도, 법대와 보증인들의 자리는 물론이고 통로와 입석까지도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이들로 인산인해였다.
이제 이런 자리는 슬슬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도 이렇게 긴장되는 것을 보면 역시 정치나 사교는 내게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다.
“이만 걸을까요.”
나의 손을 받친 예서 왕자님이 산뜻하게 물었다.
왕족의 보랏빛 시선은 흔들림 없이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고, 오월의 과실 같은 입술은 희미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곁눈질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걷는 거 잘합니다.”
“하하.”
남자가 짧게 웃고는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나는 목을 반듯이 세우고 눈빛을 떨어뜨리지 않으며 당당하게 발을 디뎠다.
오늘의 재판은 단순히 범죄자를 심판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프레데리크 폐하께서는, 오늘이 우리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이자 빌헬미나 스네이더르의 완전한 끝이 되기를 바라셨다.
세계의 신이 되기를 갈망했던 살인자의 참혹한 야망이, 생생히 실존하는 기적 앞에 볼품없이 무너져 내리기를.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왕자, 그리고 진실한 주신의 증거가 죄인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이 조각 내기를.
-뚜벅, 뚜벅, 뚜벅······
“오, 주신 맙소사······.”
“과연, 다르면서도 어딘가 닮으셨습니다. 체격도 그렇고······.”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군요! 두 분께서 주신의 쌍둥이라는······.”
“쉿!”
그래서 나의 여섯 날개가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원하셨고, 내 옆에는 반드시 예서 페네티안 왕자님이 서기를 원하셨다.
폐하께서는 우리가 다른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빛나야만 한다고 주문하셨다.
방청객뿐 아니라 이곳에 모인 백성 모두가 오늘의 기적을 잊지 않도록.
감히 소중한 생명들을 빼앗고 짓밟으며, 오래도록 쌓아온 대륙의 평화를 무너뜨린 대역죄인이······.
“말도 안 돼, 말도······. 말도······.”
우리를 보며 처절히 절망하고 낙담하기를. 그분께서는 무엇보다도 바라셨다.
나는 피고인석에 홀로 앉아 중얼중얼하는 노인을 보며 부지런히 걸어 나갔다.
그녀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처음.
-척, 척, 척!
“······.”
우리가 통로를 지나치기 시작하자, 제국군 기사들이 양발을 맞붙이며 고개 숙여 예를 차렸다.
그러자 방청석에 앉아 있던 어느 귀족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절했다.
그녀를 필두로 법정의 모든 사람이 우르르 기립하여 파도타기 하듯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분의 밝고 환한 낯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대륙의 보름과 초승을 뵙습니다.”
“······.”
파브리스 베랑 공작의 아내, 안 베랑 공작 부인. 곁에는 그녀의 딸인 엘로디 소공작도 함께였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 이상하게 마음이 벅차올랐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서 보냈던 최초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서일 것이다.
냉궁이라 불리던 쥘리에트에서 벌어진 살인 미수 사건과, 그로 인해 밝혀진 두 시종 아이의 죽음.
얼마 후 베랑 남작령에 지어진 첫 번째 보육원.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오는 신국 사람들을 구조하여 보살피던 남작 가족······.
“······대륙의 보름과 초승을 뵙습니다.”
“대륙의 보름과 초승을 뵙습니다······.”
“주신의 영총을 누리소서.”
‘좋은 사람들’.
그래,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런 분들을 닮고 싶었다.
방청석에 자리한 반가운 얼굴들을 한 분 한 분 가슴에 새기며 나는 불현듯 생각했다.
커다란 형의 등을 바라보면서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던 초등학교 3학년생 ‘정예서’는······.
마침내 다른 세계에서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고.
······완벽한 어른이 아니라, 좋은 사람. 그거면 돼.
“마마,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는 어느덧 상석의 코앞까지 진출해 있었다.
낯익은 황제궁 시종 두엇이 왕자님과 나를 층계로 인도해 주었다.
마지막 계단을 디딜 무렵에 그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그릇을 통해 나의 감정을 모두 읽어낸 왕자님은, 미소와 더불어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살며시 이끌어 황태자에게 넘겨주었다. 바통 터치구나.
“태자님, 이거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
왕자님이 준비된 자리에 앉는 동안, 나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져 세드리크의 반대쪽 손에 선물을 한 움큼 쥐여 주었다.
사내는 나를 의자로 내리누르면서도 궁금증으로 고개를 기울······.
“······난 어린애가 아니야.”
아니, 인상 쓰지 말고.
“그때는 제대로 된 걸 못 드렸으니까. 피곤할 때 하나씩 꺼내 드세요.”
“······.”
이윽고 ABC 초콜릿을 챙긴 태자가 착석했다.
그러자 법정의 모든 이가 다시 와르르 자리에 앉았다.
나는 끝으로 황제 폐하와 스승님께 깍듯이 인사드리고,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자세를 바로 했다.
왕자님과 맞춰 입은 기나긴 옷자락과 소매, 여섯 장의 날개가 이내 말끔히 정돈되었다.
느릿느릿 에테르를 거두니 후광의 빛살 또한 옅어지는 듯했다.
한층 또렷해진 시야에 널따란 재판정이 가득 들어찼다.
그 순간.
“······말도 안 된다, 말도, 말도 안 돼······!”
-달캉!
피고인석에서 포승줄에 묶인 죄인이 벌떡 일어났다. 나는 놀라서 목에 힘을 주었다.
곧바로 빌헬미나 스네이더르와 눈이 마주쳤으나, 그녀가 더 움직이기도 전에 제국군의 신속한 진압이 이어졌다.
방청객들은 경악하여 부채를 바삐 팔랑거렸다.
“이거 놔라, 말도 안 된다! 이것은 사기다, 몽땅 사기라고!”
“저런 무뢰한이 있나!”
“피고인! 자중하시오!”
“신성한 계시를 받은 존재는 나다! 저따위 사기꾼들이 아니라 나! 나란 말이야―!”
찢어지는 비명.
-우당탕! 덜커덩!
“피고인!”
“왕자는 분명 죽었다고 했다! 베르너르의 손에 죽었다고 했어! 저 더럽고 천한 사기꾼 같으니!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쩔그렁, 쩔그렁!
오른 손목과 오른 발목에 찬 구속구가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출렁거리고, 죄인의 목에서는 그보다 끔찍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아악! 아아악······!”
“신관! 교황청 신관! 어서 저자를 진정시키시오!”
“예, 의장님!”
빌헬미나 스네이더르는, 언젠가 우리가 흑마법 수정구 너머로 교신했던 사람 같지 않았다.
한때 나의 그릇을 분노로 뒤흔들었던 그녀의 차분함과 고고함은 이제 송두리째 사라져 찾아볼 수도 없었다.
세상 모든 존재를 발밑에 둔 것처럼 오만하고 방자했던······.
“믿지 마라! 주신은 우리를 버렸다! 신은 이 땅에 어떠한 은혜도 베풀지 않는단 말이다―!”
-철컹, 철커덩!
[스네이더르 공작, 우리는 지금부터 그대의 영혼을 가라앉힐 것이오. 천천히 호흡하며 힘을 받아들이시오.]“신은 너희에게 자비롭지 않아! 같은 행복, 같은 사랑을 나누어주지 않는다고! 신은 불공평함을 정녕 모르느냐!”
“어깨 단단히 잡으시게! 어깨 단단히!”
[호흡하시오! 힘을 거부하다가는 그대의 그릇이 깨질 것이오!]“바로 내가! 내가 그걸 바로잡으러 온 구세주······!”
문장 하나하나에 권위를 실어 말하던 공작은, 이제 없었다.
나는 시뻘겋게 충혈된 그녀의 두 눈과 봉두난발, 텅 빈 왼팔과 왼 다리―화상으로 얼룩덜룩해진 얼굴 주름과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보며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당연히 그녀가 안쓰러워서는 아니었다.
희대의 살인마가 불쌍하게 느껴지거나, 별안간 그녀의 사연 따위가 궁금해져서도 아니었다.
그저······.
“참으로 왜소한 노인이 아닙니까.”
“······.”
속을 꿰뚫는 듯한 왕자님의 말에, 나는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어둑히 가라앉은 눈동자가 한때 그의 고모였던 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스네이더르의 보증인들은 몇 걸음씩 물러나 상황을 주시했다.
-싸아아······!
“아아아악! 이거 놔라―!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네 이놈!”
“체격도, 힘도, 외양과 목소리까지도 무엇 하나 특출난 바 없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귀족입니다.”
“······.”
“저런 이가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이고, 수십 년간 나라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우리와 섞여 살았다는 사실이······.”
“······.”
“그것이 못내 참담하지 않습니까.”
“······.”
나는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조심스레 손을 뻗어 왕자님의 손등을 감쌌다.
그가 영영 잃어버린 인연들을 되찾아 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같은 빛깔이라는······. 턱없이 조그마한 위로라도 건네고자.
“괜찮습니다.”
그러자 왕자님은 나를 항해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나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았다.
“여기서부터는 당신과······. 새로이 시작할 테니까요.”
-털퍼덕!
“오······!”
흠칫! 방청석에서 터져 나온 탄식에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맙소사, 기어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스네이더르 공작이 어딘가로 호송되는 것이 보였다.
신관과 제국군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죄인의 보증인들이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으로 뭐라고 삿대질하기도 전에―
-땅땅땅!
“삼십 분 휴정하겠소. 삼십 분 휴정!”
시세 후작님이 저렁저렁한 목청으로 선언했다.
나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주르륵 몸을 기댔다.
“세드리크, 나 초콜릿 하나만.”
“······기가 막히는군.”
휴우······.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일이 있었네.
*
그로부터 정확히 삼십 분이 흘러서, 재판은 예정대로 재개되었다.
그사이 정신을 되찾은 공작은 창백해진 얼굴로 법정에 복귀했다.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보증인들에게 입을 다물라고 날카롭게 경고하더니, 지금부터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황실 대리인들의 신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 리에스테르 제국의 황제이신 프레데리크 폐하의 세작이었소. 이것은 위니테강이 솟아나는 태고의 샘물만큼이나 깨끗한 진실이오.”
“······.”
“······.”
장내는 귀신이 지나간 것처럼 써늘해졌다.
나는 양손을 꼭 맞잡으며 좌중을 살펴보았다.
우리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방청석에는 가인 씨와 이자벨이 앉아 있었다.
‘세작’이라는 단어에 두 사람의 낯은 곧바로 딱딱해졌고, 이와 관련한 궁정 재판을 겪은 바 있는 제국 귀족들도 할끔할끔 윗전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빌헬미나는 계속해서 발언했다.
“이제껏 황실 대리인들이 나의 죄라고 주장하며 증거를 제시한 사건들은, 대부분 황제 폐하를 위하여 벌인 짓이었소.”
“······지금 엘리서 왕세녀 전하를 상대로 반역을 저질렀음을 시인하는 것이오?”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폐하의 승전과 영광만을 위하여 행동하였소. 신국을 배반한 것처럼 보인 것도, 왕세녀 전하를 상대로 모반을 도모한 것도 전부 그래서였소.”
“······.”
“······.”
황실 대리인들이 말없이 눈길을 교환했고, 시세 후작님은 내내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웅성거리고 숙덕거리는 것이 특기인 리에스테르 방청객들 역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 프레데리크 폐하께서 입을 여셨다.
“······흥미로운 가설이군. 증거는?”
“······방금 뭐라고······.”
“짐이 너를 세작으로 고용하였다는 증좌가 있느냐고 물었다.”
“······.”
“······.”
모든 증거를 지우고 뻔뻔스레 결백을 주장하는, 전형적인 스네이더르의 방식.
일순 공작의 낯이 텅 비었다.
반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시점부터 재판은 급물살을 탔다.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 90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