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Happens When the Second Male Lead Powers Up RAW novel - Chapter (98)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98화(98/920)
#098 왕족의 반격 (3)
“30초만 더 버텨볼까?”
“윽······.”
두 개의 서클이 맞부딪혔다. 금속 갉는 소리와 황금빛 불씨가 튀었다.
-츠츠츠츳!
이를 악문 채 안간힘을 썼다. 부티에 추기경의 신력은 엄청났고 성소는 강력했다.
나는 성소의 크기를 조금씩 늘려가며, 그녀의 서클이 더 커지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추기경 집무실에 들어온 첫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수업이었다.
당시엔 그녀가 나를 밀어내 중앙 진출을 막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그녀를 구석으로 최대한 몰아붙이는 것이 목표였다.
-키기기긱!
“옳지. 지금의 집중력을 유지하렴.”
“흡.”
나는 눈을 부릅뜨고, 시계태엽처럼 맞물린 두 서클의 경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꾸역꾸역 나아가는 에테르의 영향으로 내 원이 미세하게나마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성지(聖地)를 개방하려면 절실함이 필요해. 간절하게 바라는 걸 떠올려 봐.”
‘정예서!’
‘작은오빠.’
그녀의 말과 동시에, 형과 은서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일순 턱 끝에 힘이 풀렸다.
“아.”
-파아아앗!
추기경은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수습하기엔 이미 늦었다.
내 것이 아닌 에테르가 머릿속을 강하게 내리누르는 느낌과 함께,
-콰앙!
“큭!”
그녀의 성소가 순식간에 확대되며 나를 튕겨냈다.
강렬한 힘을 버티지 못하고 내 몸이 책장에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집무실을 밝히는 금색 원은 어느새 하나뿐이었다.
“아으······.”
내가 머리를 들며 신음했다. 등과 무릎이 아팠지만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끽해야 가벼운 멍이 들 충격이었다.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추기경의 눈부신 빛살이, 나를 다정하게 감싸며 시계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중년인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단다, 왕자님.”
“······네.”
“왕자님에겐 재능이 있어. 성지는 때가 되면 열릴 테니, 그동안은 에테르 흐름을 더욱 원활하게 해두는 거라고 생각하자.”
상냥한 격려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성장하지 않아도, 지금도 내가 뛰어난 신관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언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데 할 수 있는 노력은 전부 해두고 싶었다.
든든한 이들을 곁에 두는 것도 좋지만 나 역시 강해지는 게 당연히 생존에 유리했다.
신수들에게도 믿음직한 보호자가 있는 편이 나을 테고.
“오늘 실습은 여기까지야. 한숨 돌리렴.”
추기경이 말했다. 나는 곧장 소파에 몸을 묻었고, 그녀는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았다.
“궁금한 건 없니?”
단안경 아래의 베이지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음. 가장 묻고 싶은 게 있지만, 그건 이따 질문하기로 했다.
“교황청에서 오는 세 분의 추기경은 전부 성기사입니까?”
내가 입을 뗐다.
크리스텔과 세드리크 황자의 성기사 서임 심사를 위해, 부티에 추기경이 정식으로 추기경 파견을 요청했다고 들었다.
운이 좋으면 대지 속성의 성기사도 볼 수 있을지 몰랐다.
내 물음에 선생님의 눈꼬리가 짓궂게 휘어졌다.
“그건 무작위란다. 공정성을 위해 심사위원은 추첨으로 뽑거든. 하지만 오는 건 두 명이야.”
응? 서임에는 추기경 셋 중 둘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나머지 한 명은 나고.”
“선생님?”
“권력 좋다는 게 뭐겠니.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야 가뿐해.”
그녀가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갑자기 어둡고 오싹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원칙적으로는 추첨을 통해야 하는 심사위원 결정이 제국의 돈과 힘으로 한 자리 뚝딱 해결됐다는 뜻이었다.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이래도 돼? 아무리 교황이 공석이라지만 너무 부패한 거 아니야?
심지어 그녀는 교황청 소속도 아니었다.
“교황청은 제국보다 신국과 훨씬 가까운 사이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 균형이 맞지 않겠니? 손 놓고 구경했다면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추기경만 셋이 왔을지도 몰라.”
자줏빛 눈썹이 슬프다는 듯 아래로 늘어졌다.
이걸 나쁘거나 이상하게 받아들이면 무척 서운할 것 같다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주인공들이 잘되면 좋은 거지.
“또 궁금한 건? 아니면 혹시 허락받고 싶은 게 있니?”
그녀가 노골적으로 물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어제 내가 먼저 폴로 경기를 보러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뱅자맹과 가나엘은 과장 좀 보태 울기 직전까지 갔다.
엘리자베트 경과 크리스텔도 몹시 기뻐했다.
저녁이 되자 쥘리에트 궁에는 그 얘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추기경이 이미 알고 있는 게 전혀 놀랍지 않았다.
“뒤엠 후작의 폴로 경기를 보러,”
“나도 가고 싶네. 세드리크와 동행해도 될까?”
추기경이 냉큼 말했다. 나는 결국 고개를 주억거리며 소리 내 웃었다.
솔직히 거절당할까 봐 조금 긴장했는데, 그녀와 황실이 나를 믿고 있다는 게 느껴져 마음이 놓였다.
퇴계공의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건 처음이지만 자신 있었다.
일단 내가 둘하고 같이 안 앉으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
오후에는 쥘리에트 궁이 북적북적했다.
황궁의 태의와 치유 신관, 그들의 보조가 방 두 개를 가득 채웠다.
황자, ‘세이디’는 진짜 한다면 하는 놈이었다. 검진이 벌써 1시간째였다.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안심했는데 꽤 본격적이었다.
분주한 사람들 너머로 곁방에 앉은 크리스텔이 보였다.
헤인스 경의 수업이 끝나고 쫄래쫄래 나를 따라온 것이었다.
엘리자베트 경과 에바가 무테 백작저에 있을 텐데, 왜 그쪽에 합류하지 않고 여기 남았는지 궁금했다.
“대체로 건강하십니다. 다만 체중은 늘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지금도 양껏 먹고 있는데요.”
“에테르의 흐름도 안정적입니다. 막힌 곳 없이 체내에 고르게 퍼져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의와 치유 신관이 각각 진단했다. 마지막으로 채혈이 진행됐다.
주사기 같은 건 없는 세계라, 소독한 칼로 내 손가락 끝을 살짝 베어 피를 냈다.
비위가 좋지는 못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크리스텔이 살짝 웃었다. 좀······.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착각인가.
“정확한 검사를 위해 귀한 분의 혈액을 얻었습니다만, 워낙 혈색이 좋으시니 독 반응은 없으리라 예상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말에 몇몇이 키들거렸다. 나는 진심이었다.
세이디는 눈에 불을 켰지만 헤인스 경이 내 찻잔에 독을 발랐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태의와 치유 신관이 떠날 채비를 시작하자, 뱅자맹과 가나엘을 위시한 시종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방해하면 안 되는 일’이 끝난 걸 알고 레서판다들이 조르르 내게 달려왔다.
나는 세 마리를 품에 안은 채 크리스텔에게 다가갔다.
“공녀.”
“아, 네. 다 마치셨습니까?”
크리스텔이 표정을 만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그녀는 어딘가 이상했다.
사람이 늘 밝으라는 법은 없지만, 묘하게 힘이 없고 눈빛이 멍했다.
방금 전까지도 그랬다.
평소였다면 내가 검진 받는 걸 보며 이런저런 농담을 얹었어야 할 사람이 내내 조용했다.
어제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습니까?”
“저요? 아뇨, 아무 일 없습니다.”
“그럼 혹시 어디가 불편한가요?”
산트의 에테르만으로는 역시 힘든가?
“멀쩡합니다. 튼튼한 거 아시면서.”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녀의 꾸민 듯한 낯빛은 그대로였다.
황도의 공작저로 돌아가지 않은 걸 보면 어머니인 이자벨 공작 부인과 이야기할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몇 초간 입을 다물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잠깐 걸을까요?”
*
“고민이 있어서 좋은 점도 있네요. 왕자님이 산책을 다 권하시고.”
크리스텔이 농담을 건넸다. 고민이 있긴 하구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보폭에 맞춰 꽃 덤불 사이를 걸었다.
쥘리에트 궁의 정원이자 로메로 궁의 후원인 이곳은, 내가 생각을 정리할 때마다 나오는 장소였다.
어쩌면 그녀에게도 도움이 될지 몰랐다.
황도의 7월은 볕이 따가웠지만, 하얗고 커다란 구름이 오가며 적당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저라도 괜찮다면 이야기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나 심란해요’ 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주인공을, 차마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행복은 정은서의 기쁨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구니까요.”
크리스텔의 커다란 청회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내 발언에 놀란 것 같았다.
나는 머쓱해져서 뒷목을 쓸었다.
“먼저 친구하자고 하셨으면서 반응이 별로네요.”
“아니, 그게······. 이럴 때 치고 들어오시니까 좀 감동이라서요.”
그녀가 코끝을 쓱 훔쳤다.
묵묵히 몇 걸음 더 걸으니, 옆에서 여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정말 별거 아닌데. 말하려니까 좀 민망할 정도입니다.”
“황자님을 이틀째 못 봐서 서운하십니까?”
“그건 저의 행복지수를 높였는데요?”
크리스텔의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작게 웃었다.
황자는 정무에 참여하느라 종종 어제오늘처럼 수업을 빠지곤 했다.
나는 어깨 위로 날아온 뚝심이의 날개를 쓸어주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어서요.”
“······.”
“처음에는 너무 좋았습니다. 기억은 없지만 대신 엄청난 능력이 생겼고. 집안에 돈 많고 권력도 있고, 게다가 저는 어리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으니까 참 행복했어요. 지금도 그건 똑같습니다. 그런데.”
“······.”
“주변 사람들은 모두 목표가 있더라고요. 엘리자베트 경은 직업이 분명하고 가문의 후계자인 데다 약혼자도 있습니다. 열여섯밖에 안 된 에바는, 벌써 소공작이 되겠다고 열심이고요. 사교계 데뷔를 어디서 하면 가장 효과적일지 분석하고 있대요. 황자 전하도······. 삶에 충실해 보이시고요. 그건 부럽습니다.”
“······.”
“두 번째로 얻은 삶이니까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말고 백수로 지내야지, 했는데. 남들이 열심히 사는 걸 보니 괜히 초조해져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나도 뭐 하나 잡아서 열심히 굴러야 하는 건가 싶습니다. 부딪히고 깨지는 건 이제 지긋지긋한데도······.”
‘일벌레 근성이 영혼까지 콱 박혀 있나 봐요’ 하며 그녀가 미소했다.
내가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리라 상정하고 내뱉는 말들이었다.
벽에 대고 넋두리하기보단 낫다고 여겼을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크리스텔의 문장을 모조리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아주 사소한 감정까지 전부 다.
“깨어난 지 반 년도 안 됐는데, 백수 체질은 아니신가 보네요.”
“그러니까요. 왕자님께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겠다고 말씀드린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뚜렷한 걸 손에 쥐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크리스텔이 손가락을 움직거리며 말했다.
어제 엘리자베트 경의 활약상을 들으며 번민했던 걸까.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는 게 ‘목표’지만, 당장 그것에 도달할 방법은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 이제는 귀가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했다.
그럼에도 내가 목표라는 단어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 그렇게 정해두지 않으면 내 마음이 언제 어떻게 흔들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뚜렷한 지향점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삶에 임하는 태도부터가 달랐다.
크리스텔 또한 그것을 알기에, 특별한 목적의식이 없는 자신을 답답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악착같이 발버둥 치며 살던 사람일 테니까. 그래서 은서가 좋아했겠지.
“공녀라면 언젠가는 멋진 목표를 찾으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듣기에도 진부한 소리였다. 민망함에 귀 끝이 슬쩍 뜨거워졌다.
“공녀가 찾아 나서지 않더라도, 목표가 먼저 공녀를 찾아올 만큼 활달하시니까요. 게다가 주변엔 공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과정이 느려지더라도 다들 응원하며 기다려줄 겁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하고 덧붙일 무렵, 오전에 추기경에게서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나를 돌아본 크리스텔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낮에 은하수가 보이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뻔한 말이었는데요, 뭐.”
“그래도요. 이런 하소연에 바로 그런 반응을 해주실 수 있는 분은 없을 거예요.”
그건······. 그랬다.
나 또한 빙의한 사람이기에, 그녀의 사정을 알기에 이해할 수 있는 넋풀이였다.
내가 다리에 매달린 레서판다들과 인사하는 동안 크리스텔은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려주었다.
“왕자님은 요즘 걱정거리 없으세요? 저도 들어드리겠습니다.”
“저요? 저는······.”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귀화도 그렇고, 두 남녀의 임시 파트너 건을 떠올리면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요 며칠 신경을 살살 긁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크리스텔에게 이야기를 할까 말까 하다가 입을 열었다.
‘메인 남주’가 거슬려 하는 대상이라면, 주인공에게도 알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헤인스 경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