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100)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100화(100/125)
#100
나는 날 일으킨 사람을 확인했다.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금발이 눈에 들어온다.
‘미하엘 경…….’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겁에 질렸다. 소르겐 백작 때문인지 회귀 전에 겪은 일이 단편적으로 떠오르며 겹쳐 보였다.
그때는 피 칠갑이었던 남자가 지금은 너무나 말끔하다는 게 달랐으나 무심한 눈빛 위로 보이는 살기만큼은 똑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베어낼 것 같은 눈빛.
“괜찮습니까?”
흠칫.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자 미하엘 경도 멈칫거린다.
‘아.’
그제야 나는 미하엘 경이 날 도와줬다는 걸 인지했다.
“…감사해요. 도와주셔서.”
여전히 몸이 떨렸지만 나는 애써 괜찮은 척했다. 하지만 미하엘 경과 눈을 마주칠 용기는 없어 대신 소르겐 백작 쪽을 확인했다.
백작은 앓는 소리를 내며 여전히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꼴을 보니 쉬이 일어나기는 그른 듯해 보인다.
“다친 곳은?”
“딱히요.”
“장갑에 피가 비칩니다만.”
미하엘 경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을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흰 장갑 위로 붉은 피가 번져 있었다.
아, 좀 까졌나 보네.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에요.”
따끔거리긴 하지만 이 정도는 상처는 별거 아니었기에 나는 손을 감췄다.
이런 내 모습에 미하엘 경이 눈살을 찡그렸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이! 이 애송이가 내가 누군지 알고!”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소르겐 백작이 미하엘 경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내 당장 황실 기사한테 이 일을 알릴…… 악!”
성큼 다가선 미하엘 경이 소르겐 백작의 팔을 돌려 꺾었다.
힘없이 제압당한 소르겐 백작의 얼굴이 보랏빛에 가깝게 붉게 변했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무사하지.”
미하엘 경이 소르겐 백작을 걷어찼다.
“컥!”
꼴사납게 다시 넘어진 그는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방금 미하엘 경의 발끝에서 뭔가 반짝였지 않나? 얇은 비수 같았는데.
이상해서 다시 봤으나 그의 구두는 평범했다. 내가 잘못 봤나 싶을 정도로.
“나, 날, 찌르…… 큽!”
“헛소리하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지만.”
미하엘 경이 소르겐 백작의 옆얼굴을 짓밟았다.
얼굴이 잔뜩 뭉개진 상태에서도 소르겐 백작은 뭐가 그리 분한지 미하엘 경을 노려봤다.
“다른 황실 기사한테 네가 벌이려던 짓을 전부 실토해. 최대한 소란이 적게.”
“예, 예. 전부……. 실토하겠습니다…….”
소르겐 백작의 눈이 살짝 풀렸다. 방금까지 노려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잠깐 걷죠. 저번에 못다 한 이야기도 할 겸.”
“네? 하지만 소르겐 백작을 신고해야…….”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못 움직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역시 아까 본 비수는 착각이 아닌 모양이네.
다른 사람이라면 내가 잘못 봤겠거니 했을 텐데 상대가 미하엘 경이니 그렇지도 않다.
“누가 먼저 발견하면요?”
“그렇다면 알아서 자백할 겁니다.”
어떻게 그리 자신하냐고 반박하려면 반박할 수 있겠지만, 차마 저 말이 입에서 안 나왔다.
여전히 몸에 남은 공포가 내 입을 가로막았다.
나는 결국 미하엘 경을 따라가게 됐다.
바닥에 누워 “전부 실토하겠습니다. 전부 실토…….”라며 같은 말만 읊조리는 소르겐 백작을 내버려 둔 채로.
***
걷자길래 정원 쪽을 계속 걸을 줄 알았던 것과 달리 그는 연회장 뒤편의 테라스로 날 데려왔다.
정원에 줄 지어선 등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밝은 연회장 불빛을 보니 두려움이 좀 가셨다.
여기라면 좀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랄까.
특이한 건 연회장 근처에 올 동안 어느 귀족과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여나 누군가와 마주쳐 ‘미하엘 경과 왜 함께 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말하지?’라고 고민했던 게 우스워질 정도였다.
“오늘은 그 개가 없군요.”
개? 아, 룩스 얘기구나.
“황궁에는 동물의 출입이 제한되니까요.”
룩스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생쥐였거나 그와 비슷한 크기만큼 작아질 수 있었다면 몰래라도 데려왔을 텐데.
그렇다면 이 남자의 도움 없이도 소르겐 백작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룩스가 아니었더라도 주변에 다른 동물이 있는지 찾아내 능력을 써서 시간을 번다던가, 아빠를 부른다는 선택지도 있긴 했다.
후자는 황궁에 걸린 제약으로 아빠가 내상을 좀 입긴 하겠지만…….
하지만 다시 저 상황에 부닥쳐도 과연 저렇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소르겐 백작이 자신의 정체를 밝힌 순간 정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으니까.
‘이 남자가 날 도와주지 않았다면.’
최악의 결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랬다고 한들 소르겐 백작과 결혼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트라우마로 남았겠지.
그걸 고려하면 미하엘 경은 정말 고마운 사람이 맞았다.
‘고마운 것과 별개로 이 남자가 껄끄러운 건 여전하지만.’
정신적으로 피로해진 나는 룩스 얘기 다음에 입을 열 생각을 안 하는 미하엘 경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떤 말씀을 하려는 건가요?”
“바로 본론인가.”
그럼 본론을 꺼내지, 달리 얘기할 게 있나……?
의아한 시선으로 미하엘 경을 보자 그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바로 덧붙였다.
“펜던트 갖고 있습니까?”
“아, 저택에 있어요.”
그러고 보니 미하엘 경의 펜던트를 아직도 갖고 있구나. 라샨에 맡기려던 것도 잊었네.
“황태자 전하의 생일과 엘피다 사절단의 방문이 겹쳐 정신이 없었네요. 라샨에 맡기려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제가 찾아간다고 해놓고 안 찾아간 탓도 있으니.”
그랬던가? 음, 듣고 나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미하엘 경이 자꾸 내게 접근하는 이유가 그 펜던트 때문이란 거지?
‘빨리 건네주는 게 좋겠어.’
다음 비번이 언제일지 모르니까 그냥 직접 건네주고 끝내자.
연회가 끝나면 엘피다 사절단도 돌아갈 테니 내 일정도 다시 한가해질 터였다.
“언제쯤 시간 괜찮으세요? 펜던트 갖다 드릴게요.”
“모레쯤 낮 2시부터 괜찮을 듯싶습니다.”
“좋네요. 그러면 그때 제가…….”
황태자 궁으로 찾아가겠다고 말하려던 때였다. 위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말소리가 들렸다.
“하아, 정말 지루해.”
“그러게나 말이야. 황태자 전하는 상석에서 움직이질 않지, 실베스터 공자도 안 보이지.”
투덜거리는 남녀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주변이 워낙 적막한 탓에 그들의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실베스터 공자라면 미하엘 경 이야기인데…….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들어야 한다니, 이만큼 민망할 수 없다.
자리를 뜨고 싶어도 아직 약속 장소를 결정하지 않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목소리들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벨로크 공녀도 안 보이고.”
……나까지?
예상치 못한 주제에 나도 모르게 위를 쳐다보게 됐다.
그러나 툭 튀어나온 발코니 바닥이 우리의 시선을 가리고 있어 잘 안 보였다.
그렇다고 멀리 나가서 보자니 저쪽도 우리를 발견할 게 뻔했다. 굳이 그럴 정도로 저들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았기도 하고.
“벨로크 공녀는 왜?”
“왜냐니? 지금 아니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하잖아.”
“뭐야, 오빠 주제에 벨로크 공녀를 넘보는 거야?”
“그러는 네 주제에 실베스터 공자는 되고?”
“하, 진짜 말 다 했어? 벨로크 공녀가 오빠한테 눈길이나 줄 것 같아?”
“얘가 모르네. 실베스터 공자라면 몰라도 벨로크 공녀는 한번 넘볼 만하다고. 실베스터 가문은 아쉬울 게 없지만, 벨로크 가문은 아쉬울 게 많단 말이지.”
“거기가 뭐가 아쉬워? 대공은 황제의 형제인데? 게다가 돈도 많다며?”
“하, 이래서 여자들이란. 넓게 보질 못한다니까.”
잠깐 혀를 차던 남자가 덧붙였다.
“말만 황제의 형제지, 벨로크 대공은 미치광이 살인귀잖아.”
남자의 신랄한 평가에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완전히 처음 듣는 얘기라던가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다.
회귀 전에 관련된 말을 많이 들었으니까.
미친 살인귀, 벨로크 대공이라고.
나도 익히 들어왔기에 초반에는 아빠를 그렇게만 여겼고.
다만 내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이들이 없었던 만큼 신랄한 평가가 꽤 충격이었다.
그동안 황후궁 사람이든, 대공 가문 사람이든, 대공가 휘하 가문 사람이든 다들 내게 친절했으니까.
속으로 내게 친절한 사람들을 되뇌던 나는 곧 힘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모두 대공가에 친화적이거나 황후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란 걸 깨달아서였다.
아마 일반적인 사람은 남자와 비슷하게 생각한다고 여기는 게 맞겠지.
아빠는 늘 저런 말을 들어오셨을까. 저런 말들과 시선 속에서 늘 혼자 견뎠을까.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 끊임없이 들리던 수군거림 속에도 저런 말이 섞여 있었겠지.
“게다가 원래 갖고 있던 상권도 대부분이 황가에 귀속된 상태고 말이야.”
“그래도 대공가잖아. 황제 폐하도 편의를 잘 봐주시고.”
“봐줘서 저 정도라는 거지. 가진 영토도 겨우 명맥만 이어갈 뿐이고. 한 마디로 대공가라는 건 허울 좋은 껍데기일 뿐이란 거지.”
남자의 말에 문득 소르겐 백작이 내 앞에서 대놓고 조롱하던 게 떠오른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던 태도가 이제야 이해된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공녀는 대공의 친딸도 아니잖아? 가문 사정도 좋지 않은데 양녀한테 얼마나 신경 쓰겠냐? 심지어 그 미치광이 살인귀가 장인…….”
머리 위로 무언가 얹어지며 귓속을 파고들던 말소리가 먹먹해졌다. 낯선 무게감에 고개를 들자 남성용 재킷이 보인다.
조금 전까지 미하엘이 입고 있던 재킷이다.
“듣지 마.”
미하엘 경의 목소리 역시 먹먹했다. 그러나 그의 입 모양만큼은 선명히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