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115)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115화(115/125)
#115
시야가 차단된 탓일까, 아니면 나와 다르게 냉철한 아빠의 목소리 때문일까.
복받쳤던 감정이 조금 수그러들고 이성이 돌아온다.
“……해요.”
“…….”
“울어서 죄송해요. 아빠의 뜻도 알겠어요. 하지만 일주일이라도 좋으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정리할 시간이요.”
“……그래.”
아빠가 내게서 손을 거뒀다. 시야가 다시 트였으나 나는 시선을 내리깐 채 아빠를 쳐다보지 않았다.
“일주일은 너무 짧으니 2주 정도 여유를 주마. 황제와 황후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빠의 말에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푹 숙인 채 고개만 끄덕일 뿐.
* * *
부끄럽게도 대공저에 도착할 때까지도 감정은 갈무리되지 않았다.
얼굴이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지 샤비가 날 보자마자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올 정도였다.
“이거 드세요, 아가씨.”
“고마워.”
퉁퉁 부은 눈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첼시가 따뜻한 코코아를 갖다 줬다.
최대한 괜찮은 척 컵을 받았지만, 부끄러움이 잔뜩 몰려왔다. 진짜 내가 애도 아니고, 아니, 애는 맞나.
“그런데 룩스 님이 안 보이네요. 정원에서 놀고 있나요?”
―맞네! 룩스가 안 보여!
“황궁에 있어.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못 올 거야.”
“그렇군요.”
―뭐? 왜!
수긍하는 하녀들과 달리 슈가는 꽤 놀랐는지 내 어깨 위로 폴짝 올라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엔 기력이 없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냥 그렇게 됐어.”라고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 * *
며칠 뒤 아빠가 황제와 대화를 마쳤는지 룩스의 소식을 전해 줬다.
내가 대공령으로 내려가는 날 돌려주겠다고 했으니 마저 주변을 정리하라고.
끝까지 뜻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빠의 모습에 나는 마음을 다잡고 주변을 정리했다.
상속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고, 엘피다로 넘어가는 건 대공령에서 살피다 가면 되었기에 내가 할 일은 저것뿐이었다.
‘주변 정리라고 해봤자 마리 언니한테 알리는 게 전부지만.’
황후는 아빠가 황제한테 말하며 함께 말한 덕분에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황후궁의 시녀들 또한 황후한테 언질 받았는지 마찬가지였고.
다만, 황후와 만나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카드릭한테는 말했나요? 대공령으로 내려간다고.”
“아니요. 말 안 했어요.”
“그렇군요.”
저 말과 함께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던 황후의 태도랄까.
그것 말고는 건강히 잘 지내라는 인사만 듣고 황후궁을 나왔으나 괜히 신경 쓰였다.
내 소식을 전해 들은 황후궁의 다른 시녀들이 사정을 묻는 바람에 금세 잊혔지만.
나와 룩스에 대해 떠도는 소문들 때문에 나를 멀리할 줄 알았던 것과 달리 그녀들은 여전히 친절했다.
황후궁에서 시녀로 일하던 마지막 날 내게 작별 선물까지 떠안겨줄 정도로.
그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졌지만, 선물이 많은 것도 문제였다.
직접 짠 목도리와 레이스 달린 손수건 같은 생활용품부터 시작해서 과일잼, 과자 등을 받으니 양손 가득 들어도 버거울 정도였다.
‘좋은데, 너무 많아!’
끙끙거리며 들고 오자 샤비가 어서 자기한테 달라며 내 짐을 나눠 들었다.
“흐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고마워, 샤비.”
“무얼요. 그런데 이게 다 뭐예요?”
“시녀들이 줬어. 작별 선물이라고.”
“역시 우리 아가씨는 인기도 많으시다니까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다들 착해서 그렇지…….
카드릭의 생일 연회 때 다른 귀족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들던 것, 그리고 지금 수도 전체에 떠돌고 있을 소문만 떠올려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꺼려질 법도 한데 다들 선물까지 챙겨준 거 보면 그냥 착한 사람들인 거지.
“저택에 들렸다가 곧바로 펠리시타스 보육원에 가시는 거죠? 오늘 주무시고 오는 것도 맞고요?”
“응,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대공령으로 내려가야 하는 만큼 오늘은 마리 언니와 함께 보내고 싶었으니까.
물론, 마리 언니한테는 편지로 미리 사정을 전했다.
대공저로 돌아온 우리는 짐을 챙겨 보육원에 갈 준비를 했다.
―난 준비 끝!
힘차게 외치는 슈가를 내 어깨 위에 올린 나는 방을 나왔다.
저택을 나서는데 샤비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주인님은 안 뵙고 가셔도 되겠어요?”
“안 나오시는 거 보니까 바쁘신 듯한데 뭐하러.”
내 마중도 안 나오고.
물론 내일 또 보면 된다지만, 내가 황궁에서 돌아온 걸 뻔히 알면서도 나오지 않는 아빠가 미워 나도 유치해졌다.
“내일 봐도 되는걸. 대공령으로 내려가는 날은 내일이니까.”
“그렇긴 하지만…….”
쭈뼛거리는 샤비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진다.
‘역시 인사하는 게 낫나?’
솔직히 나라고 아빠한테 매번 다가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전히 혼자 짊어지려는 아빠가 밉고 서운하다.
그래도 아빠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라서…….
‘게다가 아빠를 볼 수 있는 날도 오늘과 내일뿐이잖아.’
마음을 고쳐먹은 나는 샤비에게 잠깐 슈가와 짐을 맡겼다.
“아빠한테 인사만 하고 빨리 돌아올게.”
“천천히 오세요.”
―빨리 와!
상반되는 배웅을 받으며 도로 저택으로 들어가자 집사가 의아하게 날 봤다.
“아빠한테 인사하려고.”
“그러시군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가씨.”
집사가 온화하게 웃으면서 아빠가 있는 집무실로 안내해줬다.
집사가 문을 두드리며 “아가씨 오셨습니다.”라고 알려주자 곧 들어오라는 대꾸가 들려왔다.
달칵, 문을 열자 너부러진 종이가 가득한 책상에서 막 일어나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보육원에 가기 전에 인사드리려고요.”
“그래. 잘 다녀와라.”
“……네.”
무뚝뚝한 인사.
예상했던 반응이었건만, 맥이 탁 풀렸다.
아직도 생각이 변함없으신 거죠? 정말 내일 대공령으로 내려가도 상관없나요?
목 끝까지 말이 차올랐지만 나는 그 물음들을 꾹 삼킨 채 도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괜히 봤어.’
내 기분이 저조해진 티가 확 나서였을까, 보육원에 가는 내내 샤비가 내 눈치를 슬쩍 보는 게 느껴졌다.
자기 탓이 아닌데도 계속 내 신경을 쓰는 모습에 괜히 미안해진 나는 별로 내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먹으라며 내민 사탕을 받아 입에 넣었다.
* * *
보육원에 도착하자 마리 언니가 날 맞이해줬다.
내 사정을 아는 만큼 반가이 맞이해주기보다는 서운함을 토로하는 게 더 컸지만.
“수도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내려가는 거야?”
“언니도 내 소문 듣지 않았어? 룩스가 사람을 해쳤다는 소문 말이야.”
“듣긴 했는데 안 믿었지. 정말 룩스가 그런 거야?”
“그건 아닌데, 정황상 그렇게밖에 안 보이니까.”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거 때문에 룩스가 황궁에 따로 관리받고 있거든. 돌려받고 싶으면 대공령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가는 거구나. 그래도 아쉽다. 지금도 자주 못 보는데…….”
“편지하면 되지.”
“그렇긴 하지만, 직접 얼굴 보는 거랑은 다르잖아.”
마리 언니가 내 손을 꼭 잡더니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언니와 내가 오래 대화할 시간은 없었다. 바깥에서 아이가 “원장 선생니이임!”하고 마리 언니를 부르며 울어서였다.
마리 언니가 상황을 수습하러 간 동안 나도 보육원 일을 조금 도왔다.
‘이리스는 안 보이네.’
이리스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거의 안 보였다. 아마도 나와 얽힌 소문의 여파일 테다.
이전에는 그래도 뭐라도 얻어먹을 건더기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생각됐나.
물론 이리스가 그들과 똑같다고 여기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보육원 봉사를 정말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다만 내가 보육원에 올 때마다 늘 있었던 터라 안 보이니 괜히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 꾸준히 오던 초대장도 안 보냈지.
‘무슨 일 있나?’
내내 이리스를 잊고 있다가 이제 와 이러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뒤늦게 이리스한테도 수도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카드릭 때문에 갑작스레 헤어진 것도 마음에 걸리고.
“공녀님, 공녀님.”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리자 내 허리께까지도 안 오는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다.
“저 쿠기 더 먹고 싶어요. 하나만 더 주세요.”
“저도요!”
그 아이를 시작으로 내 주위로 금세 다른 아이들이 몰렸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워낙 많은 곳이다 보니 밤이 제법 깊은 뒤에야 나는 다시 마리 언니와 마주할 수 있었다.
깨끗하게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마리 언니의 침대 한쪽을 당당하게 차지했다.
“자, 여기 새 베개.”
“고마워.”
나는 내게 준 베개를 끌어안았다.
늘 향기로운 향이 나는 대공저의 베개와 달리 언니가 준 베개에서는 솜 냄새밖에 안 났다.
“이불도 새로 줄까?”
“아니, 언니랑 같이 덮을래.”
“안 춥겠어? 내가 이불 다 뺏어갈지도 몰라.”
“요새 날이 많이 풀렸던걸? 자다가 추우면 언니한테 달라붙지, 뭐.”
내 말에 마리 언니가 못 말린다는 듯 옅게 웃었다.
곧 내 옆으로 온 언니가 잔뜩 미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 고생 많이 했지?”
“으음, 별로.”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애들이 저러는 거야 당연하니까.
오히려 지금 아이들은 굉장히 순했다. 내가 어릴 적 함께 지낸 보육원 아이들보다 훨씬.
‘아마 물질적으로 여유로운 게 커서겠지.’
못된 원장이 보육원을 운영할 때는 물품이 없으니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서로 싸우기만 했으니까.
“맞다, 언니. 그거 받았어?”
“그거?”
“상권 명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집사가 언니한테 줬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아, 그거.”
마리 언니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
왜 저러지?
한참 서랍을 뒤지던 언니는 어떤 서류 봉투를 꺼내더니 다시 내게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네게 말하려고 했어. 자, 가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