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117)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117화(117/125)
#117
실로 달콤한 제안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해 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을 만큼.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만약 카드릭이 정말로 날 도와 수도에 남게 된다 해도 아빠는 기꺼워하지 않을 테니까.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아. 이미 다 끝난 얘기들이야.”
나는 카드릭한테서 내 손목을 빼내며 덧붙였다.
“내가 도망친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생각해.”
“도망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했어.”
“그래서 어쩔 건데?”
당장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카드릭을 쳐다보던 그때였다. 그가 싱긋 웃더니 내 손을 다시 붙잡으며 한쪽 무릎만 꿇었다.
“베로니카 나비드 벨로크.”
애칭이 아닌, 내 풀네임이 들어간 진지한 부름.
카드릭이 이런 식으로 내 이름을 부른 적은 드물었던 만큼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급히 손을 빼내려 했지만, 꽉 움켜쥔 힘은 단단했다. 미동조차 하지 않을 만큼.
“불새의 맹약자로서, 황실의 명예를 걸고 정식으로 그대에게 결혼을 요청…….”
이 미친놈!
나는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카드릭의 입을 틀어막았다.
뒤에 나올 말이 어떤 건지는 듣지 않아도 뻔하니까!
그러나 그의 입을 막은 게 오히려 더 실수였던 모양이다. 카드릭이 내 양팔을 잡아당기며 자기도 뒤로 누웠다.
꽤 드센 힘에 몸이 속절없이 휘청이더니 카드릭의 몸 위로 쓰러졌다.
―으악! 넘어진다아아!
―깜짝이야!
슈가가 폴짝 뛰어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마찬가지로 놀란 내가 기겁하며 룩스를 꼭 붙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드릭이 내 밑에 깔리며 쿠션 역할을 해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아파.’
카드릭과 부딪친 무릎이며, 팔꿈치며 할 것 없이 얼얼했다.
아무리 그가 깔려줬다고 한들 부딪친 부분이 없진 않으니까.
룩스를 바닥에 내려준 나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카드릭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짓이야?”
흘러나오는 목소리 역시 뾰족하기 그지없다.
갑자기 당기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테니까!
“소용없다는 걸 알려주려고.”
“뭐?”
“말했잖아. 난 널 놓칠 생각이 없다고.”
카드릭이 재킷 안으로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내 새끼손톱만 한 붉은색 보석이 박힌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특색이 없는 단조로운 반지였다.
“이글레시아의 불꽃.”
“……?”
어디선가 들어본 명칭인데?
낯익은 단어에 나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그것의 정체를 떠올리고는 기함했다.
초대 황제가 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보석을 가공하여 황후에게 청혼할 때 줬다는 반지의 이름이었으니까!
그 뒤로 대대로 황후가 될 이한테만 전해진다는 반지가 왜 내 앞에 있는 거야?
“너, 설마, 훔쳤어?”
“예전부터 나한테 있었어. 어머니는 이 반지에 그다지 흥미가 없으신 모양이라.”
훔친 게 아니라니 다행인데……. 문제는 저 반지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다.
카드릭이 내 왼손을 찾아 쥐더니 네 번째 손가락을 티 나게 움켜쥐었다.
억지로 끼울 셈이다.
‘이런, 미친!’
절로 경악이 흘러나왔다.
워낙 제멋대로인 건 알았지만, 이런 것조차 제멋대로일 줄이야!
“이러지 마.”
“왜?”
카드릭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조건이면 상당히 좋은 편 아닌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도 없잖아, 너.”
일순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곧이어 미하엘 경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째서 그 남자가 생각나는 거야? 설마, 정말 미하엘 경을……?
당혹스러워 바보처럼 입만 벙긋거리던 그때였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이 상황에서 들릴 리 없는, 아니, 들려와서는 안 될 음성이 들려왔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언제 열렸는지 모를 응접실 문 너머로 아빠와 집사가 보였다.
깜짝 놀란 나는 주저 없이 카드릭을 밀치고 일어났다.
“아, 아빠? 언제 오셨어요?”
대체 언제 들어온 거지? 어디부터 보고 들었을까?
나는 괜히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나 왠지 잘못한 느낌이 들었으므로.
“황궁에서 사람이 온다는 얘긴 들었지만, 그게 황태자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이제 아셨으니 된 거 아닌가요?”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쟤는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오금이 다 저릴 정도인데.
아빠가 싸늘한 시선으로 카드릭의 손에 들린 반지를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글레시아의 불꽃이로군. 그건 왜 들고 왔지?”
“베리한테 주려고요.”
저, 저! 미친놈이!
절로 험한 말이 나오려고 한다. 설마하니 아빠한테까지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줄은!
순간, 아빠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소용없는 짓을 하는군.”
“그건 해봐야 아는 거죠.”
“그것도 기회가 있을 때나 아닌가? 내 딸은 혼약자가 있으니 쓸데없는 짓이지.”
“혼약자요?”
“네?”
“예?”
카드릭을 비롯해 나와 집사가 놀란 얼굴로 아빠를 쳐다봤다.
―에엥? 베리한테 결혼할 사람이 있었어?
그러게. 나도 처음 듣는 얘기인데?
“조금 전 실베스터 공작가에서 직인을 찍고 왔다. 조만간 의회를 통해 공표될 예정이고.”
“실베스터 공작가요……?”
저번에 약혼하겠다고 말했을 땐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더니 어째서 마음을 바꾸셨지?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백부님.”
“정말 농담 같나?”
진지한 아빠의 말에 내내 여유롭던 카드릭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왜 실베스터입니까?”
“그 집안 아들이 내 딸이 좋아 죽겠으니 제발 해달라고 애걸하더군. 그래서 허락해줬다.”
“……?”
누가 날 좋아해? 제발 해달라고 애걸했다고? 그 미하엘 경이?
혹시 실베스터 가문에 자식이 더 있었나? 아닌데, 분명 그쪽도 외동이랬는데.
내가 아는 ‘미하엘 실베스터’와 아빠가 설명한 말이 전혀 일치하지 않아 혼란스럽다.
“그럴 리가요. 미하엘 실베스터가?”
카드릭도 아빠의 말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하긴, 카드릭도 평소 미하엘 경을 봤으니 내 감상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
“그래서? 내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나?”
“만약 백부님의 말씀이 사실이라 해도 황실에서 인가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델러노에게 물어봐야 알 일이지. 또한, 결혼이면 몰라도 겨우 약혼에 황실의 인가는 필요하지 않지.”
“그 말씀대로라면 제게도 기회는 남아 있다는 거네요. 겨우 약혼 따위니까.”
도발과 다름없는 말에 아빠가 서늘히 웃었다.
“내가 언제까지고 침입자에게 아량을 베풀 거라 여기는 건가?”
“보통 참아야 하는 걸 아량이라고 표현하진 않죠.”
“잠깐! 잠깐만요!”
늘 그랬듯, 험악해지려는 분위기에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빠, 실베스터 가문과 약혼해도 되는 거예요? 전 대공령으로 내려가잖아요?”
“말하는 걸 잊었군. 내려가지 말고 수도에 남아라.”
수도에 남으라고? 갑자기?
절대 안 된다던 약혼을 허락한 것도, 수도에 남으라는 것도 전부 이해가 안 된다.
‘어째서 마음을 바꾸신 거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낌새가 전혀 없었잖아?’
내겐 달가운 일이어도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의아함을 숨기긴 어려웠다.
게다가 약혼을 허락한 이유도 터무니없다.
미하엘 경이 날 좋아한다는 이유로 허락했다고? 그동안 절대 안 된다며 반대하던걸?
“그럼 이 마수는 제가 다시 데려가겠습니다.”
카드릭이 룩스를 들며 말했다.
―뭐어? 룩스를 다시 데려간다고? 왜?
슈가가 펄쩍펄쩍 뛰며 화냈지만, 카드릭에게 닿을 리 없었다.
“부황 폐하께서는 베리가 대공령으로 떠날 때 마수를 전달하라고 명하셨으니까요.”
―진정해, 누님. 난 괜찮아!
―뭐가 괜찮아, 바보야!
룩스가 씩씩하게 말하기 무섭게 슈가가 버럭 외쳤다.
―또 만나면 되지! 누님이랑 베리 만나서 좋았어! 그리고 의외로 떨어져 있는 것도 괜찮던걸? 이 인간이 잘 챙겨줘!
―뭐? 지금 우리랑 떨어져서 지내는 게 좋았단 거야?
―아니이이이! 그게 아니라!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수도에 남게 되는 건 다행이지만, 룩스와 또 떨어져야 한다고 하니 룩스한테 미안함부터 앞섰다.
그렇다고 카드릭한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가 말한 ‘도움’이란, 조금 전 일의 연장선일 테니까.
다행히 아빠의 난입으로 무산됐지만 역시 그건 아니었다.
게다가 아빠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도 물어야 하고.
그러니 일단은 룩스를 데려가게 내버려 두고 아빠와 다시 얘기해야겠다.
‘미안해, 룩스. 금방 데리러 갈게.’
―나 진짜 괜찮아!
“걱정하지 마. 네 마수는 내가 잘 돌볼 테니까.”
카드릭이 내게 가까이 와 속삭이듯 말했다.
“보고 싶을 땐 내 궁으로 놀러 와도 좋고. 언제든 볼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그러고는 카드릭은 아빠를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백부님.”
카드릭이 룩스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가자 집사 역시 그를 배웅하겠다며 따라 나갔다.
응접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나는 아빠에게 붙잡고 물었다.
“진짜예요? 실베스터 가문과 약혼했어요?”
“너도 그 녀석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군.”
“갑자기 그러셔서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내가 수도에 남는 것도.
내 말에 아빠는 나를 보지 않고 무심히 툭 내뱉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 알아라.”
* * *
실베스터 공작은 잉크가 덜 마른 아시드의 서명과 벨로크 가의 직인이 찍힌 종이를 보며 탁자를 툭툭 건드렸다.
벨로크 가문과 실베스터 가문의 화합을 증명하는 약혼서였다.
약혼서를 보던 실베스터 공작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가 앉은 소파 뒤에 서 있을 미하엘에게 물었다.
“네 짓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