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122)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122화(122/125)
#122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다.
‘대체 언제 온 거지?’
다른 사람이 올까 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상태였건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나는 미친 듯이 요동치는 고동을 애써 무시하며 침착하게 굴었다.
“액자가 예뻐서요. 함부로 만져서 죄송해요.”
“…….”
“그보다 손 좀 놓……!”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미하엘 경의 손이 미끄러지더니 그의 몸도 함께 무너졌다.
나 역시 갑자기 덮쳐온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쿵!
요란한 소리만큼이나 얼얼한 통증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온다.
하지만 아픔보다 당혹이 더 앞섰다.
미하엘 경이 내 어깨 위에 제 얼굴을 파묻었으니까!
낯선 숨결과 체온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내가 반사적으로 밀쳐내려는 낌새를 읽은 것일까.
“잠, 깐만.”
“…….”
“잠시만, 이렇게 있어.”
다소 힘없지만 어쩐지 애절한 읊조림에 내 손이 멈칫했다.
뺨에 닿는 금색 머리카락이 조금 축축하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식은땀에 젖은 채 찡그린 얼굴이 보인다.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이 고통에 물들어 있다.
“어디 아파요? 혹시 다쳤어요?”
“…….”
“치료사를 불러올게요.”
조심조심 일어나려는데 그가 내 손을 붙들었다.
“가지 마.”
“하지만 치료사를 부르는 게 좋을 거예요.”
“소용없어. 그냥, 이렇게 있어. 있으면, 괜찮아지니까.”
가만히 있으면 나을 리가.
이성으로는 치료사를 불러와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안쓰러울 정도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처럼 내 손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모습에 휩쓸려 그가 당긴 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뱉어지는 가쁜 숨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가 내게 점점 기대어 올 때마다 내 몸도 움찔움찔 떨렸다.
‘역시 치료사를 부르는 게 좋겠어.’
결심한 내가 이번에야말로 단호하게 일어나려던 때였다.
미하엘 경이 내 손을 놓아주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좋아 보이진 않지만, 숨소리도 안정적이고 혈색보다 아까보단 나아 보인다.
“이제 괜찮…… 윽.”
순간 머리가 핑그르르 돈다.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살을 찡그린 채 가만히 있던 때였다.
“공녀? 괜찮습니까?”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 아닌가? 게다가 왜 저렇게 놀란 얼굴이야?
그때였다. 코 밑으로 무언가 흐르더니 치마 위로 떨어진 건.
어라? 왜 피가…….
손으로 코와 입가를 덮은 나는 멋쩍게 웃었다.
“괜찮아요. 금방 멎을걸요.”
내 말과 달리 뚝, 뚜욱,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피가 후두두 떨어졌다. 손 틈새로 피가 새어 흐를 만큼.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아, 야 하는데……. 왜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지?
일어나기 위해 바닥을 짚으려 했으나 몸에 힘이 쭉 풀리더니 시야가 점멸했다.
* * *
“공녀!”
미하엘은 풀썩 쓰러지려는 베로니카의 허리를 받쳐 들었다.
의식을 잃은 소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힘없이 떨어진 베로니카의 손바닥이 피범벅이다.
피 흘리는 사람을 처음 보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익숙한 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온몸이 차게 식는 듯한지 모르겠다.
미하엘이 잠시 넋 놓은 사이 모퉁이에 숨어 있던 힐다가 나와 베로니카를 살폈다.
“잠시 기절한 것뿐, 심각한 건 아닌 것 같…… 도련님?”
미하엘은 베로니카를 품에 안은 채 일어났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힐다에게 말했다.
“내 방으로 치료사를 불러와.”
“예? 치료사까지는 필요 없을 듯합니다만.”
게다가 어디라고?
힐다는 제 귀를 의심했다.
“공녀가 쓰러졌는데 치료사도 베풀지 않겠다는 거야?”
“그건…….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의 방으로 공녀를 데려가는 건 아닌 듯합니다. 객실을 이용하시지요.”
“힐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경고의 의미가 가득 담긴.
평범한 사람이라면 무디게 넘길 수도 있지만 예민한 감을 가진 그녀는 미하엘의 살기를 알아차렸다.
“내 방으로 치료사를 불러와.”
“예, 도련님.”
힐다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 * *
미하엘은 의식이 없는 베로니카를 내려다봤다. 공작가의 주치의가 내린 결과 역시 힐다와 다르지 않았다.
단순한 기절.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베로니카를 살피면 당연히 그렇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미하엘만큼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나 때문이다.’
모를 수가 없다.
그 짧은 순간, 조금 접촉하고 있던 것만으로도 몇 주에 가깝게 내내 그를 괴롭히던 이명과 고통이 사그라들었으니.
베로니카는 잘 모르는 모양이나 제 고통이 나아진 만큼 무리 갔을 테다.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베로니카가 갑자기 방문하고 싶다고 서신을 보내왔을 때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챘다.
설마하니 저가 오기 전에 고대 무기를 보관하는 비밀 통로를 찾아낸 것도 모자라 열려고 들 줄은 몰랐지만.
그런 베로니카의 뒤를 노리던 힐다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그렇게 생각 없이 움직인 결과가 이 꼴이다.
갑자기 통증이 발발하고, 앞에 있는 베로니카가 구원이라도 되듯 붙잡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세르니 광산 매입 일 때문에 멀리 가셔서 다행이네.’
만약 실베스터 공작이 이 꼴을 봤다면 베로니카에게도 세뇌를 걸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베로니카한테는 제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도련님.”
주치의를 배웅하고 돌아온 힐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연신 ‘뺙뺙!’하고 우는 슈가가 들려 있었다.
“밖에 얼쩡거리던 걸 잡았습니다. 이 리본을 보니 공녀님의 다람쥐인 듯합니다만.”
힐다가 슈가의 목에 매인 리본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녀가 처음 방문했을 때 다람쥐는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몰래 데리고 온 모양인데 뭔가 알아내려고 작정하고 공작저를 방문한 게 분명합니다.”
“…….”
“공녀에게 이능을 쓰시지요. 내버려 두면 위험 요소가 될 겁니다.”
“힐다.”
“예, 도련님.”
“공녀는 산책하다가 갑자기 쓰러진 거야.”
“예?”
영문 모를 소리에 힐다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미하엘의 황금빛 눈과 마주한 그녀는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았다.
그러나 자각과 동시에 미하엘의 능력에 걸려든 그녀는 곧 그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대신 미하엘이 새로 채워 넣은 내용만 남았을 뿐.
“이만 나가. 그 다람쥐도 놓아주고.”
“……네.”
힐다가 슈가를 베로니카의 옆에 내려놓고 나갔다.
곧바로 베로니카에게 달려갈 줄 알았던 것과 달리 슈가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미하엘을 응시했다.
‘경계하는 건가.’
꼭 제 주인 같다. 하찮으면서도 경계심 깊은 게.
“안심해. 아무 위해도 끼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못 알아듣겠지만.
미하엘은 슈가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베로니카를 바라봤다.
힐다가 한 말이 떠오른다.
‘내버려 두면 위험 요소가 될 겁니다.’
맞는 말이다. 베로니카의 존재는 제게 해로우면 해로웠지, 이로운 존재는 아니었으므로.
베로니카와 엮인 이래로 저답지 않은 짓을 몇 번이나 저질렀던가.
‘다 아는데.’
베로니카를 곁에 둔 건 자신이었다.
다치질 않길 바라니까. 안전했으면 좋겠으니까. 제 곁에 둬야 그나마 안전할 테니까.
동시에 완전히 망가뜨려 없애버리고 싶기도 했다. 자꾸만 저답지 않게 만드는 베로니카가 거슬린다. 지독하게도.
‘차라리 없애 버릴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손을 뻗어 저 가느다란 목을 꺾어 버리면 분명 편해질 테지.
베로니카를 보고 떠올릴 때마다 수십 번도 더 한 생각이다. 하지만 결론은 늘 같았다.
‘할 수 있을 리 없지.’
그럴 수 있었다면 진즉 없앴을 것이다. 이 꼴이 되기 전에, 진작에.
자신이 빠진 수렁에 베로니카까지 끌어당기고 있다는 걸 알지만 놓을 수 없다.
‘아니, 놓고 싶지 않아.’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이렇게.
전부 삼켜지기 전에 너만큼은 보내줄 테니.
* * *
―베리이이이!
눈을 뜨기도 전에 따뜻한 무언가가 내 얼굴을 덮쳤다. 어쩐지 조금 축축한 것 같기도 한데…….
털 뭉치를 떼어내 자세히 살핀 나는 떨떠름히 입을 열었다.
“슈가?”
얘가 왜 울고 있지?
―왜 이제 일어나! 내가 얼마나, 얼마나 놀랐는데!
맞다, 나 쓰러졌지.
“미안해. 걱정했어?”
―당연한걸! 느낌이 이상해서 왔더니 일어나지도 않고! 내가 얼마나! 얼마나!
그러고 보니 용케 날 찾아왔네. 정작 나는 슈가를 찾지도 못했는데 말이지.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슈가를 달래 주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바로 옆에 있던 미하엘 경과 눈이 마주쳤다.
어라? 이 남자가 왜 있지? 아, 맞다. 쓰러질 때 같이 있었구나. 옆에 있는 걸 보니 금방 깼나 보네.
“……많이 지쳐서 그런 거라더군요.”
미하엘 경이 입을 열었다.
“약혼식이 급히 진행되어 피로가 쌓였나 봅니다.”
―아니야! 저 인간 때문이야! 분명 여기 막 왔을 때만 해도 깨끗했는데, 지금은 저 인간한테서 풍기는 기운이 네게 잔뜩 묻어 있다고!
‘알아. 그리고 난 괜찮으니까 진정해.’
나는 방방 날뛰는 슈가를 소중히 감싸 안았다.
어느 정도는 짐작한 바였다. 약혼식을 서두르느라 바쁘긴 했어도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만약 쓰러진다면 내 드레스를 만들며 고생할 의상점의 직원이나 다른 사용인들이지,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게다가 미하엘 경과 만날 때마다 이명이 들리더니 오늘은 끝내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랬는데도 이상하다는 걸 눈치 못 챌 리 없지 않나.
‘게다가 슈가까지 확인해 줬고 말이야. 미하엘 경 때문인 게 확실한데.’
문제는 그에게 내가 알고 있다고 티 낼 수 없다는 것.
고민 끝에 나는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제가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겠네요. 죄송해요.”
“…….”
무어라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건만, 미하엘 경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피하려던 찰나였다.
“공녀.”
“네?”
“이 이상으로 알아내려고 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