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123)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123화(123/125)
#123
“경이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알아내려 하지 말라니요?”
“알잖습니까.”
“…….”
“내가 뭘 말하는지.”
마치 내 속내를 꿰뚫어 본 듯한 시선이자 말투였다.
‘들켰다는 게 맞으려나.’
그렇지 않고야 내가 액자의 비밀통로를 열려던 때 찾아와 내 손을 잡았을 리 없지.
모른 척했으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미하엘 경의 시선을 피하며 몸을 일으켰다.
“신세를 많이 졌네요.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시각이 늦었으니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마차를 타고 왔는걸요.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
“대공가의 마차라면 전령 겸 이미 돌려보냈습니다.”
“그걸 왜 경의 마음대로……!”
“언제 깰지 모르는 데다 늦게까지 소식이 없으면 걱정할 테니까요.”
침착한 대꾸에 말문이 막혔다. 맞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아빠나 다른 하녀들이 걱정하고 있을 테다.
“그럼 마차와 마부만 빌려주세요. 경께서 굳이 함께하실 필요는 없어요.”
“약혼자로서, 약혼녀가 쓰러졌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땐 그다지 실감 안 났는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약혼녀라는 그 단어 하나에 말이다.
이런 감정에 물들 때가 아닌데, 멀리해야 하는데…….
이래서 그가 날 사랑한다고 거짓말하는 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이성적인 사고를 계속 배반하려 하니까.
결국 나는 미하엘 경을 뒤따라 일어났다.
나오며 창을 보는데 하늘이 새까맸다. 잠시간 기절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간이 꽤 흘러 있어 나는 퍽 당황했다.
‘설마 계속…….’
옆에 있었던 걸까?
―맞아! 저 인간 계속 네 옆에 있었어! 가까이 있지 말라고 소리 냈는데도 꼼짝 안 하던 거 있지!
그럴 리 없다고 속단하려던 찰나 들려온 슈가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어째서?’
단지 연기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을 텐데? 이것조차 철저한 계획 중 하나인 걸까?
다른 사람이라면 진심이라고 믿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미하엘 실베스터’인 이상 그럴 수 없다.
나는 그의 진면모를 알고 있으니까.
왜 자꾸만 예상외의 행보를 보이는진 모르겠지만.
***
미하엘 경은 날 대공가에 데려다준 뒤 바로 돌아갔다.
“약혼식 때 뵙겠습니다.”
저 한마디 말만 남기고.
겉으로는 정중하나 속은 경고일 테다. 그전까지는 보지도, 실베스터 공작가에 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경고.
‘포기해야 하나?’
미하엘 경이 알아차린 이상 쉽지 않을 게 분명해서, 나는 잔뜩 고민하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집사가 날 반겼다.
“오셨군요, 아가씨. 늦으셔서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혹시 연락 못 받았어? 실베스터 공작가에서 마차를 돌려보냈다던데.”
“받았습니다만, 그래도 걱정되는 것이 늙은이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혼자 오신 겁니까?”
“미하엘 경이 데려다줬어.”
“실베스터 공자님 말씀이시군요. 공자님께서는…….”
“바로 돌아갔어.”
“그렇군요. 그나저나 몸은 괜찮으십니까? 제가 신경 썼어야 했는데 미흡했습니다.”
“으응, 괜찮아. 별거 아니라는 데다 지금은 멀쩡한걸.”
나는 “봐봐.”라고 말하며 괜히 과장되게 움직였다.
“원래 멀쩡하다 갑자기 쓰러지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당분간 요한나에게 신경 쓰라고 하겠습니다.”
“알았어. 그런데 아빠는 어디 계셔?”
솔직히 아빠도 걱정했을 줄 알았는데 안 보여 괜히 기웃거리던 때였다.
“전하께서는 황실로부터 전언을 받고 외출하셨습니다.”
“황제 폐하를 뵈러 간 거야?”
“그렇지요.”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아빠를 불렀구나.
“아무리 폐하라 해도 아가씨의 약혼식에 불참하게 만들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런 걱정을 한 게 아닌데.
하고 싶은 말이 꽤 있었지만, 어서 방으로 올라가 쉬라는 집사의 떠밂에 나는 걸음을 옮겼다.
***
바닥 곳곳에 움푹 팬 홈을 따라 검붉은 피가 흥건히 고이며 흘러내린다.
‘……끝났나.’
아시드는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불새를 소환하지 않아도 마법을 쓸 때마다 두통이 일어나며 이명이 끊이질 않았다.
늘 그를 괴롭히는 환영의 호소 역시 더욱 심해져만 갔다.
마력 진정제라도 있으면 나을 텐데 진즉 떨어졌다.
진정제 없이 버틴 몸이 슬슬 한계에 달했다. 다행이라면 이성을 완전히 놓기 전에 일이 끝났다는 것일까.
아마 이 역시 계산한 것일 테다. 제 동생인 델러노는 늘 이런 식으로 그를 괴롭혔으니.
‘베로니카…….’
베로니카의 약혼식에 가야 하는데 며칠이나 지났지? 이미 끝났나? 아니면…….
그에게 달라붙는 환영의 속삭임들에 생각이 점점 흩어진다.
정신이랄 게 없는 와중에도 아시드는 착실히 황궁으로 돌아갔다. 학습된 개 같은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아시드가 피 칠갑으로 황궁에 나타나자 그를 본 이들이 죄다 기겁하며 피했다.
그중 일부는 기절하거나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딸꾹질을 억누르느라 바빴다.
‘대공이 또…….’
‘대체 황제 폐하께서는 저런 살인귀를 왜 감싸시는지……. 아무리 형제라지만…….’
혹여나 아시드가 들을까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은 한마디씩 수군덕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 수군거림과 그를 늘 진득하게 괴롭히는 환영의 저주들이 뒤섞여 더욱 시야가 어지럽다.
다 놓아버리고 싶다. 그렇다면 좀 더 편해질 텐데.
위태로이 걷던 아시드는 황제의 집무실에 가까워지자 끝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듯 몸으로 문을 밀쳤다.
쿵!
피범벅으로 갑작스레 들이닥친 아시드의 모습에 놀랄 법도 하건만, 델러노는 아무렇지 않게 서류를 정리하며 대꾸했다.
“오셨군요, 형님.”
이내 엉망진창인 꼴을 보고 난처한 듯 웃었지만.
“이런. 꼴이 말이 아니시네요. 그래도 옷매무새는 정돈하고 오지 그러셨습니까. 벌써 문에 자국이 생겼네요.”
델러노가 아시드에게 눈총을 줬다.
아시드가 몸을 기댄 문과 벽에 검붉은 핏자국이 길게 번져 있었다.
하필 묻은 게 피인 만큼 잘 지워지지 않을 터였다.
마법으로 지우면 그만이나 그가 할 일은 아니었다. 내버려 둬도 대신 청소할 이가 많은데 구태여 자신이 할 필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맡긴 일은 잘 끝내셨습니까?”
아시드는 대답하는 대신 성큼성큼 걸어가 책상 위에 반지를 내려놓았다.
“칼란데 백작가, 바할 상단, 솔베 남작가……. 다 있군요.”
피로 얼룩진 반지에 새겨진 인장을 헤아린 델러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형님이시네요. 잘 처리해주실 거라 믿었어요.”
흐린 시야로 바닥만 노려보던 아시드가 힘겹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진정제…….”
“아, 그렇지요.”
델러노가 서랍에서 약병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는 척하다 가볍게 굴렸다. 동그란 유리병이 책상을 매끄럽게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융단 위에 떨어져 깨지진 않았지만.
“손에 힘이 풀렸네요. 죄송합니다. 형님 쪽에 가까우니 주워주시겠습니까?”
손짓 한 번이면 그의 손에 쥐여줄 수 있으면서 굳이 주워달라 하는 심보가 투명하다.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조차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걸 뻔히 알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봐야겠다는 것일 테다.
델러노의 만행이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이런 굴욕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분할 뿐.
아시드는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집었다.
그러나 끝내 주워 들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졌다.
“괜찮으십니까?”
“괜찮, 다.”
“안색이 안 좋긴 하네요. 곧 조카님의 약혼식에 나서야 할 텐데 이렇게 안색이 안 좋아서야……. 어쩔 수 없네요.”
쯧, 가볍게 혀를 차며 일어난 델러노가 아시드를 눈높이를 마주 보며 앉았다.
“오랜만에 도와드려야겠군요.”
사실 조금 전부터 저것들도 거슬리고.
델러노가 혼자 읊조리며 아시드로부터 피어나 허공으로 흩어지는 검은 일렁임을 응시했다.
아시드를 부리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상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하고 불쾌한 까닭에 알아볼까 말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결국 호기심이 이겼다.
델러노가 아시드의 어깨를 잡고 마력을 흘려보낸 순간이었다. 검은 일렁임이 반응을 보이더니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뭐지?’
당황한 그가 바로 마력을 거뒀으나 일렁임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덩어리로 몸집을 불린 것이 아시드를 타고 델러노에게까지 달라붙었다.
“이게 대체, 큭!”
마법으로 떨쳐내려 했으나 역으로 마력이 튕겨 나왔다.
‘마법으로 안 된다면…….’
역류한 마력에 피를 토하면서도 델러노는 침착하게 제 불새를 소환했다.
‘태워.’
주인의 의지를 알아들은 불새가 덩어리를 향해 불길을 내뿜었다.
이번에는 떨쳐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것과 달리 덩어리들은 오히려 불길을 먹고 더욱더 커졌다.
마구잡이로 엉겨 붙으며 커진 검은 덩어리는 불새에게까지 달라붙었다.
아무리 실체화시켰다고 해도 본질은 소환수인 만큼 불새에게는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마법이든, 물리적인 힘이든.
그런데 이 덩어리는 정체가 무엇이기에 불새한테까지 달라붙는 거지?
―주인이여, 이건……!
당황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불새 또한 엉겨 붙는 검은 덩어리에 당혹감을 비췄다.
델러노는 저와 마찬가지로 검은 덩어리에 먹혀가는 아시드를 쳐다봤다.
자신과 달리 아시드는 의식을 놓은 건지 멍한 얼굴로 저항 없이 먹히고 있었다.
‘도대체 뭘 건드린 겁니까, 형님.’
델러노의 상념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잠식한 검은 덩어리가 이내 주변을 전부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