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2)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2화(2/125)
#2
말롱 부인이 자고 일어나자마자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새벽 중에 물을 길어 갖다 놓으라고 한 일을 자느라 못했을 뿐이었다.
당시 나는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였다.
게다가 고된 노동에 시달려 바닥에 머리를 대면 잠들기 일쑤였다.
그런 내가 새벽에 일어나 그런 일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작 그뿐이었는데.
“내가 떠들어 봤자 넌 못 알아듣겠지만.”
“…….”
“네가 잘못하면 네게 소중한 사람이 다친다는 걸 알아야 일을 잘하겠지.”
말롱 부인이 마리 언니와 나를 앞에 두고 말했다.
“애니, 나는 이유 없이 자애를 베풀지 않는단다. 그리고…….”
“…….”
“너 같은 애들을 효과적으로 움직이는 건 죄책감을 이용하는 거지.”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왜 내가 잘못한 일에 마리 언니까지 불렀는지 몰랐다.
말롱 부인이 내가 보는 앞에서 언니를 험하게 대하기 전까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순간도 끝은 있었다.
쓰러진 마리 언니를 받치고 있는 내게 말롱 부인이 다가왔다.
“명심하렴, 애니. 네가 실수하고 잘못하면 그 벌은 저 애가 받게 될 거란다.”
상냥한 척 가증스레 웃는 그 얼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다행히 마리 언니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언니의 앞에서 우는 날 보며 괜찮다고 말해 주기까지 했다. 정작 모든 걸 본 나는 하나도 안 괜찮았는데.
어린 나이에 각인된 그 경험은 나를 말롱 부인의 충실한 종으로 만들었다.
나는 말롱 부인의 하녀로서 그녀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했다.
잡일을 비롯해 장부 조작이며, 은밀히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등.
문제는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실수할 때가 있다는 거였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도 있었고.
말롱 부인의 남편인 말롱 자작은 장인인 셰인트 백작의 대리인으로서 암흑 시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롱 부인도 암흑 시장을 옹호하는 부류였다. 당연히 나도 그에 연관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봤자 말롱 부인이 하는 걸 옆에서 지켜본다든가, 손님을 맞이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모르는 척해 줘, 제발!”
아주 가끔 도망치던 아이와 마주치는 때가 있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말롱 부인에게 일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애는 나와 같은 보육원에 있었던 아이였다. 안면 있는 애의 외침은 절실했고, 나는 차마 그 애를 붙들 수 없었다.
그러나 보람이 없게도, 그 애는 반대편에서 달려온 병사에게 붙잡혔다.
병사는 망설임 없이 나를 고발했다.
말롱 부인은 나와 마리 언니를 불러 놓고 내게 웃으며 물었다.
“애니, 네가 그 아이를 못 본 척해 줬다고 들었는데.”
“자, 잘모, 자모해떠요. 제발, 제발…….”
당시 나는 내가 어떤 발음으로 말하는지 몰랐지만, 필사적으로 말롱 부인에게 빌었다.
잘못했다고.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네가 잘못하면 저 애가 대신 피해를 보게 될 거라고.”
그러나 말롱 부인은 단호했다.
내 작은 동정심에서 유발된 행동의 대가는 고스란히 마리 언니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 일은, 언니에게 치명적이었다. 치료사조차 가망이 없다고 혀를 내두르며 나갔으니까.
나는 열이 펄펄 들끓는 언니를 잡고 훌쩍이며 빌었다.
미안하다고, 같은 보육원 아이라 도저히 일러바칠 수 없었다고.
―괜찮아, 애니.
마리 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손짓했다.
―잘했어.
뭐가 잘했다는 걸까.
―네 탓이 아닌걸. 넌 착한 아이야.
아니야, 내 잘못이야.
그날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마리 언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독해지겠다고.
이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하지만 내게 ‘다음’은 주어지지 않았다.
마리 언니는 며칠 못 가 죽었다.
영양 상태가 안 좋아 유약해진 탓에 몸이 견디지 못했다나.
제발 살아 달라고, 나만 두고 가지 말라고 빌었는데도 언니는 내 곁을 떠났다.
그 뒤에도 나는 여전히 말롱 부인의 충실한 종이었다.
뜻대로 길들어진 건지, 아니면 내가 원래 이 모양이었던 건지.
차마 말롱 부인을 거역할 생각이 안 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도와…… 악!”
“이 자식이! 감히 도망을 쳐?”
내게 도움을 청했던 남자애를 외면함으로써 그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그래서 이번에는 그걸…….”
“아주 큰 거래가 될…….”
불법 사업과 관련된 대화를 은밀히 나누는 사람들을 못 본 척하고, 말롱 부인이 시키는 대로 한 것도.
모두 거기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말롱 부인은 이런 내 모습을 기꺼워했다.
어느덧 나는 그녀의 믿음직한 하녀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열여덟 살.
“이제 너도 성인이니 황궁에 출입할 수 있겠구나. 이번 황태자의 성인식에 널 데려가야겠다.”
난생처음 가게 된 황궁이었지만, 설렌다거나 기쁜 건 없었다. 실제 황궁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말롱 부인의 수발을 들기 바빴다.
가장 화려할 연회장에는 발도 못 들여 봤다.
“연회장 안에는 개인 하녀와 하인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애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렴.”
고개를 숙인 나는 다른 하녀들 사이에서 쉬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말롱 부인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날 찾아왔다.
이리 오라며 내게 손짓하는 말롱 부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비열한 인상의 중년 남자와 함께였다.
‘소르겐 백작.’
나는 한눈에 남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저택에 찾아온 그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횟수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는데도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날 보던 눈빛이 소름 끼칠 정도로 음흉해서.
만날 때마다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혀를 핥던 모습이 쉽게 잊힐 리가.
“애니,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단다.”
그 말에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아닐 거라 애써 부정했지만, 이어 들려온 말에 내 희망은 산산이 조각났다.
“소르겐 백작님께서 네가 필요하다고 하시는구나.”
말롱 부인은 소르겐 백작을 힐끔거리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내게 왼손 검지를 뉘어 보여 줬다.
무조건 따르라는 그녀의 신호였다.
“내가 평소 백작님께 신세 진 게 많아서 말이야. 불편함 없도록 잘 모셔야 한다. 알겠니?”
“고맙네. 부인이 보여 준 성의는 기억하지.”
“무얼요. 제 하녀가 백작님께 즐거움을 드리길 바랄 뿐이랍니다. 그럼 전 이만.”
말을 마친 말롱 부인은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에 있던 하녀들이 동정 어린 얼굴로 날 바라봤다.
“우리도 가자.”
소르겐 백작이 내 손목을 휙 잡아당겼다.
‘끌려가면 안 돼!’
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소르겐 백작의 손힘이 생각보다 억세었던 것도 있지만, 이제 와 말롱 부인의 뜻을 거스르기란 어려웠다. 늘 복종해 왔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몸에 잔뜩 힘을 줘 끌려가는 시간을 최대한 끄는 것뿐이었다.
이런 내 행동에 백작은 조금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그는 복도를 걷다 말고 날 확 밀쳐 내동댕이쳤다.
“오냐, 꼭 객실로 들어가야 한다는 법은 없지.”
“으…….”
벽에 부딪친 어깨가 아파 감싸자마자 백작이 정장 재킷을 벗었다.
‘도망쳐야 해.’
후환이나 이런저런 걱정은 들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 생각뿐.
비틀대며 일어나기 무섭게 백작이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어딜!”
“악!”
나는 다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백작이 저열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오던 때였다.
쿠구궁-
진동이 울렸다. 당장 황궁이 폭삭 내려앉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거센 진동이었다.
“뭐, 뭐야?”
소르겐 백작도 당황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또다시 진동이 울린다.
고개를 들자 당장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천장이 크게 갈라져 있었다.
당황한 백작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지금이 도망칠 기회임을 느꼈다.
‘이때야!’
있는 힘껏 백작을 밀치자 그대로 뒤로 넘어간다.
벌떡 일어난 내가 뛰려던 때였다. 방금까지 내가 앉아 있던 벽에 큰 폭발이 일더니 우르르 무너졌다.
“이, 계집…… 컥!”
벽의 파편이 그대로 백작을 집어삼켰다.
불에 탈 게 없어 보이는데도 화염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올랐다.
타오르는 불꽃과 무너진 돌무더기 밖으로 유일하게 삐져나온 것은 백작의 손뿐이었다.
내가 굳어 있는 동안 뻥 뚫린 건너편에서 처음 보는 남자가 화염을 뚫고 걸어 나왔다.
많이 봐 줘야 30대 초반처럼 보이는 남자는 제 머리색처럼 새까만 정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힘없이 늘어진 한쪽 소매가 망토처럼 펄럭 휘날렸다.
‘……외팔?’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왜소해 보이진 않았다.
남자 자체에서 느껴지는 위압감도 위압감이었지만, 가까워질수록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겨 더욱 그랬다.
게다가 그 옆을 날아다니는 커다란 붉은 새는 흡사 불꽃 덩어리처럼 보였는데, 그 때문에 묘한 이질감마저 들었다.
―죽여! 죽여! 죽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울림이 시끄럽게 내 머릿속을 마구마구 두들겼다.
‘이게, 뭐야……?’
처음 겪어 보는 현상에 혼이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뻣뻣하게 굳어만 있는데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남자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의 옷을 물들인 피처럼 붉은색 눈동자는 완전히 미쳐 버린 자의 것이었다.
‘날 죽일 거야.’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죽여! 죽여!
머릿속의 울림에 맞춰 남자도 서서히 팔을 들었다.
정확히 날 가리키는 손을 보며 질끈 눈을 감으려던 때였다.
“윽!”
무언가 내 머리를 퍽 내리쳤다. 시야가 뒤흔들리며 흐려졌다.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머리가 축축하게 젖는 느낌이 든다.
몇 번 눈을 깜빡인 끝에 나는 내가 바닥에 깔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전에 내 머리를 때린 게 천장에서 떨어진 파편이란 것도.
머리에서 흐른 피가 바닥을 적신다.
‘아파…….’
깔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도 무너진 파편에 깔려 있었다. 게다가 정신을 잃은 건지 눈을 감고 꿈쩍도 안 했다.
문득 찾아온, 익숙한 고요함에 나는 내내 남자의 주변을 돌던 붉은 새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납게 울부짖어 날 놀라게 만들던 현상도 더는 없다.
바닥에 옅은 진동이 울린다.
곧 우리를 향해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중 로브를 입은 여자가 쓰러진 남자를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찾았습니다! 반역자, 벨로크 대공이 맞습니다!”
벨로크, 대공……? 저 남자가?
그런데 왜 대공을 반역자라고 하는 거지?
여자의 입 모양을 읽은 나는 멍하니 되뇌었다.
곧이어 고급스러운 구두코가 보인다.
시선을 살짝 들어 보니 소년과 청년의 경계쯤에 있는 금발의 남자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