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28)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28화(28/125)
#28
‘싱거워?’
말롱 부인은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자신과 가문의 안위가 걸린 일이었다.
그게 싱겁다니!
비록 고통을 못 이겨 나불나불 불어 버렸으나 그녀에게는 ‘귀족’으로서의 자긍심이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라 해도 자신은 귀족이거늘, 이토록 버러지만도 못한 취급이라니!
그것도 평민 고아 출신의 계집애 때문에!
말롱 부인은 카드릭을 노려봤다.
막상 카드릭이 그녀를 쳐다봤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그런 그녀를 보며 카드릭이 해사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불새에게 그녀를 태우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던 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에 말롱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카드릭을 올려다봤다.
“살고 싶지?”
“예, 예?”
“그러니 내게 이렇게 털어놨겠지. 그렇지?”
묻는 어투조차 화사한 미소처럼 실로 상냥했다.
하지만 지금껏 겪은 일을 통해 황태자의 말 속에 칼이 품어져 있음을 알고 있는 그녀는 대답하길 머뭇거렸다.
살고 싶냐고? 당연하다.
그러나 이 미친 황태자가 자신을 살려 줄까?
삶을 바라는 것과 별개로 상대의 순순한 태도가 도리어 의심되었다.
그녀의 의심에 답을 주듯 카드릭이 말했다.
“살려 줄게.”
“……!”
동시에 주위를 가득 에워싸고 있던 불길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자작 부인이 도망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게 만든 불길이었다.
‘사, 살려 준다고?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자작 부인이 놀라 카드릭을 올려다봤다.
‘내가 오해했던 걸까? 분명, 날 살려 주려는 얼굴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흘러도 카드릭이 불새를 불러내기는커녕 정말 제 말을 지킬 것처럼 돌아섰다.
그 뒷모습에 말롱 자작 부인은 안도하며 그대로 혼절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전하!”라고 부르며 달려오는 황실 근위병들을 보지 못한 채로.
한편, 말롱 부인을 바닥에 버려둔 채 돌아선 카드릭은 그녀로부터 거둔 목걸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벨로크 대공의 딸이라…….”
조금 전 말롱 부인이 자신의 범행 이유를 실토하면서 알게 된 여자아이의 정체였다.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어느 가문의 딸인지 알았으니 이름 정도는 알아내기 쉬우리라.
“벨로크 대공의 딸.”
되뇌고 나니 어느 봄날에 흐드러지게 필 것 같은 꽃잎처럼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에 이어 아까 본 동글동글한, 순한 강아지 같은 인상의 여자아이가 떠오른다.
잔뜩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을 붙잡은 것도 모자라 화상을 입을 거라며 끌어당기던 그 모습이란.
처음에는 귀찮고 짜증 났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런 감정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살짝, 궁금했다. 그 아이가.
‘신기해서 그런가?’
불새는 마력을 대 주는 주인의 말밖에 듣지 않았다.
강제로 말을 듣게 할 수 있는 건 모든 불새를 통솔할 수 있는 고대 무기 ‘화염의 검’과 각인한 사람뿐이었다.
화염의 검은 각인자가 죽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기 전까진 단 한 사람만을 섬겼다.
현재 화염의 검은 제 부친이 갖고 있다.
그런데 제 명령도, 부친의 명령도 아닌 웬 여자아이의 명령을 불새가 들었다.
‘이상해.’
그 사실이 불쾌해야 하거늘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제 기운에 잔뜩 주눅 든 채로 꿋꿋하게 의견을 피력하던 모습조차 넘어가 줬을 만큼.
“죽여도 된다는 말을 못 들었지만.”
카드릭은 혼절한 말롱 부인을 보며 읊조렸다.
“그래도 조금 괴롭히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 괴롭힘은, 차라리 이 병 속에 들어 있는 독약을 마시고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테지만.
제 궁에 무단으로 침입한 데다 자신에게 덤비기까지 했으니 그 죄는 아주 무겁겠지.
카드릭은 근위병에게 말롱 부인을 황궁 지하 감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그리고 하나 더.”
“명령하십시오.”
“손님용 객실에 저 여자의 하녀가 있다는데 찾아서 내게 데려와. 죄인은 아니니 잘 대우하고.”
근위병이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카드릭은 여유롭게 목걸이를 품 안에 감추며 혼자 읊조렸다.
“빚진 거야, 너.”
5. 황태자가 이래도 되는 건가요?
황궁을 다녀오고 내 주위에 변화가 생겼다.
아니, 변화라기보다는 그냥 새로운 사람이 한 명 추가된 건가?
이전에 내가 자주 접하는 사람이라고는 집사 할아버지와 하녀 언니들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베리, 저 남자 인간한테 다른 곳 가라고 하면 안 돼, 찍?
―맞아, 맞아. 신경 쓰여.
룩스와 슈가의 말에 나는 정원을 산책하다 말고 힐끔 내 뒤를 바라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 하녀 언니들을 비롯해 옅은 갈색 피부를 가진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페리드 경이라고, 대공이 붙여 준 내 호위 기사였다.
저택을 벗어나면 무조건 대동하라면서.
정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택 ‘밖’이니까.
원래 대공은 내 운동 신경을 길러 줄 검술 훈련 선생을 찾으려고 했다.
뜻밖에도 집사 할아버지가 대공의 의견을 반대해 무산되었지만.
‘전하, 아직 아가씨께서는 많이 어리십니다. 그동안 잘 못 먹어 영양 상태도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무리한 운동을 시키는 것보단 많이 먹여 체력부터 키우는 게 더 중요할 듯싶습니다.’
‘그럼 체력이 붙을 때까지 이대로 두라는 건가? 내가 못 본 사이에 엉망진창이 되던데.’
‘평소에는 하녀들이 있으니 괜찮다고 봅니다만……. 아니면 기사단에서 아가씨의 호위를 맡을 기사를 차출하는 건 어떠십니까?’
‘호위 기사를?’
‘예. 원래는 아가씨께서 조금 크시면 차출해 달라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지금부터 호위 기사를 배정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호위 기사라…….’
‘그리고 예절과 교양을 가르쳐 줄 선생을 부르는 건 어떠십니까? 폐하께 대공녀로 인정받으셨으니 슬슬 교육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꽤 그럴듯한 의견이라고 여긴 것인지 대공은 집사 할아버지가 한 말들을 받아들였다.
그 자리에서 날 교육할 선생을 부르고, 호위 기사를 차출해 내라고 했으니까.
날 교육할 선생을 찾는 건 시일을 두어야 하는 문제로 당장 교육이 시작되진 않았지만, 호위 기사는 바로 다음 날 배정되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이었다.
‘나도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호위 기사더러 다른 곳에 가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호위 기사를 붙여 준 사람이 ‘벨로크 대공’인 이상에는.
‘어쩔 수 없지. 내가 들어가는 수밖에.’
나는 종종걸음으로 하녀 언니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들어갈래.”
하녀 언니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심 그녀들도 페리드 경을 신경 쓰고 있어서가 틀림없었다.
돌아온 나는 대공이 선물해 준 장난감 블록을 갖고 놀았다.
열심히 블록을 쌓아 장난감 집을 만드는데 문득 황궁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마리 언니…….’
언니가 어떻게 말롱 부인의 옆에 있었을까?
대공이 날 불러 준 건 고마운 일이다.
‘조금만 늦게 불러 줬다면 더 고마웠을 텐데.’
마리 언니의 행방과 말롱 부인이 그러고 있었던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아쉬우면서 대공이 원망스러웠다.
사실 대공에게 말도 못 꺼내는 내가 제일 한심하지만.
마리 언니에 대한 것도 고민이었지만, 황태자와의 만남도 내게 여러 고민을 안겨 주었다.
‘황태자의 불새……. 내 말을 들었었지.’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불새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그래도 소환수에 속하는지라 마나를 대 주는 주인의 말만 듣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 말을 들을 리 없는데 멈췄어.’
황태자의 불새가 멈춘 건 절대적으로 내가 외친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야 황태자가 날 노려보며 뭐냐고 물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불새는 어째서 내 말을 듣고 멈춘 걸까?
‘혹시, 내 능력 때문인가?’
현재로선 의심되는 구석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나는 블록을 쥔 내 손을 바라봤다.
과거로 돌아온 뒤, 이상한 일이 많아지긴 했다.
귀가 들리는 것부터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까지.
아직 룩스와 슈가 말고는 다른 동물을 접할 기회가 없어 다른 동물과도 이럴 거란 확신은 없지만, 아마도 될 것 같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불새가 내 명령을 들은 건 역시 이상해.’
룩스와 슈가처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거라면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진 않았을 텐데 정작 황태자의 불새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회귀하기 전에 본 대공의 불새는 제대로 말했는데…….
비명을 지르듯 외치던 소리가 머리를 가득 울리던 그 감각은 이제는 뚜렷하다고 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어느 정도 기억은 났다.
회귀한 뒤에는 대공의 불새를 본 적 없다.
하지만 대공과 황태자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있었다.
바로 나이.
‘황태자의 불새가 말을 못 하는 건 어려서 그런 게 아닐까? 대공은 성인이고, 황태자는 아직 어리니까.’
제법 그럴듯한데?
그래도 일단은 내 추측에 불과하니 너무 맹신하면 안 되겠지만.
‘만약 내 능력이 동물과 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명령까지 할 수 있는 거라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야.’
생각지 못한 길이 열린 기분이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모를뿐더러 아직 검증된 건 없지만, 그래도.
―음냐, 역시 씨앗 중에선, 아몬드 씨앗이 제일 맛있다니까, 찍!
―아몬드가 맛있긴 해.
머릿속에 들려오는 룩스와 슈가의 말에 나는 간식 바구니를 바라봤다.
바로 옆에서 룩스가 행복하게 아몬드 씨앗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시험해 볼까?’
룩스에겐 미안하지만 당장 실험할 수 있는 대상이 룩스와 슈가뿐이었다.
나는 제일 가까이 있던 룩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룩스, 나한테 아몬드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