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29)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29화(29/125)
#29
―찍?
“아몬드.”
재차 말했는데도 룩스는 아몬드를 주기는커녕 고개만 갸웃거렸다.
‘전부 내 망상에 불과했던 걸까?’
방금까지 가득했던 설렘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민망해져 손을 거두려던 때였다.
내 손바닥 위로 올라온 룩스가 아몬드를 떨어트렸다.
어? 혹시 내 말을 들은 거야?
―불쌍해서 주는 거야, 찍.
룩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다시 내려갔다.
―너무하네. 아몬드를 먹고 싶으면 새로 달라고 해서 먹지, 왜 먹던 걸 뺏어?
―괜찮아, 누님. 내가 옛날에 들은 건데 원래 남의 것이 더 커 보이는 거랬어, 찍.
아니, 이게 아닌데?
당황한 나는 아몬드를 돌려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룩스, 이거 가져가.”
―난 정말 괜찮아. 그걸 먹고 베리가 행복하다면 아몬드 하나쯤은 줄 수 있어, 찍!
―맞아, 그냥 먹어. 기껏 줬는데 도로 돌려주면 룩스의 체면이 뭐가 되겠어?
―역시 날 이해해 주는 건 누님뿐이야! 누님, 찍!
―으악! 징그럽게 달라붙지 마!
룩스가 슈가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슈가는 잽싸게 룩스를 피했다.
그러자 룩스가 “너무해, 찍!”이라고 말하며 열심히 슈가를 쫓아다녔다.
나는 사정을 설명할 기회를 놓친 채 그 어지러운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 * *
하인이 나이프로 칠면조 구이를 작게 잘라 주는 동안 나는 멀뚱멀뚱 대공을 바라봤다.
처음 대공과 함께 식사할 때를 떠올리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이제 이 정도는 괜찮았다.
나와 달리 하인은 아직도 대공이 무서운지 내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칠면조 구이를 자르고 있었지만.
‘오늘 샐러드에는 아몬드가 들어 있네.’
갖가지 채소들 위에 얇게 저민 아몬드를 보고 있자니 아까 룩스가 내게 준 아몬드가 생각났다.
‘으, 부끄러워.’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동시에 의문도 피어났다.
룩스의 반응을 보면 나한테 동물에게 명령하는 힘 같은 건 없는 거 같은데.
“베로니카.”
그런데 황태자의 불새는 왜 내 말을 듣고 멈췄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베로니카.”
“네, 네?”
한창 생각하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자 대공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 네 새로운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가 보군. 여러 번 불러야 반응하는 걸 보니.”
“……?”
그게 무슨 말이지?
설마, 이보다 전에 여러 번 날 불렀는데 내가 다 무시했다는 거야……?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헉, 숨이 들이켜졌다.
으아아아! 다른 것도 아니고 대공의 말을 무시했다고? 내가?
아무리 요 며칠 새 대공에게 익숙해졌다 해도 그렇지, 무시하다니!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벙긋거리던 때였다.
“베로니카.”
“…….”
“익숙해질 때까지는 네 이름을 자주 불러 줘야겠군.”
어, 이렇게 넘어가 주는 건가?
의외로 대수롭지 않아 하는 그의 모습에 황당해하는 동안 대공이 입을 열었다.
“네 교육을 맡을 선생이 정해졌다.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선생님이요?”
“다음 주부터 이곳을 방문해 널 가르칠 거다.”
“여, 열심히 배울게요.”
내 말에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스틴이 이번에 연간 연회 일정을 정리하는 데 필요하다며 네 생일을 궁금해하더군.”
집사 할아버지가 내 생일을?
“생일이 언제지?”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생일이, 그러니까…….
“몰라요.”
“……모른다고?”
순간 대공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헉, 내가 너무 성의 없이 대답해서 화났나?
“지, 진짜 몰라요.”
“…….”
“정말인데……. 맹세할 수도 있어요.”
점점 험악해지는 대공의 얼굴에 나는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네 맹세 같은 걸 어디다 쓴다고.”
그, 그건 그렇지.
사실을 푹 찔러 들어오는 대공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생일을 왜 모르지? 누군가 챙겨 준 적이 없었나?”
도리도리.
“단 한 번도?”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말했다.
“원장 엄마가, 어차피 우리 생일은 원래 부모님한테 버려진 날일 텐데 그런 걸 알아서 뭐 하겠냐고…….”
“…….”
“그래서 안 챙겨서 몰라요.”
나는 대공이 무어라 하기 전에 빨리 말했다.
챙겨 주기는커녕 오히려 너희 같은 것들 키워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고 했었지.
지금이야 우리 생일을 챙기면 선물을 줘야 하고 그에 따른 돈이 드니 아끼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란 걸 알지만, 어릴 땐 상처받았다.
내가 잠깐 생각에 잠겼을 때, 하인이 슬그머니 먹기 좋게 자른 칠면조 구이가 든 그릇을 놓아 주고는 뒤로 물러났다.
‘또 대공이 무어라 하기 전에 어서 먹어야지.’
막 포크를 집었을 때다.
콰드득―.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니 대공이 잡은 식탁 모서리 부근이 부서진 게 보였다.
지금 맨손으로 식탁을 부순 거야?
저게 가능해? 아니, 그보다 갑자기 왜 부순 건데?
호, 혹시 나도 저렇게 부숴 버리겠다는 뜻인가?
“원장이, 그딴 소리를 했었다고.”
“히끅!”
나는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한 번씩 히끅! 몸이 들썩여질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얼굴이 험악해진 데다 식탁을 부순 걸 봐서는 지금 대공의 심기는 안 좋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여기에 내 딸꾹질 소리까지 더해지다니!
으헝, 딸꾹질아, 멈춰라! 멈춰!
하지만 딸꾹질은 멈출 생각을 안 했다.
그렇게 정적 속에서 히끅! 히끅! 내가 딸꾹질하는 소리가 몇 차례나 울렸을까.
대공이 식탁 모서리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의 손끝으로 식탁이 부서지면서 생긴 부스러기처럼 보이는 것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마저 식사하지.”
언제 그랬냐는 듯 대공이 태연하게 나이프를 들었고, 나는 내내 딸꾹질하며 식사했다.
오랜만에 정말 체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 * *
“전하, 더스틴입니다.”
“들어와.”
아시드의 허락에 더스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책상 위로 깍지 낀 양손 위에 턱을 괸 채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 제 주인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멈칫거렸다.
‘들어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꽤 가라앉은 듯하더니 정말 기분이 안 좋으신가.’
긴장감에 목울대가 절로 움직였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대공가의 집사였고, 제 주인이 오라고 하면 와야 하는 처지이거늘.
하지만 더스틴으로서는 지금 이 상황을 퍽 이해하기 어려웠다.
바로 직전 아시드가 한 일은 베로니카와 저녁을 먹은 것뿐이었다.
‘아가씨께서 전하의 심기를 거스를 일을 하진 않았을 텐데?’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더스틴이 봐 온 베로니카는 얌전한 데다 지나칠 정도로 움츠리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이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지 속으로 할 말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네 말대로 생일을 물었는데.”
“…….”
“모른다고 하더군.”
그 말에 더스틴은 아시드가 베로니카와 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생일을 궁금해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시드가 자신이 직접 묻겠다는 답을 듣고는 잠시 잊고 있었는데…….
‘생일을 모른단 말인가?’
사실 베로니카의 출신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는 평민 고아였으니까.
부모가 멀쩡히 있어도 평민이면 형편이 어려워 생일을 안 챙겨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전하께서는 이런 사정을 모르시겠지만……. 그래도 이 일로 기분이 가라앉진 않을 텐데?’
1황자로 태어난 아시드는 이복동생인 2황자가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황족으로 살았다.
황위 계승에서 밀려난 뒤에도 선대 황제의 자비로 대공 위를 받아 여전히 황족으로 대우받아 왔다.
그러니 평민들의 사정을 알 리가.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대공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전하를 화나게 만든 거지?’
더스틴이 막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보육 시설의 원장이란 인간이 부모에게 버려진 날일 텐데 생일을 알아서 뭐 하겠냐고 했다던데.”
“…….”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아.
그제야 더스틴은 제 주인의 기분이 저조한 이유를 깨달았다.
‘확실히, 그 원장이라면 그런 말을 하고도 남겠지.’
이미 그는 브리엔츠 보육 시설을 조사해 본 적이 있었다.
자의로 찾아본 건 아니었다. 아시드가 원장을 죽이는 바람에 뒤처리하기 위해 알아본 것이었다.
자세히 조사하기 전부터 더스틴은 원장이 나쁜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보통은 사람을 거래할 생각을 못 할 테니까.
심지어 원장은 어린아이를 암흑 경매장인 리슬리란테에 팔았다.
이것만 봐도 그녀의 성품을 짐작했을 텐데 저렇게 충격을 받는다는 건…….
‘아가씨를 아끼시기 때문이겠지.’
더스틴은 이런 아시드의 인간적인 면이 신기했다.
마치 그가 1황자일 때로 돌아간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사람들보다 무뚝뚝하긴 해도 보통의 사람들처럼 웃을 줄 알고, 나름 평범한 일상을 살던 때 말이다.
이제는 제대로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어쨌거나 근래의 아시드는 제법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미약하긴 하나 베로니카를 보거나 얘기할 때 웃는 것은 물론, 베로니카와 되도록 함께 식사하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레일라 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다신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