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3)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3화(3/125)
#3
여리고 상냥한 얼굴과 달리 이상하게 싸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살아 있어?”
“예, 공자님.”
“처리해야겠네. 감히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시해한 반역자를 살려 둘 수는 없으니까.”
‘공자’라고 불린 남자가 입을 움직이는 속도는 제법 빨랐다.
하지만 읽는 데 무리는 없었다.
그저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핑그르르 돌고, 정신이 멍해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 이상한 건 아닌가?
무너진 잔해에 머리를 다친 이후로 계속 피가 줄줄 나고 있으니까.
뒤에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남자에게 장검을 건넸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날카로운 장검은 그대로 대공의 등을 꿰뚫었다.
헤집듯 대공에게 완전히 검을 박아 넣었다가 빼자 핏줄기가 거세게 튀었다.
실로 무자비한 손길이었다. 여리고 상냥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눈앞에서 살해 현장을 목격한 나는 멍한 와중에도 놀라 헉, 비명 같은 숨을 내뱉었다.
“여기 쥐새끼가 있군요.”
누군가 날 가리켰다.
“아직 살아 있는데 죽일까요?”
날 죽이겠다고?
내가 뻣뻣하게 굳은 동안 남자는 얼굴에 묻은 피도 안 닦은 채 날 내려다봤다.
점점 시야가 흐려지며 번진다.
남자의 눈 색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날 응시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느낌이 그랬다.
하지만 나는 남자와 시선을 맞추기보다는 그의 입 모양에 최대한 집중했다.
남자가 어떤 결심을 하느냐에 따라 내 운명도 결정될 테니까.
곧 남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됐어.”
남자의 입 모양을 읽은 나는 긴장을 풀었다.
“꼴을 보니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을 텐데 뭐 하러.”
저 말이 맞았다.
나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남자가 내게 따로 손을 쓰지 않고 내버려 둬도 알아서 죽을 거라고.
“하지만 공자님의 얼굴을 본 자입니다. 혹시라도 살아남으면 추후 문제가 될 수도…….”
남자가 검을 휘둘렀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에 내가 놀라기도 전에 날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쓰러졌다.
뒤늦은 충격이 날 덮쳤다.
놀라 숨을 헐떡이는 나와 달리 남자는 여전히 평온하고 무심한 얼굴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
“반역자의 주검만 챙겨 아버지께 돌아간다.”
“역시 자애로우십니다.”
남자가 피 묻은 장검을 다시 기사에게 건네며 말하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남자의 명에 따라 벨로크 대공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시야가 엉망이었다. 주변이 울렁이고 뿌옇게 보인다.
그래도 나는 반사적으로 공자라고 불린 남자의 행동을 좇았다.
그가 돌아서자 얼핏 소맷자락이 펄럭이며, 그 아래로 손에 낀 반지가 보였다.
제법 알이 큰 보석이 박힌 반지 위에는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황금, 사, 슴…….’
문양은 아주 작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황금색 사슴 모양인 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동안 흐릿하던 시야는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선명하고 뚜렷하게.
그리고 그게 내가 기억하는 내 삶의 마지막이었다.
아니, 마지막인 줄 알았다. 감았던 눈을 다시 뜨기 전까지는.
주위를 살펴볼 새 없이 어떠한 울림이 귀를 관통했다.
“으아아앙!”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높고, 큰 울림이었다.
마치 조금 전에 내 머릿속을 울리던 것과 비슷한 느낌의 울림.
반사적으로 귀를 감쌌던 나는 천천히 손을 풀었다.
주위를 가볍게 슥 훑어보니 생각지 못한 풍경이 보인다.
베이지색 카펫 위에 널브러져 있는 허름한 인형 몇 개와 작은 가죽 공, 그리고 장난감 블록 한 상자.
마지막으로 주위에 바글바글한 아이들까지.
‘황궁이, 아니야?’
무너져 불길이 매섭게 치솟던 황궁 복도가 아닌, 연노란색 벽지가 발린 방 안의 풍경이 지독하게 낯익다.
“마리 언니이이, 흐엉!”
다시 아까의 그 울림이 들려왔다. 나는 이번에도 놀랐다. 다른 이유로 인해서.
‘마리 언니라니? 언니는 나 때문에 죽었는데?’
울고 있는 아이를 보는데 벌컥, 또 다른 소리가 났다.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자 열린 문을 통해 금갈색 머리를 하나로 모아 땋은 여자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저 사람은…….
“마리 어니?”(마리 언니?)
무의식적으로 읊조렸던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방금 무슨 소리지? 목에서 울린 게 내 귀로 전해져 온 것 같았는데.
실로 이상한 감각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마리 어니.”(마리 언니.)
또랑또랑한 울림이 내 목에서 전해졌다.
그리고, 평소와 다르게 뭔가가 들렸다.
‘이거, 내 목소리야? 지금 들려오는 것들은 소리인 거고?’
믿기지 않는다. 내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게다가 난 조금 전에…….
‘죽었잖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하지만 순간의 감정일 뿐이었다.
지금은 어떠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살아 있다는 감각이 뚜렷했으니까.
꿈인가?
하지만 죽은 뒤에도 꿈을 꾸나? 그건 아닐 텐데.
귀를 만지작거리는데 손끝에 걸리는 게 있었다.
무심코 당기니 무언가 내 앞에 툭 떨어졌다.
‘머리띠……?’
작은 리본이 달린 조촐한 머리띠였다. 허리를 숙여 머리띠를 줍던 나는 내 손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왜 이렇게 작아?’
앙증맞은 게 누가 봐도 어린아이 손이었다.
“흐어엉, 마리 언니!”
그사이 다시 한번 아이가 시끄럽게 울었다.
고개를 들자 울던 아이가 마리 언니에게 폭삭 안기는 모습이 보인다.
“파비가아, 머리띠 안 줘! 오늘은, 흑, 내가 하기로 했는데, 끄흡, 저번에도, 내가 양보했는데…….”
아이가 끅끅, 울음을 삼키며 다른 아이를 가리켰다.
―파비, 발리아한테 머리띠를 줘.
“싫어! 내 거야!”
“흐아아앙!”
주위가 혼잡스럽다.
그래도 덕분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브리엔츠 보육원이야.’
아홉 살에 말롱 부인이 날 데려가기 전까지 지냈던 보육 기관.
그 사실을 깨닫자 저 두 아이가 왜 저러는지도 알 것 같았다.
보육원의 재정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정작 아이들이 쓸 물품은 부족했다.
‘원장이 제 배를 불리기 위해 돈을 빼돌려서였지.’
물론 그 피해를 받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었고.
특히 머리띠나 인형처럼 꾸미거나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은 몇 개 없어 자주 싸움이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발리아와 파비라는 두 아이가 저렇게 싸우고는 했더랬다.
원장을 제외하고 보육원에서 유일하게 성인이며, 아이들을 돌보는 담당이었던 마리 언니는 저 둘을 달래느라 늘 고생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두 아이 사이에 낀 마리 언니가 쩔쩔매며 손짓했다.
―파비, 우리 약속했잖아. 돌아가면서 쓰기로.
“난 그런 거 몰라!”
이쯤 되면 억지로라도 머리띠를 뺏어 발리아에게 줄 법하기도 한데 마리 언니는 그러지 못했다.
‘원래 저런 성격이니까.’
예전에는 그런 언니의 성격이 답답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가슴이 아릿하기만 했다.
마리 언니는 나 때문에 말롱 부인에게 맞아도 반항하거나 날 나무라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죽어 가는 순간까지 내게 괜찮다고 그랬지.’
회상하고 나니 역시 이게 현실일 리 없다는 생각만 든다.
하긴, 애초에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것 자체가……. 게다가 소리가 들리는 것도 이상하고.
‘죽으면 그냥 끝인 줄 알았는데 환각을 보여 주는구나.’
왜 하필 이 순간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마리 언니를 다시 볼 수 있어 좋긴 했다.
‘어쩌면 내가 마리 언니에게 지닌 죄책감이 깊어서일지도.’
그때, 파비가 혀를 쏙 내밀고는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발리아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마리 언니는 난감해하며 발리아를 달래기 바빴다.
나는 그 옆으로 다가갔다.
“바리아.”(발리아.)
“크응, 왜애……?”
발리아가 훌쩍거리며 날 바라본다. 나는 머리띠를 내밀었다.
“이거, 너 해.”
“저, 정말?”
“응. 난 피료 업써.”(응. 난 필요 없어.)
“……고마워, 흑, 언니.”
그제야 발리아가 울음을 그치고 머리띠를 받았다.
다른 곳으로 가는 아이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걸로 마리 언니가 곤란한 일은 더 없겠지.’
내 생각대로 마리 언니는 발리아가 간 뒤 한숨 돌린 얼굴로 내게 손짓했다.
―고마워, 애니.
그리고 멈칫한 언니가 곧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잠깐, 방금 발리아의 말을 알아듣고 머리띠를 준 거야?
“응. 말소리가 들렸어.”
―세상에. 소리를 듣다니.
마리 언니가 감격에 찬 얼굴로 제 입을 가렸다가, 손짓했다.
―잘됐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리 언니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마리 언니는 여전하구나.’
아니면 내가 마리 언니를 이런 식으로만 기억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네가 할 머리띠가 없어서 어쩌지? 곧 원장님께서 새 부모님들과 함께 오실 거야. 예쁘게 하고 있어야 눈에 띌 텐데…….
언니의 말을 듣고 있자니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확실히, 예전에 아무것도 모를 땐 나도 새 부모님을 만나고 싶어 눈에 띄려고 애썼던 적이 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처럼 꾸미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원장이 데려오는 양부모 후보들은 평범한 부모를 지망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제각기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아이들을 사러 오는 변태 범죄자일 뿐.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니 신경 쓸 건 없지만.
“난 갠차나, 언니.”(난 괜찮아, 언니.)
―안 되겠어. 내 머리끈으로 머리 땋아 줄게. 여기 앉아 봐.
마리 언니가 내 어깨를 살짝 누르자 나는 맥없이 앉혀졌다.
동시에 나는 꽤 놀랐다. 언니가 날 잡아 주고,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였다.
‘이거, 설마 진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