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32)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32화(32/125)
#32
인식하자마자 몸이 움직였다.
딸랑―.
“아가씨!”
사탕 가게의 문을 밀자 종소리가 명쾌하게 울린다.
나는 그대로 가게를 나와 마리 언니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뒤에서 얼핏 나를 부르는 페리드 경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신경은 온통 마리 언니를 뒤쫓는 데 집중되었으니까.
―우리 어디 가?
―드디어 도망치는 거야, 찍?
―진짜? 우리 도망쳐?
‘아니야. 그게 아니라, 마리 언니가 보였어.’
―마리 언니, 찍?
‘이따가 설명해 줄게!’
나는 바쁘게 마리 언니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언니는 아직 멀리 가지 않은 상태였다.
“언니!”
멀게만 느껴지던 마리 언니와의 거리가 착실하게 좁혀졌다. 열심히 뛴 보람이 있다.
“마리 언니!”
잡았다!
마침내 언니의 소매를 붙잡은 나는 환하게 웃었다.
“누구……?”
“아.”
막상 돌아본 여자의 얼굴은 내가 기대하던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딘가 경계심 어린 표정의 여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꼬마야?”
“죄송해요. 제가 아는 언니인 줄 알고…….”
가까이에서 보니 여자는 금갈색 머리도 아니었다.
그냥 갈색이었다.
아까는 햇빛에 물들어 그렇게 보였던 걸까.
이러니저러니 내가 착각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베리가 바보 같은 짓 한 거야?
―그런가 봐, 찍!
바보 같은 짓이라니!
물론 사실이긴 하지만 괜히 발끈하는데 여자가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상냥하게 물었다.
“음. 꼬마야, 혼자인 거니?”
“아니요.”
“그래? 그러면 네 보호자는 어디 있…….”
“거기서 뭐 해?”
어린 미성이 끼어들었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남자아이가 있었다.
나보다 두어 살 많은 듯한, 예전에 본 황태자와 또래처럼 보인다.
남자아이는 온순해 보이는 인상만큼이나 부드러운 옅은 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저렇듯 귀티 나는 생김새와 달리 옷차림은 허름했지만.
그렇다고 평민처럼 보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고위 귀족이 입을 만한 옷차림이 아니었을 뿐.
행정 귀족의 자제, 혹은 잘사는 상인 계층 집안의 자제인가?
“도련님.”
여자가 남자아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 오고 왜 가만히 서 있나 했더니……. 얜 뭐야?”
“저도 모르는 아이예요. 이 아이가 절 붙잡았어요.”
“그래?”
남자아이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어떤 용건으로 내 하녀를 붙잡은 거야? 아직 볼일이 남았어?”
분명 인상 자체는 온순한데, 무표정한 얼굴로 물으니 묘한 압박감이 들며 싸늘했다.
하지만 불새에게 불을 피우게 해 직접적인 위해를 보여 줬던 황태자와 달리 이 남자아이는 표정만 굳은 게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큰 위협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날 경계하고 있다는 느낌만 물씬 들 뿐.
“미안해. 아는 사람인 줄 알고 착각했어.”
“아는 사람?”
“응.”
내 착각이었지만.
여자에게 미안하다는 뜻으로 살짝 고갯짓한 뒤 돌아서려던 그때였다.
“잠깐 기다려.”
남자아이가 내 팔을 붙들었다.
시선이 얽혔다.
남자아이가 햇빛처럼 찬란한 금색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눈 색도 금색이네. 예쁘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와는 별개로 내 감상은 솔직했다.
―얘는 왜 베리를 봐, 찍?
―나한테 반했나?
―찌찍? 누님한테 반했는데 왜 베리를 봐, 찍?
―나처럼 예쁘고 깜찍한 하늘다람쥐를 처음 봐서 만지고 싶은 거지. 그리고 지금 난 베리의 품에 있으니까 베리에게 물으려는 거고. 훗! 뭘 좀 아는 어린 수컷 인간이네.
―그럴 리 없……기는! 누님처럼 예쁜 하늘다람쥐는 누님 말고 없지, 찍!
내 품에 있는 룩스와 슈가가 재잘거렸다.
“너…….”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한참 내 얼굴을 빤히 보던 남자아이가 막 입술을 달싹이려 하자 페리드 경이 날 찾아왔다.
아이의 시선이 페리드 경의 가슴팍에 달린 엠블럼으로 향했다.
“벨로크?”
작은 읊조림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에 있던 내게는 또렷하게 들렸다.
‘단번에 문양을 알아봤어?’
나는 남자아이의 눈썰미에 놀라며 움찔거렸다.
벨로크 대공가나 대공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그에 반해 실제로 대공을 봤거나 대공가의 문양을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회귀하기 직전에 대공을 처음 보고, 대공저에 온 이후에나 대공가의 문양을 처음 본 것처럼.
그런데 벨로크 대공가의 문양을 알아봤다는 건…….
‘대공가와 왕래한 일이 있거나 고위 귀족 가문의 자제라는 건데.’
옷차림 때문에 고위 귀족은 아닐 거라 여겼다.
그러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저렇게 위장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풀어졌던 경계심이 팽팽해졌다.
‘만약 고위 가문의 자제가 맞다면 엮여서 좋을 건 없을 거야.’
어쩌면 대공가와 적대적인 관계일 수도 있으니까.
사실 그 이유가 아니어도 경험상 귀족과 얽히는 것 자체가 좋았던 적은 없지만, 어쨌든.
나는 남자아이의 손에서 내 팔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빼려고 해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 세게 붙잡은 게 아닌 것 같은데도.
“팔 놔줘.”
내가 못 참고 한마디 하자 그제야 남자아이가 손에서 완전히 힘을 빼며 내 팔을 놓더니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갑자기 공대한다고? 조금 전만 해도 반말을 찍찍 하더니?
너무나 급변한 태도였다. 심지어 언제 싸늘했냐는 듯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와…….’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변할 수 있구나.
인상이 원래 좋아서인지 웃기까지 하자 주위가 화사하게 피어났다.
만약 처음 만났을 때도 저랬다면 상냥한 미소에 정신이 팔려 흐물흐물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갑자기 웃네? 이상한 인간이야!
―누님, 아까는 뭘 좀 아는 어린 수컷 인간이라고…… 음, 내가 잘못 들었나 봐, 찍!
“처음 뵙는 분이라 저도 모르게 날을 세웠습니다.”
남자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슈가와 룩스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테니 당연하겠지만.
“어쩌다 우리 아가씨와 함께 있게 된 겁니까?”
“그쪽 아가씨가 먼저 제 하녀를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게 되었고요.”
“아가씨가요?”
페리드 경이 날 흘긋 보고는 남자아이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내가 입을 열었다.
“사람을 착각했어.”
“어느 분과 착각하셨습니까?”
“그냥, 옛날에 알던 언니랑…….”
“그러셨군요.”
내가 깊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묻진 않았다.
페리드 경의 시선이 남자아이에게로 옮겨 갔다.
“실례지만, 공자께서는 어느 가문의 자제분이신지요?”
“대공가의 기사분이 알 정도로 대단한 가문은 아닙니다. 나중에 뵈면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남자아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유려하게 말을 넘겼다.
그리고 내게 살짝 눈인사하고는 자신의 하녀와 함께 뒤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보는데 왜인지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한번 본 듯한……. 그런 이상한 느낌이.
저 남자아이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그럴 리 없는데도.
“저희도 이만 돌아가지요. 하녀들이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아…….”
맞다, 하녀 언니들.
내가 갑자기 뛰쳐나갔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페리드 경을 따라 사탕 가게로 돌아가자 입구 앞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는 하녀 언니들이 보였다.
“아가씨! 무사하셨군요!”
“다쳤다거나 안 좋은 일을 당하신 건 아니죠?”
내 신변부터 걱정하고 챙기는 하녀 언니들을 보니 죄책감이 몰려온다.
갑자기 사라진 내가 원망스러울 법도 할 텐데.
“……저기, 미안해.”
“네?”
“말도 없이 사라졌잖아.”
하녀 언니들의 관점에서 나는 모셔야 하는 사람이었다.
말롱 부인의 하녀로 일했던 만큼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녀들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괜찮아요.”
“맞아요. 하지만 앞으로는 어디 가시기 전에 저희한테 말씀해 주시고 꼭 같이 다녀요.”
그리고 저건 고용된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이란 것도.
“다음에는, 꼭 그럴게.”
* * *
외출은 사탕 가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내가 돌아가고 싶다고 칭얼거려서였다.
하녀 언니들은 이왕 나온 것, 다른 가게도 가 보자고 했으나 언니들과 페리드 경에게 미안해 더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짧은 외출이었는데도 기진맥진 지쳐 돌아온 탓이었을까.
“미열이 있으신 것 같은데.”
하녀 언니가 내 옷을 갈아입히다 말고 중얼거렸다.
“나, 괜찮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해열제를 달라고 할게요.”
“응.”
약은 쓰고 맛없지만, 오늘은 미안한 만큼 나는 하녀 언니가 갖다준 약을 먹고 잠들었다.
분명 그랬는데.
“아가씨? 아가씨, 괜찮으세요?”
“으…….”
날 깨우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목 아파…….’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로 하녀 언니들이 보인다.
하지만 도로 눈이 감겼다. 몸이 뜨겁고 무겁다.
“어떡해. 많이 아프신가 봐.”
―베리, 많이 아파, 찍?
―정말 아픈가 봐. 숨도 불안정해.
“넌 아가씨를 돌보고 있어. 난 집사님께 알리고 주치의 선생님을 불러올게.”
여러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내 정신은 다시 몽롱해졌다.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온몸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질식될 것만 같았다.
입을 벌려 숨을 크게 들이마시려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예전에 부서진 황궁의 잔재에 깔렸던 때처럼.
‘숨 막혀.’
의지와 무관하게 발버둥 쳐진다.
내 몸을 감싼 것에서 벗어나려던 때였다. 이마 위로 서늘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시원하고, 기분 좋은…….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마 사람의 손 같았다.
조금 전까지 안 떠지던 눈이 아주 약간 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