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33)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33화(33/125)
#33
어떠한 형체가 보였으나 얼굴도, 머리카락 색도 알 수 없을 만큼 불분명한 형체였다. 그저 사람이란 것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눈꺼풀이 무겁다. 나는 도로 눈을 감았다.
상대를 보진 못했지만, 다정하게 내 이마를 문질러 주는 차가운 손의 주인은 내가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마리, 언니…….”
‘열이 많이 올랐어.’
마리 언니가 내 이마 위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니는, 여전히 다정하구나.
나는 언니를 못 지켰는데.
그저 내 안위에 급급해서, 내가 우선이라서.
“마, 리 언니…….”
‘응?’
“미안, 미안해…….”
언니를 죽게 만들어서.
지켜 주겠다고 했는데 못 지켜서.
내가 힘이 없어서.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매번 말로만 미안하다고 해서.
행동으로 실천할 용기가 없어서.
‘괜찮아.’
서늘한 손이 계속 내 이마를 문질러 준다. 소중한 것을 매만지듯.
‘네 탓이 아닌걸.’
다정한 위로였지만, 실질적으로 내게 닿는 건 없었다.
그저 어둡게 가라앉을 뿐.
* * *
“열 감기입니다.”
대공가의 주치의, 요한나는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베로니카의 상태를 알렸다.
그제야 집사와 전담 하녀들의 표정이 풀어진다.
단 한 명만큼은 여전히 표정이 굳어 있었지만.
“갑자기 열 감기에 걸린다고?”
“아이는 성인과 비교하면 연약하니까요. 아까 해열제를 먹였다고 했으니 새로 약을 먹이는 건 시간을 조금 두는 게 좋겠습니다.”
요한나는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며, 약만 잘 먹이고 며칠 푹 쉬게 하면 금방 나을 거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시드의 표정은 여전히 누그러질 줄 몰랐다.
“외상이 아니니 마법은 안 들을 테고. 신관을 불러 치료하는 건.”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이런 작은 앓이는 아가씨 스스로 이겨 내야 장기적으로 좋을 겁니다.”
“……알겠다. 하녀 한 명만 남고 다들 나가 보도록.”
아시드의 말에 샤비를 제외한 모두가 방에서 나갔다.
고요함 속에서 아시드는 땀을 뻘뻘 흘리며 괴로워하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아이를 돌보는 건 처음이라 아시드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생소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그는 베로니카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이가 늘 데리고 다니던 하늘다람쥐와 생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베로니카의 옆에 붙어 찍찍, 작게 울고 있었으니.
여타 짐승들과 달리 도망치기는커녕 옆에 꼭 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평소 아이가 끼고돌아 그 마음을 알고 이러는 걸까.
“주인이 걱정되나?”
물론 두 설치류가 알아들을 거라 여기고 말한 건 아니었다.
“안심해라. 가벼운 병이니까.”
혼잣말이었다. 한편 아이가 아프다는 소리에 놀란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했다.
하녀가 집사를 급히 찾으며 베로니카가 아프다고 말했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분명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다.
아이를 데려와 놓고도 잊은 채 바깥을 나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한 거며 이래저래 아이를 챙긴 건.
‘은인이니까.’
이 아이가 바랐으니까.
그래. 단지 그뿐이다.
가슴은 무언가 이유가 더 있다고 말했지만, 아시드는 이성적으로 그것을 무시했다.
제가 데려온 것과는 별개로 자신에게는 이뤄야만 하는 ‘목표’가 있었다.
베로니카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아이가 그 목표보다 우선시될 일은 절대로 없었다.
사실상 아직 자신이 살아 있는 건 그 목표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니 다른 이유 따위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니, 몰라야만 했다.
“으…….”
작게 앓는 소리에 아시드는 베로니카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생각보다 뜨겁다.
‘정말 내버려 둬도 되는 건가?’
요한나의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더스틴과 더불어 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곳에서 계속 일해 온 실력 있는 주치의였으므로.
그런데 끙끙 앓는 아이를 보니 무언가 더 조처해야 하는 게 아닌가, 조바심 난다.
제 손이 닿아 있음을 느낀 건지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아시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초점 없는 페리윙클빛 눈동자가 그의 마음속 깊숙이 묻어 뒀던 기억을 들춰서.
베로니카는 금방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시드가 떠올린 기억의 향수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아이, 묘하게 레일라 누님을 닮은 것 같아 더 정감이 가는군요.’
‘안 닮기는요? 특히 눈 색이 닮았는데요. 오묘한 보랏빛 도는 푸른 눈이라……. 혹시 그래서 딸로 삼은 건 아니신지?’
아니다. 착각이다.
이 아이는 레일라를 닮지 않았다.
다른 존재였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레일라가, 그리고 한순간 찾아왔던 그 아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이 손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그러니 착각이 분명했다. 그걸 아는데도 왜…….
아시드는 동요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베로니카와 레일라와의 다른 점을 찾으려 애썼다.
다행히 그는 금방 현실로 돌아왔다.
베로니카의 몽글몽글한 연분홍색 머리카락 덕분이었다.
자신도, 레일라도,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색.
우습게도 그 사실 하나로 마음이 안온해졌다.
아시드는 베로니카를 보다가, 마법으로 제 손에 냉기를 돌게 했다.
땀이 흥건하게 묻어나는 아이의 이마를 식혀 줄 생각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마에 달라붙은, 분홍색 실 가닥 같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살살 문질러 주던 때였다.
베로니카가 조그마한 입술을 달싹였다.
“마리, 언니…….”
“……?”
“마, 리 언니…….”
아시드는 숨을 죽이고 베로니카의 읊조림을 귀 기울여 들었다.
“미안, 미안해…….”
아이의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곧 연분홍색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베로니카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통통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아직 젖살이 있는 뺨을 타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아시드는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마리’가 누구길래 이러는 거지?
이 작고 어린것이 이렇게 울면서 빌 만한 일이 뭐가 있다고?
더 자세히 사정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후로 흘러나오는 말은 없었다.
엄지로 베로니카의 뺨에 묻은 눈물 자국을 닦아 준 아시드는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룩스와 슈가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집사와 베로니카의 호위 기사로 붙여 둔 기사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저 기사가 보고한 내용이 있군.’
도저히 베로니카가 원하는 걸 알 수 없어 하녀들더러 아이와 함께 외출하게 했다. 나가서 아이의 기호를 알아 오라고 말이다.
물론 이는 집사인 더스틴의 생각이었다.
그랬던 외출에서, 베로니카가 갑자기 사탕 가게에서 뛰쳐나갔다.
‘뒤쫓아가니 웬 갈색 머리 여자와 소년이 있었다고 했지.’
그중 갈색 머리 여자 쪽을 예전에 알던 사람과 착각했다고.
기사가 보고한 내용과 조금 전 베로니카가 한 말을 겹쳐 생각해 보니 어렴풋이 실마리가 잡혔다.
‘틀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되었든 은인을 위한 선물이었다. 되도록 원하는 것을 쥐여 주고 싶었다.
결정을 마친 아시드는 집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더스틴.”
“말씀하시지요.”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겠다. 베로니카를 부탁하지.”
* * *
내가 기운을 차린 건 다음 날 늦은 오후쯤이었다.
그사이에 한 번도 안 깨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중간중간 깨서 하녀 언니들이 가져다준 오트밀로 속을 달랜 뒤 약을 먹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외에는 내내 잠만 잤기 때문에 온종일 자다가 깨어난 기분이었다.
―이제 괜찮아, 찍?
‘응.’
―갑자기 앓아서 놀랐어!
‘많이 걱정했어?’
―당연하지, 찍!
―당연한 말을!
룩스와 슈가가 동시에 답했다.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에 나는 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맞아! 네가 앓는 동안 무서운 수컷 인간도 다녀갔어. 그런데! 생각보다 안 무섭더라.
‘대공이 안 무섭다고?’
―응! 우리더러 가벼운 병이니까 안심하라고 해서, 생각보다 괜찮은 인간이구나 싶었어!
―그땐 정말 놀랐어. 우리랑 말 통하는 줄 알았지, 찍!
―그것 말고도 베리 네가 우니까 눈물도 닦아 주던걸?
‘내, 내가 울었어?’
―“마리 언니, 미안해.” 하면서 울던데?
―나도 들었어, 찍!
겨우 기운을 차린 게 무색하게도 정신이 아찔해졌다.
‘미, 미쳤어!’
무의식이긴 했지만!
불가항력이었지만, 대공의 앞에서 울면서 그런 소리를 했다니!
‘그, 그래서 대공이 뭐래?’
―아무 말 안 하던데?
―그냥 나갔어, 찍.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말았나? 그러면 다행이지만.
열 감기를 앓고 나니 하녀 언니들은 나를 불면 날아가는 종이 인형처럼 대했다.
그녀들은 내가 스튜를 먹을 때 스푼조차 못 들게 했다.
“자. 아, 하세요. 아가씨.”
“나 혼자 먹을래.”
“다 나으실 때까진 안 돼요. 주치의 선생님이 아가씨를 푹 쉬게 하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맞아요. 그래서 가정 교사도 오늘이 아니라 며칠 뒤에 오기로 했다고 들었어요.”
“다시 아, 할까요?”
조금도 물러나지 않는 하녀 언니들의 모습에 나는 포기하고 입을 벌려 스튜를 받아먹었다.
“이틀 동안 오트밀만 드시다 처음 드시는 음식이니 천천히 드세요.”
“꼭꼭 씹어 드셔야 해요!”
“으, 응.”
하녀 언니들의 걱정 어린 감시 아래에서 나는 렌즈콩이 들어간 닭고기 스튜를 꼭꼭 씹어 삼켰다.
남이 떠먹이니 편할 성싶지만, 은근 불편했다.
‘차라리 대공과 함께 먹는 게 낫겠어.’
그러고 보니 내가 이렇게 방에서 식사하면 대공도 혼자 먹어야 하지 않나?
“스튜 맛이 별로인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아빠는 뭐 하나 싶어서.”
“주인님은 어제부터 출타하셔서 여기 안 계세요.”
“어제부터?”
그럼 외박을 한 거야?
“오해하지 마세요. 주인님은 예전부터 자리를 자주 비우셨어요. 한번 나가시면 잘 안 들어오셨고요.”
“샤비 말대로예요. 제가 여기서 2년을 일했지만, 아가씨께서 오시기 전에는 주인님을 뵌 게 딱 두 번뿐이었거든요.”
“두 번이나 봤어? 난 한 번인데.”
“이거 보세요. 어쨌든 주인님께서 이곳에 머무르시는 날은 드문 편이에요. 한동안 오래 계셨지만……. 그래도 아가씨를 생각해 금방 돌아오실 거예요.”
내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니 하녀 언니들이 서둘러 대공을 변호했다.
아마 내가 대공에게 섭섭함을 느낀 줄 안 모양이다.
그저 의외라서 그랬을 뿐인데.
“참, 알려 드릴 소식이 있어요. 아가씨의 생일 연회와 관련된 거랍니다. 아마 들으면 놀라실걸요.”
대체 뭐길래?
“아가씨의 연회에 특별한 분이 올 거래요. 혹시 누가 올지 짐작 가세요?”
“모르겠어. 누군데?”
“놀라지 마세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첼시 언니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신대요!”
뭐?
아니,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