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38)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38화(38/125)
#38
이어서 대공을 비롯해 다른 이들에게도 케이크가 돌아갔다.
하지만 대공이 케이크에 손대는 일은 없었다.
‘단 걸 싫어하나?’
생각해 보면 후식도 나만 싹싹 긁어 먹었지, 대공이 다 먹거나 즐겨 먹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대공이 눈치챌세라 나는 금방 시선을 바로 했다. 그리고 황태자의 위치를 파악했다.
황태자는 꽤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턱을 살짝 괸 그는 무료한 듯 포크로 케이크를 쿡쿡 찌르기만 할 뿐, 먹지는 않았다.
‘정말 기다리네.’
왠지 마리 언니도 있을 것 같아 황태자의 주위를 살펴봤으나 언니는 안 보인다.
문득 황태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먼저 눈을 돌리려 할 때였다.
황태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케이크 다 먹고, 나와……?’
내가 알아볼 거라 여기고 저러는 건지, 그냥 눈치껏 알아들을 거라 여기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황태자의 입 모양을 읽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오라니? 어디로?’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을 나갔다.
순간, 나도 벌떡 일어나려다 대공의 시선을 느끼고는 다시 케이크를 먹었다.
‘어떻게 빠져나가지?’
온통 그 생각으로 손을 놀리니 금세 그릇이 바닥을 드러냈다.
“더 먹을 건가?”
“네? 네.”
앗! 아니, 더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대답을!
그사이 케이크 조각을 담은 그릇이 내 앞에 새로 놓였다.
두 접시째 먹어도 케이크는 맛있었다.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들어차 있다는 건 문제였지만.
안 되겠다. 부끄러워도 그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아빠, 저 머리를 정리하고 와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이 말을 하면서도 조금 뿌듯해졌다.
얼마 전에 글레나 부인에게 배운, 몇 안 되는 사교계 표현이었다.
무도회 시즌 때 춤을 추다 보면 머리 모양이 망가지거나 드레스가 찢어지는 일이 많아 유래된 말이라고 했다.
보통 그렇게 말하고 휴게실로 향하지만, 화장실에 갈 때도 쓰이는 말이니 필요할 때 말하라고 했지.
“머리를? 괜찮아 보이는데.”
……설마하니 대공이 못 알아들을 줄은 몰랐지만.
“그, 머리가 아니에요.”
“그럼 뭐지?”
어떡해. 진짜 모르나 봐.
나는 울상을 지었다.
“배가, 조금 아파서…….”
“아프다고?”
대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어도 냉철하게 생긴 사람이 얼굴까지 찌푸리니 더 무섭다.
아까 황태자를 대하던 얼굴과는 묘하게 달라 화난 게 아니란 건 알겠지만.
“당장 주치의를 불러야겠군. 집사는 어디…….”
“괘, 괜찮아요! 주치의 선생님을 부를 건 아니에요!”
“아프다며.”
어흑, 알아듣지 못한 데다 주치의까지 부르려 하다니.
“그게 아니라…… 화장실…….”
나는 대공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그제야 대공은 제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그런, 뜻이 있었지.”
그답지 않게 당황하다가 이어 설핏 입꼬리를 올린다.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저번에도 이 비슷한 모습을 본 거 같은데.
언제였지?
“어쨌든 다녀와라.”
“네, 네!”
이어진 한마디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물론 황태자가 나간 문과는 다른 문이었다.
황태자는 야외로 바로 나가는 문을 이용했지만, 나는 대공에게 둘러댄 말이 있어 저택과 이어진 문을 이용해 연회장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밖으로 나가면 돼.’
이전에 도망치겠답시고 여기저기 쏘다녔던 터라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중간에 사용인들과 마주쳤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워낙 바빠서인지 그들은 내게 인사만 하고 서둘러 지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밝은 햇빛이 쏟아지고 꽃 내음 섞인 미풍이 불어온다.
‘황태자는 어디 있지?’
밖으로 나가는 걸 봤지만, 그게 전부였다. 만나자고 약속은 했으나 장소를 상세하게 정한 것도 아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삐!
깜짝이야!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나뭇가지 위에 앉은 붉은 새가 보인다.
불새의 몸 끝에서 불꽃 깃털이 나풀나풀 떨어지다 사라진다.
하지만 그 자리에 불이 붙는 일은 없었다.
“불새야?”
황태자의 불새 맞나?
―삐이!
확인차 부르니 불새가 나뭇가지에서 내려왔다.
내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날아가 다시 멈췄다. 그리고 내 쪽을 보며 날갯짓했다.
“따라오라고?”
불새는 아무런 대꾸 없이 앞으로 날아갔다.
‘주인이랑 똑같네.’
자기 볼일만 해결하면 그 어떤 것도 안중에 두지 않는 게 닮았다.
불새를 따라 조금 걷자 정원수 아이로 황태자가 보였다.
앞서 날아가던 불새가 하강해 황태자가 내민 팔등 위에 안착했다.
그러자 불새가 눈 녹듯 사라졌다.
마치 황태자에게 흡수된 것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감상에 빠질 새는 없었다.
“늦었네. 바로 따라 나올 줄 알았는데.”
“최대한 빨리 나온 거예요.”
“어쨌든 바로 안 나왔잖아?”
“그건, 사정이 있어서…….”
“사정이란 건 벨로크 대공? 날 만나지 말라고 했어?”
헉, 어떻게 알았지!
“표정을 보니 맞는 모양이네.”
황태자가 훅 다가왔다.
‘가까워.’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날 피해?”
“피한 적 없는데요.”
나는 뻔뻔스레 굴었다.
그래, 피한 적은 없지. 잠깐 움찔했을 뿐!
“아니면 내가 무서운 건가?”
그럼 안 무섭겠니?
마리 언니를 데리고 와 준 건 고맙지만, 무서운 건 별개였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산 채로 불태우려던 모습이 생생한데!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었다.
힘없는 자의 설움이다.
“안 무서워요.”
“거짓말.”
겨우 입바른 말을 했건만, 황태자는 전혀 믿지 않았다.
어차피 안 믿을 거면서 왜 물어본 거야?
“이상하네. 다른 사람들은 내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데.”
그야 황태자인 데다 무서우니까 그러겠지.
“저도 전하께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데요?”
“넌 좀 달라.”
별로 다를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래서 왜 날 무서워하는 거야? 너한테는 상냥하게 대해 줬잖아.”
상냥? 이게?
하긴……. 무시했어도 됐을 내 부탁을 들어줬으니까.
“전하께서 마리 언니를 찾아 준 건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내 이름은 카드릭이야.”
응?
“그냥 카드릭이라고 불러. 넌 그래도 돼.”
으, 응?
존칭 말고 이름으로 부르라고?
“저번처럼 말도 놔.”
“제가, 어떻게…….”
“못 하겠어? 처음 만났을 때는 잘만 반말하더니.”
“그, 그때는! 전하인 줄 몰라서 그랬던 거고요!”
“알고 난 뒤에도 반말했던 것 같은데.”
그, 그랬나?
워낙 그때 상황이 긴박해 정말 그랬는지 긴가민가했다.
“어쨌든, 전하께 어떻게 반말해요? 전 공대할 거예요.”
내 작은 항의에도 황태자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럼 모른다고 생각해.”
“네?”
“내가 황태자라서 공대하겠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내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하라고.”
이미 황태자인 걸 아는데 어떻게 모른 척해?
“불가능해요.”
“우린 이제 사촌인데도?”
“그래도요.”
“그러고 보니 마리를 구해 준 답례를 받지 못했네.”
설마.
“네 빚을 너한테 받는 게 나을까, 대공한테 받는 게 나을까?”
“…….”
“어느 편이 좋아? 나는 둘 다 상관없어.”
이, 이 치사한!
그걸 저렇게 걸고넘어지다니!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지 몰라도 저렇게 나오니 더 거부할 수 없었다.
“알았어. 반말할게. 됐지?”
이제 만족하냐?
“훨씬 낫네.”
황태자, 아니, 카드릭을 보니 그가 픽 웃는다.
으, 이름을 부르려니 어색하다. 입에도 안 붙고.
“마리 언니는 어디 있어?”
나는 조급하게 물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잠시 다른 주제로 실랑이했지만, 내 목적은 하나였다.
게다가 대공에게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나온 상태였다.
‘빨리 돌아가야 해.’
다행히 황태자는 순순히 대답을 들려주었다.
“내 마차에.”
“마리 언니가 왜 전하의 마차에 있…….”
“또 전하라고 하네.”
“……왜 네 마차에 있어?”
“내 시녀가 날 기다리는 게 이상한 일이야?”
“내게 언니를 보내 주려고 데려온 거 아니었어?”
“네 생일 선물은 아까 줬잖아. 그런데 마리까지 데려가려고? 욕심쟁이네.”
일순 말문이 막혔다.
뭐? 욕심쟁이?
“보내 줄 게 아니라면 마리 언니는 왜 보여 준 건데?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네가 그랬잖아. 머리끈의 원래 주인이 어딨는지 알고 싶다고.”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해 보이는 얼굴로.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된 거 아니야?”
“그건……!”
“어차피 네게 줘도 대공가의 하녀로 일하는 게 전부겠지. 대공이 허락하지 않으면 여기에 있지도 못할 테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옳았다.
하지만…….
“소리를 낼 수 있는 목걸이는 왜 준 거야? 마리 언니한테 주라고 만든 거 아니야?”
“맞아. 마리가 말을 못 한다길래 특별히 주문 제작한 거야.”
“그럼 뭐 해? 목걸이를 걸어 줄 언니가 내 옆에 없는데.”
“나중에 만나서 주면 되지.”
“그게 무슨 선물이야?”
말을 뱉어 놓고 나는 아차, 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조가 너무 격양됐다.
나는 슬쩍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기분이 상했을 테니까.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건 황태자의 웃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