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4)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4화(4/125)
#4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믿기 어려웠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과거로 돌아왔다는 뜻이니까.
그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는데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고?
이게 진짜일 리 없는데.
―다 됐다.
그때 마리 언니가 날 보며 방긋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련하게 아팠다.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으니까.
―애니는 귀여우니까 금방 새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언니가 덧붙인 말은 그리 기쁘지 않았지만.
* * *
마리 언니는 내 등을 토닥여 주고는 다른 아이들을 살피러 자리를 떴다.
나는 슬쩍 내 볼을 꼬집어 봤다.
“아얏!”
통증에 뺨이 화끈거린다.
‘정말 과거로 돌아온 거야?’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혼란스럽고 이해가 안 되는 것들 천지다.
만약 이게 현실이라면…….
‘운도 없네.’
바란 적 없는 회귀라니!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마리 언니가 살아 있던 때라는 것 정도겠지.
나는 마리 언니가 묶어 준 머리를 매만졌다.
거울을 볼 수 없어 손으로 만져 대충 머리 모양을 짐작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사실 아무렴 좋았다.
중요한 건 상아색 섞인 내 분홍색 머리카락을 묶은 이 리본이었다.
선명하다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푸른빛이 남아 있는 리본을 보니 조금은 실감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조금 해졌지만, 끝에 겹겹이 싸인 레이스가 달린 이 리본은 마리 언니가 버려졌을 때 요람 속에 함께 들어 있던 끈이라고 들었다.
원래는 푸른색이었다는데, 언니가 죽기 전에 내게 줬을 땐 빛이 바랜 회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푸른빛이 조금이나마 보였다.
‘정말 돌아왔다고?’
믿기지 않고, 어떤 이유로 인해서인진 모르겠지만 내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거라면 우선으로 바꿔야 할 게 있었다.
바로,
‘말롱 부인을 따라가면 안 돼.’
나는 내가 죽기 전을 떠올렸다.
복종하고, 강제적이긴 해도 그녀의 말을 따르며 살아왔던 대가가 결국 날 넘기는 것이라니.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아.’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말롱 부인이 날 데려가고자 한다면 원장은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이전에 그랬듯이.
‘말롱 부인이 날 데려가려 했던 이유는 내 외모와 귀가 안 들린다는 것 때문이었어.’
이번에는 귀가 들린다는 걸 알려 주면 자연스레 다른 아이에게 눈을 돌리지 않을까?
그런데 이번에도 날 마음에 들어 하면 어떡하지?
아니야. 이런 생각 하지 말고 일단 다른 수를 낼 생각을 하자.
나는 마리 언니가 묶어 준 머리를 풀어 손으로 문질렀다.
고수머리로 태어난 탓인지 몇 번 문지르지 않았는데도 내 머리카락은 금세 부스스해졌다.
기껏 신경 써 준 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예쁘게 하고 있어 봤자 눈에 띌 뿐이었으니까.
경험상 말롱 부인 말고는 내 귀가 안 들린다는 걸 알고도 눈독 들이는 이들은 없겠지만…….
그래도 귀찮은 일은 방지하고 싶었다.
‘마리 언니가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문고리에 묶어 두는 게 좋겠지.’
언니의 리본은 낡고 해져 다른 아이들이 보기에 별로 탐나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니 누가 가져갈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몇 살이지?’
말롱 부인이 언제 올지 대충이라도 알아야 각오하고 도망칠 수 있을 텐데.
아직 보육원에 있는 걸 보면 말롱 부인이 오기 전이겠지?
그때 내가 아홉 살 때였으니 그쯤이거나 그 아래일 테고.
‘그래도 자세한 내 나이를 알아야 하는데 나중에 마리 언니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어.’
막 그렇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컹컹! 컹!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나는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았다.
‘방금, 뭐야?’
깜짝 놀란 나와 달리 내 주위에 있는 아이들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신난 얼굴이었다.
“얘들아, 블러디가 짖었어! 원장 엄마가 왔나 봐!”
블러디?
잠시 기억을 되새긴 끝에 나는 원장이 키우던 개의 이름이란 걸 기억해 냈다.
늘 보육원의 입구를 지키던 덩치 큰 사냥개.
‘그 개의 이름이 블러디였지.’
그럼 방금 소리가 개 짖는 소리구나…….
깨달음에 나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데 또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 역시 나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인지라 절로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어머나.”
낯익은 여자가 문을 열며 들어왔다.
인위적이다 싶을 정도로 윤기 나는 금발, 입가에 두드러지는 점까지.
“다들 부모님을 맞이하러 나와 있었구나. 착하기도 하지.”
나는 간드러지게 웃는 여자를 보며 멈칫했다.
‘보육원 원장이야.’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으나 달갑진 않았다.
원장과는 좋은 기억이 전혀 없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들어오시죠.”
원장이 문밖을 보며 말하자 갈색 피부를 가진 장신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외국인?’
제국인은 피부가 하얬으니 내가 이렇게 추측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예전에도 저런 사람이 보육원을 찾아왔었던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또 다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나도 모르게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자, 얘들아.”
경직된 나와 달리 원장이 손뼉을 쳐 이목을 집중시키며 말했다.
“너희를 보러 여기까지 오신 분들이야. 이분은 소리야 왕국에서 오신 귀족분이시고.”
원장이 남자를 가리켰던 손을 움직여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이분은 우리 보육원에 늘 도움을 주시는 좋은 분이란다.”
원장은 여자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지만, 나는 저 여자를 알고 있었다.
‘말롱 자작 부인.’
다갈색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그녀는 내가 기억하던 얼굴보다 젊었지만 확실했다.
그보다 이렇게 바로 말롱 부인이 온다고?
“자자, 너희를 보러 오신 두 분을 환영해 드려야겠지? 우리 인사 한번 크게 해 볼까?”
“아녕하떼요!”
“안녕하세요!”
아이들이 밝고 크게 인사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새 부모에게 입양되고 싶은 아이들은 평소 연습한 대로 열심히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말롱 부인과 남자는 무심했다. 그다지 흥미가 당기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다른 아이들을 지나 내 차례가 왔을 때였다.
“흐응?”
나를 본 말롱 부인의 갈색 눈이 반짝였다.
흥미가 돋을 때 저런 눈빛을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을까, 나는 반사적으로 내 양손을 맞잡았다.
“예쁜 아이구나.”
언제 적인가 한번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말.
일부러 눈에 안 띄려고 머리까지 부스스하게 만들었는데…….
“이름이 뭐니?”
내게 가까이 다가온 말롱 부인이 상냥한 척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애니,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단다.’
‘소르겐 백작님께서 네가 필요하다고 하시는구나.’
말롱 부인의 얼굴 위로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이 환각처럼 겹쳐 보이는 것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간다. 내가 입을 열지 못하는 동안 원장이 은근슬쩍 날 가리며 말했다.
“오호호, 죄송해요, 부인. 이 아이는 귀머거리라서 소리를 듣지 못한답니다. 방금 부인께서 하신 말씀도 못 들었을 거예요.”
“귀머거리?”
“네. 귀가 안 들려요. 보육원 앞에서 주웠을 때부터 그랬지요. 불쌍하게도 말이죠.”
원장이 날 힐끔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아이 빼고 모두 정상이니 다른 아이들을 보시죠.”
넌지시 내 옆에 있던 아이들을 밀쳐 말롱 부인에게 다가가게 했으나 오히려 역효과였다.
“다른 아이들은 됐어. 난 이 아이가 마음에 들거든.”
“……진담이신가요?”
“마담에겐 내가 실없는 농이나 칠 사람으로 보이나 봐?”
“그, 그럴 리 있나요? 그저 보통은 꺼려하는지라…….”
“난 아니야. 귀머거리라 내 말도 못 알아듣는다며?”
말롱 부인이 덧붙였다.
“마침 입이 무거운 하녀가 필요했는데 이 애가 제격인 것 같네. 귀머거리니 말도 못 할 테고, 듣지도 못하겠지.”
“…….”
“생긴 것도 귀여우니 내 체면 살리기도 좋고.”
말롱 부인은 부채 끝으로 내 턱 밑을 받쳐 올렸다.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러면 안 돼.’
지금은 저 외국인 남자와 다른 아이들이 보고 있으니 원장이 말롱 부인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롱 부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결국 똑같아질 거야.’
말롱 부인의 하녀로 가게 되어 결국엔 그 징그러운 소르겐 백작에게 내던져지고, 벨로크 대공과 마주해 죽게 되겠지.
‘싫어. 그건.’
나는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 밑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지금 이 행동이 불러올 결과가 이전보단 나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시도조차 안 해 보고 전과 같은 걸 반복하는 것보단 낫겠지.’
결심한 나는 말롱 부인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말, 아라들을 수 이떠요.”(말 알아들을 수 있어요.)
아직은 생소하지만 내 것이 확실한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울렸다.
“너, 너, 어떻게……?”
원장이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차분히 덧붙였다.
“저 귀머거리 아니에요.”
원래는 귀가 안 들렸지만, 지금은 들리니까 거짓말은 아니겠지.
내 말을 들은 말롱 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매섭게 원장에게 쏘아붙였다.
“귀머거리라며?”
“오, 오해세요, 부인. 저 아이는 분명 귀머거리가 맞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 대화를 듣고 저렇게 말할 수 있다고? 지금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말롱 부인은 이미 원장을 안 믿는 눈치였다.
믿었다면 저렇게 부릅뜬 눈으로 원장을 노려볼 리 없을 테니까.
사실 말롱 부인은 뒷말과 거짓말을 혐오했다.
어렸을 때 친하다고 생각했던 영애가 아파서 생일 연회가 무산되었다고 거짓말하고, 자신만 쏙 빼놓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연회를 한 걸 알게 됐다던가.
그녀는 내가 귀머거리이니 못 들을 거라는 이유로 날 앞에 두고 혼잣말을 할 때가 잦아 알게 된 것이었다.
“다음 후원액은 좀 생각해 봐야겠어.”
“예?”
원장이 되묻자 말롱 부인이 쐐기 박았다.
“정말 못 들어서 묻는 건가?”
“아, 아니…….”
막대한 후원금을 받으면서도 아이들에게 최대한 아끼고, 모두 제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었다.
돈에 미쳐 암흑가의 사람과 결탁한 사람이다.
그런데 후원금이 줄어든다니?
그야말로 날벼락이겠지.
“부인, 지금은 정말 오해……!”
“그만.”
말롱 부인이 부채로 원장의 손등을 탁 때렸다.
“내가 구질구질한 건 싫어한다는 걸 알 텐데? 그리고…….”
말롱 부인이 부채 끝으로 날 가리켰다.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