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46)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46화(46/125)
#46
단순히 사슴 모양으로 양각된 거였다면 무늬인가 보다 넘어갔을 터다.
하지만 금으로 양각된 사슴 모양은 전생에서 죽기 직전에 본 문양을 떠올리게 했다.
‘비슷한 정도가 아니야. 똑같아.’
아빠를 반역자라고 칭하며 시신을 수습해 가고, 날 죽이려 했던 정체 모를 무리.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했던 젊은 남자가 끼고 있던 반지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황금 사슴 문양.
“첼시, 첼시.”
“네, 아가씨.”
“이 오르골 말인데 어디서 선물한 건지 알아?”
“실베스터 공작가에서 보냈을 거예요.”
그 말을 해 놓고 첼시는 명확히 확인해 보겠다며 서랍을 열어 종이를 꺼내 읽었다.
“다시 확인했는데 맞네요. 실베스터 공작가에서 들어온 선물이에요.”
‘실베스터 공작가.’
나는 속으로 되뇌며 기억을 떠올렸다.
“혹시 거기에 내 또래의 남자아이가 있어?”
“네, 있어요.”
첼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아가씨보다 두 살인가, 세 살인가 더 많을 거예요. 병약해서 저택에서 잘 안 나온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아요.”
병약하다고?
나는 제 말에 이의를 제기한 남자를 단번에 죽이던 청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검을 쓰는 사람이 병약할 리 없을 텐데…….
‘내 짐작이 틀렸나?’
그 남자아이가 밝은 금발을 가졌는지 아느냐고 물으려던 때였다.
“그런데 실베스터에 공자만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움찔했다.
내 궁금증을 해결할 생각에만 급급해 이런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대비해 둔 게 없었으므로.
“그, 들었어.”
“가정 교사한테 들으셨어요?”
“응. 선생님께.”
어물쩍 한 대답에 첼시가 알아서 이유를 덧붙이며 납득했다.
휴, 다행이다. 잘 넘어가서.
* * *
여느 때처럼 아빠와 함께 식사하고 나온 후식을 먹던 나는 아빠의 옆에 서 있는 집사를 흘긋 봤다.
평소에도 저랬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식사할 때 집사는 밖에 있고는 했다.
게다가 집사가 들고 있는 종이 뭉치도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아빠가 다사다망해 밥을 먹으며 서류를 처리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정작 아빠가 종이 뭉치에 시선을 주는 일은 없었다.
‘저건 뭘까.’
궁금하지만 먼저 묻기 어려워 끙끙 앓던 때였다.
“저게 신경 쓰이나 보군.”
아빠가 집사를 눈짓하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가만 보면 아빠도 눈치가 참 빠르다니까.
“후식을 다 먹으면 보여 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가져와.”
앗, 내가 봐야 하는 거였어?
저러니 더 궁금해진다.
곧 집사가 내 앞에 종이를 여러 장 펼쳐 놓았다. 눈대중으로 세어도 대충 열 장이 넘는다.
‘이게 뭐지?’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종이를 들여다봤다.
어려운 단어들투성이다. 하지만 읽을 수는 있었다.
‘보육원 건물, 후보, 토지 매매, 위치…….’
내용을 이해하는 건 별개였지만.
더듬더듬 몇 줄 읽었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이걸 왜 나한테 보여 주지?’
막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 아빠가 입을 열었다.
“보육원을 지을 토지 후보들이다. 네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고르도록.”
네?
“원할 때 쉽게 갈 수 있도록 전부 수도에 있는 곳들로 선정했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면 거기에 보육원을 지을 거다.”
“보육원을 짓는다고요?”
“그래.”
나는 멍하니 아빠를 바라봤다.
마리 언니가 보육원을 꾸리게 해 달라고 부탁한 건 나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원장이 없는 보육원을 언니가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한 거였는데.
‘설마 건물부터 올리려 들 줄이야.’
부담스럽다!
미치도록 부담스러워!
당장이라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리 언니를 위한 거니까.
내 기억에 의하면 브리엔츠 보육원은 외관과 원장실, 그리고 중앙 현관을 제외하고는 멀쩡한 곳이 드물었다.
보육원에 인력이라고는 마리 언니와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뿐이었으니까.
청소는 어찌어찌해도 낙후된 시설을 어떻게 할 도리는 없었다.
심지어 죽은 원장은 건물 보수를 하느니 그 돈을 아껴 제 사리사욕을 채우고는 했으니…….
‘고칠 게 많은 곳보다는 새로 지은 곳이 더 좋을 거야.’
그 전에 보육원을 지을 땅부터 골라야겠지만.
종이를 다시 보고 내용을 몇 줄 읽던 나는 으, 소리를 내며 곧바로 시선을 떼었다.
“마음에 드는 게 없나?”
“아, 아니요. 그냥 어디가 좋은 건지 몰라서요…….”
아빠의 험악한 표정을 본 나는 주춤했다.
생각보다 아빠가 물렁물렁하다는 걸 알아도 저런 얼굴을 하면 무서웠다.
인상이 오죽 험악해야지.
“어쩔 수 없군.”
아빠가 손끝으로 가볍게 식탁을 두드렸다.
“다 사들여 건물을 지은 다음 보여 주마.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면 다른 부지를 찾고.”
머릿속에 물음표 수십 개가 가득 들어찬다.
지금 아빠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 종이에 있는 것들을 전부 사들이겠다고?
게다가 건물까지 짓고?
“내 딸의 은인을 위한 건데 허투루 할 수 없지.”
생일 선물 얘기를 하며 자신은 이 나이쯤에 별장을 가졌다고 할 때는 그러려니 했다.
내게 마법 반지를 선물해 줬을 때도 넘겼다.
‘하지만 이건 심하잖아!’
보육원을 지을 정도라면 제법 큰 부지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땅을 일단 사고, 건물까지 지은 다음에 다시 보여 주겠다고?
세상에 돈 자랑도 이런 자랑이 또 없을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러지?
이전부터 씀씀이가 남다르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당황한 나와 달리 아빠는 집사를 불렀다.
“더스틴.”
“예, 전하.”
“지금 가서 이 부지들을…….”
“아, 아빠!”
내 외침에 아빠와 집사가 내 쪽을 바라봤다.
내버려 두면 정말 다 사들일 것 같아 일단 불렀는데 어, 어떡하지?
“돈은 소중해요!”
내 말에 아빠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당황한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아니, 이게 아닌데?
그냥 땅을 사지 말고 잠깐 마리 언니와 의논할 시간을 달라고 해야 했는데!
마리 언니한테는 비밀이니 정말 상의하진 못할 테지만, 그래도! 어쨌든!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다.
아무 말도 못 해 적막한 가운데 침묵을 깬 것은 집사였다.
“역시 아가씨께서는 영민하십니다.”
“……?”
으응?
갑자기 무슨 말이지?
집사를 바라보니 그가 주름 잡힌 눈매를 휘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보통 아가씨의 나이 때는 사 주면 다 좋다고 할 텐데……. 벌써 가문을 위할 줄 아시고 참으로 영민하시지 않습니까?”
둘이 무슨 연관인가 했더니, 저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구나.
딱히 저런 마음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알아서 오해해 주면 좋지.’
속으로 집사에게 감사해하는데 아빠가 눈살을 찌푸렸다.
“베로니카.”
“네?”
“고작 저 정도 산다고 가문이 힘들어지진 않는다.”
“……?”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대공가의 재산은 많아. 그러니 우려할 필요 없다.”
지금 돈 자랑하는 건가?
어쩐지 내 생일 연회를 생각나게 하는 말이었다.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보통은 몇 달 걸리는 연회를 몇 주 만에 준비하게 했다더니.’
난 아빠가 돈 자랑하는 것 자체에는 관심 없었다.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니 가치관이나 배포도 다른 게 당연할 터이니.
어디까지나 나와 연관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아무리 대공저의 호화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졌다 한들 아직 내 속에는 고아 출신의 평민인 ‘애니’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예시가 다 사들이겠다는 아빠의 배포에 놀라 엄청난 속도로 뛰는 내 심장이었다.
으아, 가슴 콩닥거려.
“그래도 내 딸이긴 하군.”
“예, 전하를 닮으셨습니다.”
대체 어디가? 어느 면이?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하는 나와 달리 아빠와 집사의 분위기는 화목했다.
“아가씨의 마음이 기특하니 생각할 시간을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시간이 필요한가?”
네! 완전!
집사에게 물은 거라고 착각하기엔 아빠의 시선이 향한 곳은 명확했다.
나는 날 보고 있는 아빠에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주일 정도면 되나?”
그 정도면 되겠지……?
충분하다고 말한 나는 조금 급하게 케이크를 먹어 치웠다.
어서 마리 언니에게 가서 이 일을 의논하고 싶었다.
‘맞다. 그 전에 감사 인사를 해야지.’
나는 고민하다 포크를 내려놓고 아빠를 불렀다.
“저, 아빠.”
“……?”
아빠는 내가 자신을 부를 줄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평소에는 별말 없이 식사만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아빠의 옆으로 총총 달려갔다.
* * *
아시드는 제 옆으로 온 베로니카를 바라봤다.
평상시와 다른 태도에 의문을 품기도 잠시, 아이가 그를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안아 달라는 건가?’
이미 여러 차례 경험이 있는 아시드는 선뜻 의자를 뒤로 뺐다.
그리고 베로니카에게 허리를 숙이며 아이를 들어 올리려던 때였다.
쪽.
뺨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온기에 아시드는 그대로 굳었다.
그사이 뽀뽀를 끝낸 베로니카가 수줍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빠.”
다가올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떨어진다.
돌아서서 포르르 멀어지는 모양새가 어쩐지 작은 새가 달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베로니카가 식당을 나가자 문의 경첩이 탁 맞물렸다.
뒤늦게 아시드는 이성을 되찾았다.
“더스틴.”
“예, 전하.”
베로니카의 귀여운 행동에 흐뭇하게 웃던 더스틴이 표정을 바로 하며 고개를 숙였다.
“당장 지주들을 불러라.”
“지주들을 말입니까?”
“그래. 베로니카에게 보여 준 부지들을 다 사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