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47)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47화(47/125)
#47
평소였다면 군말 없이 명을 이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집사로 일해 온 그조차 놀랄 정도로 생각지 못한 명령이었으므로.
“아가씨께는, 분명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다고……?”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했지, 사지 않겠다고는 안 했다.”
맙소사.
더스틴은 제 입이 떡 벌어지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그의 턱은 온전히 다물려 있었다.
‘전하께서 아가씨를 각별하게 여기시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제 집사의 심정을 눈치채지 못한 아시드가 검지 끝으로 식탁을 부산스레 두드렸다.
“기껏 생각해 결정해 왔는데 그 부지가 이미 팔렸으면 실망할 것 아닌가?”
얼핏 들으면 꽤 일리 있는 말이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사람은 고민이 많아지니.
하물며 베로니카는 어린아이였다.
그 작은 머리로 열심히 골라 왔는데 이미 팔린 부지라 다른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면 실망이 클 터였다.
다만, 아시드가 크게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보통 그 가격의 터는 쉽게 거래되지 않습니다만.’
하나하나 부지들을 알아보고 직접 발품을 팔아 살펴보고 정리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이런데 가격까지 제법 높다. 거래가 쉽게 이루어질 리가.
더스틴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심지어 베로니카에게 주어진 기간은 고작 일주일이었다.
하지만 더스틴은 아시드를 설득하는 대신 그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지주들에게 연락을 넣겠습니다.”
어차피 말려도 듣지 않을 테니까.
* * *
으아! 해 버렸다! 해 버렸어!
식당에서 뛰쳐나온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쌌다.
밖에서 날 기다리던 샤비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였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하겠어!
아빠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느라 뽀뽀를 하고 나왔다는 걸!
뽀뽀는 결코 내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빚진 게 많고 아빠가 날 위해 준다는 걸 알기에 나름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첫째, 난 아빠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른다는 것.
둘째, 내게는 돈이 없다는 것.
그래서 마리 언니에게 남한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으면 어떡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진심 어린 인사가 고마움을 표현하는 법 아닐까?’
‘진심 어린 인사?’
‘응. 베리, 너 같은 경우에는…….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뽀뽀를 해 주면 될 것 같은데?’
사실 그 말을 들은 후에도 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가 내 뽀뽀를 좋아할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달리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빠가 자꾸 나한테 잘해 주니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괜찮아할 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솟구쳤고…….
그런 이유로 방금의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하고 나니 자괴감이 마구마구 솟구쳤다.
으허, 괜히 했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거야!
아빠가 날 붙잡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지금 뭘 한 거냐고 추궁이라도 했다면 부끄러워서 땅으로 꺼지고 싶었을 테니까.
‘앗, 그러고 보니 토지 종이!’
부끄러워 무작정 나오는 바람에 종이들을 챙겨 올 생각을 못 했다.
‘나중에 집사가 갖다주겠지?’
그때 슬쩍 물어 의논해야지.
아무렴 나보다는 집사가 더 잘 알 테니까.
“마리 언니?”
내 부름에 방문 앞을 서성이던 언니가 뒤돌아봤다.
―베리.
“여기서 뭐 해?”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날 찾아와서까지 해야 할 말이라니.
어쩐지 살짝 불길한걸.
그리고…….
―대공저를 나갈까 해.
내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나간다고? 왜?”
나는 깜짝 놀라 마리 언니에게 바짝 엉겨 붙었다.
왠지 긴 얘기가 될 것 같아 언니를 방으로 들여 다시 물었더니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이야.
“여기가 별로야? 아니면 누가 언니를 괴롭혀?”
―그런 일은 없었어. 생활도 편해. 집사님께서 내 편의를 잘 봐주셔서.
“그럼 왜 나가겠다는 거야?”
―너무 신세만 지는 것 같아서.
마리 언니가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손님처럼 있는 게 좀 그렇기도 하고,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을 수 없으니까.
“계속 있어도 돼. 아빠한테 말하면 아마 들어줄 거야.”
―아니야. 나도 내 길을 찾아야지. 네 도움은 넘치도록 받았으니까.
“여기에 있는 게 싫어?”
―싫다기보다는, 미안해서. 너무 편안하게 있기만 하니까…….
지극히 마리 언니다운 이유였다.
언니는 지나치게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원장이 온갖 잡일을 시켜도 묵묵히 해내고, 늘 웃으며 아이들을 돌볼 정도로.
대공저에 온 뒤로 편히 있기만 하니 답답했겠지.
―집사님께 말하기 전에 네게 먼저 알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으로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언니와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진 않았지만, 이건 너무 빨랐다.
‘어쩔 수 없어. 그걸 말하자.’
결심한 나는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언니한테 할 말 있어.”
원래는 꼭꼭 숨기고 말 안 해 주려고 했던 거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언니를 깜짝 놀라 넘어가게 하려다 내가 먼저 넘어가게 생겼으니까.
“보육원을 짓기로 했어.”
―보육원을?
“응. 그리고 거길 언니한테 맡길 거야.”
예상대로 언니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저번에, 아이들이 아이답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제야 마리 언니는 왜 내가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 깨달은 듯했다.
―베리, 그건.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아빠도 된다고 했고.”
나는 일부러 언니의 손짓들을 보지 않고 외면했다.
“언니는 늘 내게 잘해 줬잖아. 난 언니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
말하다 보니 울적해진다.
비록 지금은 언니가 살아 있지만, 나는 언니가 나 때문에 죽던 때를 잊지 못했다.
“언니도 알다시피 마침 나한텐 좋은 아빠도 생겼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
나는 또 한 번 아빠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처음 그에게 입양되었을 때는 불행으로 여겼으나 지금만큼은 행운이었다.
아빠가 아니었다면 이러지 못했을 테니.
“언니는 그래도 돼. 언니는 보상받을 자격이 있어.”
마리 언니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한 얼굴로 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네 마음은 고맙지만, 그렇다면 더욱더 나가야만 해.
“어째서? 왜 더 나가려고 하는 거야?”
―받은 게 너무 많잖아. 받을 것도. 조금이라도 좋으니 내 힘으로 일어서서 네게 돌려줄 수 있으면 좋겠어.
“언니가 내 옆에 있으면 돼. 보육원이 완성될 때까지만 있으면 안 돼?”
―새로 짓는다면 몇 달은 걸릴 거야. 그때까지 이렇게 지내고 싶지 않아.
“…….”
―여길 나간다 해도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닌걸. 자주 찾아올게.
언니가 날 달래듯 내 등을 토닥여 줬다.
조금도 위로가 안 되었지만.
* * *
‘이걸로 마지막.’
더스틴은 아시드를 대신해 지주를 배웅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결국 다 사들이셨군.’
모든 것이 반나절도 되지 않아 이뤄진 일이었다.
지주들은 아시드가 부른다는 말에 곧바로 달려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시드에 대한 인식은 직위를 제쳐 놓고도 부정적인 만큼 대부분 두려워했다.
그런 그의 부름에 늦게 응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당연히 흥정도 있을 수 없다.
아시드는 통상적인 가격에 속전속결로 부지를 사들였다.
지주를 배웅하고 돌아온 더스틴이 잠시 안경을 벗고 관자놀이를 누르던 때였다.
똑똑―.
“집사님, 저 마리입니다.”
생소한 음성에 더스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마리는 베로니카의 손님이었다. 대우가 남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자 황태자가 선물한 목걸이를 목에 건 마리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집사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우선 들어와요.”
“감사합니다.”
“편한 곳에 앉아요. 차 중에 꺼리는 게 있나요?”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없을 것 같지만……. 안 주셔도 돼요. 긴 이야기는 아니에요.”
더스틴은 그가 즐겨 마시는 캐모마일차를 따르려다 말고 마리를 바라봤다.
긴장해서인지, 아니면 목걸이가 어색해서인지 마리는 제 목을 연신 매만졌다.
“근시일 내로 저택을 나가겠다고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베리에게도 말했고요.”
“그렇습니까?”
더스틴은 속으로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직접 본 바로나 전해 들은 바로나 베로니카는 마리를 특별하게 여겼다. 쉽게 허락해 줬을 거 같지는 않은데.
“아쉽군요. 마리 양이 오래 있어 줬으면 했습니다.”
“……?”
“마리 양이 온 뒤로 아가씨가 줄곧 즐거워하셨거든요. 이전보다 더 밝아지시기도 했고.”
마리의 얼굴이 설핏 어두워졌다.
그러잖아도 베로니카가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더스틴이야 모르고 한 말이겠지만, 저런 말을 들으니 신경 쓰였다.
어린 시절부터 보육원에서 자라 온 마리는 큰 이후에도 원장의 밑에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았다.
보육원 아이들 중에 마음이 안 가는 아이는 맹세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유독 마음 쓰이는 아이들이 있었다.
특히 베로니카가 그러했다.
갓난아기 때부터 봐 온 아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저와 은근 닮은 터라 유독 더 정을 주고 보살폈기에 갑자기 청력이 회복되었다 했을 때는 마냥 기쁘기만 했다.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제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지만.
‘하지만, 베리를 생각하면 더욱 남을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