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52)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52화(52/125)
#52
“네가 그렇게 봤다면 그런 거겠지. 쉬어도 좋다.”
“감사합니다.”
미하엘은 딱딱하게 인사한 뒤 집무실을 나왔다. 막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도련님.”
돌아보니 하녀 겸 살수인 힐다가 그에게 은빛을 띠는 잎줄기를 내밀었다.
“이걸 떨어뜨리셨습니다.”
프테리디움.
아까 보육원에서 베로니카와 함께 자르던 식물의 잎줄기였다.
옷도 갈아입고 잘 갈무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붙어 여기까지 따라온 건지.
“그딴 건 알아서 치워.”
“죄송합니다.”
힐다가 잎줄기를 버리기 위해 따로 챙길 때였다.
“잠깐.”
“…….”
“내가 버릴게.”
미하엘이 힐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변덕에 의아해할 법도 했지만, 힐다는 기계적으로 잎줄기를 건네었다.
미하엘이 걸음을 옮기자 힐다 역시 뒤를 따르려 했다.
“따라오지 마.”
“예, 도련님.”
연이어 들려온 명령에 힐다는 즉시 물러났다.
미하엘은 홀로 걸었다. 걷다 보니 복도 중앙 벽에 걸린 커다란 황금 사슴 장식이 보인다.
장식 외에도 복도는 전체적으로 화려하나 삭막했다.
소란스럽고 온기가 묻어나던 펠리시타스 보육원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요, 집이었다.
미하엘 ‘실베스터’인 이상 있어야 하는 곳.
평생 벗어나지 못할 화려한 새장.
미하엘은 손에 쥔 프테리디움 잎줄기를 내려다봤다.
은빛인 앞면과 달리 자줏빛인 뒷면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같은 식물체인데 앞면과 뒷면이 다르다.
‘벨로크 대공의 딸.’
그 애가 사는 세계는 아마도 이 앞면이겠지.
자신과는 다르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지 않아.”
머리색보다 훨씬 짙은 금색 눈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 * *
‘아빠는 언제 올까?’
나는 글레나 부인이 내준 숙제인 《어린 귀족을 위한 제국사》 책을 펴 놓고 정리하다 말고 책상에 엎드렸다.
숙제하기 싫기도 했지만 아빠의 근황이 신경 쓰였다.
아무리 아빠의 부재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으니까.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아빠는 언제? 대체 뭐 하길래 안 들어오지? 많이 바쁜가……?]으아악! 종이 위에 써 버렸잖아!
급하게 손을 멈췄으나 늦었다. 이미 삐뚤삐뚤한 문장이 버젓이 적힌 뒤였으므로.
‘어쩌지? 덧칠할까?’
방금 쓴 문장 위에 길게 두 줄을 그어 보지만, 그걸로 글씨를 다 가리는 건 역부족이었다.
‘조금만 더 칠하면 가릴 수 있을 거야.’
깃펜에 새로 잉크를 묻혀 열심히 손을 움직이던 때였다.
찌익―.
“망했다.”
나는 펜촉보다 더 크고 길게 찢어진 종이를 보며 절망했다. 욕심이 불러온 참사였다.
“다시 해야 하잖아…….”
어흑, 덜 가려져도 만족할걸. 두 줄만 그었어도 내용을 알아보긴 어려웠을 텐데.
기껏 정리했던 부분을 다시 종이에 정리해야 한다 생각하니 의욕이 뚝 떨어졌다.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저택에 돌아오기만 했어도, 아니,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 주기만 했어도 이렇게 생각할 일은 없었을 텐데!
“하아.”
책상 위에 엎드리니 옷 밖으로 튀어나와 책상에 널브러진 반지 목걸이가 보인다.
무심코 줄을 들어 올리자 꼬였던 줄이 풀리며 반지가 한 바퀴 돌았다.
붉은 깃털 모양의 보석이 박힌 반지는 생일 연회 날, 아빠가 준 거였다.
‘그러고 보니 아빠는 생일이 언제지?’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와, 아빠에 대해 아는 게 이렇게 없었구나.’
나는 새삼 놀랐다. 이렇게까지 무지할 줄은.
물론 내가 일부러 아빠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도 영향을 끼쳤을 거다.
그래도 생일을 모르는 건 좀 충격이었다. 심지어 아빠는 내 생일을 챙겨 줬는데.
‘나빴네. 내가.’
끙, 앓는 소리를 낸 나는 소파에 앉아 자수를 놓는 샤비를 쳐다봤다.
“샤비.”
“네, 아가씨.”
“혹시 아빠 생일이 언제인지 알아?”
“주인님의 생일이라면…….”
샤비가 눈살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괜찮아.”
“그래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샤비는 아니었는지 계속 죄스러워하며 거듭 사과했다.
“첼시는 아빠의 생일을 알고 있을까?”
“글쎄요. 첼시보다는 집사님께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집사님은 확실히 아실 테니까요.”
“그게 낫겠다. 고마워!”
나는 바로 의자에서 내려왔다. 말 나온 김에 물어봐야지!
“집사님께 가시려고요?”
“응!”
“그럼 저도…….”
“혼자 다녀올 수 있어.”
나는 자수 놓던 것들을 정리하며 일어나려 하는 샤비를 저지했다.
―어디 가? 나가?
‘응. 잠깐만.’
―나도 갈래!
낮잠을 즐기는 줄 알았던 슈가가 내 쪽으로 포르르 날아왔다. 슈가를 받자 룩스도 폴짝폴짝 뛰었다.
―나도, 찍!
결국, 나는 둘을 데리고 방을 나왔다.
―베리, 베리! 나 그거 탈래!
‘그거?’
―신기한 반지!
슈가가 신나게 외쳤다. 여기서 말하는 ‘신기한 반지’는 아빠가 준 반지 목걸이였다.
내게는 선명히 잘 보이지만, 투명화 마법이 걸린 반지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룩스와 슈가에게도 안 보였다.
그런데 아빠가 말한 대로 형태는 느껴져 둘은 저렇게 말하고는 했다. 특히 슈가는 반지에 타는 걸 좋아했다.
―사람 없으니까 타도 돼?
“그래. 잠깐 있어 봐.”
나는 옷 사이로 감춰 뒀던 목걸이를 꺼내어 슈가를 조심스레 그 위에 올려 두었다.
슈가는 몇 번 발을 움직인 끝에 목걸이 줄을 쥐고, 자기보다 한참 작은 반지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명색이 하늘다람쥐인 터라 딱히 무겁진 않았다.
―이제 앞으로 흔들흔들해 줘!
“그게 그렇게 재밌어?”
―응!
나는 잠깐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러자 슈가가 기분 좋은 듯 삑삑 울었다.
―나도 탈래, 찍!
‘이따가 타게 해 줄게.’
내 어깨 위에 있는 룩스를 달래며 걷던 때였다.
―베리! 더 빨리 흔들흔들…… 으아앗!
무언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더니 슈가가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재빨리 양손을 모아 떨어지는 슈가를 받아 냈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으, 응. 그런데 어떡해? 줄 끊어졌잖아.
“고쳐 달라고 하면 될 거야.”
나는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 줄을 주웠다.
이음새 부분이 끊겨 있었다.
‘생각보다 약하구나.’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니 튼튼할 줄 알았는데…….
음, 아닌가? 넉 달 동안 슈가와 룩스를 태우고 버텼으니.
‘반지는 어디 있지?’
줄은 찾았지만, 줄에 걸려 있던 반지는 안 보였다.
―뭐 찾아, 찍?
“반지가 없어. 어디 갔지?”
긴 복도에 보이는 거라고는 바닥에 깔린 베이지색 양탄자뿐이었다.
못 찾으면 어떡하지? 나한테만 보이는 반지라 도와 달라고 할 수도 없는데…….
아빠한테 말하면 되나?
아빠가 마법을 걸었으니 찾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때였다. 룩스가 다급히 날 불렀다.
―베리! 여기! 여기서 냄새가 나, 찍!
룩스가 앙증맞은 앞발을 뻗어 제일 가까이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냄새?’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문 앞에 엎드렸던 나는 룩스가 한 말의 뜻을 깨달았다.
바닥과 문이 맞닿는 틈 사이에 반지가 끼여 있었다.
―있어, 찍?
“와, 이걸 어떻게 찾았어?”
―내 코가 좀 좋아. 나 잘했지, 찍?
“응. 잘했어.”
내 칭찬에 룩스가 가슴을 쭉 펴며 “엣헴, 나 이런 생쥐야, 찍!” 하고 잘난 체했다.
룩스를 한번 쓰다듬어 준 나는 반지를 꺼내려 애썼다.
문틈은 딱 반지의 굵기만큼 좁았다. 손톱으로 살살 밀어내 보지만, 단단히 끼여 버린 모양인지 반지는 전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가늘고 길쭉한 거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그런 물건이 있을 리 없었다.
―왜 그래?
“반지가 문틈에 껴서 안 빠지네. 문을 열어야 할 것 같아.”
나는 방문을 자세히 살폈다.
집사와 몇몇 하녀와 하인을 빼고 보통 사용인들의 숙소는 별채에 있었다.
게다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내 방에서 그리 멀지 않아 사용인들의 방은 아닐 터였다.
아마 손님을 위한 객실이거나 비어 있는 방일 듯싶은데.
‘혹시 모르니까.’
문을 두드렸지만, 문 너머는 조용했다.
나는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철컥―.
“잠겨 있네.”
―그럼 어떡해, 찍?
“집사한테 부탁해서 잠깐 열어 달라고 해야지. 어차피 가던 길이었…… 슈가야? 어디 가!”
내가 잡기도 전에 슈가가 재빠르게 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더니 천장 쪽에 있는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슈가가 들어가기 전까진 여태껏 장식인 줄 알았던 터라 나는 꽤 놀랐다.
지금 보니 꽃을 형상화한 듯한 흰 석고 장식 가운데 제법 큰 구멍이 있는 게 보인다.
아마 설렁줄이 지나가는 구멍인 것 같았다.
그런데 슈가는 왜 저길 들어간 거지?
‘설마?’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멈칫하기도 잠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지.
슈가가 문을 열어 주려고 들어갔을 리 없잖아.
쿵!
“슈가! 너, 괜찮아?”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누님, 괜찮은 걸까, 찍?
“그러게.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집사를 데려와서 문을 열어야 하나?
달칵―.
“어?”
안절부절못하던 그때, 내 앞에 있는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