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55)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55화(55/125)
#55
샤비와 첼시가 꽃을 따러 간 동안 저번에 발견한 방에 가기 위해서였다.
저번에야 어찌어찌 혼자 다녀왔다지만, 그 뒤로는 좀처럼 혼자 다닐 기회가 없어 방에 가지 못했다.
내 속셈을 모르는 샤비와 첼시는 웃으며 “네, 많이 따 올게요.”라고 말했다.
그녀들이 꽃을 따러 간 동안 나는 풀물이 묻은 손을 닦고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어디 가, 찍?
“밖에! 금방 돌아올 거니까 먹던 거 마저 먹어!”
룩스와 슈가에게 외친 나는 서둘러 움직였다.
가는 동안 누군가와 마주치진 않을지 우려되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저번에 발견한 방문 앞에 선 나는 주변을 휙휙 살폈다.
‘좋아, 아무도 없지?’
재빨리 문손잡이를 붙잡아 돌리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다행이야. 안 잠겨 있어서.’
내가 다녀간 뒤로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방 안은 저번에 왔을 때와 똑같았다. 불에 탄 듯한 가구들이며 천에 덮인 액자와 달리 기이할 정도로 깨끗한 벽면과 바닥도.
“……깨끗하진 않네.”
나는 바닥에 또렷하게 남은 발자국들을 보고는 급히 생각을 고쳤다.
지금뿐만 아니라 며칠 전에 왔을 때 찍힌 듯한 발자국도 그대로였다. 정말이지, 안 들킨 게 신기할 지경이다.
나는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원래는 집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고 다시는 이 방에 안 오려 했지만…….
‘궁금한걸.’
거의 확신하고 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초상화만 확인하는 거야. 초상화만.”
작게 읊조리며 나는 액자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 있네.”
흰 천으로 덮여 있는 건 그것뿐이었던 만큼 찾는 건 쉬웠다. 천을 걷어 내니 전에 본 초상화가 드러났다.
와, 다시 봐도 예쁘…… 아니, 이렇게 감탄할 때가 아니지!
나는 여자의 머리색과 눈 색을 확인했다.
옅은 갈색 머리에 보랏빛이 도는 푸른 눈, 그리고 ‘레일라’라고 적힌 종잇조각까지.
‘틀림없어. 이건 아빠 전 부인의 초상화야.’
이렇게 멀쩡히 존재하는데, 집사는 왜 없다고 했을까? 선대 황후의 초상화는 보여 줬으면서.
아빠는 어째서 자기가 죽인 사람의 기일 때문에 생일을 챙기지 않는 걸까?
전 부인의 초상화와 함께 있는 이 가구들과 아기용품들의 정체는?
추측이 조금씩 이어지며 완성된다. 그러나 확실한 게 아닌 만큼 나는 깊이 생각하는 걸 그만두었다.
확인되지 않은 걸 혼자 추측하고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나는 도로 천을 덮었다.
지금은 이 방에서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어차피 집사에게 알리고 문을 잠가 달라고 할 거긴 하지만.
‘자진해서 말하는 것과 들켜서 털어놓는 건 다른걸.’
두 번이나 들어온 건…….
음, 이건 말하지 말자. 이번에 처음 들어온 척하는 거야.
방을 나가기 위해 문손잡이 쪽으로 손을 뻗는 그때였다.
끼익―.
내가 열지도 않은 문이 먼저 열렸다.
이윽고 열린 문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과 마주한 나는 그대로 굳었다.
“아가씨?”
문을 연 사람은 집사였다. 내가 놀랐듯이 날 발견한 집사도 꽤 놀란 듯했다.
‘룩스와 슈가를 데려올걸.’
과일을 맛있게 먹고 있길래 안 데려온 게 후회됐다.
둘이 있었다면 집사의 발걸음 소리를 눈치채고 조심하라 말해 줬을 테니까.
“대체 어떻게 이 방에……? 이 방은 분명 잠가 뒀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게, 슈가가 열어 줬어.”
“다람쥐가 문을 열어 줬단 말입니까?”
“응. 아빠가 준 목걸이 줄이 끊어졌거든. 거기 달려 있던 반지가 여기로 들어가서 고민이었는데 슈가가 열어 줘서 꺼낼 수 있었어.”
말하고 나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기분이다. 분명 난 사실을 말했는데.
슬쩍 집사의 표정을 살핀 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혹시 안에 있는 가구들을 보셨습니까?”
“……응.”
잠깐 본 적 없다고 둘러댈까 고민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바닥에 찍힌 발자국들을 떠올리고는 순순히 털어놨지만.
“초상화도 보셨을 테지요.”
끄덕.
“여기 들어오신 건 이번이 처음입니까?”
도리도리.
“그럼 며칠 전에 레일라 님의 초상화를 물으신 게……?”
“미안.”
내 대답에 집사가 착잡한지 마른세수했다.
한편 집사를 보는 나도 혼란스러웠다.
집사가 내게 거짓말했다는 게 확인되었으므로.
“아가씨.”
집사가 내 앞에 쭈그려 앉더니 양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힘을 주지 않아 아프진 않았다.
별개로 집사가 이런 식으로 날 붙잡은 건 처음이라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세월의 흐름이 담겨 새하얗게 세어 버린 속눈썹 아래 날 응시하는 그의 눈은 진중했다.
“대공 전하께는 절대! 절대로, 이 방에 들어온 적이 있다는 걸 말하시면 안 됩니다. 또한, 이 안에서 본 것들도 잊으십시오.”
“왜?”
“전부 아가씨를 위한 것입니다. 아가씨께서는 이 방에 들어온 적도 없고, 본 것도 없으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나를 붙든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한껏 겁에 질린 듯한 집사의 모습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럴게.”
“좋습니다. 이 방은 제가 나중에 다시 잠글 테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집사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돌아봤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아빠가 서 있었다.
‘인기척을 못 느꼈는데 언제 왔지?’
아니, 이건 상관없겠구나.
아빠는 뛰어난 마법사이니 갑자기 나타나는 것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오, 오셨습니까, 전하.”
아빠에게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들킨 것.
그게 문제였을 뿐.
오랜만에 보는 아빠였다. 다시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들 줄 알았는데 지금은 무섭고 머릿속이 새하얗기만 했다.
들키면 안 된다고 한 걸 바로 들켜서가 아니었다.
아빠의 기세가 흉흉해서였다. 서릿발 같은 시선, 그리고…….
“대체, 왜 이 방에 들어가 있는 거지?”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음성.
날카롭고 흉흉한 기세에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두려움, 온몸을 짓누르는 위압감.
마치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전하, 아가씨는 그저…….”
집사가 나 대신 말하려는 듯 입을 열자 벽에 붙어 있던 촛대가 떨어졌다.
챙그랑!
떨어지며 분리된 촛대와 촛대 받침이 카펫 위로 흩어졌다.
“나와라.”
찌를 듯한 살기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나는 아빠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집사가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르게 나를 방에서 나가게 할 때조차도.
“다시는.”
손대지도 않은 방문이 쾅! 거세게 닫혔다.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마라.”
철컥!
분명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 건 내 뒤쪽이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아빠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단단히 잠긴 것만 같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날 한번 훑어본 아빠가 돌아섰다.
차갑기 그지없는 그 뒷모습에 나는 한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 * *
무슨 정신으로 방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다만 내 기분이 엉망진창이 된 건 확실했다.
샤비와 첼시 몰래 나갔다 왔다는 걸 잊은 데다 그녀들이 따 온 토끼풀꽃을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내 상태가 이상한지 샤비와 첼시는 따뜻한 우유를 갖다주며 낮잠을 자라고 권했다.
아무리 침대에 누워 있어도 잠은 안 왔지만.
‘잘못했다고 말하자.’
끊임없이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저녁 먹을 때 아빠한테 빌자고.
하지만 그날 저녁, 아빠는 나와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혼자 저녁을 먹는 내내 감정이 요동쳤다.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다른 빛의 여러 감정이 잔뜩 뒤엉켜 너울이 일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낮의 일이 계속 떠올랐다.
다만, 낮과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마라.’
날 응시하던 싸늘한 시선과 살기 어린 목소리.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회상하고 있자니 숨이 턱 막힌다.
그만큼 아빠는 무서웠다. 어쩌면 이대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결론적으로는 안 죽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느낀 위기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대공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안일하게 있었는지.
‘알고 있어. 원초적인 잘못은 내게 있다는걸.’
잠겨 있던 방에 들어간 데다 한 번으로도 모자라 두 번이나 들어가는 잘못을 저질렀다.
집사의 경고조차 어겼으니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말롱 부인의 밑에서 일하다 그랬다면 호되게 채찍질을 맞았겠지.’
아빠는 날 그냥 보내 줬으니 말롱 부인과 비교하면 훨씬 온화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낮에 내가 느낀 두려움은 말롱 부인 때보다 더 심했다. 아빠가 간 뒤 집사가 내게 해 준 위로들이 하나도 기억 안 날 만큼.
‘잠깐 내가 미쳤던 거야.’
아빠, 아니, 대공이 말랑말랑하다고?
단단한 착각이었다. 늑대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여긴 안전해!’ 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아빠가 내게 잘해 준 건 부정할 생각 없다.
그저……. 아빠가 맹수라는 걸 상기했을 뿐.
안전해 보여도 마음만 먹으면 날 한입에 집어삼킬 수 있는 맹수.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