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58)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58화(58/125)
#58
‘또.’
이상한 일이었다. 왜 저 아이에게서 순간순간 그 사람의 모습이 겹쳐지는 걸까.
분명 이전에도 이랬다가 확고하게 아니라는 결단을 내렸는데.
절대 그럴 수 없는데.
‘어째서.’
하도 여러 번 되뇌어 세뇌라도 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내 부정해 왔던 게, 갑자기 그럴듯하게 보일 리 없지 않은가.
누구보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주변에 델피니움이 많은 탓이다. 아니면 마력을 많이 써서 정신이 불안정하거나. 그래서 혼동하는 게 틀림없으리라.
아시드는 지금 제 상태가 여느 때보다 멀쩡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대신 그는 또 한 번 도망쳤다.
그게 베로니카에게 어떻게 비칠지 모르고.
별개로 아시드는 제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과민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고작 그 몇 마디 하는 게 뭐가 어려워서.
한편,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더스틴은 드디어 아시드가 베로니카와 대화했다고 생각하며 밝은 얼굴을 했다.
“그럼 아가씨와 얘기하고 오시는 길이겠군요.”
“아니.”
“예? 그러면…….”
“보기만 했다.”
더스틴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대화조차 안 했다니?
이 사안에 대해 한마디를 해도 될지 아니면 물러나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러나 아시드의 표정을 보니 금방 결론이 났다.
“후회하시는군요.”
말하자마자 더스틴은 급히 아시드의 눈치를 봤다. 생각으로만 남겨 뒀어야 하거늘.
그러나 아시드가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굳게 다물린 입을 보며 더스틴은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제 추측이 맞는다는 걸.
“다녀오면, 그때.”
“…….”
“그때는 꼭 얘기하지.”
저보다는 아가씨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을.
더스틴은 차오른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아시드는 분명 어엿한 성인 어른이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해서 모든 일에 완벽하고 능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조차 종종 나이에 걸맞지 않은 실수를 하고, 어떤 게 정답인지 모를 때가 있으니까.
“베로니카를 부탁하지. 원하는 건 다 들어주도록 해.”
“그러겠습니다.”
다만, 지금 아시드가 한 결정이 베로니카에게 깊은 상처가 아니기를.
둘 사이가 완전히 어그러지는 계기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 * *
아빠가 돌아선 모습은 한동안 내 머릿속을 괴롭혔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 떠올랐으나 나는 오기로 생각을 지우려 했다.
그 결과물로 이어진 게 첼시와 페리드 경에게 준 화관들이었다.
샤비와 첼시는 화관이 잘 어울렸으나 페리드 경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체구를 생각하면 당연한가 싶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나는 물론이거니와 첼시와 샤비도 웃음을 참았다.
기분이 조금 풀어진 나는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아빠 것도 만들자.’
이전이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테지만, 이미 나는 대공가의 수양딸로 알려졌다.
또 클 때까진 여기에 의탁하기로 마음먹은 상태고 펠리시타스 보육원까지 걸려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나는 아빠한테 잘 보여야만 했다.
그동안은 욱해서 애써 이 사실을 외면했지만 말이다.
‘황궁 도서관을 이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이건 뇌물이다. 이런 게 아빠의 눈에 찰 린 없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뭘 부탁하려면 정성이라도 내보여야겠지.
앞서 몇 번 만들어 본 만큼 화관은 금방 완성되었다.
시간도 마침 저녁을 먹을 때였다. 나는 같이 식사하자고 말할 겸 화관을 들고 아빠를 찾아갔다.
하지만 나를 반긴 건 아빠가 아니라 집사였다.
“전하께서는 조금 전에 외출하셨습니다.”
아까 봤는데 그새 나갔다고?
이런 상황은 생각지 못했던 만큼 나는 크게 당황했다.
“그럼 아빠는 언제 와?”
“좀 걸릴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보다 그 화관은 전하께 드리려고 가져오신 건지요?”
“아, 응. 만든 건데…….”
나는 화관을 뒤로 숨겼다. 풀물에 엉망이 된 손가락이 쓰린 건 둘째치고 아무 쓸모 없어진 내 노력이 민망했다.
“제게 주시겠습니까? 전하께서 돌아오시거든 바로 전할 수 있게 보관하겠습니다.”
“시들 텐데?”
“그래도 좋아하실 겁니다.”
거짓말.
내 속내야 어떻든 자상한 집사의 면전에 대고 그리 말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결국 화관을 건넸다. 집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화관을 소중히 감쌌다.
“아빠가 오면 황실에 편지를 써 달라고 말해 줄 수 있어?”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황궁 도서관에 가고 싶어서.”
“그 정도는 전하를 통하지 않고, 아가씨께서 편지를 쓰셔도 될 겁니다.”
내가 해도 된다고?
믿기지 않아 “정말?”이라고 되묻자 집사가 덧붙였다.
“허락은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만, 아마 흔쾌히 해 주실 겁니다.”
아빠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막상 황제의 허락을 받으려니 마음에 걸린다.
그것도 내가 직접 편지를 써야 한다니.
“편지 말인데, 카드릭…… 아니, 황태자한테 쓰면 안 될까?”
“그런 방법도 있군요. 아마, 그러셔도 될…….”
집사가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왜 저러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집사의 얼굴 위에 난감한 기색이 넘실댔다.
“안 돼?”
“그게…….”
말꼬리를 흐리는 걸 보건대 안 되나 보네.
원래는 아빠를 통해서 하려던 거였으니 내가 직접 보내는 건 안 된다고 번복해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안색을 살피던 집사가 조심스레 제안해 왔다.
“혹시 내가 황태자한테 편지를 쓰면 집사가 곤란해져? 그러면 안 써도 괜찮아.”
“아니,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니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정말?”
“예. 정말입니다.”
아닌 거 같은데.
석연치 않았지만, 차마 황제에게 편지를 쓰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카드릭이라고 편한 건 아니나 황제는 더 불편했으니까.
“그럼 황태자한테 쓸…….”
잠깐.
그러고 보니 난 편지를 한 번도 써 본 적 없잖아?
글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달 전인 데다, 이전에는 쓸 일이 전혀 없었으니.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내가 너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는지 집사가 옆에서 봐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집사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다 썼다.
“이제 이걸 보내면 되는 거야?”
“맞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야. 집사야말로 도와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런데 음, 이거 읽을 수 있겠지?”
나는 지렁이 같은 글씨들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최대한 또박또박하고 예쁘게 쓰려고 노력했지만, 어디 내 마음대로 써져야지.
“귀여운 글씨체이니 충분히 알아보실 겁니다.”
세상에!
이 글씨를 보고 귀엽다고 말해 주다니!
다른 건 몰라도 집사가 내게 너그러운 것만은 잘 알겠다.
“이제 봉투 위에 인장을 찍으시면 됩니다. 밀랍은 제가 녹여 떨어뜨릴 테니 아가씨는 도장만 찍어 주십시오.”
“응.”
나는 집사한테 받은 인장을 꽉 쥐었다. 처음 찍어 보는 거라 살짝 긴장된다.
다행히 문양은 그럭저럭 잘 찍혔다. 동봉된 편지는 많이 봐 왔지만, 직접 해 보긴 처음이라 감회가 새롭다.
이거 좀 재밌네.
“밀랍 녹이는 거 어려워?”
“배우시고, 조금만 주의하시면 쉽게 하실 수 있습니다. 괜찮다면 연습해 보시겠습니까?”
“좋아!”
역시 집사 할아버지다.
내가 원하는 걸 바로바로 눈치채다니.
집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몇 번 해 보니 혼자 해도 제법 그럴듯하게 문양이 찍혔다.
나는 기념 삼아 그 인장들을 떼어 내서는 들고 돌아왔다.
* * *
황태자에게 편지를 보낸 지 이틀이 지난 때, 집사가 답신이 왔다며 내게 갖다줬다.
‘벌써?’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걸릴 줄 알고 그동안 느긋하게 대공가 도서관에 있는 책을 읽고, 글레나 부인이 내 준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봉투를 밀봉한 밀랍 인장부터, 편지에 적힌 글씨체마저 나와 다르게 반듯하고 예뻤다.
[허락해 줄게.―카드릭 라몬트 이글레시아스
추신. 방문할 날짜와 시각을 정해서 답신할 것.]
비록 안에 적힌 내용은 하나도 안 예뻤지만.
‘허락해 줬으니 됐어.’
어차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 목적은 도서관에 가서 더 많은 책을 읽고, 내 능력에 대해 알아내는 거니까.
솔직히 근 며칠 동안 나는 카드릭이 허락해 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면 황제한테 편지를 써야 했으니까.
황제가 허락해 주면 다행이지만, 그마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고민이 많았다.
‘이제 그럴 걱정 없지만.’
나는 방문 예정일과 시각을 적은 뒤 집사의 도움을 받아 봉투 입구를 밀봉했다.
* * *
대공가의 도서관을 더 뒤져 봤자 알아낼 게 없을 것 같았던 나는 최대한 빠르게 입궁하길 희망했다.
편지가 오가는 기간을 고려해 일주일 뒤에 가고 싶다 하니 카드릭은 이조차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어느덧 약속한 날이 되었다.
지난번 황궁에 갈 땐 아빠와 함께였기에 따로 기사와 사용인을 대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만 가는 거라 내 보호자 겸 호위 기사로 페리드 경과 함께 가기로 했다.
모든 책이 모여 있다던 샤비의 말마따나 황궁 도서관은 정말 거대했다. 대공가의 도서관보다 훨씬 더.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카드릭이 보내 준 통행증을 내미니 순순히 들여보내 준다.
‘진짜 크다!’
도서관 건물도 크고, 책도 많아서인지 사서도 많았다.
정작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지만.
“이쪽이 동물과 관련된 책들입니다. 대여가 가능한 것도 있고, 불가능한 것도 있으니 고르신 뒤 제게 가져오시면 분류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한 사서는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자길 불러 달라고 하곤 자리를 떠났다.
사서에게 고맙다고 한 나는 서가를 훑었다.
모든 책이 다 있다고 하나 정작 책장에 꽂힌 책들은 이미 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처음 보는 것들이 있긴 있어 페리드 경에게 부탁해 꺼내 봤지만, 수확은 없었다.
‘다른 쪽을 찾아야 하나?’
언제 또 황궁 도서관에 올 수 있을지 모르는 만큼 마음이 조급해진다.
‘신화 쪽을 찾아야 하나? 아니면 마법 쪽?’
고민하며 사서에게 향하는데 때마침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계절별 꽃들의 꽃말》?”
그러고 보니 저번에 첼시가 델피니움의 꽃말은 부정적이라고 해서 찾아봐야지, 했는데 잊고 있었네.
꽃말을 찾아보는 것 정도는 오래 안 걸릴 테니 잠깐 보고 가자.
나는 책을 꺼내 목차에서 델피니움을 찾았다.
‘앗, 있다!’
표기된 페이지를 찾아 넘기니 손수 그린 듯한 그림과 설명이 보인다. 다행히 꽃말은 맨 첫 줄에 있었다.
‘그런데 꽃말이 청명, 거만, 자비심?’
뒤로 꽃말이 몇 줄 더 적혀 있었으나 첼시의 말대로 좋은 뜻들은 아니었다.
하나의 꽃에도 다양한 뜻이 있는 건 안다.
하지만 대공가의 문양에 있는 또 다른 상징인 그믐달까지 고려하면 도저히 좋은 쪽으로 해석되지 않는…….
“아직 있었네.”
“히익!”
바로 옆에서 들려온 미성에 나는 책을 탁 덮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카드릭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