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62)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62화(62/125)
#62
카드릭의 선물을 주문하고 온 뒤, 나는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냈다. 글레나 부인에게서 수업을 받고, 남는 시간에는 테이머에 대한 책을 찾고 룩스와 슈가를 데리고 연습했다. 여전히 진전은 없었지만.
‘내가 헛된 꿈에 부푼 게 아닐까?’
사실 내 능력은 단순히 동물과 대화하는 게 전부인데, 테이머라고 착각했다든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애써도 안 될 리 없는데.
룩스와 슈가를 붙들고 있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벌러덩 뒤로 누웠다.
침대 헤드 쪽이 아닌 옆면에 머리를 뉘니 커다란 창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왜 안 될까…….”
한탄에 가까운 읊조림이었다. 왜 안 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모든 게 의미 없게 여겨진달까.
멍하니 솜사탕 같은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걸 보던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좋아! 다시 하자!”
―엑? 나, 나 잘 거야!
―나도, 찍!
룩스와 슈가가 재빠르게 바구니로 숨어들었다.
에잇! 날이 갈수록 눈치만 늘어서는!
날아간 기회를 아쉬워하며 다시 창밖을 보는데 아는 사람이 지나갔다.
‘페리드 경? 연습하나?’
얼마 안 있어 나는 내 추측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페리드 경에게 손짓하는 하녀가 보여서였다.
뭔진 몰라도 연습하는 건 아니겠구나.
턱을 괸 채 둘을 보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샤비가 살며시 문을 열었다.
“아가씨. 황태자 전하께 드릴 깃펜 세트가 왔어요.”
“벌써?”
나는 깜짝 놀랐다. 외출해 주문하고 온 게 고작 사흘 전이다. 주문을 받은 세공사가 마침 희귀한 깃털이 들어와 있어 최대한 빠르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확인해 보시겠어요?”
“좋아.”
샤비가 탁자 위에 고급스러운 남색 상자를 올렸다.
내용물을 보니 절로 탄성이 나왔다.
“잉크가 반짝거려!”
“이번에 새로 개발한 잉크래요. 붉은빛 도는 호박색인데, 안에 금가루를 넣었다나 봐요.”
“우와……. 이런 거 처음 봐.”
나는 신기한 눈으로 잉크병을 바라봤다. 카드릭한테 줄 선물만 아니었어도 내가 한번 써 보는 건데 아쉽네.
확인이 끝난 상자는 장신구 보관함 근처에 두기로 했다. 그래야 잊지 않고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편지도 쓰는 게 나으려나?’
선물을 준비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내가 품을 들인 게 아닌 데다 카드릭이 준 게 많은 만큼 괜히 신경 쓰였다.
물질로 이길 수 없을 때는 정성으로 밀어붙이는 거지!
결심하고 책상 앞에 앉은 것까진 좋았는데……. 막상 쓰려니 쓸 말이 없네. 생일 축하해, 이건 당연한 거고.
“으음.”
깃펜 끝을 우물거리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때였다.
“……씨? 아가씨?”
으음, 몸이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거지?
어쩐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니 첼시가 보였다.
“아가씨, 여기 말고 침대에 가서 주무셔야죠.”
“침대?”
“네, 침대 가서 주무셔요.”
연달아 들려오는 첼시의 말에도 나는 한참을 멍하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제법 어두워진 주위를 깨닫고는 헛! 숨을 들이켰다.
뭐야? 내가 언제 잠들었지? 분명 편지를 쓰다가…….
“헉!”
편지지를 확인한 나는 크게 기함했다.
이 꼬부랑글씨, 아니, 글씨라고 할 수 없는 낙서들은 뭐람?
엉망인 건 편지지뿐만이 아니었다. 손바닥 여기저기에도 잉크가 묻어 있었다.
‘손 씻어야겠네.’
내일을 기약하며 어지러워진 책상 위를 대충 정리한 나는 손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침대에 누웠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씨.”
“첼시도 잘 자.”
작은 마법 등만 남기고 첼시가 밖으로 나갔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건지 바구니에 있던 룩스와 슈가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깼네, 찍?
―그러게? 우리가 깨울 땐 안 일어나더니!
“깨웠어?”
―엄청! 이거 봐! 널 깨우다가 꼬리에 묻었어!
내 어깨 위로 착지한 슈가가 납작한 꼬리를 내게 내밀었다. 풍성한 털 군데군데 검은 잉크가 묻어 있다.
―나도, 찍!
뒤이어 룩스도 내게 앞발을 내밀었다.
제법 번져 흐릿하나 평소와 다르게 얼룩진 까만 발을 보니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피게 되었다.
예상대로 이불 곳곳을 비롯해 바구니가 올려진 협탁까지 까만 발자국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으아, 저거 잘 안 지워질 텐데! 내일 첼시와 샤비가 발견하고 기함할 걸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진다.
“너희 이리 와. 씻자.”
―뭐? 우리 어제 씻었잖아!
―난 씻는 거 좋아, 찍!
이미 일은 벌어진 상태라 이제 와 씻기는 건 소용없을 듯하지만,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슈가의 반항이 제법 심했으나 꼬리만 씻길 것이며 내일 간식을 더 주겠다고 약속하고서야 간신히 둘을 씻길 수 있었다.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슈가를 먼저 닦아 준 다음, 룩스의 털을 말려 주는데 룩스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누가 와, 찍!
“누구?”
―우리가 자주 보는 인간, 찍!
자주 보는 인간이라면……. 첼시나 샤비?
전속 하녀인 둘은 종종 내가 잘 자는지 살피러 왔기 때문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방 꼴을 숨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을 뿐.
‘어차피 아침이 되면 들키겠지만 미리 알릴 필요는 없지.’
나는 후다닥 룩스를 안은 채 마법 등을 끄고 누웠다.
곧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인기척은 내 쪽으로 다가와 주위를 스윽 살피는 듯하더니 이내 방 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뭐지?’
첼시나 샤비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기분 탓인가? 발걸음 소리도 좀 묵직한 게 첼시와 샤비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룩스는 분명 ‘우리가 자주 보는 인간’이라고 했는데?
무서웠지만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방 안이 어두워 내 눈에 불청객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수 초 뒤, 제법 커다란 덩치의 인영이 보였다.
‘페리드 경?’
서랍을 뒤지고 있는 남자는 페리드 경이 틀림없었다.
‘대체 왜?’
한밤중, 모두가 잠들었을 무렵에 들어와 내 방을 뒤지고 있는 이유가 뭐지?
심지어 그가 지금 뒤지는 서랍은 내 장신구들을 보관해 두는 곳이었다.
충격을 받았던 머리가 점차 차가워진다.
‘생각해 보면 영 이상한 일은 아니야.’
가끔 사용인 중에 돈이 급하거나 과욕을 부려 주인의 금품에 손대는 경우가 있었으니.
말롱 부인의 하녀로 일하며 그런 경우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봤다.
다만 페리드 경이 이럴 줄 몰랐기에 충격이 큰 것뿐이다.
몇 달 동안 그는 정말 우직했고, 말없이 날 호위해 줬으므로.
나는 일단 다시 자는 척하기로 했다.
내게 막대한 힘이 있어 페리드 경을 현장에서 제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림없는 얘기였다.
―베리, 저 인간 뭐 하는 거야, 찍?
‘이따 설명해 줄게. 지금은 가만히 있어.’
페리드 경이 서랍을 다시금 닫았다.
탁!
최대한 살살 닫으려고 애쓴 것 같지만 방 안이 워낙 고요해서인지 서랍 닫히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가 내 쪽을 돌아봤다. 실눈으로 동태를 지켜보던 나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안 들켰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숨을 내뱉으며 자는 척한 보람이 있는지 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페리드 경이 내 방을 나간 뒤에도 나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혹시나 그가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어떡하지?’
머릿속이 혼잡하다. 차라리 면식 없는 사용인이 그랬다면 망설임 없이 고발했을 테지만 페리드 경은 몇 달간 곁에서 봐 온 사람이었다.
집사한테 알리면 대공가에서 쫓겨나겠지? 쫓겨나는 이유가 이유인 만큼 다시는 기사 일을 할 수 없을 테고.
‘도대체 페리드 경은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하지만 확실한 건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먼저 뭘 훔쳤는지 파악하자.’
마법 등을 켜 방을 밝힌 나는 페리드 경이 뒤진 서랍을 열었다. 무턱대고 고발했다가 그가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면 그것대로 난감할 테니까.
사실 밤에 몰래 들어와 서랍을 뒤진 주제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확률은 없겠지만.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장신구 보관함을 확인했다.
“……다 있잖아?”
―다 있으면 좋은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분명 없어진 게 있을 줄 알았거든.”
―없어진 거, 찍?
“아까 페리드 경이 들어왔잖아? 서랍을 뒤지길래 분명 가져간 게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다 있으니까 당황스러워서.”
혹시 내가 기억 못 하는 장신구가 있나?
샤비와 첼시에게 물어본다면 확실히 알 수 있을 테지만, 다들 곤히 자는 시간이라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확인해 보고……. 만약 사라진 게 없다면 페리드 경은 뭘 한 거지?’
장신구를 담아 둔 보관함을 내려놓고 다시 서랍을 닫으려던 찰나였다.
문득 보관함 옆에 둔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카드릭에게 주기 위해 주문한 깃펜 세트였다.
‘설마 저걸 훔쳐 갔나?’
그러고 보니 아까 상자를 열어 본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굳이 깃펜 세트를 가져갈 필요가 있나? 장물을 금전과 바꾸려면 깃펜보다는 보석류가 좋을 텐데.
상자를 매만지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 본 나는 손을 떨었다.
‘이것도, 있어?’
낮에 본 깃펜과 잉크병이 그대로 놓여 있다.
이쯤 되니 정말 이상했다. 사라진 게 하나도 없다니? 그럼 대체 페리드 경은 여기서 뭘 한 거지? 혹시 훔치려다 마음이 변해 그냥 돌아간 건가?
상자 뚜껑을 도로 덮고 서랍도 닫으려던 때다.
갑자기 상자에서 작은 빛무리가 새어 나왔다.
이상함을 깨닫고 급히 뒤로 물러나려던 찰나, 빛줄기가 내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