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65)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65화(65/125)
#65
사람이 너무 놀라면 제대로 놀라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로브를 쓴 남자아이는 카드릭과 또래, 아니면 좀 더 나이 있어 보였다.
깊이 눌러쓴 후드 아래 보이는 금색 눈이 정확히 날 응시하고 있었다. 또렷한 조우에 나는 숨조차 헐떡이지 못했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도련님?’
역시 저 남자애는 이곳과 연관되어 있구나. 한패일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던 게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체념부터 앞섰다.
틀렸어. 저 남자애는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할 거야. 저쪽 사람이니까.
“……아무것도.”
어?
나는 놀란 눈으로 남자아이를 올려다봤다.
그사이 그는 태연한 얼굴로 내 바로 앞까지 걸어오더니 주위를 둘러보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없네.”
분명 눈 마주쳤는데. 게다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날 발견 못 했을 리 없다. 그런데 저렇게 말한다는 건…….
‘설마 모른 척해 주는 건가?’
하지만 어째서? 분명 날 찾는 것 같았는데?
“그쪽은? 뭐 있어?”
“아니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남자아이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틀었다.
“내가 예민했네.”
완전히 나를 지나치기 전이었다. 돌연 남자애가 멈추더니 내 쪽으로 휙 몸을 돌렸다.
‘혹시 마음이 바뀐 걸까?’
긴장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때다. 남자아이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움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움츠리자마자 머리 위에 무언가 얹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슬쩍 시선을 드니 남자아이가 입술을 달싹인다.
“나가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스무 걸음쯤 걸은 다음, 5시 방향에 유독 튀어나온 벽돌 세 번 누르면 비밀 통로.”
“……?”
“빠져나가면 잊도록 해.”
남자아이는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고는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다시 날 지나쳤다.
“도련님? 방금 누구한테 하신 말씀입니까?”
“방금 뭐?”
“그러니까 방금 도련님께서, 방금, 방…… 어…….”
“야, 왜 말을 못 해? 방금, 도련님이 누, 누…….”
오크 통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자들의 말투가 점점 어눌해지더니 이내 말꼬리를 흐린다.
“아무것도 없으니 가지.”
“예, 도련님.”
아까와 다르게 남자들의 목소리는 영혼이 나간 것처럼 힘이 빠져 있었다.
남자애의 기세에 눌렸다기엔 뭔가 이상한 느낌이라고 할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향연이나 확실한 건 있었다.
‘날 도와줬어.’
이것 역시 왜 도와줬는진 모르겠지만.
* * *
―꺼내 줘! 꺼내 달라고!
삑! 삑삑삑!
캄캄한 서랍 속, 슈가는 심장 부근을 부여잡고 온 힘을 다해 울었다.
그러나 아무리 울부짖어도 자신을 꺼내 주는 인간은 없었다.
―베리……. 룩스…….
한참 서럽게 울던 슈가는 한껏 몸을 웅크렸다. 홀로 남겨진 하늘다람쥐는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정확한 시각은 모르겠으나 어쨌든 캄캄한 밤이었다.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 베로니카와 룩스가 사라졌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빛이 사그라든 후에도 슈가의 앞에는 덩치가 작은 여자아이가 서 있었으므로.
그러나 덩치만 비슷할 뿐, 여자아이는 베로니카가 아니었다. 냄새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 너, 누구야!
깜짝 놀란 슈가가 방방 날뛰었으나 여자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제멋대로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너! 누구냐니까! 베리랑 룩스는 어디 가고 네가 있어!
“아파! 이건 뭐야?”
―이거 놔! 그리고 나가!
“시끄러워! 정신 사납게 왜 이렇게 울어 대는 거야!”
여자아이에게 날아간 슈가가 사납게 앞발을 놀렸다.
제법 따가운 할큄에 여자아이가 눈살을 찡그리며 슈가를 붙들었다.
저항하며 여자아이의 손을 깨물었으나 아이는 눈살만 조금 찡그릴 뿐, 손아귀 힘을 풀지 않았다. 대신 서랍을 열어 그 속에 슈가를 넣고는 그대로 닫아 버렸다.
그 뒤로 아까처럼 줄곧 울었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포기하고 웅크리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서랍 틈새로 아주 희미한 빛줄기가 들어왔다.
그 빛에 깨자마자 서랍 밖에서 익숙한 음파가 들렸다.
“아가씨,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으, 응.”
“세수부터 하시는 게 좋겠죠? 세숫물 가져올게요.”
아가씨? 저건 다른 인간들이 베리를 부르던 이름 아닌가?
벌떡 일어난 슈가가 다시 서랍 안을 뛰어다녔다.
―꺼내 줘! 걔 베리 아니야!
쿵쿵! 덜컹덜컹! 쿵!
시끄럽게 들썩이는 소리에 샤비는 세숫물을 가져오려다 멈칫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삑삑! 삑!
쿵!
자세히 들으니 미세한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의아해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려는데 ‘베로니카’가 불쑥 물었다.
“왜 그래?”
“아, 저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 같아서요.”
“신경 쓰지 마. 날 깨물어서 벌을 준 것뿐이야.”
“네?”
“이거 봐. 물린 곳, 빨개.”
베로니카가 손을 내밀었다. 자그마한 손등의 살갗이 살짝 까져 있다.
“설마 룩스 님과 슈가 님이 그러신 건가요?”
“아니야. 다람쥐가 그랬어.”
“슈가 님이 그랬다고요?”
“다람쥐가 했다니까!”
이상한 말이었다.
‘왜 자꾸 다람쥐라고 말씀하시지? 아가씨가 슈가 님을 다람쥐라고 부르셨던가?’
기억 속 베로니카는 슈가와 룩스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다람쥐라고 계속 정정해 주는 데다 깨물었단 이유로 서랍 속에 가둬 뒀다니?
샤비가 알던 베로니카답지 않은 행실이었다.
아무렴 아이는 다른 이라면 기겁할 정도로 동물들과 친근하게 지냈으므로.
게다가 이상한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샤비가 기억하기로 베로니카가 어제 입은 잠옷은 하얀색이었다.
그런데 지금 베로니카는 짙은 분홍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밤새 갈아입으셨나?’
의아했지만 잠옷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던 만큼 샤비는 그쪽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저기 있으면 숨 막히지 않을까요? 꺼내 주는 게…….”
“아니! 꺼내지 마!”
“네? 하지만…….”
“아니다. 그래, 꺼내서 밖에 갖다 버리고 와!”
갖다 버리라고?
베로니카가 저런 말을 하다니, 정말 이상했다.
그러나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눈앞에 있는 아이는 그녀가 봐 오던 베로니카였다. 솜사탕처럼 복슬복슬한 옅은 분홍색 머리도, 순둥순둥한 외양도.
“뭐 해? 갖다 버리라니까!”
그런데 표정만큼은 표독스럽기 짝이 없다.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으나 샤비는 우선 명령에 따르는 척하고, 다람쥐를 다른 곳에 빼 두기로 마음먹었다.
베로니카가 갑자기 왜 저러는진 몰라도 나중에 다시 데려오라 할지 모를 일이니.
들썩이는 서랍을 열자 슈가가 삑삑 울며 튀어나왔다.
슈가는 제법 날쌨으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서랍을 열었던 만큼 금방 잡을 수 있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삑! 삑삑!
“슈가 님, 얌전히 계셔 주세요.”
삑삑! 삑삑삑!
“시끄러워! 빨리 저거 치워!”
베로니카의 외침에 샤비는 슈가를 감싸 안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에 둬야 하지?’
평소 자유롭게 풀어 뒀던 만큼 막상 슈가를 데리고 나오니 달리 숨겨 둘 데가 없었다.
“어떡하지……? 그래도 아가씨의 명령인데.”
―쟤! 베리 아니야!
샤비가 고민하는데 슈가가 답답하다는 듯 울었다.
그래 봤자 샤비의 귀에는 삑삑! 하고 우는 소리처럼 들릴 뿐이었지만.
“아! 첼시한테 맡겨야겠다!”
―쟤 베리 아니라니까!
“얌전히 있자. 아가씨가 왜 저러시는진 몰라도 금방 다시 널 부를 거야.”
다독여 주는 손길은 자상했으나 안타깝게도 슈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답답한 인간!
삑! 슈가가 크게 울었지만, 샤비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 첼시에게 슈가를 맡겼다.
―뭐냐, 멍!
첼시에게 있는 대로 애교를 부리던 완자가 벌떡 일어났다. 잘 정돈된 흰 털 뭉치가 슈가를 경계하듯 더 풍성하게 섰다.
―여긴 내 구역이야, 멍!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베리랑 룩스가 없어졌다고!
―멍멍?
―빨리 찾아야 하는데……. 찾기는커녕 그 인간 꼬마한테 베리라고 부르기만 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멍!
“완자야, 왜 그래? 간식 줄 테니까 사이좋게 먹을래?”
―간식! 좋아, 멍!
첼시의 말에 완자가 정신 사나울 정도로 꼬리를 흔들며 뱅글뱅글 돌았다.
―지금 중요한 건 간식이 아니야! 베리를 찾는 거라고!
―간식, 멍멍!
슈가의 외침에도 완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쉬던 슈가는 완자를 쳐다보다가 꼬리를 바짝 세웠다.
―맞아! 넌 그 인간을 쫓아낼 수 있겠다!
슈가의 외침에 완자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어나! 가짜 베리를 물리치고 진짜 베리를 찾자!
―가짜를 물리쳐, 멍?
―그래! 저기 가짜를 물어서 쫓아내는 거야!
―내가 왜 그래야 해, 멍?
―엥?
슈가가 당황해하며 완자를 바라봤다. ‘이 바보가 뭐라는 거야?’라는 얼굴로.
반면에 완자는 귀찮은 듯 뒷발로 제 귀를 긁고는 열심히 발을 핥았다.
―베리가 걱정되지 않아?
―왕자님은 첼시 빼고 관심 없다! 그리고 왜 그렇게 그 인간과 생쥐를 구하려는 거야, 멍?
―그야……. 친구니까?
―넌 다람쥐잖아, 멍?
―하늘다람쥐야!
―어쨌든 다른 종족이잖아? 신경 쓸 필요 없는걸, 멍!
―그, 그러는 넌 왜 첼시라는 인간을 좋아하는데? 첼시도 다른 종족인데?
―첼시는 친구가 아니라 주인이야.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개는 주인을 좋아하는 거랬다, 멍!
―네 주인은 베리거든?
―아니다, 멍!
완자가 작은 앞발로 바닥을 콩콩 찍었다.
―몰라! 싫으면 말아라! 나 혼자 할 테니까!
슈가는 평소 입 안에 숨겨 두던 씨앗을 완자에게 퉤퉤! 뱉고는 쪼르륵 달려 나왔다.
뒤에서 완자가 화내며 “왕자님한테 무슨 짓이야, 멍!” 하고 외쳤지만, 알 바 아니었다.
포르르 뛰어다니던 슈가는 창턱에 앉아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었다.
―나쁜 바보 개!
종족이 다르니 신경 쓸 필요 없다니!
물론, 한때 슈가도 그리 생각하긴 했다.
인간은 모두 못됐고 경계해야 하는 동물이라고 말이다. 일부러 제집을 찾아내 뱀을 쑤셔 넣은 게 인간이었으므로.
덩치가 비교적 작은 뱀이었던 만큼 슈가의 부모 다람쥐들은 그 뱀과 싸워 이겼지만, 상처가 깊어 결국 죽었다.
셋 있던 형제들은 식량을 잘 찾지 못해 시름시름 앓거나 천적에게 죽었다.
혼자 어찌어찌 살아남긴 했지만, 저만 보면 돌을 던지고 부모를 죽게 만든 인간들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단순히 재밌어 보여서, 복수하고 싶어서 도와줬던 베로니카에게 언제 이토록 진심이 되었을까.
어째서,
‘너도 올라와.’
같이 가자며 제게 내민 손을 거부하지 못했을까.
한때 룩스와 이 비슷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심경이 복잡하던 슈가와 달리 룩스는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왜 좋아하냐고? 베리는 내 친구니까, 찍!
―친구? 하지만 넌 생쥐고 베리는 인간인데?
―무슨 상관이야? 친구 하기로 했으면 친구지! 그리고 누님한테만 말하는 건데 사실 베리는 내 첫 친구야, 찍.
―첫 친구?
―난 무리에서 쫓겨났거든. 대장 쥐도, 형제 쥐들도 전부 날 싫어했어. 내가 생쥐답지 않게 군다고, 찍.
―뭐? 누가 그런 말을!
사실 슈가는 ‘생쥐답다’라는 게 뭔지 몰랐지만, 룩스가 그런 취급을 당했다니 일단 분개하고 봤다.
―괜찮아. 지금은 누님이랑 베리가 있는걸. 난 행복해, 찍!
아마 그때부터였나?
베리를 맹신하고 옆에 있는 걸 당연히 여기게 된 건.
그러니 완자도 비슷한 마음일 거라고 여겼는데…….
―으으!
떠올리니 분하고 서운하다.
하지만 저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만큼 슈가는 고개를 털어 냈다.
―일단 저 가짜 베리부터 쫓아내는 거야!
힘차게 날아올라 베로니카의 방으로 가는데 반대편에서 불쑥 남자가 튀어나왔다.
―으아아악! 비켜!
그대로 돌진해 부딪칠 줄 알았던 것과 달리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슈가를 받아 냈다.
생각보다 푹신한 느낌에 놀라 고개를 들기도 전에 슈가의 몸이 먼저 들어 올려졌다.
“이건……. 베로니카가 키우는 다람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