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71)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71화(71/125)
# 71
내 눈으로 보고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아빠가 무릎을 꿇다니?
물론 원래부터 나와 시선을 맞추느라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은 꽤 충격이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었으니까.
놀라 눈만 깜빡이는데 아빠가 입을 열었다.
“구하지 못해 미안하다. 믿기 어렵겠지만, 맹세컨대 어떻게든 널 구할 생각이었다.”
“…….”
“결론적으로 널 구한 건 너 자신이지만……. 고맙다. 무사히 살아줘서.”
이쯤 되니 믿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물은 건.
“…정말요?”
“그래.”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 얼굴이다.
“그럼 불렀는데 왜 안 왔는지 물어도 돼요?”
“얼마든지.”
“……그 방에 대해서도요?”
말하자마자 나는 아빠의 시선을 피하며 잠옷을 꾹 움켜쥐었다. 초조함과 두려움에 심장이 정신없이 뛰는 게 느껴진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내가 언급한 ‘그 방’이 뭐냐고 물었을 테지만, 아빠는 그러지 않았다.
나 또한 아빠가 바로 알아들을 거라 여기고 말한 거고.
사실 나는 그 방이 아빠한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전에 분노를 산 적 있는 만큼 아빠에게 있어 건드리면 안 되는 역린 같은 거란 건 알았다.
뻔히 알면서 물은 이유는 명확했다. 지금처럼 다정히 굴다가도 태도를 급변한 적이 있었으므로.
‘확실히 하고 싶어.’
어차피 갈 곳도 없는 데다 힘도 없는 주제에 이렇게 구는 게 건방지게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여기에 머물 거라면 명확히 짚고 가고 싶었다.
만약 아빠가 화내면 납작 엎드리게 될 테지만, 그래도 난 사람이었다. 입맛대로 가지고 노는 인형이 아니라.
기다려도 아빠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줄곧 대답을 잘 해줬기에 지금의 침묵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역시 안 말해주겠……!
“……그래.”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가 번쩍 들렸다.
방금 ‘그래’라고 한 거야? 진짜 말해주겠다고?
뒤늦게 마주한 아빠의 얼굴은 이전처럼 화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할 뿐.
“다 말하지. 그것 말고 또 바라는 건 없나?”
“또요……?”
“이제야 내게 설명 듣는다고 네가 받은 상처가 없어지진 않을 테니, 바라는 게 있다면 전부 말해.”
“없어요! 그런 거!”
나는 빠르게 고개를 붕붕 저었다. 어쩌면 ‘지금 말고 나중에 원하는 걸 들어달라’고 영악하게 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걸 빌미로 빚을 짊어지게 하고 싶진 않았다.
“설명해주는 거면 충분해요.”
여전히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 진짜인데.”
나름대로 강단 있게 말해도 마찬가지였다.
끙,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아빠의 무릎을 위해 내 말을 번복할 수밖에.
“방금 하나 생겼어요.”
“어떤 거지?”
“아빠가 일어나는 거요.”
“고작 그걸 원한다고?”
으음, 고작이라고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일에 뭐라 할 마음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빠는 머뭇거리다 내게 팔을 뻗었다.
익숙한 모양에 습관적으로 안긴 뒤에야 나는 이 과정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는 걸 깨달았다. 금세 이러면 어떡하냐 싶어졌지만.
* * *
내가 열어뒀던 창문을 닫고, 날 침대에 내려준 아빠는 마법 램프를 켜 방을 밝게 만들었다.
그 뒤로 내가 처음 물었던 질문에 대답해줬다. 어째서 반지를 문질러 불렀는데도 오지 못했는지에 대한.
사정을 듣고 나니 말롱 부인의 미친 짓에 대한 감탄만 나왔다. 정말 내게 단단히 독기를 품었구나 싶어서.
‘놀랍진 않지만.’
말롱 부인의 악랄한 인성이야 그 밑에 있으며 많이 겪었으니.
하지만 페리드 경의 사망 소식과 날 대신하려 한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충격적이었다.
그와 대화를 많이 한 건 아니지만 지내온 시간이 있고 끝이 그런 만큼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가 키우는 다람쥐 말인데 영리하더군.”
“다람쥐라면 슈가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 네가 아니란 걸 알아본 모양이더군. 널 데리고 온 뒤에도 내내 옆에 있으려 하기에 더스틴이 데려갔다.”
아, 집사 할아버지가 데려갔구나. 혹여나 해코지당한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던 만큼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널 데리고 나온 마물은 따로 분리해 치료했고.”
마물?
저 단어를 듣자마자 잠시 잊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내게 달려오던 마물의 입안에 들어간 룩스. 그 뒤 마물과 이어지는 듯하던 그 감각과 복종.
‘룩스.’
잠깐 다시 떠올린 것만으로도 목이 메며 눈가가 뜨거워졌다. 더는 나올 눈물이 없는지 눈물은 안 나왔지만.
대신 나는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말롱 부인…….’
이전 삶에서는 저 여자 때문에 마리 언니를 잃었는데 이번에는 룩스를 잃었다.
이럴까 싶어 말롱 부인과 아예 연을 만들지 않거나 카드릭이 죽이겠다고 했을 때 안도했던 건데 이렇게 되다니.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말롱 부인이 확실히 죽었다는 것이다. 마물이 난동을 피우며 집어삼킨 이 중에는 말롱 부인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부디 그 여자의 마지막이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다.
“이제, 그 방에 관해 얘기할 차례군.”
나는 아빠를 쳐다봤다. 조금 가슴이 두근거린다. 집사한테 어느 정도 들어 아는 게 있는 것과 별개로 아빠가 내게 직접 얘기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방은 레일라의 유품을 모아둔 방이다. 레일라는 내 아내였고.”
아빠가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덧붙였다.
“내가 죽였다.”
익히 아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본인한테 직접 들으니 새삼 충격이었다.
‘왜 죽였어요?’
그때를 상기하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하고 있으면서.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삼키고 아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불새를 가진 황족들은 마법을 쓸수록 정신이 오염된다. 그걸 제어할 수 있는 게 고대 무기인 화염의 검인데, 대대로 황제한테만 전해 내려오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런 게 있다고?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저 사실을 레일라를 죽이고 나서야 알게 됐다. 마법을 쓸수록 불새에 의해 정신이 차차 미치게 된다는 것도, 화염의 검이 그 광증을 제어해준다는 것도.”
“…….”
“그리고 일부러 테이머 능력이 있는 레일라를 내 약혼녀이자 아내로 점했다는 것도.”
“테이머 능력이요?”
“그래. 동물들과 교감하고 소환수를 부리는 능력이지. 그리고 테이머 능력이 강한 자는 화염의 검처럼 불새를 제어할 수 있다더군.”
한때, 그토록 찾아 헤맸던 테이머에 대한 정보가 아빠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이 사실을 몰랐을 때는 어째서 선황께서 남작 가문의 영애인 레일라를 내 약혼녀로 정해졌는지 늘 의문이었다. 원래부터 날 미워하고 델러노를 예뻐하시던 분이라 이런 식으로 후계 구도에 영향을 주나 싶어 선황과 레일라가 미웠지.”
전 부인을 미워했다고? 하지만 집사는 아빠가 전 부인을 많이 좋아했다고 했는데?
“그러나 레일라는 겪을수록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사랑하고 있더군.”
아빠가 헛웃음을 흘리며 쓸쓸하면서도 애달픈 얼굴로 웃었다.
그리움, 원망, 애정.
이외에 나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처음 레일라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두려우면서도 기뻤다. 그리고 우린 아이와 만나게 될 날만을 기다렸지. 하지만 그게 잘못이었다.”
어째서?
“아이 때문에 레일라의 테이머 능력은 점점 약해졌고, 내 광증은 쌓였다. 원인과 이유를 몰랐으니 나는 내내 광증에 시달려야 했지. 온갖 치료법을 동원했지만 별 효과 없었다. 그러다 내 생일 연회 때 광증이 폭발했다.”
“…….”
“정신을 차리니 내가 레일라를 비롯해 궁에 있던 사용인들을 모두 죽였다더군.”
아빠는 더 이상 내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제 손을 원망스레 쳐다봤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내 품에 있는 레일라의 시체와 궁을 불태우고 있는 내 불새를 보니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한 게 명백했으니.”
“…….”
“네가 들어간 그 방은, 그나마 멀쩡한 흔적들을 모아둔 방이다.”
비로소 의아하게만 여겼던 궁금증들이 해결된다.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역력한 물품들과 달리 그 방의 벽지나 바닥은 왜 멀쩡했는지.
어째서 아빠가 죽였다는 전 부인의 기일은 신경 쓰면서 제 생일은 챙기지 않는지.
“원로들은 광증을 앓는 나를 황제로 삼을 수 없다며 내 폐위를 주장했고 선황은 그들의 손을 들어줬지. 모든 게 계획된 것처럼 순식간에 처리됐다.”
문득 회귀하기 전, 내게 미친 대공의 팔을 날렸다며 자랑스레 말하던 유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 말고도 아빠에 대해 숱하게 들어온 소문들도.
단순한 가십거리처럼 말하던 소문에 얽힌 진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잔혹하고 아빠한테 잔인해서.
“황제가 되지 못한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러나 이럴 걸 예상하고 선동한 선황과 이걸 이용한 델러노를,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감히 내가 사건의 당사자인 아빠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하면 건방진 생각이겠지만.
“베로니카.”
아빠가 다시 날 바라봤다.
“언젠가 나는 지금의 황실을 무너뜨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