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72)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72화(72/125)
# 72
이제는 제법 흐릿해진 기억 속에 피범벅이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내 죽이라며 비명처럼 뇌리에 울리던 불새의 울음도.
미래의 기억만 가지고 아빠의 반역을 막아보겠다고 생각했던 한때가 부끄럽다.
아빠한테 이런 속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찾아 손에 넣어야 할 게 있다.”
“찾아야 하는 거요?”
“그래. 델러노가 가진 화염의 검에 대항할 수 있는 또 다른 고대 무기를 말이다. 그게 있어야만 지금처럼 휘둘리지 않고 황실을 무너뜨릴 수 있을 테니.”
의도치 않게 어마어마한 비밀을 알게 됐다.
그저 그 방이 아빠한테 어떤 의미였는지 알고, 조금 더 아빠를 이해하고 싶었을 뿐인데.
“네게는 미안하다. 이런 뜻을 갖고도 가족을 갖고 싶다던 널 들였으니.”
갑작스러운 사과와 ‘나’에 대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렸다.
다행스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아빠가 덧붙였다.
“조금 돌봐주면 되겠지, 내 재산과 권력을 생각하면 네게 최고의 선택지겠지.”
“…….”
“그렇게 안일하게 결정했다. 끝까지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말이지. 경솔했다고밖엔 할 말이 없군.”
차마 ‘아니다’ 혹은 ‘괜찮다’라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빠가 나를 입양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 누구보다 질색했던 게 나였으니까.
이후로도 종종 그때를 되뇌며 중간에라도 어떻게든 도망쳤어야 했다고 후회했고.
다만, 예상외로 다정한 면을 비롯해 날 챙기려 애쓰는 모습에 정말 아빠가 생긴 것 같아 미련을 갖고 계속 남아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베로니카, 나는 널 귀찮다고 여기거나 싫어한 적 없다.”
그건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알았다.
내가 들은 것을 떠벌릴지도 모르는데 솔직하게 계획을 전부 말해준 걸 고려하면 아빠의 말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
그저 우연이 겹쳐 오해가 쌓였고, 근본적으로 내 잘못이 맞았으며, 아빠한테는 나보다 더 우선시해야 할 게 있었을 뿐이라는걸.
“아빠의 광증 말인데요, 아직도 있나요?”
“그래. 마법을 많이 사용할수록 심해지지.”
그럼 언젠가 나도 죽을 수 있겠구나. 아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내가 널 해치는 일은 없을 거다. 내 말을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이상하게 네가 있으면 광증이 가라앉더군.”
“…….”
“내 추측이나 너도 레일라처럼 테이머 능력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혹시 알고 있었나?”
나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움찔했다. 설마 아빠가 내 능력을 알아차렸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므로.
만일에 대비해 숨기고자 결심했는데 이렇게 기습적으로 물으니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역시 그랬군.”
“안 지 얼마 안 됐어요.”
“모른다면 알려주려 했을 뿐이니 신경 쓸 것 없다.”
왜 혼자 찔려 변명하려다 실패한 느낌이 들지? 사실인데.
머쓱함에 괜히 옆에 있던 인형이라도 가져와 끌어안을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어쨌든 네게는 내가 불안하기 짝이 없을 테지. 여기 있기 무서울 테고.”
아빠의 말에 나는 말 없이 인형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완전히 아니라고는 할 수 없긴 한데…….
“이미 내 딸로 알려졌으니 쉽지 않을 테지만 원한다면 위탁할 곳을 찾아주겠다.”
위탁이라니?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을 찾아주겠다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돈이 되질 않아 내가 잠시 입을 꾹 다무는 동안 아빠가 덧붙였다.
“하지만 네가 이곳에 남겠다면 네게 이것만큼은 약속하지.”
“약속이요……?”
“만약 고대 무기를 찾게 되더라도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전부 미루겠다.”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어렴풋이 미래를 아는 내게는 의미 없는 약속이었다.
‘아빠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고대 무기를 찾지 못할 테니까.’
아빠가 반역하고 황실을 무너뜨리는 건 황태자, 그러니까 카드릭의 성인식 때다.
그전에 고대 무기를 찾았다면 일찍이 반란을 일으켰겠지.
‘하지만 아빠는 이걸 몰라.’
그러니 이렇게 말해주기까지 아빠 딴에는 고민도 많이 하고 아주 큰 결심이었을 것이다. 염원을 미룬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일 테니.
심지어 친족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얽히게 되어 수양딸로 들인 나를 위해서.
다 아는데…….
“네가 성인이 되었을 때 내가 가진 것들을 가질 수 있도록 손 써두겠다. 작위는 주지 못하겠지만, 재산만큼은 부족하지 않겠지. 미리 타국으로 망명하면 자유로이 살 수 있을 테고.”
“…….”
“더는 누군가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네 부친으로서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 널 지켜주겠다.”
나는 아까부터 이따금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분명 고마운 말이고, 애당초 벨로크 대공한테 바랐던 것이기도 했다.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지원하고 안전하게 지켜주겠다는 것 말이다.
심지어 자신의 반역 이후, 곤란해질 내 처지를 고려해 망명까지 도와주겠단다.
이보다 더 바랄 게 없는데, 기뻐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하고 아플까.
나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빠한테는 그게 중요한 거죠? 그러니까, 복수하는 거요.”
“……그래.”
“앞으로도 변함없겠죠?”
“미안하다.”
돌아올 대답을 뻔히 알면서 물어본 주제에, 왜 저 대답에 혼자 상처받는 건지.
그렇다 해도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있을게요.”
“…….”
“여기에 있을게요. 그러니까 남게 해주세요.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때까지만요.”
“그래.”
“감사해요, 아빠.”
돌아온 대답에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시각이 늦었다. 이만 자라.”
“네.”
꼬물꼬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는데도 아빠는 방을 나가지 않았다.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아빠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나직이 말했다.
“안심하고 자라. 오늘은 밤새 옆에 있을 테니.”
지나친 배려. 지금만큼은 받고 싶지 않았던 다정함.
아빠한테 몸을 돌린 나는 한껏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 * *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온다.
아직 피로가 덜 가신 건지 베로니카는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잠들었다.
아시드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흐트러진 아이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줬다.
더스틴한테 말했듯 베로니카를 찾게 되면 어느 정도는 털어놓고 사과할 생각이긴 했다.
베로니카한테 한 약속들도 평소 생각하던 것이긴 했다.
어차피 복수가 끝나면 제게 소용없어질 것들이었으니.
차라리 뒤에 남을 베로니카가 편하게 지내는데 보탬 된다면 그것대로 좋은 결말이라 여겼다.
다만, 후회되는 게 있다면.
‘너무 많은 걸 말했군.’
어린아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들을, 어느 정도는 숨겨도 됐을 것을 전부 털어놓았다.
베로니카가 제게 바랐던 것이긴 했으나 그렇게까지 진솔할 필요는 없었는데.
게다가.
‘만약 고대 무기를 찾게 되더라도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전부 미루겠다.’
그런 약속까지.
제 손으로 레일라를 죽인 뒤 삶의 모든 초점과 우선순위는 복수뿐이었다.
베로니카와 만난 뒤로는 차차 경계가 느슨해지는 듯했는데 결국, 이렇게.
그런 약속을 한 게 후회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돌아가도 선택은 같았을 것이다.
제 잘못도 아닌데 비는 아이를 보고도 그러지 않을 자신은 없었으므로.
그러니.
‘기다려줘, 레일라.’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 * *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밝은 햇살이 아침을 알린다.
“아가씨, 계세요?”
익숙한 하녀들의 목소리.
“으응…….”
고개를 주억거리며 잠에서 깨어나는데 무언가 날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얼떨결에 손을 뻗으니 부드러운 무언가가 손아귀에 잡힌다.
―베리이이이!
상황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슈가가 내 손에 마구마구 제 몸을 문지르며 물었다.
―너 진짜지? 베리 맞지?
“응.”
―으허엉, 베리이이이!
“죄송해요.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할 것 같아 바로 데려왔는데 이리 좋아할 줄은…….”
“괜찮아.”
난감해하는 샤비와 첼시를 보던 나는 우선 내 손가락을 꼭 움켜잡고 삑삑 우는 슈가를 달래기로 했다.
“걱정 많이 했어?”
―당연한 걸 왜 물어! 다른 인간이 네 행세하고! 완자, 그 똥강아지는 자기 알 바 아니라고 하고! 나쁜 개!
“그럼요! 얼마나 걱정하고, 무사하시길 기도했는지 몰라요.”
“맞아요. 그래도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아가씨가 걱정되어서 며칠간 정말…….”
앗, 속으로 말하지 않고 육성으로 내뱉었구나!
당장이라도 날 끌어안고 울고 싶은 듯 눈시울을 붉히는 첼시와 샤비를 보며 나는 일부러 밝게 웃었다.
“난 괜찮아. 다들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가씨이이…….”
어째 정말 울 것처럼 굴던 샤비와 첼시는 금세 표정을 바로 했다. 대신 세숫물과 아침을 들고 와 날 챙겼다.
“혹시 아빠 못 봤어?”
“아, 주인님이라면 아까 나가셨어요.”
“그렇구나.”
정말 아침까지 있어 주다 갔나 보네.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쓸쓸했다. 결국, 우리 관계는 기간이 정해진 임시적인 것에 불과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