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75)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75화(75/125)
#75
지난 늦봄, 마리 언니는 내 열여섯 살 생일에 옷을 지어 보냈다.
고민했지만 자신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정성뿐이라며, 입어준다면 정말 기쁠 것이라는 편지와 함께.
어차피 내게 중요한 건 마리 언니 자체이니 무얼 주든 기뻤을 테지만 정성 가득한 선물에 감동한 것도 사실이었다.
‘옷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지.’
언니가 보낸 옷이 내게 많이 클 줄이야!
보육원에 있는 내 또래 여자아이들의 체구를 참고해 만들었다고 쓰여 있어 비참했다.
‘또래보다 한참 작다니!’
회귀 전에도 체구가 작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이라고 여겼다. 지금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벨로크 대공의 딸이 된 이후로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어왔는데 전생과 키가 비슷한 건 선천적인 요인 때문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키 크는 데 도움이 되는 건 꼭 챙겨 먹고 평소 우유도 열심히 마셨는데 이렇다니! 억울해!
결국, 마리 언니가 보내준 옷은 드레스룸에 보관하며 나중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나는 성장기고 키가 더 크면 입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언니한테는 사실대로 사정을 적어 답신을 보냈다.
예쁜 옷은 고맙지만 내게 너무 크다고.
그 결과, 지금처럼 장갑과 망토를 보낸 거였다.
“이건 딱 맞네.”
손에도 잘 맞고, 미튼 장갑의 둥그런 모양이 귀엽다.
망토 또한 새하얀 게 예쁘고 내게 잘 어울렸다. 거울 앞에서 팽그르르 한 바퀴 돌자 망토에 매달린 리본도 함께 살랑거린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망토와 장갑을 벗어 샤비한테 건넸다. 잘 보관해달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 룩스는?”
“목욕하고 옆방에서 털 말리고 있어요.”
“아, 맞아. 아까 사냥했지.”
“맞아요. 발과 털에 진흙이 잔뜩 묻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하인들을 불러 씻기게 했죠.”
“고생이네.”
룩스의 털이 워낙 길고 촘촘해 털을 말리는 데만 한 시간 넘게 걸렸다.
그나마 몸집을 작게 조절한 데다 바람이 나오는 마도구를 사용해서 저 정도 걸리는 것이지, 크기 조절이 안 되었다면 반나절 넘게 걸렸을지도.
룩스한테 최대한 사냥을 자중할 것을 권해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무엇보다 룩스가 저렇게 행동하는 데는 별장에서 일하는 몇 기사들과 사용인들의 탓이 컸다.
룩스의 주장에 따르면 요리사를 비롯해 하인과 남자 기사들이 룩스가 사냥하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곰의 웅담이 몸에 그렇게 좋다나?
나라면 아무리 몸에 좋다 해도 안 먹을 것 같아 상당히 의외였다.
그것 말고도 다른 맹수들의 가죽을 벗겨 장비를 제작하거나 팔고, 고기를 풍족하게 먹을 수 있어 좋다고.
이런 이유로 몇은 룩스한테 고기를 뇌물로 주며 잘 부탁한다고 굽신거리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뭐, 사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맹수들은 위험한 데다 숲에 있는 슈가의 안위를 생각하면 룩스의 행동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다칠까 걱정된단 말이지.’
지금까지 다쳐온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룩스가 올 때까지 마리 언니한테 보낼 편지나 쓸까?’
책상에 앉아 한참 편지를 쓰던 차였다.
―베리!
벌컥!
문이 열리더니 보통의 강아지처럼 크기를 줄인 룩스가 내게 달려왔다.
―아까 내가 잡은 거 봤어? 엄청나게 크지! 그렇게 큰 거랑 싸운 건 처음인데 내가 이겼어! 나 강해!
“대단하네. 엄청 커다란 곰이랑 싸워서 이기고.”
―맞아! 나 대단해!
룩스가 가슴을 크게 폈다.
털이 하얘서 그런가?
저럴 때마다 묘하게 완자와 비슷해 보인다.
―그보다 누님한테도 자랑하고 싶었는데 요리사가 또 가져갔나 봐! 없어졌어!
“요리사가 잘 정리해줄 거야. 그리고 슈가한테 가져갔으면 까무러쳤을걸.”
―누님이?
“응. 아기들이 있잖아.”
나는 슈가를 똑 닮은 새끼 하늘다람쥐들을 떠올렸다.
한동안 혼자였던 슈가는 어느 날 갑자기 귀여운 수컷을 만났다며 나돌아다니더니, 그대로 숲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안전하게 별장으로 오라 했으나 수컷 반려가 불편해할뿐더러 새끼들한테 야생을 가르쳐주고 싶다며 거절했다.
물론 수컷 하늘다람쥐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수컷 하늘다람쥐에게 있어 나는 그저 낯선 ‘인간’이라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슈가를 꼬신 수컷 하늘다람쥐가 미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새끼는 귀여웠어.’
며칠 전에 룩스의 안내 하에 슬쩍 보고 온 새끼들이 얼마나 깜찍하던지!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새끼들이 귀여워 호들갑 떨고 싶은 마음을 자제해야 했다.
―누님의 새끼들은 재밌어할 텐데?
그럴지도…….
나야 슈가의 새끼들을 보고 귀여워하는 게 끝이었지만, 슈가는 새끼들이 너무 활달해 걱정이 많다고 했다.
룩스가 처치해준 뱀 사체를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갖고 놀려고 했다 하니 곰을 보면 재밌어했을지도.
“그래도 안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저번에 뱀 보고 슈가가 많이 놀랐잖아.”
―알겠어.
룩스가 바짝 세운 귀를 축 늘어뜨렸다.
마리 언니한테 쓰던 편지를 마저 마무리한 나는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벨로크 대공가의 가신인 파르지 남작의 딸인 ‘리리카 파르지’가 주선한 다과회에 가는 날이었다.
내년에 성인식을 앞둔 리리카는 어릴 적부터 차분하고 어른스러워 나와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였다.
사실 예전에 내 생일 연회에서 엉엉 울어버린 아이들 때문에 또래 친구들을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리리카의 모친인 남작 부인이 옆 나라인 엘피다 출신이라 제국어뿐만 아니라 외국어도 능통하다고 해서 한번 만나보기로 했다.
리리카와 친하게 지내면 남작 부인과도 만날 기회가 생길 테고, 그녀의 고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책으로는 접할 수 없는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말이다.
슬쩍 리리카와 함께 외국어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해도 되고.
그렇게 정말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음험한 속셈을 갖고 파르지 남작가를 방문했다.
별 기대 없이 방문했던 것과 달리 리리카는 정말 차분한 아이였다.
성격뿐만 아니라 배경지식 수준과 대화가 어른 못지않아 대화하기가 편했다.
‘혹시 이 애도 나처럼 회귀자인가?’하고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래 알아 온 지금이야 리리카는 회귀자가 아니고, 그냥 천성이 어른스러운 거라고 결단 내린 상태지만.
어쨌거나 때때로 외로워 또래 친구가 있었으면 바랐던 내게 있어 리리카는 소중한 친구였다.
리리카의 친구들이라던 다른 영애들도 다 착한 애들이고. 조금 심하게 활달하긴 하지만.
“다 됐어요. 역시 우리 아가씨! 정말 예쁘세요!”
“고마워.”
샤비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설핏 웃었다.
처음 대공가에 왔을 때부터 귀엽다고 호들갑 떤 만큼 샤비의 말은 딸을 둔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과 같은 거란 걸 안다.
그래도 남이 하는 칭찬은 언제 들어도 듣기 좋았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가씨.”
“다녀올게. 가자, 룩스.”
―그래!
나는 룩스를 안고 마차에 올라탔다. 파르지 남작가는 별장에서 제법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
“파르지 남작가에. 우리 자주 가는 곳.”
―파르지! 좋아!
룩스가 꼬리를 격하게 흔들었다. 파르지 남작가의 요리사는 룩스에게 깨끗하게 삶은 소뼈를 줬는데, 보통 소뼈와 다르게 정말 고소하고 맛있다며 룩스가 좋아했다.
내 다리 옆에 몸을 말고 자는 룩스의 털을 매만지며 창밖을 구경하는데 멀리서 저택이 보인다.
이윽고 저택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니 남색 빛을 띠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날 보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그보다 마중 나와줘서 고마워, 리리카.”
“당연한 것을요. 안으로 드실까요? 모두 와있답니다.”
“좋아.”
총총 안으로 들어가니 언제 봐도 참 예쁜 유리 정원 속에 먹음직스러운 과자들과 케이크, 차가 보인다. 그리고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다른 소녀들도.
리리카와 마찬가지로 전부 대공가의 가신 가문의 딸로 나보다 한두 살 많거나 적었다.
날 보고 우르르 일어난 그녀들이 어서 오라며 인사했고, 나는 그들의 환영 속에서 룩스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간단한 안부와 서로의 취미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누군가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이 성인식이었죠? 그거 때문에 파트리샤가 수도에 갔었고요?”
“네, 그랬죠.”
“어땠어요? 궁금한데 얘기 좀 해줘요.”
“맞아요! 저희 중에 성인식을 치른 건 파트리샤가 처음이잖아요. 수도와 황궁이 그렇게 화려하고 멋있다던데 정말이에요?”
“멋진 영식을 찾으셨나요? 춤을 얼마나 췄어요?”
“황태자 전하는 보셨어요? 어때요? 정말 소문대로 정말 잘생기셨던가요?”
우르르 쏟아지는 질문 중 끼어있는 카드릭 얘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다행히 다들 파트리샤의 대답에 집중해서 내 상태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지만.
리리카마저 아닌 척 차를 들며 파트리샤를 흘긋거리고 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모두의 이목을 받은 파트리샤는 난감해하다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