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77)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77화(77/125)
#77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현재 조건은 죽기 전에 본 그 남자와 비슷했다.
가문의 인장이니 황금 사슴 문양이 박힌 반지를 하고 있을 수 있고, 검술이 그렇게 뛰어나면 카드릭의 성인식 때 황궁에 있던 것도 이해가 된다.
호위나 보안을 맡았을 테니.
‘직접 보면 확실해질 텐데.’
벌써 몇 년 전이긴 해도 그때의 상황이 강렬했던 만큼 일정 부분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 왜 이렇게 황금 사슴 문양을 신경 쓰는 거지?’
불현듯 든 생각이었다. 아빠의 반역은 예정된 일이다.
그리고 그 남자도 결국 날 죽이지 않았다.
날 죽이자던 제 수하를 자비 없이 죽여버릴 만큼 무서운 손속을 가지긴 했지만……. 어쨌든, 날 죽인 건 아니니까.
생각할수록 내가 황금 사슴 문양에 이토록 집착할 이유는 없다는 결론만 나왔다.
‘죽기 직전에 본 문양이 그거라 그런가?’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내가 회귀한 이유와 관련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럴 거 같진 않았다.
고작 그 문양 하나 봤다고 회귀했다면 실베스터 가문의 문양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기회를 얻었을 테니.
어째서 나만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 몰라도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세상을 구하는 용사가 아니라 그저 살고 싶었던 평범한 여자아이였을 뿐이니까.
내 회귀의 사유가 장대할수록 감당할 자신 없었다. 그저 이 예상치 못한 기적을 활용해 잘 살면 그만이지 않을까.
별장으로 다시 돌아오자 룩스가 곧바로 거대하게 변하더니 숲 쪽으로 달려갔다.
―다녀올게!
저렇게 좋을까.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숲으로 사라진 룩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차였다.
“돌아왔군.”
이 목소리는…….
“아빠?”
생각지 못한 만큼 놀랐지만, 나는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아빠의 앞으로 다가갔다.
“일찍 오셨네요.”
“2주가 ‘일찍’은 아니지.”
“먼젓번에 비해서요. 두 달 만에 오셨잖아요.”
“그렇게 들으니 확실히 일찍 오긴 한 것 같군. 그보다 키가 더 컸나?”
“그대로예요.”
엊그제 키를 재보지 않았더라면 기뻐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누구보다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아빠도 그냥 한 말에 불과했는지 “그런가.”라는 한마디가 끝이었다.
“저녁은?”
“아직이요.”
“같이 먹지. 할 얘기도 있고.”
할 얘기?
설마 고대 무기를 찾은 건가?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하는 데 성공했다.
명확한 유예 기간을 알고 있으니 평소 아무렇지 않게 굴다가도 이런 상황이 오면 언제 평화로웠냐는 듯 긴장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식사는 금방 마련되었다. 평소처럼 먹음직스러웠으나 맛을 제대로 느끼긴 어려웠다. 아빠가 할 얘기가 신경 쓰였으니까.
결국, 디저트가 나올 즘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아까 할 얘기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아빠가 와인을 마시다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황후가 널 시녀로 들이고 싶다고 서신을 보냈다.”
아, 고대 무기 얘기가 아니었구나. 다행이긴 한데…….
“시녀요?”
황후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곁에 두며 견문을 넓혀주고 싶다는군. 미성년이니 공식 석상에는 대동하지 않을 거라고 쓰여 있었고.”
가끔 어린 황녀가 있는 경우 놀이 친구 겸 시녀로 어린 귀족 영애를 데려오는 경우가 있다고는 들었으나 현재 황실에는 황녀가 없었다. 황태자인 카드릭만 있을 뿐.
게다가 황후는 나를 본 적이 없는 데다 어린 시녀가 필요 없을 텐데, 굳이 날 시녀로 지목하다니?
‘혹시 아빠를 수도로 부르기 위한 핑계인가?’
확실히, 7년 정도 지방에 있었으면 부를 때가 되긴 했지.
“싫다면 안 해도 된다.”
“네?”
“원래는 서신을 바로 불태우려 했다. 하지만 네가 하고 싶을지도 모르니 전달해준 것뿐, 싫다면 거절해.”
황후의 지목을 거절하라니!
공녀로 살며 나도 예전보다 대담해졌으나 아빠의 담력에 비하면 먼 모양이다.
애초에 놀란 것이지, 거절할 마음은 아예 없었으므로.
게다가 내 짐작대로 아빠를 수도로 부르기 위한 수작이라면 거절할 시 그 쪼잔한 황제가 어떤 짓을 할지 몰라.
셰인트 백작을 죽인 거로도 이렇게 몇 년을 지방에 처박아둘 정도였으니.
물론 나도 머리로는 황제가 저 일을 쉽게 넘길 수 없다는 걸 이해했다.
어쨌든 아빠는 같은 고위 귀족을 죽인 거니까.
그것도 내게 위험이 될까 봐, 라는 이유 하나로 재판이나 다른 과정 없이 독단으로.
거기에 셰인트 백작은 평소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암흑 시장을 통해 막대한 금액을 벌어들였고, 그와 관련된 뒷배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법이다.
특히나 황제는 평소에도 고까웠던 만큼 사적인 유감이 꽤 더 해졌다.
그래봤자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이 ‘나’라는 게 변함없는 만큼 생각은 늘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다.
예를 들면.
‘나만 아니었다면 아빠가 지방에서 이토록 오래 근신할 일은 없었을 텐데.’
이런 생각?
그러므로 나는 더는 내 일로 인해 아빠한테 피해 입히기 싫었다.
“할래요. 아니, 하고 싶어요! 황후 폐하의 시녀요!”
“시간 낭비일 텐데.”
“그건 모를 일이죠. 어쩌면 황후 폐하의 편지처럼 제 견문이 넓어질 수도 있잖아요?”
“정말 괜찮겠나?”
“네.”
아빠가 날 빤히 바라봤다. 표정과 눈빛을 보니 못마땅한 게 분명했다.
예전 같았다면 저 눈빛에 겁먹고 슬그머니 물러났을 테지만, 나도 제법 컸단 말이지!
꿋꿋하게 아빠를 보고 있자니 곧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전하지.”
* * *
답신은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황실 마법사를 통해서.
비록 이곳이 수도와 비교적 가깝다 한들 마차로 달려 몇 주는 족히 걸렸는데, 일주일 만에 답신이 오다니.
‘황실 마법사가 고생을 많이 했겠는걸.’
그렇게 생각하던 차, 아니나 다를까.
샤비가 마법사가 서신을 전하고 탈진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몸을 회복할 때까지 며칠 신세를 질 것 같단 얘기도.
그렇게 황실 마법사가 고생한 것과 달리 답신은 간결하기 짝없었다.
최대한 빨리 수도로 올라와 주길 바라며, 만남을 고대하겠다는 내용이었으므로.
‘말롱 부인처럼 악독한 사람이면 어떡하지?’
정말 뒤늦은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황제의 아내이자 카드릭의 어머니인데.
유려한 필체와 간단한 답신만 보면 괜찮은 사람일듯했지만, 황실 마법사를 혹하게 부린 거 보면 아닌 것 같아 걱정되었다.
끙끙, 앓다 넌지시 샤비와 아빠한테 물어봤으나 돌아온 답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되었다.
샤비는 딱히 황후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아빠도 황후한테 관심을 둔 적이 없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우려한 바를 알아차렸는지 황후가 괴롭히는 것 같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그렇게 수도로 돌아가는 게 확정되니 좋은 것도 있고 안 좋은 것도 있었다.
좋은 걸 꼽자면 드디어 마리 언니와 첼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샤비도 오랜만에 제 동생들과 재회할 생각에 나처럼 들떠 있었다.
반대로 안 좋은 점은 이곳을 떠나는 만큼 기껏 사귄 친구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룩스가 마음 편히 날뛸 공간도 수도에는 없고.
게다가 황궁에서 시녀로 일하면 황제와 카드릭도 만나게 될 거란 사실에 대한 불편함도 제법 있었다.
‘그래도 슈가가 마음을 바꿔서 다행이야.’
반려와 새끼들과 함께 야생에 적응했으니 다시 수도로 돌아가는 걸 반기지 않을 거란 내 예상과 다르게 슈가는 나를 따라오겠노라고 했다.
남은 새끼들은 반려와 함께 숲에 남기로 했다며.
룩스가 누님은 “반려와 새끼들이 걱정 안 돼?”라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
―걱정되고 같이 가면 좋겠지만, 걔네가 선택했는걸.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역시 누님이야! 멋져!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룩스가 감탄을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슈가를 내버려 두고 가는 건 나로서도 마음에 많이 걸렸던 터라 그 결정이 고마웠다.
별장에 내려올 때와 달리 수도로 올라가기 위해 꾸린 짐은 어마어마했다.
내려올 때야 내가 어린 데다 대공가에 온 지 1년도 채 안 된 관계로 짐이 적었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므로.
아빠는 수도에 가서 새로 사면 그만이니 대충 짐을 꾸리라 했지만, 그렇다 쳐도 챙길 게 많았다.
옷과 장신구부터 시작해서 즐겨 읽던 책이랑 취미로 놀던 퍼즐과 타국에 대한 자료 조사, 그리고 수도로 가는 동안 룩스와 슈가가 먹을 식량과 장난감까지!
최대한 약소하게 꾸렸는데도 마차 두 대가 내 짐으로 가득 찼다.
게다가 내가 수도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리리카를 비롯해 다른 영애들이 보내온 선물에 마차 한 대가 더 들어찼다.
아빠의 짐이 아예 없는 걸 생각하면 ‘좀 많은가?’ 싶긴 하지만, 평범한 귀부인과 귀공녀들을 떠올리면 결코 많은 편이 아니었다.
파트리샤도 성인식 때문에 잠깐 수도에 머무르기 위해 짐을 꾸렸을 때도 마차 세 대를 사용했다고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