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78)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78화(78/125)
#78
비록 마차 행렬은 길었으나 챙겨온 게 많은 만큼 가는 동안 크게 심심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마차 여행을 또 하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마차 자체가 내내 앉아 있기에 불편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으나 매일 저녁쯤 여관을 찾아 짐을 정돈하고, 익숙지 않은 곳에서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쁜 사용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회귀 전에 겪어본 만큼 신경 쓰였다. 그래도 출발이 있으면 도착도 있는 법이었다.
“아가씨, 수도가 보여요!”
샤비가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말하자 룩스와 슈가도 덩달아 흥분했다.
―수도면 집인 거지?
―빨리 달리고 싶어! 여긴 너무 지루해!
―누님도? 나도!
‘조금만 참아.’
두 녀석의 채근에 달래듯 토닥이긴 했으나 설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걱정되는 게 많은 것과는 별개로 수도는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수도로 입성한 뒤 마차의 속력은 이전보다 줄었으나 금방 대공저에 도착했다.
몇 년 만에 온 곳이었지만, 대공저는 내 기억과 변함없이 크고 아름다웠다.
마차에서 내리니 집사가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그리고 아가씨.”
“오랜만이군, 더스틴.”
“오랜만이야.”
“아가씨? 정말 아가씨 맞으십니까?”
집사가 날 보며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뭐지? 내가 뭔가 실수했나? 아닌데?
온갖 상념이 빠르게 지나갔을 때 집사가 덧붙였다.
“못 뵌 사이 레이디가 다 되셨군요!”
아하, 내 성장에 대한 감탄이었구나.
‘내가 그렇게 컸나?’
솔직히 평균보다 작은 데다 나야 내 모습을 늘 봐서 자랐다는 인식이 그다지 없는 만큼 괜히 부끄러웠다.
“별로 안 컸어.”
“제 눈엔 많이 성장하신 듯합니다.”
“예전보다 많이 크긴 했지. 이제 한쪽 팔로 안고 다닐 수도 없으니.”
아빠가 툭 던지듯 뱉은 말에 나는 입을 봉쇄했다.
저렇게 말하면 반박할 수 있을 리 없지.
“그래도 아가씨의 동물들은 그대로군요.”
집사가 내 품에 안겨 있는 룩스와 슈가한테 시선을 줬다.
―그대로 아닌데! 나 엄청나게 커졌는데!
룩스가 씩씩하게 외쳤으나 집사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나중에 룩스가 커진 모습을 보면 놀라겠는걸.’
별장 사용인들이 룩스의 모습에 적응하기 전까지 기겁했던 것처럼 말이다.
* * *
수도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방의 실내장식을 바꾸는 일이었다.
아예 못 쓰는 건 아니었지만, ‘어렸던 나’에게 맞춰진 가구들이 대부분인 만큼 불편했다.
집사와 첼시가 미리 받아둔 가구 장인의 카탈로그를 바탕으로 나는 내 취향껏…… 은 아니고 조언을 받아 빌려 꾸몄다.
이전의 경험 덕분에 어느 정도 가구를 볼 줄 알긴 하지만, 너무 중년 귀부인의 취향에 맞춰져 있다고 해야 하나.
‘아가씨, 정말 그걸로 하실 건가요?’
‘응? 왜?’
‘음……. 아가씨께는 너무 조숙하지 않나 싶어서요.’
첼시는 내가 고른 가구를 보고 난감한 얼굴이었고, 샤비는 익숙하게 내게 다른 가구가 어떻냐고 제시했다.
그제야 아차, 했다. 별장에서도 실내장식을 바꿀 때 자주 이래서 나름대로 고쳐보겠다고 노력해 어느 정도 고친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수도에 있는 대공저 생활에 적응하는 건 비교적 빨랐다.
슈가와 룩스는 조금 답답하다며 불평하긴 했지만, 금세 또 정원을 누비고 다녔다.
다소 여유로운 듯하면서도 정신없는 적응 끝에 황궁에 가는 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첼시는 정말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해보겠다며 들뜬 눈치였다.
황후를 만나는 건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나와 다르게 말이다. 첼시가 내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땋아주며 호기롭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도 아가씨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반하실 거예요!”
“그럴 것까지는…….”
“분명 홀딱 반하실 거예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황후가 내게 반할 리도 없지만, 그래서야 어쩌란 건지.
앗, 아닌가? 일단 황후의 마음에 들면 황궁 생활이 제법 편해질지도?
하염없이 거울 앞에 앉아 있으니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드는 것 같다.
“다 됐어요! 어떠세요?”
첼시가 발그레한 얼굴로 내게 손거울을 들이밀었다.
처음 보는 머리 모양이다. 양옆으로 땋아 말아 올린 머리 사이사이로 진주 매듭 장식이 보이는 게 단정하면서도 은은하게 빛난다.
“예쁘다. 이런 머리는 처음 해보는 것 같아.”
“정말요? 근래 수도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라고 해서 열심히 연습했는데 다행이네요.”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첼시는 내 머리를 다양하게 땋아주고 묶는 걸 즐겨 했지.
어렸을 때 복숭아 모양처럼 생긴 머리도 그렇고.
마찬가지로 과하지 않게 수수한 연한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는 걸 끝으로 준비는 끝났다.
룩스와 슈가한테 잠시 다녀올 테니 기다리라고 당부한 뒤, 내려오니 아빠가 보였다.
“왔나?”
외출복이시잖아?
혹시…….
“아빠도 황궁에 가세요?”
“델러노가 보자고 해서.”
까딱, 고개를 끄덕이며 들려온 긍정적인 대답에 괜히 뿌듯해진다.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구나. 황제는 이번을 토대로 아빠를 복귀시키려는 거였어.
어차피 부를 계획이었다면 후에 어떻게 해서든 부르긴 했겠지만……. 그래도 아빠한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기분 좋아 보이는데.”
“아빠랑 같이 가서요.”
나는 제법 능청스레 굴며 아빠한테 팔짱을 꼈다.
이 모습을 본 첼시가 뒤에서 “어머.” 소리를 냈다. 돌아보니 입을 가린 첼시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흐뭇하게 웃는 집사의 모습이 보였다.
‘왜 저러지?’
고개를 갸웃거리려는 찰나.
“안 가나?”
“가요!”
아빠의 채근에 나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좀 무겁네.’
황궁으로 가는 마차 안, 양옆으로 올려 묶은 머리의 무게 탓에 절로 손이 올라갔다.
그렇다고 첼시가 기껏 정돈해준 머리를 풀어버릴 수는 없으니, 진주 매듭만 매만지는데 아빠가 내게 말을 걸었다.
“긴장할 것 없다.”
“네?”
“황후를 보는 게 긴장돼서 그런 거 아닌가?”
“음, 그것도 있긴 한데…….”
지금은 그냥 머리가 무거워서 그런 건데.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기 망설여졌다. 왠지 아빠가 할 말이 예상된다고 해야 하나.
분명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풀어버리면 그만 아닌가?’라고 말할 테지.
“그것도 있긴 한데?”
“아니요. 그게 다예요.”
음, 내가 뱉은 말이지만 납득 못 할 말이로군.
그러나 어쩔 수 없다. 헤헤, 어색한 웃음까지 흘려주니 아빠가 옅은 한숨을 흘린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도 이거 하나는 명심하는 게 좋겠군.”
어떤 걸?
“네게 해가 되는 인간은 내가 다 처리해주마.”
“…….”
“그게 누구든 상관없이.”
감동적이긴 한데, 그거 너무 위험한 발언 아닌가요?
상대는 황후 폐하인데!
물론 아빠는 내게 반역자가 되겠노라고 말한 만큼 실제로도 그렇게 될 거란 걸 알지만…….
그래도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건 어쩔 수 없다.
“고마워요, 아빠.”
그래도 날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공 전하. 그리고 공녀님.”
황궁에 도착하자 시종과 시녀, 황실 기사 몇이 우리를 반겼다. 아빠와 함께 시종을 따라가려 하니 시녀의 말이 나를 붙들었다.
“공녀님께서는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여기서부터 아빠와 헤어져 따로 가는 건가? 조금 더 가다가 헤어질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너무 이른 이별에 당황한 내가 나도 모르게 아빠를 흘긋 쳐다봤을 때다.
“베로니카.”
“네?”
“끝나고 데리러 가마.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아니, 그 이유로 쳐다본 게 아니었는데!
어쩐지 아빠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해 응석이나 부리는 아이가 된 기분이다.
나만 이런 느낌을 받은 게 아닌지 곳곳에서 크흠, 헛기침을 뱉었다.
“두 분께선 평소 많이 친근하신가 보군요. 부녀지간에 좋은 일이지요.”
시종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내 얼굴은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에둘러 저리 표현한 거란 걸 알았으니까.
어흑, 내 이미지…….
* * *
황후, 엘리제는 조금 어이없는 심정으로 제 맞은편에 앉아 태연스레 차를 마시는 카드릭을 바라봤다.
아들이 모친을 찾아와 차를 마시는 게 뭐가 문제냐 싶겠지만, 그 아들이 ‘카드릭’이라는 게 문제였다.
엘리제도 처음에는 제 아들을 사랑해보려 했다. 비록 제 남편과는 정략으로 이루어진 관계라 애정보다는 의무에 더 가까웠지만, 그래도 저가 낳은 친자식이지 않은가.
그러나 누가 제 남편의 핏줄 아니랄까, 카드릭은 일반적인 아이와 많이 달랐다.
어렸을 적부터 천재적인 학업 성취를 보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성격까지 조숙했다.
제 또래 시녀들의 아들이 제 모친을 “엄마!”라고 사랑스럽게 부를 때 카드릭은 엘리제를 ‘어머니’ 혹은 ‘황후 폐하’라고 격식 있게 불렀다.
커서 그렇게 부르는 거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고작 네 살짜리 아이가 선을 그어대며 어른스레 격식을 차리는 모습은 엘리제가 느끼기에 조금 징그러웠다.
어릴 적부터 조숙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그녀도 네 살 때는 저러지 않았으므로.
크면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카드릭은 성장할수록 엘리제가 그리던 이상적인 아들의 면모와는 많이 멀어졌다.
필요한 일이 아니면 찾아오질 않았으므로.
그래도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엘리제 나름대로 카드릭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그녀 혼자만의 노력은 무의미했다. 카드릭이 상응해주지 않았으므로.
그야말로 의무적인 모자 관계. 그게 카드릭과 엘리제의 모습이었다.
그런 아들이 저를 찾아와 차를 마시고 있다니?
심지어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고 물으니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말이 이거다.
“어머니와 차를 마시고 싶어서요.”
이제 와 갑자기?
엘리제가 제 아들의 변덕을 헤아리는 동안 카드릭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서 새 시녀를 들일 거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