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86)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86화(86/125)
#86
내게?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 어떤 건데?”
그 뒤로도 이리스는 한참 내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며칠 후에 저희 저택에서 모임이 있는데, 혹시 참석해주실 수 있을까요?”
모임? 어떤 모임?
“반려동물 교류회예요. 전부 또래 귀공녀들만 오고요. 공녀님께서 데리고 계신 동물이 너무 멋져서요! 앗, 제 말이 불쾌했다면 죄송해요!”
“아니야. 불쾌하기는.”
나는 고개를 푹 이리스한테 손사래 쳤다. 룩스가 들었다면 ‘내가 좀 멋지긴 하지! 헤헷!’라고 우쭐거렸겠지.
물론, 나도 룩스를 겁내기는커녕 칭찬해주니 기분 좋긴 하지만 모임 참석 여부를 묻는 만큼 대답하기 신중해졌다.
룩스는 평범한 동물이 아니었으니까.
대부분 작아진 룩스를 보고 마수라 생각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나로서는 많이 고민됐다.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죠? 죄송해요. 공녀님을 곤란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윽, 저렇게까지 풀 죽은 채 사과할 건 없는데.
이리스가 마리 언니와 성향이 비슷해서일까, 잔뜩 침울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무래도 나는 선하고 상냥한 사람한테 약해지는 모양이다.
‘한 번쯤은 괜찮겠지.’
딱히 누군가와 친분을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이리스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좋아. 갈게.”
“……정말이세요? 정말요?”
“응. 그런데 룩스 말고 다른 동물도 데려가도 될까? 하늘다람쥐인데.”
“물론이죠! 아, 고양이가 있어서요. 안전을 위해 보호장에 넣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후 이리스는 참석 일자와 장소를 적어 대공가로 보내겠다고 말한 뒤 돌아갔다.
“얘기 다 끝났어?”
“다 보고 있었어?”
“친구를 사귀는 자리에 내가 어떻게 끼어들겠어?”
“괜찮았는데. 그리고 이리스 양을 친구라고 하기에는 오늘 처음 만났고.”
“만난 시기는 중요하지 않지. 잘 맞으면 금방 친해지는걸?”
끄응,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나는 친구 사귀는 법도 모르는 줄 알겠다.
나도 친구는 있는데 말이야.
나는 마리 언니가 하는 말을 반쯤 흘리며 배고프니 저녁 먹자며 화제를 돌렸다.
* * *
책을 읽던 나는 새어 나오는 하품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제 마리 언니와 헤어지기 아쉬워 펠리시타스 보육원에서 자고, 새벽 일찍 나와 대공가를 들렸다가 황궁에 입궁한 탓인지 피곤했다.
‘대공가에서 잘걸.’
마리 언니와 만난 게 워낙 오랜만인 데다 한동안 또 들리지 못할 듯해 아쉬운 마음에 결정한 건데 역시 무리였나 보다.
‘그나마 황후가 내게 딱히 무언가 시키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렇다고 황궁 도서관에서 늘어져 잘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황후의 시중을 드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렇게 피곤한 정신으로 큰 실수를 저지른다면……. 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깊게 생각하지 말자.
그사이 또 하암, 연달아 하품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눈물도 찔끔 흘러나왔다.
안 되겠다.
바깥 공기! 공기를 쐬자! 그럼 잠이 깨겠지!
벌떡 일어난 나는 바깥으로 나왔다.
“후우.”
확실히 바깥바람을 쐬니 언제 졸렸냐는 듯 정신이 멀쩡해졌다.
그래도 도로 들어가기엔 나온 게 아까우니 조금만 나와 있다 갈까?
요새 너무 건물 안에만 있었으니 햇볕도 쬘 겸.
볕이 드는 가까운 벤치에 앉으니 몸이 따끈따끈해지는 게 기분 좋다.
역시 나오길 잘했다. 조금만 있다 가야지. 조금만, 있다…….
툭-
떨어진 고개에 나는 매우 놀라며 퍼뜩 눈을 떴다.
헉! 언제 잠들었지! 대체 얼마나 잠들었던 거야?
파드득 몸을 떠는데 몸을 덮고 있던 게 무릎 위로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뭐야? 이거 남자 옷이잖아?
뒤늦게 어깨 뒤로 단단한 무언가가 날 받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게 꼭 사람 몸 같은…….
잠깐, 사람?
휙 고개를 들자 햇빛을 받아 해사하게 빛나는 은발의 소년이 나를 반긴다.
“……카드릭?”
“잘 잤어?”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건데?”
“지나가는데 네가 보이길래.”
황궁 도서관을 지나가다 내가 보이길래 이랬다고?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나와 달리 카드릭은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이었다.
얘는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깨우지.”
“안 일어나던데? 오히려 날 베개 삼아 잘 자고.”
“내, 내가?”
거짓말!
아무리 요새 내가 간이 커졌다지만 황태자를 베개로 삼았을 리가!
해명을 요구하는 내 말에 카드릭은 가볍게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제 말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는 듯이.
“내 선물 준비는 잘 되어가?”
“그러어엄! 열심히 준비하고 있지!”
“기대되네.”
카드릭이 싱긋 웃는다.
윽, 양심 찔려. 하필 이걸 묻다니!
그래도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건 맞고 또 다음 비번 땐 꼭 결정할 거니까.
거짓말은 아니니까 괜찮겠지? 응, 괜찮을 거야.
“요즘도 엘피다에 관심 있어?”
“응. 어? 아니?”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던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여행지로 관심 가졌던 건데 아직도 볼 리 없잖아. 그땐 잠깐 본 거지. 잠깐.”
자연스럽게 웃어야 하는데 자꾸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왜 묻는 거지? 설마 내 망명 계획을 눈치챘나?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일단 웃자. 웃어.
헤헷, 웃는데 카드릭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 아쉽네.”
뭐가?
“내 생일에 맞춰서 엘피다에서 사절단이 오거든.”
“사절단? 정말?”
“어머니께 부탁해 사절단 안내를 네게 맡기자 하려 했는데……. 관심 없다니까.”
“있어! 관심!”
헛, 내가 무슨 말을!
그대로 쩡 얼어붙었는데 카드릭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자연스레 그의 시선을 좇았던 나는 그의 팔을 붙잡은 내 손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팔은 또 언제 잡은 거야? 헉, 겉옷도 떨어뜨렸잖아!
머리가 어지럽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당혹감과 혼란이었으므로.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겉옷을 주우려 했으나 카드릭이 더 빨랐다.
“미안. 너무 놀라서.”
“상관없어.”
겉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더니 도로 입는다.
‘의외네.’
다시 안 입을 줄 알았는데.
“추운 데 아무 데서나 자지 마. 입 돌아가.”
“평소에는 안 그래. 오늘만 그런 거야.”
“그러면 다행이고.”
싱거운 대꾸에 욱했던 마음이 도로 내려간다. 괜히 흥분했던 나만 바보가 된 느낌이랄까.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카드릭이 그럼 다음에 보자고 말하고는 떠났다.
용건이 이렇게 간단할 거였으면 그냥 날 깨우지, 뭐하러 내가 깰 때까지 기다린 건지.
‘그런데 쟤를 만나면 할 말이 있었던 거 같은데 뭐였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불현듯 용건이 떠올랐다.
‘왜 멋대로 애칭 부르냐고 물어야 했는데!’
워낙 정신이 없어 할 말도 못 했다. 나는 바보다! 바보!
사실 물었어도 카드릭이라면 뻔뻔하게 ‘그러면 안 돼?’라고 되물을 듯하지만.
음, 물어보지 말자. 애칭 좀 부르는 건 상관없으니까.
* * *
며칠 뒤 황후가 날 찾았다. 카드릭과 만난 이후, 줄곧 황후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던 만큼 나는 쉬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왔군요, 공녀.”
황후가 웃으며 날 맞이했다. 정말 언제 봐도 우아하고 기품이 흐르는 사람이다.
예를 취하자 황후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엘피다 어를 할 줄 아나요?”
“잘하는 건 아니지만, 의사소통할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묻죠. 곧 엘피다에서 사절단이 오는데 맞이할 생각이 있나요?”
내 대답을 들은 황후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제국어가 아닌 엘피다 국의 언어였다.
기습적인 물음에 놀랐지만 나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영광입니다만, 제게 그런 큰일을 맡겨도 되나요?”
“공녀라면 사절단을 맞이하기 적합하죠. 사절단 맞이는 내 소관이라 인원 편성은 쉬워요. 엘피다 어까지 할 줄 안다니 더욱 적합하죠.”
황후가 우아하게 웃었다.
“부담가질 것 없어요. 대부분 일은 나와 밀리엔 후작이 맡을 테니까요.”
“그럼 전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엘피다 국에서 공작이 아들과 함께 온다더군요. 그 공자의 나이가 공녀와 동갑이고요. 아무래도 나이 있는 사람보다는 또래가 낫겠지요? 공녀나 그 공자한테나 말이에요.”
말동무라고?
나쁘진 않다. 내 또래라면 나도 좀 더 편하게 물어볼 수 있을 테고.
“맡겨주신다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좋군요.”
황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다시 제국어로 돌아와 있었다.
“공녀의 외국어 실력이 수준급이군요. 카드릭이 추천한 이유를 알겠어요.”
걔는 제가 엘피다 어를 할 줄 안다는 걸 모를 텐데요…….
그러잖아도 카드릭과 헤어진 뒤 이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카드릭이야 그 속내를 알 수 없지만, 황후라면 단순히 내가 엘피다에 관심이 있다는 이유로 사절단 맞이 행렬에 넣어줄 리 없을 것 같다고.
뭐, 만족해하는 얼굴의 황후를 보니 잘 풀린 듯해서 다행이지만.
‘좋아. 사절단의 그 공자한테 이것저것 물어서 망명 계획을 자세히 세우자.’
나는 작은 꿈에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