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87)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87화(87/125)
#87
대공가로 돌아오니 첼시가 내 앞으로 편지가 온 게 있다고 알려주었다.
말린 작은 꽃송이와 함께 봉합된 왁스를 뜯으니 단아한 필기체로 적힌 편지가 보인다.
[벨로크 공녀님께.이전에 인사드린 이리스 넬레입니다. 말씀드렸던 모임에 참석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날짜와 장소를 기재합니다.
말씀해주신 다람쥐가 무척 기대돼요. 혹, 일정이 안 된다면 가능한 날짜를 부탁드립니다.
이리스 넬레, 드림.]
이리스 넬레? 아, 보육원에서 본 영애구나.
때마침 이리스가 보낸 날짜와 시각은 내가 비번일 때였다.
‘따로 조정할 필요 없겠네.’
답신을 적던 나는 잊고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슈가야, 혹시 모임에 갈 생각 있어?”
―모임? 그게 뭐야?
“음,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이는 거야. 여긴 동물들도 많이 온댔어.”
―그럼 싫어.
―그럴 것 같았어. 누님은 다른 동물들을 안 좋아하잖아. 짝짓기한 게 신기할 정도라니까.
―신기하다니? 나처럼 매력적인 하늘다람쥐를 가만히 두는 게 이상한 거지!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며 나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 * *
사절단 맞이를 맡기로 한 이후 나는 이런저런 예법 교육을 다시 받게 되었다.
‘덕분에 전처럼 온종일 도서관에는 있을 수 없게 됐지만.’
하지만 내내 도서관에만 있는 것도 제법 힘들었던 터라 나쁘지만은 않았다.
몇 시간씩이고 앉아있으면 몸도 찌뿌둥한 데다 허리도 아프단 말이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리스 넬레가 주최한 모임의 날이 되었다.
나는 룩스를 데리고 넬레 남작가를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
보통은 하녀를 시킬 텐데 이리스는 직접 나와 날 맞이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오겠다고 약속했는걸. 그런데 남작님과 부인은?”
“두 분은 저희끼리 편히 시간을 가지라고 외출하셨어요. 오시느라 힘드셨죠? 얼른 티룸으로 안내할게요.”
이리스를 따라가는데 그녀가 날 돌아보며 말했다.
“저택이 초라하죠? 고양이 때문에 꽃을 둘 수 없어서요. 양해 부탁드려요.”
“초라하긴? 그런 생각 안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역시 공녀님은 상냥하세요.”
이게 상냥한 건가?
나는 멋쩍게 웃었다. 직접 마중 나온 것도 그렇고 이리스의 과한 호의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어느 정도 대우받고 남들이 날 특별 취급하는 것에 익숙해졌으나 그게 당연히 내가 누릴 권리라고 여기는 건 어려웠다.
차라리 이리스가 대공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었다면 좀 나았을 것이다.
그들은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하고 다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공녀님의 개는 다시 봐도 멋지네요. 그런데 전에 말씀하신 다람쥐는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사정이 있어서 데려올 수 없었어.”
내 말에 이리스가 “아쉽네요.”라며 한탄했다.
“그런데 고양이는 영역성 동물 아니야? 이렇게 다른 동물들을 데려와도 괜찮아?”
“괜찮아요. 저희 고양이는 순해서 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착하죠?”
“그렇네.”
“아, 여기가 티룸이에요.”
이리스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가자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을 가득 올려둔 테이블을 중심으로 내 또래의 소녀들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많지는 않네.’
내심 사람이 많은 자리는 부담스러운 만큼 다행이었다.
짧은 소개와 인사가 오간 뒤 비로소 착석했다.
주변에서 은근 내 눈치를 보며 쭈뼛하게 굴었으나 얼마 안 있어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모임에 온 동물은 강아지 두 마리와 이리스의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앵무새 한 마리였다.
룩스가 얼핏 보기엔 강아지처럼 보여서일까, 강아지를 데리고 온 영애들이 유독 룩스한테 관심을 보였다.
“공녀님의 강아지는 얌전하네요. 저희 루시는 워낙 사고뭉치라서 이렇게 잡고 있지 않으면 정신없는데 말이에요.”
“룩스도 은근 사고뭉치야.”
“정말요?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역시 강아지들은 어쩔 수 없나 봐요.”
―엑! 내가?
‘노느라 몸에 흙 다 묻혀오잖아. 씻길 때 얼마나 고생인데.’
―하지만 그게 좋은걸!
룩스가 붕붕 꼬리를 흔들며 자기주장을 하는데 한 영애가 불쑥 물었다.
“혹시 어떤 품종인 줄 알 수 있을까요? 이런 품종은 처음 봐서요. 털이 깃털 같은 게 특이하고요.”
그야 처음 보겠지. 강아지가 아니라 마수니까…….
속내를 삼킨 나는 대신 요 몇 년간 누군가 룩스에 관해 물으면 대외적으로 둘러댄 변명을 말했다.
마리 언니한테야 거짓말할 수 없어 솔직하게 말했지만, 룩스가 마수인 걸 알려봤자 좋은 건 없으니까.
“품종은 잘 모르겠어. 어렸을 적에 우연히 길에서 만나서 데려왔거든.”
“네? 정말요? 정말 좋은 일 하셨네요.”
“그렇진 않아. 룩스가 곁에 있어서 힘들 때를 견뎌낼 수 있었거든.”
“그, 그렇죠. 저도 제 곁에 루시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저도요.”
내가 룩스를 쓰다듬자 저마다 제 반려동물들을 소중히 쓰다듬는다.
동물들이 워낙 귀여워 처음에 즐거웠던 것도 잠깐, 이후 다른 주제로 넘어가니 지루해졌다.
드레스를 새로 맞출 건데 어디가 좋을지 모르겠다던가, 최근 유행은 뭐라던가, 그런 얘기들.
워낙 저런 것들에 관심이 적은 만큼 더욱 그랬다.
‘대공가로 돌아가고 싶다.’
으, 역시 나는 친구를 많이 만들 수 없는 성격인가?
함께 어울리려고 노력하기보단 이리스한테 예의를 차리기 위해 억지로 참석해 있다는 느낌만 드는 걸 보면…….
멍하니 찻잔을 매만지는데 어떤 영애가 난데없이 손뼉을 마주쳐 내 이목을 끌었다.
“참, 그러고 보니 공녀님께서 황후 폐하의 시녀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어? 응.”
“황후 폐하께선 어떠신가요? 무섭지 않으신가요?”
“전혀. 상냥한 분이셔.”
생각해 보면 황후는 정말 배려 넘치는 좋은 사람이었다.
매번 내 처지를 생각해주고 배려해주고 있으니.
그 ‘카드릭’의 어머니이며, 황제의 부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만날 때마다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공녀님께서는 황태자 전하도 자주 뵙죠? 황후 폐하의 시녀시니까.”
“몇 번 보긴 했는데 자주까지는 아니야.”
원래 카드릭은 제 어머니를 잘 안 찾아온다고 했으니까.
황후궁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난 때가 더 많기도 하고.
“사촌이시니 만날 기회가 많지 않나요?”
“시녀 일로 바빠서 말이야.”
바빠진 건 최근이었으나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 없는 만큼 나는 가벼이 둘러댔다.
그보다 수도에 올라오기 전에 리리카를 비롯해 다른 가문의 영애들과 모임을 했을 때도 이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내 또래 여자아이들의 관심사는 다 비슷한 걸까.
“그럼 실베스터 공자님, 아니 미하엘 경은요? 공녀님께서는 미하엘 경도 보셨겠죠? 황태자 전하의 호위 기사로 발탁되었으니까요.”
미하엘 실베스터.
얼마 전까지 가장 신경 쓰다 겨우 잊었던 이름에 절로 몸이 움찔거렸으나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응. 한 번 보긴 했어.”
“역시 공녀님은 보셨을 거 같았어요! 어떤가요? 소문대로인가요?”
“어떤 소문?”
“천사가 지상에 잘못 태어난 거라는 소문이요! 저런 말을 들을 정도면 엄청난 미남이겠죠?”
천사?
미하엘 경이 잘생긴 건 나도 인정하지만, 딱히 천사가 떠오르진 않던데…….
이건 내가 그의 뒷모습을 알아서인가?
하긴, 미하엘 경의 얼굴만 보면 그런 곳과 연관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전혀 안 들긴 하지.
만약 룩스가 미하엘 경이 그 소년과 동일 인물임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의 뒤에 그런 진실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예상조차 못 했겠지.
나는 나를 향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이들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잘생기긴 했어.”
“그렇죠? 전에 멀리서 얼핏 뵌 적 있는데 정말 같은 사람인가 싶더라니까요! 빛……. 맞아요, 마치 빛 같았어요!”
그 정도인가?
미하엘 경은 금발이니 햇빛을 받으면 과하게 반짝여서 그렇게 보일 만하다만.
“공녀님 생각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으, 응? 뭘?”
미하엘 경이 빛 같다는걸?
“황태자 전하와 미하엘 경 말이에요! 누가 더 잘생긴 것 같나요? 공녀님은 두 분을 모두 뵀으니 아시겠죠?”
저런 질문을 들은 만큼 의식하지 않으려야 의식이 되었다.
둘 다 정말 잘생긴 데다 우열을 가리기에는……. 서로 다른 계열인데 가릴 게 있나? 아니, 그보다 이게 뭐라고 열심히 생각하는 거야?
“글쎄. 잘 모르겠어.”
“그런가요……. 아! 그럼 춤은요? 만약 두 분이 동시에 춤 신청하면 어떡하실 거예요?”
“맞아요! 두 분 다 멋진 예복을 차려입고 공녀님께 춤을 신청하는 거죠!”
그런 걸 가정하는 게 의미가 있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째서 둘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끙, 내내 둘에 관해 생각해서 그런가?
“그런 일은 없을 거 같은데.”
“만약에요!”
그렇게 말해도……. 어째 둘의 얼굴은 떠올라도 내게 춤을 신청하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으니 몰입이 안 된다.
게다가 카드릭이나 미하엘 경과 함께 춤을 춰야 한다니.
차라리 아빠랑 춤을 추는 게 낫겠다.
……어? 이거 좋은데?
미안해요, 아빠! 좀 팔아먹을게요!
“만약이라 해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빠랑 출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