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94)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94화(94/125)
#94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하는 것도 잠깐, 곧 가슴이 먹먹해졌다. 물에 젖은 솜이 목부터 가슴까지 무겁게 얹힌 느낌.
두 분 사이에 얽힌 이야기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나는 그 일을 겪은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러니 그 감정을 전부 이해할 수 없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깨우는 게 낫나?’
고민하던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당장은 아빠의 우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굴 자신이 없었으니까.
‘이대로 나가면 내가 다녀간 줄도 모를 거야.’
그러니 방금 본 건 모르는 일이다. 난 모르는 일이다.
스스로 세뇌하며 잠시 내려뒀던 상자를 챙기던 찰나, 읊조림에 가까운 부름이 들렸다.
“…베로니카?”
“깨, 깨셨어요?”
나는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한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이렇게 갑자기 깰 줄은 몰랐는데.
돌연 아빠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헉, 나 때문에 깨서 기분이 안 좋아지셨나?
“죄송해요, 아빠.”
“왜 사과하는 거지?”
“저 때문에 깨셨잖아요. 또 멋대로 들어왔고요.”
나도 모르게 주눅 들었다. 예전에 출입 금지 방에 들어갔다 들켰을 때가 떠올라서였다.
서재는 출입을 금한 적이 없고, 그때 이후로 아빠가 내게 화낸 적은 없긴 하지만 꽤 충격이긴 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몸이 반응하는 걸 보면.
“그런 거로 화내진 않아. 방해받기 싫었다면 애초에 문을 잠가뒀을 거다.”
그렇긴 한데…….
뜻하지 않게 본 게 있어서인지 나는 좀처럼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없었다.
“그 상자는 뭐지?”
“아! 이거, 아빠 거요.”
나는 허둥지둥 상자를 내밀며 덧붙였다.
“장갑이에요. 필요하신 듯해서 주문했어요.”
“그렇군.”
내게서 상자를 받은 아빠는 바로 확인하려는 듯 뚜껑을 열었다.
이윽고 아빠와 함께 상자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본 나는 크게 당황했다.
‘왜 회색이지?’
카드릭한테 줄 장갑이 회색이고, 아빠 건 검은색인데?
설마……. 상자를 바꿔 들고 온 거야?
그러고 보니 상자 두 개가 비슷하게 생겼던가?
포장지야 크게 상관없어 유심히 살피지 않았더니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좀 작은 것 같은데.”
그사이 장갑을 꺼낸 아빠가 손에 대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헉,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잖아!
나는 재빨리 아빠에게서 장갑을 뺏었다.
등 뒤로 장갑을 숨기자 아빠가 눈썹을 더욱 찌푸렸다.
“자, 장인이 만들 때 실수했나 봐요. 다시 주문할게요.”
“이상한 일이군. 그동안 이런 일은 없었는데.”
“사람이니까 실수할 때도 있는 거죠.”
죄송해요, 장인 아저씨!
애꿎은 장인의 명성을 더럽혀 미안한 것과 별개로 카드릭의 생일 선물이라고 실토할 수는 없었다. 아빠한테는 더욱.
허둥지둥 상자까지 챙기던 때다.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카드가 툭 떨어졌다.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어 빠르게 카드를 주우려 했으나 아빠가 더 빨랐다.
‘별거 아니겠지……?’
아니어야 하는데?
카드를 본 아빠의 미간이 더 좁혀졌다.
“장갑을 두 개 주문했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 쓰여 있다.”
듣고 보니 퍽 멍청한 질문을 했구나 싶다.
카드를 보고 저렇게 물었으면 당연한 건데.
나는 아빠가 말없이 내민 카드를 받아 읽었다.
[주문하신 대로 두 분의 장갑을 만들었습니다. 확인하시고 주문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방문해주십시오.]‘두 분의 장갑’이라니!
이래서야 아빠 거뿐만 아니라 카드릭의 것도 주문했다는 걸 알리는 꼴이잖아?
그보다 대체 이런 카드를 왜 상자 안에 넣어둔 건데!
속으로 장인을 탓하는데 아빠가 물었다.
“또 누굴 걸 주문한 거지?”
“그게…….”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던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릭 거요.”
“누구 거라고?”
“카드릭, 전하요.”
아빠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놈 걸 왜 주문한 거지?”
“곧 생일이라고 해서요. 초대받았는데 아무것도 안 가져갈 수 없잖아요.”
“황실에서 온 초대장은 없다고 들었는데?”
그럴 수밖에.
카드릭은 불새를 통해 초대장을 전했으니까.
“개인적으로 받았어요.”
“얕은수를 쓰는군.”
살벌한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내 몸이 절로 움츠러들 만큼.
“숨겨서 죄송해요.”
“네게 화난 게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늘 생기기 마련이니.”
아빠가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짚었다.
“혹시나 내 사정 때문에 숨긴 거라면 앞으로는 그러지 말란 거다. 개인적인 문제를 네게마저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
그동안 숨기려 애쓴 게 무색해진다.
하지만 안도보다는 섭섭한 마음이 더 컸다. 묘하게 선 긋는 거 같아서.
섭섭해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아니, 애초에 내게는 그럴 자격도 없었다.
여전히 망명 계획은 버리지 않은 데다 아빠를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도 없으니까.
“어쨌든, 초대받았다니 참석하는 게 좋겠지.”
역시나 순순히 떨어지는 허락이 의외지만 전혀 기쁘지 않아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장갑은 내가 보관하다 전해주는 게 낫겠군.”
아빠가 내민 손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갑을 직접 전해주겠다니, 이거 혹시…….
“아빠도 연회에 가세요?”
“네가 가는데 그럼 안 갈까.”
당연하다는 어투에 가슴이 간질거린다.
‘순 멋대로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섭섭했으면서 겨우 저런 말 한마디에 헤실헤실 풀리다니.
“그래도 번거롭게 아빠가 장갑을 전해주실 필요 없…….”
“필요 있다.”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돌아온 단호한 대꾸에 나는 멈칫했다.
‘내가 전해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건가?’
정치적인 이유라든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다든가?
그렇지 않고야 저렇게까지 단호할 리 없을 듯했다. 지금으로서는 아빠가 왜 저러는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결국, 나는 아빠한테 장갑을 건넸다.
* * *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다. 중앙 황궁 광장 앞, 양측에 일렬로 나열된 붉은 불새가 그려진 황금색 깃발이 휘날린다.
사절단 맞이를 위해 정돈하고 한껏 준비한 광장은 장엄했다.
그러나 그런 멋진 광경도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안내 사항을 듣는 내내 사절단 맞이 행렬에 내 또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탓이었다.
‘망명할 곳에 관해 자세히 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카드릭의 제안을 덥석 붙잡은 건데.’
이래서야 나만 특혜를 받았다고 알리는 꼴이나 마찬가지라 민망했다.
황후는 사절단에 내 또래의 공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카드릭의 입김이 들어간 것도 사실이니까.
‘나 혼자만 따로 교육받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물론, 미리 알았다 해도 워낙 좋은 기회라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빠도 소식을 듣고 “괜찮군.”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공녀님?”
응?
고개를 돌리자 상기된 얼굴을 한 검은 머리 소녀가 보인다.
뜻밖의 인물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
“리리카?”
“오랜만에 봬요, 공녀님. 여기서 뵐 줄 몰랐어요.”
“그러게. 황궁에는 어떻게 온 거야? 수도에는 언제 왔어?”
“아버지를 따라왔어요.”
“파르지 남작님?”
“네. 아버지가 대리공사……, 음, 이번 사절단을 맞이하는 데 임명되셨대요. 그래서 저도 따라가게 해달라고 부탁드렸죠.”
맞다, 파르지 남작 부인이 엘피다 사람이니 남작도 엘피다어를 잘하겠구나.
“그러면 아까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아니요. 아버지가 저는 들으면 안 된다고, 잠깐 주변을 구경하고 오라고 하셔서 그러다 이제 왔어요.”
그래서 못 봤구나. 어쩐지 갑자기 보이더라니.
“공녀님을 뵙게 되어 기뻐요.”
배시시 웃는 이리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묻어났다.
그리고 리리카를 봐서 반가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공녀님은 여기에 어쩐 일이세요?”
“나도 사절단 맞이를 하게 되어서.”
“정말요? 하긴, 공녀님도 엘피다어를 잘하시죠.”
……카드릭이 꽂아준 것과 다름없는데.
양심에 가책을 느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그동안 잘 지냈어?”
“저야 뭐, 다를 게 없죠. 공녀님은 쭉 바쁘셨겠어요. 모임도 많으실 테고.”
“바쁘긴 한데 모임에 가는 건 없어서 한가한 날도 있어.”
문득 이리스가 주최했던 모임이 떠올랐지만, 금방 지워냈다.
앞으로 안 갈 거니까.
“그럼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종종 찾아봬도 될까요?”
“나야 좋지. 오기 전에 기별만 줄래?”
“물론이죠.”
활짝 웃는 리리카의 뒤로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리리카.”
“앗, 아버지!”
“공녀님도 함께 계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같이 예를 차리긴 했으나 어쩐지 처음 보는 기분이었다.
분명 몇 번 보긴 했을 텐데 말이지.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인상이 아니라 그런가?
아마 리리카가 아는 척하지 않았다면 마주쳐도 몰랐을 테다.
“공녀님도 아버지처럼 사절단 맞이를 하신대요. 혹시 알고 계셨어요?”
“그러잖아도 방금 듣고 오는 길이란다.”
짧게 대꾸한 남작이 날 보며 말했다.
“사절단이 입구에 도착했다고 하더군요. 제 딸아이를 데리고 가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짧은 만남에 리리카가 아쉬워하며 “편지할게요.”라고 말했다.
다시금 혼자 남았지만, 어색함을 느낄 새는 없었다. 사절단이 오는 게 멀리서부터 보이자 다들 분주해져서였다.
남색 깃발을 휘날리며 광장에 들어오는 사절단의 행렬은 생각보다 길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내가 담당하게 될 거 같은 공자를 찾는 건 꽤 쉬웠다.
제법 선두 쪽에 있기도 했지만, 이쪽처럼 어른들이 대부분인 행렬에 내 또래로 보이는 소년은 한 명뿐이었다.
‘하늘색 머리?’
나만큼이나 보기 드문 머리 색에 절로 눈길이 간다.
거리가 제법 가까워지자 파르지 남작을 포함해 몇 명이 앞으로 나서 사절단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을 오셨습니다, 이곤 공작님.”
“반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옆에 있는 아이가 아드님입니까?”
“맞습니다.”
소년과 똑 닮은 중년 남성이 웃으며 대꾸했다.
“견문을 넓힐 겸 데려왔는데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군요.”
“그럴 리가요. 아주 의젓해 보이는데요. 미리 알려주신 덕분에 저희 측에서도 준비할 수 있었고요.”
“준비라면……?”
“당분간 공자님의 안내를 맡을 분입니다. 벨로크 대공의 따님이시죠.”
능란하게 오가던 언어를 듣고 해석하느라 정신없는데 누군가 내게 손짓했다.
얼떨결에 앞으로 나서자 모두의 이목이 내게 쏠렸다. 당황스럽지만, 다행히 내 몸은 엘피다의 법례대로 인사하고 있었다.
“베로니카 벨로크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귀여운 아가씨로군요. 뵙게 되어 저 또한 영광입니다.”
이곤 공작이라 불린 남자가 평온한 미소를 그리며 내게 인사했다.
타국의 귀족이라고 어리게 대하는 것 없이 예를 갖추는 그의 태도는 점잖았다.
“리안, 너도 인사해야지.”
“리스테안 이곤입니다.”
공작과 달리 조금 서툰 발음의 제국어가 공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서툰 발음에 정말 내 또래라는 게 느껴지며 괜히 안심되던 찰나였다.
공자가 내게 다가왔다. 단순히 인사를 하기 위함이라기에는 꽤 가까운 거리였다.
‘……?’
의아하게 공자를 쳐다보는데 돌연 그가 몸을 숙였다.
이윽고 뺨에 낯선 촉감이 빠르게 닿았다 떨어졌다.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