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95)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95화(95/125)
# 95화
왜, 뺨에……?
놀라 눈을 깜빡이는 동안 공자가 환히 웃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공녀.”
봄꽃을 닮은 미소였다. 대담한 행동과 달리 그의 웃는 얼굴만큼은 순수했다.
모순적인 모습에 조금 정신이 희미해졌다.
나뿐만 아니라 이곤 공작 역시 제 아들의 행동을 예상 못 한 모양이었다. 그는 누가 들어도 당혹감이 역력한 목소리로 공자에게 물었다.
“리안, 공녀한테 무례를 범하면 어떡하니?”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저는 제국식대로 인사했을 뿐인걸요.”
“르제니아 제국에 그런 인사 법은 없단다.”
“없다고요? 하지만 제가 읽은 예법 책에서는 분명 이렇게 인사한다고 했는데…….”
“저희 제국에서는 그렇게 인사하지 않습니다. 혹시 옐펜 왕국의 인사법과 헷갈린 건 아닌지요?”
이곤 공작에 이어 내 곁에 있던 파르지 남작이 이어 말했다.
“아.”
짧은 한탄이 공자에게서 흘러나왔다.
그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정말 헷갈렸구나.’
어리숙한 모습에 조금 전 벌어진 돌발적인 행동으로 올라온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공녀.”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내 대꾸에도 공자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사과했다.
보다 못한 이곤 공작과 파르지 남작이 중간에 끼어들어 그를 만류할 때까지 계속해서.
* * *
―왔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룩스가 내 품에 안겨들었다.
털 여기저기 묻은 풀잎들과 입에 문 나뭇가지를 보니 정원에서 놀고 있던 모양이다.
손끝에 닿는 털과 받쳐 든 발바닥이 꽤 차갑다.
‘안 추워?’
―전혀? 아, 누님은 조금 노는 척하다 무섭다고 들어갔어!
‘무서워? 왜?’
“왔군.”
지척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돌아보니 팔짱을 끼고 있는 아빠가 보였다.
‘설마 무섭다고 한 이유가…….’
―저 인간 때문이지!
때에 맞춰 룩스가 신나게 말했다.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아빠, 룩스와 놀아주셨어요?”
―내가 놀아준 거야!
“널 기다리는 동안 나뭇가지 몇 번 던져줬을 뿐이다.”
서로 다른 주장에 나도 모르게 옅은 웃음이 흘러나온다.
밖이 추우니 일단 들어가자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얼마 안 됐다.”
―오래 기다렸지! 나뭇가지를 몇 번이나 물어다 줬는지 몰라!
이럴 때만큼은 룩스의 말이 아빠한테 들리지 않아 다행이라니까.
“생각보다 늦기에 데리러 갈까 고민하긴 했지.”
“좀 늦었죠. 저녁만 먹고 빨리 온다고 온 건데…….”
“별 탈 없이 왔으니 됐다. 그보다 엘피다에서 온 귀족이 무례하게 굴진 않던가?”
“전혀요. 생각보다 착해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또래 친구가 늘겠군.”
“친구…….”
―베리의 친구는 나야!
“친구는, 어렵지 않을까요?”
나는 멋쩍게 뺨을 긁었다. 그도 그럴 게 그간 이성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보육원에 있을 때도 남자아이들과는 어울리기 어려웠다.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과도 그다지 안 친했으니 말 다 했지.
지금에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귀족 영애가 몇 있지만.
“어째서?”
“그야 만난 지 얼마 안 됐고 관심사도 잘 모르는걸요.”
말하다 보니 문득 카드릭이 떠오른다.
그나마 유일하게 가깝게 지내는 남자애긴 한데…….
‘친구는 아니지.’
내가 멀리한다고 해서 멀리할 수 있는 게 아닌지라 어떻게든 지내고 있는 거니까.
서류상 사촌이기도 하고.
―헉! 베리랑 나랑 친구 아니야?
어지간히 놀랐는지 룩스가 털을 바짝 세우며 날 올려다봤다.
지금처럼 가끔 의도치 않게 내 생각이 룩스한테 전달되는 때가 있었다.
하필 저 생각이 룩스한테 전달될 줄은 몰랐지만.
‘친구 맞아. 너 말고 카드릭을 생각한 거였어.’
―그렇지! 우린 친구지!
등을 살살 긁어주며 달래듯 말하자 금세 활기를 되찾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설핏 웃은 나는 아빠와 대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친구가 되는 건 어려울 거 같아요.”
“그래도 또래 귀족 영애이니 겹치는 관심사가 있을 텐데?”
“귀족 영애요?”
“……?”
“……?”
뜬금없는 맥락에 의문을 가진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빠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귀족 영애가 왜 나오는 거지?
설마 공자를 내 또래 귀족 영애라고 착각하신 건가?
“설마 귀족 영식인 건가?”
생각과 동시에 들려온 아빠의 물음에 당혹감이 몰려왔다.
“말씀드린 줄 알았는데……. 제가 말 안 했던가요?”
“안 했다.”
“정말요? 어, 공작 가문의 영식이래요.”
내 또래라고는 말했으면서 성별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니 조금 머쓱하다.
딱히 중요한 게 아니라서 굳이 안 말한 듯하지만.
“네 또래의 남자란 말이지?”
“맞아요. 제 또래.”
그런데 기분 탓인가?
아빠의 얼굴이 조금 험악해진 것 같은데?
아니, 원래 험악한 인상이었으니 평소랑 똑같은가?
“착하다고 했으니 걱정할 일을 만들지는 않겠지.”
“걱정할 일이요?”
“네게 함부로 굴거나 구설에 휘말리게 한다거나.”
“그럴 리 없잖아요.”
무심코 대꾸하자마자 공자가 첫 만남에 한 짓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뭔가 있긴 하네.
아빠한테까지 알려질 일은 없겠지……?
슬쩍 눈치를 살피는데 아빠와 눈이 딱 마주쳤다.
찔리는 게 있는 만큼 아빠한테 팔짱을 꼈다. 중간에 룩스가 배가 조여진다며 불평했으나 나는 그 말을 애써 무시했다.
“집에 오니 좋네요.”
헤헷, 웃자 아빠가 굉장히 의심스럽다는 듯 날 쳐다본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수상쩍지만, 나는 끝까지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마 아빠한테까지 그게 알려지겠어? 애들 실수인데.
* * *
가볍게 넘긴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황후의 시녀들과 함께 다과를 들던 때였다. 데보라 부인이 날 똑바로 보며 말했다.
“참, 엘피다에서 온 공자가 고백했다면서요?”
켁!
“어머, 괜찮아요?”
“이거 써요, 베로니카 양.”
“감사, 감사합니다.”
나는 데보라 부인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 입가를 닦았다.
다행히 찻물을 뱉어내는 불상사는 면했지만, 기침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하필 차 마시는데 저런 말을 하다니!
“미안해요. 제 호기심이 베로니카 양을 당황하게 했군요.”
“조금 놀라서……. 손수건은 나중에 돌려드릴게요.”
“괜찮으니 개의치 말아요.”
데보라 부인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대체 그런 말이 어디서…….”
좀 심하게 잘못 와전되긴 했지만, 어제 일어난 일을 어떻게 데보라 부인이 아는 거지?
“조카가 말해줬어요. 제 조카도 베로니카 양처럼 사절단 맞이를 하거든요.”
어제 그 자리에 있었다니!
애들의 실수로 넘길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와전된 걸 들으니 해명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오해하신 듯한데 공자는 제게 고백한 적 없어요.”
“정말요?”
“네. 옐펜 왕국의 인사법과 헷갈렸다고 하더라고요. 바로 사과도 해주셨어요.”
“옐펜 왕국이면……. 그래서 조카가 그렇게 말했나 보군요. 제 조카의 오해였네요.”
“저도 오해했네요. 베로니카 양이 워낙 예뻐서 그럴듯하더라고요. 그래서 들은 그대로 믿었어요.”
뜬금없이 쏟아지는 칭찬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칭찬이니 기분 좋긴 한데, 내가 예쁜 얼굴은 아니지 않나? 반반하게 귀여운 쪽이면 몰라.
“혹시 그런 말을 또 들으시면 저 대신 아니라고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걱정하지 말아요.”
“제 조카는 제가 따끔하게 혼내고 입 단속시킬게요.”
부인들이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부인들 외에도 다른 이들한테도 저런 식의 소문이 퍼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타국에서 온 공자가 또래 소녀에게 반해 첫 만남에서 고백했다는 소문이라니.
솔직히 나 같아도 꽤 흥미롭게 들을 것 같다.
그러니까, 저 소문의 ‘소녀’가 나와 상관없다는 전제에.
그래도 저 소문이 아빠한테까지는 들어가지 않겠지?
별일 있겠냐만 싶지만, 만약 아빠까지 알게 되면 많이 부끄러울 것 같다.
그 뒤로도 부인들은 내게 엘피다 귀족에 관해 조금 물었고, 나는 아는 한에 최대한 대답하다 이만 갈 시각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아직도 진정 안 되네.’
아까 놀란 여파가 생각보다 오래가서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길 반복하며 사절단이 머무르는 별궁으로 향했다.
* * *
“안녕하세요, 공자님.”
“아! 오셨군요.”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하늘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벌떡 일어났다.
“앉아 계셔도 되는데.”
“절 도와주는 분인데 예의를 차려야죠.”
양처럼 순한 얼굴로 수줍게 웃는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근래 접한 또래 이성이 카드릭과 미하엘 경이다 보니, 그들과 다르게 순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 괜히 감격스럽다랄까.
“공작님은 안 계시는가요?”
“아버지는 대사와 할 이야기가 있어 일찍이 나가셨습니다.”
“언제 오실지 아시나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공자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어제는 긴 여행길을 끝내고 막 도착한 이들이 피로할 것 같아 저녁만 먹고 일정을 끝냈지만, 오늘은 황궁 이곳저곳을 소개해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이렇게 자리를 비워버릴 줄은 몰랐는데.
어쩌지? 공작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저어, 공녀.”
“……?”
“괜찮다면 저만 동행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