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Villainous Grand Duke RAW novel - Chapter (96)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96화(96/125)
# 96화
“단둘이요?”
“아버지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는데 무작정 기다리게 하는 게 죄송해서……. 곤란할까요?”
“그건 아니지만, 제 안내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요.”
사실 나도 황궁의 역사에 관해서는 아는 게 적단 말이지.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물의 위치나 대략적인 지리 정도는 알지만, 조각상 하나하나에 붙여진 기원이나 의미까지는 몰랐다.
“괜찮아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공녀께서 아는 만큼만 알려주시면 돼요.”
아니, 그러니까 그 아는 게 없는데.
곤란한 심정을 얼굴에 담아 공자를 바라봤으나 그의 표정도 만만치 않았다.
마치 강아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애타게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분명 공자가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데, 어떻게 저런 느낌이 들게 할 수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먼저 항복한 쪽은 나였다.
“좋아요. 저희끼리 나가요.”
내 말에 공자가 한껏 밝아진 얼굴로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이후, 우리는 수행원한테 외출을 알린 뒤 밖으로 나왔다.
혹시나 우리가 나간 사이 돌아온 공작이 놀라지 않도록.
* * *
“…여기가 공녀께서 즐겨 찾는 곳인가요?”
이곤 공자의 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온 곳은 내가 자주 시간을 보내던 황궁 도서관이었다.
원래는 중앙 광장을 거쳐 외곽을 따라 실내 정원과 황궁 내부에 있는 예술품을 구경할 예정이었지만…….
‘내가 아는 게 있어야지.’
망명할 엘피다에 관해서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정작 제국에 관해서는 공부를 많이 안 한 탓이었다.
아예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많이 아는 건 아니랄까.
공자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돌아온 말은 “그러면 공녀가 즐겨 찾는 장소를 소개해 줄 수 있나요?”였다.
재미없을 거라고 미리 경고했는데도 괜찮다고 해서 데려온 건데 공자의 표정을 보니 조금 후회됐다.
‘화원에나 데려갈 걸 그랬나?’
예술품은 잘 모르지만, 화원에 있는 식물에 관해서는 그럭저럭 아니까.
“역시 재미없죠?”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다. 조금 의외긴 하지만, 아, 아니! 공녀가 도서관을 좋아할 줄 몰랐다는 게 아니라 여기로 데려올 줄 몰라서……! 저도 도서관 좋아합니다!”
손을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말하던 공자가 장소를 깨닫고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까보다 조금 붉어진 얼굴로 주위를 살피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장소가 도서관인 만큼 크게는 못 웃고 숨죽여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사람이 없어서 괜찮아요.”
“흐흠, 공녀께서는 주로 어떤 책을 읽는지 물어도 될까요?”
“두루두루 읽어요. 최근에는 엘피다 역사와 전설을 많이 읽었고요.”
“저희 때문인가요?”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엘피다에 관심이 많았어요. 기회가 된다면 한번 가고 싶었거든요.”
“그랬군요.”
공자는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등을 훑더니 곧 난감해하며 날 돌아봤다.
“아무래도 책을 읽는 건 어려울 듯하군요. 부끄럽지만, 제가 제국어를 못해서요.”
“중간 전달해주는 게 제 역할인걸요. 못해도 상관없죠.”
“하지만 공녀는 엘피다 어에 능숙하신데…….”
“음, 저로서는 공자가 못하셔서 다행인걸요. 그러지 않았다면 제가 사절단 맞이 인원에 들어갈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요.”
“저도 공녀께서 제 담당이라 기쁩니다.”
웃으며 말하는 공자의 뺨 위로 은은한 붉은 기가 돌았다.
‘자주 얼굴이 붉어지네.’
생긴 것도 상냥한 외양이라 그런가, 웃으며 저러니 예의상이라는 걸 알아도 괜히 다른 여지를 주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공녀만 괜찮다면 이름으로 편히 부르셔도 돼요. 조금 더 머무를 텐데 매번 격식 차리기도…….”
게다가 배려도 넘쳤다. 그게 과해 자칫 이성에게 오해 사기 딱 좋을 듯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공자와 친해져 두면 나중에 망명한 이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나는 약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테안, 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담당해야 할 귀족의 이름을 외우는 건 기본 아닌가?
놀라는 그를 보니 오히려 당황스러워졌다.
“저도 공녀를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그럼요.”
“감사합니다, 베로니카.”
끝에 붙은 내 이름이 아주 작은 읊조림처럼 들렸다.
“제가 이성 친구를 사귀는 건 처음이라, 혹시 미흡해도 잘 부탁드려요.”
“무얼요. 음, 어쨌든 책을 읽는 건 어려우실 듯하니 정원에 가실래요?”
“정원이요?”
“네. 여기서 가깝거든요. 원래 가려던 곳이기도 했고……. 보온 마법이 걸린 곳이라 따뜻해서 걷기도 좋아요.”
“그게 좋을 것 같네요.”
리스테안의 동의에 우리는 정원으로 가기로 했다.
‘아깝네.’
내가 먼저 정원에 가자고 제안하긴 했지만, 내심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엘피다의 환경에 관해 적힌 책을 보며 자연스럽게 이것저것 물어보려 했는데.
뭐, 이번만이 기회는 아닐 테니 아직은 괜찮지만.
계단을 내려가는데 문득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와 그 위에 앉은 새가 보였다.
‘저건, 불새……?’
―삐익!
이런저런 궁금증이 들기도 전에 불새가 마치 놀란 것처럼 다급히 날갯짓하더니 사라졌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뭐야?’
들려온 소리로 확신하건대 분명 카드릭의 불새였다.
하지만 불새가 날 지켜볼 이유는 없을 텐데?
혹시 카드릭이 근처에 있나?
종종 도서관을 들르는 때가 있던 만큼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리스테안이 내게 물었다.
“왜 그런가요?”
“아, 밖이 예뻐서요.”
리스테안이 날 따라 창밖을 봤다. 불새가 사라진 뒤라 평범한 풍경만 보일 뿐이지만.
* * *
황궁 도서관을 나와 정원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가 카드릭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길이 엇갈렸나 보네.’
불새가 이유 없이 내 주위를 맴돌 리 없으니 나는 저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다행이지, 뭐.’
만약 카드릭을 만났다면 인사만 하고 가진 않았을 테니까.
“이게 제국의 상징화라는 이글레시아스인가요?”
나는 공자가 보고 있는 꽃을 바라봤다. 마치 새가 날갯짓하는 듯한 모양의 꽃은 불타는 듯한 붉은 색부터 주황색, 노란색까지 그 색이 다양했다.
“네, 이글레시아스 맞아요.”
“본 적 없어도 보면 안다더니 정말이네요. 꽃인데 불새를 닮았군요.”
“불새를 본 적 있으세요?”
“그건 아니지만, 국기에 그려진 모양을 보고 그렇게 생겼거니 상상했습니다.”
하긴. 직계 황족만 가질 수 있는 소환수인데 엘피다에 첫 방문이라는 공자가 봤을 리가.
“베로니카는 불새를 직접 본 적 있나요?”
“몇 번 본 적 있긴 해요.”
“아, 대공께서 불새를 소환하시니 자주 보셨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던 리스테안이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뒤늦게야 아빠가 대공이 된 이유를 떠올린 눈치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불새를 몇 번 구경하게 해주셨거든요. 그래서 본 적 있어요.”
“그랬군요.”
내 태연스러운 대꾸에 그제야 리스테안이 당황한 기색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새를 보여줄 정도라니, 황태자 전하와 친하신가 봅니다.”
“네. 사촌이라 그런지 잘 챙겨주세요.”
너무 잘 챙겨줘서 문제지만.
멀찍이 거리감을 두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
‘그러고 보니 아빠의 불새를 본 적 없네.’
회귀하기 전 때만 보고 이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제국에도 아르테가 있군요?”
“아르테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스테안이 우리의 허리춤까지 오는 수풀을 가리켰다.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진 풀잎 끝에 동그란 푸른색 열매가 보였다.
“저건…….”
‘아르테’가 아니라 다른 명칭이었던 거 같은데……. 으, 잘 기억 안 나네.
“아까 엘피다 전설이 재밌다고 하셨죠? 책에 실리지는 않았을 테지만, 사실 저희 가문에도 아르테와 관련된 재밌는 전설이 있습니다.”
“정말요?”
확실히 처음 듣는 이야기에 꽤 흥미가 돋았다.
“예. 아주 오래전에 저희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갈색 머리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리스테안 머리 색은 은발에 가까운 하늘색이잖아요? 공작님도 그랬던 것 같은데.”
“맞아요. 이게 다 아르테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
저건 평범한 열매 아닌가?
“선대 중에 마법과 약초학에 능숙한 분이 ‘갈색 머리는 안 돼!’라며, 아르테를 이용해 머리 색을 바꾸는 시약을 만들어 먹었다는군요. 그때부터 대대로 은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났다는군요.”
갈색 머리는 안 돼, 라니…….
“갈색 머리를 정말 싫어하신 분이었나 봐요.”
“저도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갈색 머리의 리스테안이라니, 부드러운 인상이라 갈색이어도 잘 어울렸을 듯싶네.
“혹시 제가 무슨 실례되는 말이라도……?”
아차, 너무 빤히 바라봤구나.
“아니요. 그냥 갈색 머리였어도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