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opened my eyes, I realized that modern life RAW novel - Chapter 21
21화
트롤 사건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해 질 무렵 옥상에 파라솔과 피서 의자를 펴고 누운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최강이었다.
최강이 눈을 감고 자는 듯한 모습으로 있자니 때마침 주소희가 옥상 철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소희의 기척이 가까워지자 최강이 말했다.
“어때?”
“약속대로 류씨세가 쪽에서 말한 금액이 들어왔어요.”
“그러냐? 약속은 잘 지켜서 좋네.”
류씨세가에서는 이번 트롤 건에 대해서 최강에게 이득이 발생한 전액을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아마 트롤 토벌에 나선 책임자 류세란이 류씨세가의 공헌이 없음을 깨끗하게 인정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고, 최강과 좋은 관계를 이어 가려는 의도도 다분히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훤히 아는 주소희도 주씨세가에 의견은 피력해 보았지만…….
“그…… 죄송해요.”
“뭐를?”
최강의 물음에 주소희가 말했다.
“주씨세가에서는 최강 씨 몫으로 내어 줄 것이 없다고 결론이 지어졌어요.”
애초에 토벌대에 끼워만 달라고 부탁해서 들어간 것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주씨세가 쪽 전투에 최강이 관여됐다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씨세가의 무인들이 보기엔 트롤 두 마리 모두 그저 주소희가 단신으로 해치운 것으로 보였을 테니 말이다.
최강이 말했다.
“난 또 뭐라고. 됐고, 미안한 줄 알면 앞으로 투덜대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자. 알았냐?”
“네.”
주소희의 답을 들은 최강이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며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 일 하나만 더 하자.”
주소희가 종이를 받아 들며 말했다.
“이게 뭔데요?”
찢어진 종이를 테이프로 억지로 붙여서 짜 맞춘 허름한 종이에는 누군가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알 거 없고, 거기로 은밀하게 트롤로 벌어들인 돈 좀 몰래 전해 주고 와.”
주소희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닌데…… 전부 다요?”
최강이 벌떡 일어나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전부 다겠냐? 한 마리만 전해 줘! 한 마리만!”
“알았거든요?! 좋게 말하면 될 걸 괜히 짜증이야.”
구시렁거리며 옥상 출구로 가던 주소희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저, 그런데요.”
주소희가 걸어가는 동안 그새 벌써 자리에 누운 최강이 약간 귀찮은 말투로 말했다.
“뭐, 왜?”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아니? 근데 그건 왜?”
“그냥요. 돈도 아라크네 때 못지않게 벌었는데, 기분이 안 좋아 보이니까 저희 때문인가 신경 쓰이잖아요.”
“…….”
주소희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누워 있던 최강이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를 향해 걸었다.
“어디 가요?”
“퇴근한다. 생각해 보니까 꿈자리가 뭣 같은 게 다시 자면 이어질 거 같거든.”
자신을 스쳐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는 최강을 보고 주소희가 말했다.
“꿈이요? 어떤 꿈이었는데요?”
“있다, 뭣 같은 그런 꿈이.”
계단을 내려가는 최강이 귀찮은 듯 말했다.
“먼저 간다. 일 끝나면 집으로 알아서 와.”
계단에 깔린 어둠 사이로 사라지는 최강의 뒷모습은 어쩐지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
최강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이해는 최강에게 있어서 조금 특별한 해이기도 했다.
최강이 중랑장직을 처음으로 맡은 해였기 때문이다.
사실 최강은 원래대로라면 내년에 천거될 예정이었는데, 한 해 일찍 중랑장이 된 것이었고, 그것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해마다 왜구 놈들의 수탈이 심해지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작년에 비해 올해도 피해가 늘어날 것을 대비한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 부대 배치를 받은 최강의 수발을 들게 된 게 우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었다.
정7품 별장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던 녀석이 사실상 별장 중에 가장 말단이라는 이유로, 신임 중랑장이 부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귀찮은 일을 떠맡은 것이었다.
하지만 귀찮은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유지하던 녀석이 나는 그다지 싫지 않았다.
녀석이 유독 많이 하던 처자식 자랑도 싫지 않았고, 한참 어린 나의 나이 때문에 아직 기 싸움 중인 다른 별장들과는 달리 순종적이던 태도도 싫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처자식 자랑을 할 때마다 은연중에 출세욕을 불태우던 우식이 녀석을 말렸어야 했다고 지금은 순수하게 후회한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리고 또 너무 몰랐었다.
주변에서 천재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왔기에 자신감은 항상 넘쳤고, 막연히 첫 출정에서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말이 아부가 아님까지 알고 있었으니 이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대충 싸워도 약탈이나 일삼는 왜구 따위 물리칠 수 있다고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중랑장, 우익이 너무 깊숙이 들어갔다가 역으로 기습을 당했습니다. 속히 물러나 재정비하셔야 합니다. 곧 여파가 이곳까지 밀려들 겁니다.
-중랑장, 속히 결정을!
처음 만나 보는 적장.
지금 생각하면 우케다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열다섯 살짜리 천재 소년이 단칼에 베어 버리기에는 또 버거운 녀석이었던 것 같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시간은 제 편이라는 양 부하들 사이에서 나를 비웃던 녀석을 놔두고 나는 결국 두 명의 부관들의 조언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참패였다.
정규군 500에 사병 1,000을 이끌고 나간 전투에서 사병 절반과 정규군 우익을 필두로 한 150을 잃어버렸다.
사실상 전투 불능에 빠진 것이었다.
“우익에서 백인장을 맡고 있던 성우식과 장춘덕이 이번 전투로 사망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패인은 우식이 녀석이었다. 애당초 중단에 힘을 주었던 만큼 우익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기만 했다면 승리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녀석은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무리해 화끈하게 한 건 해 먹은 것이었다.
“도성에서는 어떤 반응인가?”
“더 이상의 충원은 없답니다. 퇴각할지 전투를 지속할지는 판단에 맡기겠답니다.”
애초에 우식이 녀석의 성격을 고려했다면 중앙군에 배치했어야 했던 게 맞았다.
하지만 자신이 배치를 잘못했음에도 나는 한심하게도 멋대로 저지르고 죽어 버린 우식이 녀석을 처음으로 미워했다.
내가 잔류와 복귀,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잔류한다.”
겨울이 되자, 추수철 내내 제멋대로 활개 치던 녀석들이 본토로 물러났다.
추수철 내내 인근 관아에서 움직이지 않는 우리 군을 들어 백성들의 원망은 끊이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한번 꺾인 사기를 회복할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싸워서야 이길 방법이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보내며 병력을 조금이라도 확충하고 사기를 천천히 끌어올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훌쩍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낯선 지방에서 주민들의 냉대를 받으며 죽도록 훈련한 사병들은 실력은 몰라도 눈에 독기만은 차올라 있었고, 정규군은 어느덧 수족이나 다름없이 일사불란한 모습이었다.
나는 지금이 전투를 치를 때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케다를 죽였다. 적장이 죽자 왜구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혼란에 빠진 녀석들의 등을 베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비정규군이나 다름없는 왜구 놈들 고작 2천을 때려잡은 것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너무나도 당연한 승리였지만 첫 번째 전공은 나의 자신감을 다시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전투를 마치고 도성으로 당당하게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우연히 군영을 돌아다니다가 별장(정7품)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신임 중랑장 밑에서 한 3년쯤은 지방 신세 질 줄 알았는데, 완전 땡잡았지 않냐?”
“하, 씨벌 거…… 나도 그럴 줄 알고 안사람한테 신세 한탄 겁나게 했잖냐.”
“하…… 새끼, 마누라한테 잡혀 사는 주제에 신세 한탄은 무슨. 바가지나 긁혔을 자식이. 킥킥킥.”
“뭐, 인마?”
“그래도 천재, 천재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나 보다. 남들은 3~4년씩 걸리는 신고식을 1년 만에 끝내고…….”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전공을 세워서 일반적으로 중랑장에 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음서로 천거된 중랑장에게는 신고식이 있었고, 지난 전투가 단순히 귀하신 도련님들에게 실전 감각을 기르게 하기 위한 신고식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대화였기 때문이다.
우식이 녀석은 이것을 알고 있었을까?
한심한 질문이다.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보니 지난 1년간 꾸준히 원망했던 우식이 녀석의 죽음은 결국에 나로 인해 비롯된 것이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녀석은 죽어 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를 원망했을까? 아니면 처자식을 걱정했을까?
진실을 알아 버린 내가 개인 지휘실에서 막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중랑장,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생각에서 깨어나 답한 나의 말에 아까 대화하던 별장 중 한 명이 들어왔다.
별장이 품에 들고 있던 목갑을 책상 위에 내려놨다.
“뭐냐, 이게?”
“노획한 물품을 팔고 들어온 돈입니다.”
“노획? 노획한 물품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나?”
“아…… 물론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병장기 같은 것들은 애초에 백성들에게 주기가 난처하니 따로 처분해 정규군이 나누어 갖는 게 일반적인 관례입니다. 이건 중랑장의 몫이구요.”
별장이 대화를 마치고 나가자 내가 목갑을 열었다. 한 달 남짓 기방에서 코가 삐뚤어져라 유흥에 빠져도 될 법한 양의 많은 패물이 보였다.
***
끼이이이익…….
나의 선잠을 깨우는 익숙한 옥상 철문 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깨어난 내가 품에서 힘겹게 붙여 놓은 종이를 꺼내며 생각했다.
‘직업병이야, 직업병.’
그래…… 어쩌면…… 이번에 트롤을 잡고 난 돈을 그 모녀에게 주는 것도 직업병일지 모른다.
일본인을 봤을 때 괜히 심기가 불편해진 것처럼.
아직 잊어버리지 못한 아주 질 나쁜 직업병 말이다.
***
한국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한적한 크루즈선이 있었다.
널널한 선상에 서 있던 나미사에게 하야토가 다가왔다.
나미사가 말했다.
“아버님은 뭐라고 하셔?”
“크게 반대하시는 듯한 느낌은 아니시긴 합니다만, 본가에 들어가시면 마땅한 설득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미사가 재밌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글쎄? 너희들 꼴을 보면 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야토를 필두로 선상에 서 있던 백귀대에게 덕지덕지 감긴 붕대를 보면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전원이 오직 한 사람에게 당했다고 한다면 말이다.
“주인 어르신께선 이소군, 그자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설명이 필요하실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
잠시 생각하던 나미사가 말했다.
“그게 말이지, 나도 정략결혼, 그런 거 불만은 없거든? 그리고 애초에 내가 가게 된 것도 그런 목적인 것도 알아. 근데 말이야.”
말하던 나미사가 싱긋 웃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던 이소군을 거부할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소군, 그자의 계획에 큰 약점이 한 가지 드러났잖아. 안 그래?”
“…….”
나미사의 말을 들은 하야토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미사의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침몰의 위험성이 있는 배라면 탈 이유가 없는 거잖아?”
하야토도 알고 있다. 이소군, 그자의 계획은 완벽하다. 그리고 성공했을 것이다. 최강, 그자만 없었다면 말이다.
지이이잉…….
이어지던 하야토와 나미사의 대화가 그렇게 잠시간 멈췄을 때였다. 하야토의 품에서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을 꺼내 바라보기만 하는 하야토를 향해 나미사가 말했다.
“누구?”
하야토가 말했다.
“이소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