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07)
치매를 앓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다. 괜히 요양 병원이라는 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정신이 어려진 노인들은 아주 고집스럽고 제멋대로다. 같은 말을 여러 번 하는 것은 일상다반사고 방금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이 차 이름이 뭐지?”
자신이 직접 골라 우려낸 차의 이름을 하녀에게 되묻는 것 정도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녀가 다시 차의 이름과 효능을 설명하였으나 아게라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아마란스, 어서 마셔 봐!”
나를 딸로 착각하는 점이나, 하물며 내가 벌써 찻잔을 두 번이나 비웠다는 것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이다.
아게라의 반짝이는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잔을 가져가서 그냥 입술만 적시고 내려놨다. 물배가 차서 더는 못 마시겠다. 그럼에도 정확히 열두 번째 반응을 기대하기에 그냥 향이 좋다며 일축했다. 아게라는 내 성의 없는 답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아게라가 진짜 내 할머니도 아닌데 마음이 울적했다. 마음이 이렇게 심란한 걸 보면 빙의 전 우리 조부모님도 치매를 앓으셨…나? 머릿속이 희뿌옇게 흐렸다. 요새 빙의 전 기억이 선명하지가 않아서 문제다.
원래도 그랬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전에는 향수병 올까 봐 일부러 빙의 전 기억을 배제하려고 했어서 비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돌아갈 방법도 모르는데 괜히 원래 세상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걸!
언제부터 원래 기억이 희미해졌는지는 모르겠다. 여태까지 본 소설들 같은 것들은 잘 기억 나는데 내 이름이나 나이는 모르겠단 말이야.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엄마 정도인데…. 왠지 흰머리가 연상되었다. 빙의 전 내 나이가 사오십대도 아닐 텐데 웬 백발? 아무래도 내가 마음고생을 심하게 시켜서 젊은 나이에 흰 머리가 많았던 게 분명하다.
아무튼, 빙의 전의 기억이 흐릿해진 건 내가 에반젤린이랑 융화되고 있다는 증거인 듯싶었다. 시스템 창이 있었다면 ‘동화율 77%’ 뭐 이런 게이지가 있었겠지.
아무튼, 조부모님 중에 치매이신 분이 있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울적한 거겠지? 기억도 안 나는 거 대충 넘어가자.
아게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처럼 굴었다.
“사랑하는 딸에게 온실을 보여 줄 수 있어서 너무 기뻐.”
온실 자랑도 진짜 수십 번은 들은 것 같다. 하지만 말을 꺼낼 때마다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감탄하게 되니 정말 자랑거리라고 할만했다. 온갖 이국적인 식물들을 심어 놓아 잘 조경되어 마치 요정들이 머무는 보금자리 같았다.
중간에 덮여 있는 천막이 좀 눈에 거슬리기는 했다. 온도 조절하려고 일부러 천을 덮어 놓은 거라고 했지? 자동 온도 조절 장치 같은 게 없어서 그런 모양이다.
가만히 있으면 아게라가 차를 마시지 않냐고 계속 물어 왔기에 꾸준히 마시는 척 티스푼으로 잔을 휘적거렸다. 그러면서 주변을 훑어보다가 날 빤히 보고 있는 하녀 한 명이랑 눈이 마주쳤다.
뭔가 내 손을 노려보는 것 같은데…? 티스푼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 컸나? 이따 공작한테 가서 ‘에반젤린은 테이블 매너가 완전 최악이다.’라며 보고 올리는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이 충분해서 불안한 마음에 티스푼을 내려놨다.
더불어 ‘성심성의껏 공작 부인을 응대해 주지 않았다.’ 하는 보고가 올라갈까 봐 조용히 아게라가 하는 말에 동조하고 있는데 옆에서 소란이 났다.
“…니겔라! 정신 차려!”
하녀 하나가 갑자기 귀를 틀어막고 고통스러워했다. 무슨 일이래?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다른 하인들이 와서 어서 자리를 파하자고 권유했다.
아무래도 아게라의 정신 연령이 어려졌으니 사람이 고통에 허덕이는 광경을 보여 주는 게 좋지 않다고 판단 내린 모양이다. 그러나 아게라가 그런 배려심 넘치는 제안을 쉬이 들어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게라 님, 어서 나가요.”
“싫어! 왜 나가야 하는데? 여기 있을 거야!”
“부인…!”
“아마란스랑 다과회 할 거라고!”
이제 양쪽에서 난리였다. 하녀 쪽은 아파서 호흡 곤란이 온 것 같았고 아게라는 반항심에 가득 차 발을 굴리며 고집을 부려 댔다. 난 아게라와 가까이 있었기에 우선 아게라를 말렸다.
난 지금 성수도 뭣도 없고, 아게라한테 내 얼굴이 효과가 있었으니까. 저쪽에도 두 사람쯤 붙어 있으니 괜찮거니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갑자기 헐떡이던 하녀가 몸부림을 치며 천막 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더니 천을 잡아서 확 잡아당겼다.
뭔데? 혹시 서프라이즈 선물? 뜬금없이 고통스러워한다 했더니 다 깜짝 카메라였나? 행복 회로를 돌리면서 두근거렸다가 천 뒤에서 나온 걸 보며 심장이 쿵 떨어졌다.
‘쥐?’
진짜 서프라이즈였다.
포르말린도 아니고 왜 수조에 쥐 사체들을 담가 놓은 건지 모르겠다. 고급스러운 온실이 아닌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과학실에 들어온 줄 알았다. 으으. 꿈에 나올 것 같은 끔찍한 광경이다.
아니, 애초에 쥐 사체를 왜 온실에 가져다 둔 거야? 거기다 그냥 덮어 놓지 그걸 왜 깜짝 카메라처럼 보여 주는 건데? 아하, 알겠다. 내가 지금 마음에 안 든다고 골탕 먹이는 거구나?
꼭 악녀한테 구더기 끓는 수프나 벌레나 쥐 같은 거로 장난쳐서 괴롭히는 하녀들 있잖아. 공작이 날 싫어하니까 하인들도 동조해서 날 괴롭히는 거지. 누가 로판 주민 아니랄까 봐 행동 원리도 참 뻔하네.
그런데 물량 공세는 너무 나간 거 아니야? 하녀들끼리 벌이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큰데 설마 주동자가 공작은 아니겠지? 어이가 없고 혼란스러워서 멍하니 수조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게라가 말릴 새도 없이 수조에 달라붙어서 엉엉 울었다.
뭐라 말하는 것 같았는데 코맹맹이 소리로 훌쩍거려서 구분할 수는 없었다. 쥐들보고 불쌍하다고 하시는 거겠지. 안 그래도 감정 기복이 심한 것 같으셨는데 정신 건강에 완전 최악이네.
나만 괴롭히면 되지 뭐하러 공작 부인까지 휘말리게 해? 마음 같아서는 혼쭐을 내주고 싶은데 여기서 난동부리면 악녀라고 낙인을 찍는 거랑 다를 바 없었다.
이게 나중에 다 공작한테 보고될 거다. 여기선 어른스럽게 대처해서 호감을 쌓아야지.
“거기, 너. 아게라 님이 계속 수조 안을 보고 계시게 할 거니?”
그럴 건가 보다. 다들 움직이려는 기색이 없기에 나라도 가서 아게라의 눈을 가렸다. 하여간 이 세계 사람들 시민 의식 한번 끝내준다니까? 도나우 집에 불날 때랑, 신전에서 기사한테 불붙었을 때도 겪어 본 거지만 진짜 큰 문제였다. 그래도 해답을 알아서 다행이다. 이럴 때는 그냥 정확히 지목해서 부탁하면 된다.
‘누가 도와주세요.’ 보다 ‘검은 머리카락이신 분 도와주세요.’ 쪽이 훨씬 효과가 만점이거든.
양손으로 아게라의 눈을 가리고 있느라 눈이랑 턱으로 지시했다. 역시 콕 집어서 시키니까 바로 말을 들었다. 천을 덮고 아게라도 방으로 데려가고.
“알고 있겠지만 본 것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해선 안 된다.”
반대로 마음껏 이야기하란 소리였다. 공작한테 내가 얼마나 유연하고 관대하게 대처했는지 보고하란 말이다.
하녀들의 괴롭힘을 너그럽게 넘어가 주고, 온실에서 쥐 사체가 나왔다는 걸 비밀로 하라는 입단속까지 대신해줬다는 걸 알면 공작이 날 새삼스럽게 다시 보지 않을까?
물론 아직 멀었다. 지금은 하녀들한테도 무시당하는 처지였다. 하녀 하나는 마지막까지 나보고 수조 안에 든 것을 제대로 봤냐고 묻더라. 내가 패악질하는 대신 어른스럽게 굵어서 설마 쥐 사체를 못 봤다고 생각한 건가? 악녀 타이틀 그냥 네가 가져가라.
여하튼 대충 상황 정리를 마쳤다.
더는 온실에 있기 싫어서 다 같이 밖으로 나왔다. 아게라는 충격적인 장면을 봐서 기력이 쫙 빠진 것인지 하인들이 부축하는 대로 그냥 따라 걸어갔다. 중간에 때마침 아마란스가 지냈던 방 청소가 끝났다고 데리러 온 리코와 마주쳤다.
“아게라 님!”
리코가 비척거리며 걷는 아게라를 보며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무슨, 왜 이렇게 지치셨어요.”
“…시끄러워!”
하지만 아게라는 상대가 집사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너희들이 말해 봐.”
리코가 다른 하인들한테 물어봤으나 하나같이 입이 달라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긴 할 말이 없겠지. 변명했다가 괜히 더 분노를 살 거고.
다들 입만 뻐끔거리면서 나보고 말하라는 듯이 눈치를 주기에 그냥 내가 나서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줬다.
하녀가 천막을 걷었는데 그 아래서 생쥐 사체가 담긴 수조가 나왔다고. 그걸 보고 아게라가 상당히 충격을 받았노라고 설명하자 리코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이런….”
이야기를 전부 들은 리코가 하인들을 질책했다.
“모두 아게라 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벌을 받을 거야. 특히 너.”
천을 걷어 낸 주범한테는 더 센 징벌을 가할 모양이었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아프다고 봐주는 건 없었다. 역시 신분제 사회답네.
“우선은 아게라 님을 침실로 모셔가도록.”
리코의 말에 다들 고개를 숙였다가 발을 뗐다. 나랑 아게라 둘이서 차를 마실 때는 자기들끼리 뭐라 숙덕대더니 집사 앞에서는 한마디도 안 하고 엄청 조용하네.
치매 걸린 공작 부인이랑 손녀 취급도 못 받는 나 정도는 우습다 이건가? 리코도 아게라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화만 냈지 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참자. 공작이 손녀 바보만 되면 손바닥 뒤집듯이 대우가 달라질 거다. 미래를 기약하자.
전부 아게라를 부축해 들어가자 나랑 리코만 남았다.
난 어디로 가야 하지…. 아마란스 방을 치워 놓는다고 했는데 거기로 안내해 달라고 하면 되겠지? 아니다. 방에 들어갈까 했는데 공작 얼굴을 한번 보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만나서 이야기할 거였으면, 마차에서 미리 대화를 나누든가 도착하자마자 같이 가서 얘기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자세한 건 공작님께 들으라고 했지. 지금 만나 뵐 수 있을까?”
“네.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리코가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쏟아내고 싶은 불평은 많았으나 바로 앞에 공작의 충실한 심복이 있어서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나는 얌전히 리코의 안내를 따라갔다.
리코의 키는 내 눈높이 정도였다. 앞에서 걸어가는 리코의 뒤통수를 보고 있다가 아게라에 관해 물어봤다.
“아게라 님이 널 기억하지 못하던데, 서운하지 않아?”
리코는 잠깐 멈칫했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 발을 움직였다.
“아게라 님은 최근의 일을 모두 잊으셨습니다. 자신의 나이조차 모르시는데 절 기억하지 못하시는 건 당연하지요.”
“하지만 ‘아마란스’는 기억하시잖아?”
“아무리 공작님께서 절연을 선포하셨다고 해도 아마란스 님은 아게라 님의 따님이시니까요.”
뒤통수에 서운하다고 글자가 쓰여 있는데 아닌 척하기는.
아마도 리코는 죽은 아마란스를 곱게 보지 않았을 거고 그걸 딸인 에반젤린한테 풀어 대며 적대하는 캐릭터일 거다.
안주인이 치매를 앓고 있으니 사실상 호사퀸 공작가의 내정은 리코가 주무를 테고, 그러니까 하인들이 리코를 보고 쩔쩔맸겠지.
뜬금없이 절연한 손녀가 유산을 분배할 타이밍에 기막히게 들어와 이권을 두고 다투는데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게 당연하지.
자기가 공작가에 얼마나 헌신했는데 결국엔 핏줄은 이기지 못하는 거냐고 불만스러워할걸.
고로 리코는 내가 공작가에서 후회물을 찍는 데 걸림돌이 될 확률이 아주 높았다. 눈여겨봐야겠어. 이렇게 뒤통수를 뚫어지라 노려보는데도 시선이 따갑지도 않은지 무시하는 걸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공작님, 리코라드카입니다. 로한슨 영애를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게.”
리코가 안내해 준 곳은 응접실이 아니라 공작의 집무실인 것 같았다. 공작이 앉은 책상 위로 엄청난 양의 서류 더미가 쌓여 있었다. 저게 다 처리해야 할 일인가?
저택 안내를 리코한테 미루고 서둘러 간 이유가 있었네. 저만한 양을 처리하려면 한시가 모자라긴 하지….
로한슨 백작도 맨날 야근하면서 밤을 새우던 걸 보면 역시 귀족은 서류 처리가 패시브인가 보다.
“앉지.”
그냥 세워 둘 것 같았는데 의외로 공작이 먼저 자리를 권했다. 서류가 쌓인 책상이 아니라 잠시 휴식하는 용도로 옆에 따로 갖춰진 테이블이었다. 내가 먼저 앉고 공작이 맞은편에 착석했다.
“차는 내어 줄 필요 없겠지.”
“네. 필요 없어요.”
이미 배가 빵빵했다. 에반젤린은 평생을 아팠던 몸이라 그런지 위장도 작아서 많이 먹지도 못했다. 공작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차가 없어서 그런지 참으로 삭막한 시간이었다.
“날 찾아온 걸 보면 아게라를 만났겠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차도 필요 없다고 하고, 이미 아게라랑 온실에서 다과회 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을 텐데 시치미 떼기는.
“…그래. 직접 보니 어떻던가?”
가만히 말을 골랐다. 병환이 깊어 보인다, 참으로 염려되시겠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가는 동정하냐고 공작이 급발진해서 화를 낼 것 같았다. 어차피 다정다감한 사이도 아니었겠다, 사감 쫙 빼고 사실만 얘기하자.
“절 어머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시더군요.”
나름대로 정답에 가까운 답이었는지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무얼 해야 하는지 알겠지.”
“아게라 님의 곁에서 어머니 행세를 하면 되겠지요.”
물론 이건 표면상의 대답이고 실제로 내가 목표하는 바는 더욱 컸다. 그냥 아마란스 행세하는 거로 공작의 호의를 살 수는 없지. 가족 후회물 찍으려면 일단 공작이 내게 감겨야 한단 말이야.
내 데이터에 따르면 이럴 때는 본인이나 주변 인물을 구제해 주는 게 제일 호감도가 잘 쌓였다. 칸나랑 데이지가 아주 좋은 예시였다.
그런데 마침 공작 부인이 아프네? 이건 나보고 치료하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현실에서는 치매를 치료하는 방법이 없다지만 여기는 개사기인 성수가 존재하는 소설 속 판타지 월드잖아. 무슨 세계수의 씨앗 같은 게 분명히 있을 거고 나는 그걸 찾아내면 되겠지.
아, 이 세계는 태양신이나 악마는 있어도 정령은 없다고 했나? 그럼 뭐 태양신 신물 같은 거라도…. 아무튼 뭐가 있을 거다.
어떻게든 아게라의 병을 치료하면 공작도 떼 놓은 당상이지.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서 손녀 편이 된 할머니랑 아내의 등쌀에 못 이기는 척 손녀를 위해 주는 츤데레 할아버지….
캬! 완전 정석 아니야?
물론 그건 먼 훗날의 일이고, 지금은 공작의 호감도가 마이너스에 수렴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안 그래도 공작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제 주제를 파악할 줄은 아는 것 같아 다행이군.”
치욕스럽다. 악녀에 빙의 된 이후로 남한테 이렇게 무시당하기는 처음이었다. 다들 눈만 마주쳐도 조아리는데 과연 악녀 할아버지는 남달랐다. 하지만 이럴수록 전의가 불타오를 뿐이라고.
내게 쏴붙인 공작은 이대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면 축객령이 떨어질 것 같아서 서둘러 화제를 꺼냈다.
“온실에 있는 쥐들은 조부님의 작품인가요?”
아까 생각한 건데 쥐들을 온실에 가져다 둔 범인은 공작인 것 같았다. 아게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고, 무엇보다 저택 주인 허락 없이 온실에 그런 짓을 벌여 놨을 리 없잖아.
그리고 나 하나 괴롭히려고 쥐들을 잡아놓은 게 아니라 분명 다른 목적이 있었을 거다. 아마 병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었을까?
에반젤린이 아픈 원인을 고양이에게 찾아서, 고양이를 학살한 시대였다. 마찬가지로 쥐들이 전염병을 옮긴다고 생각해 전부 잡아 놓은 것 같았다.
어쩐지 공작이 마차에서 공작이 푸딩보고 쥐는 잘 잡냐고 물어보더라. 그게 은어가 아니라 진짜 쥐였을 줄은 몰랐지.
왜 불태우지 않고 물에 담가놓은 건지는 모르겠다. 담금주…, 뭐 이런 건 아니겠지?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네.
“…쥐? 그걸 보았다고?”
공작이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내가 쥐들을 봤다고 하니까 귀를 의심했다. 공작이 일부러 지시한 게 아니었네.
아게라를 모시는 하녀가 마법 보여 주듯이 짠하고 천을 걷어 버렸다고. 내가 설명하려는데 공작이 내 쪽이 아니라 리코를 바라보았다. 내 말 보다 리코의 말이 신뢰가 간다 이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저도 로한슨 영애께 전해 들은 겁니다만….”
리코가 설명을 시작했다. 근데 어찌 먼저 날 언급하는 게 책임을 돌리는 모양새였다. 물론 내가 설명해 준 게 맞긴 하지. 하지만 어휘 선택 하나하나에 의중이 가득한 게, 역시 낮잡아 볼 수 없는 인물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게라 님의 곁에 있었다면 이런 소란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되었다. 네가 항상 부인의 곁에 붙어 있을 수도 없으니.”
공작이 손을 내둘렀다. 주인마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음에도 리코는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 하나로 질책을 피하고 오히려 호감 스택을 쌓았다.
이거 봐! 뒷수습은 내가 했는데 자기가 공로를 쏙 빼 가는 것 좀 봐!
“아게라는 어떻지?”
“몹시 지쳐 보이셨습니다. 지금은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실 겁니다.”
단 한 번도 내 공치사는 안 해 주네…. 이 원한 잊지 않겠어.
“그렇군….”
공작은 탄식을 내뱉으며 잠깐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공작이 더욱 늙고 지쳐 보였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뜨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기색이 다시 날카롭고 매서워졌다. 공작이 나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끄집어낸 저의가 무엇이냐?”
아니, 그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묻어 둬요. 온실에서 티타임 하다 생쥐 사체를 무더기로 발견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당장 물어봐야지. 당신이라면 안 그렇겠어요?
“내 약점이라도 잡은 줄 알았나?”
그러나 공작은 나한테 꼭 꿍꿍이가 있다고 여긴 듯했다. 공작의 경계심은 이미 최고치를 찍었다.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공작의 나를 향한 혐오 수치가 높으면 뭐 어때. 이제 내려올 일만 남았네. 더 점수를 깎아내리기 전에 서둘러 대답했다.
“거래하고자 해서요.”
“거래?”
공작이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절 공작저로 데려오신 건 가브리엘 경과 거래한 것 때문이시죠.”
“그래. 가브리엘 경에게 빛을 지지 않았다면, 아게라가 아니었다면 널 결코 내 집에 들이지 않았을 거다.”
공작은 무척이나 깐깐하고 이해득실을 따지는 인물이었다. 지금 내가 공작저에 들어오게 된 데도 계산이 철저하게 들어갔을 거고.
치환하자면 가브리엘에게 빚을 진 대가가 날 사면해 주는 것, 내가 저택에 머무르는 건 아게라에게 아마란스인 척해 주는 대가일 거다.
공작한테 호감도를 쌓으려면 대체 불가능한 일을 해 주면 된다. 방금 말한 아게라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게 제일 효과가 좋긴 하겠지만, 하나라도 더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해 봐야지.
“그럼 저와도 거래하도록 해요. 제가 ‘쥐’를 처리해 드릴게요.”
“네가 그것들을 처리할 수 있다고?”
“네. 제겐 고양이가 있잖아요.”
싱긋 웃으며 호기롭게 푸딩을 언급했다. 그냥 고양이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우리 푸딩은 마법을 패시브로 달고 있는 수인이거든. 쥐? 푸딩한테 잡히면 한 입 거리지. 먹이 사슬은 이러라고 있는 거 아니겠어.
“하, 그 고양이도 평범한 고양이는 아닌가 보군.”
“짐작하고 계셨잖아요.”
공작은 잠깐 고심하다가 결론을 내렸나 보다.
“대가로 무얼 원하지…?”
너무 큰 걸 바라면 어림도 없다는 투였다. 다행히도 내가 유산을 떼어 달라든지 그런 큰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내가 상속받으면 로한슨 백작이나 좋아할 텐데, 딸을 팔아먹은 배신자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은 없거든.
“매일은 아니더라도 여유가 되시는 대로 오찬 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시면 좋겠어요.”
“시간이라….”
“전 조부님과 대화할 시간을 원해요. 그 시간 동안 부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짐작건대 공작의 공략 키워드는 추억이었다. 계속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추억팔이하면서 열심히 공략해 주마. 가 보자, 태그 가족 후회물.
“제가 어머니를 흉내 내려면 조부님께서도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셔야죠.”
짐작하지도 못한 대가였는지 공작이 잠시 껄끄러운 티를 냈다. 공작이 거절할까 싶어 그럴듯한 이유도 덧붙였다. 공작은 고심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예스! 마음속으로 마음껏 환호성을 지르며 어퍼컷을 날리고 있는데 공작이 초를 치며 조건을 덧붙였다.
“다만 우선 증명이 필요해.”
진짜 더럽게 깐깐하시네. 상남자답게 호쾌하게 지르지 않고!
“우선 네가 보았던 수조 속 쥐들을 처리해 보거라.”
공작이 내건 조건은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괜히 긴장했네. 그냥 밤에 캠프파이어 한 번 하면 싹 다 처리되는 거 아니겠어? 물론 불놀이의 준비는 푸딩에게 토스할 예정이었다.
앗, 젤리도 지금쯤 심심해할 거 같은데 불러와서 시켜 먹어야지.
“그것들을 전부 흔적도 없이 처리해. 명심하거라, 거래는 그다음이야.”
“물론이죠.”
나는 상남자답지 못한 공작과 다르게 흔쾌히 조건을 받아들였다.
“로한슨 영애님. 이제 머무르실 방을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리코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제 공작은 밀린 업무를 봐야 한다면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드디어 쉬러 가는구나. 아게라가 아마란스의 방을 준비해 달라고 응석을 부렸는데 리코가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인지 모르겠다.
안내해 준 방에 들어가서 내부를 훑었다. 꽤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먼지는 전부 닦아 내고 청소한 것 같은데 해묵은 가구에서 방이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쓰시던 방이야?”
“네. 아마란스 님의 방입니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게 참으로 바람직했다. 진짜 청소해 줬네. 조금 새삼스럽게 리코를 바라보았다.
“오늘 오찬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은 괜찮아. 대신 간식거리를 가져다주겠어?”
“네. 로한슨 영애가 머무르시는 동안 시중을 들 아이에게 들려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리코는 가볍게 인사하며 방을 나섰다. 발소리가 멀리 사라지는 걸 듣고 나서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방을 뒤져 아마란스의 일기장을 캐낼 시간이다.
‘아무것도 없어.’
한참을 뒤졌는데 수확이 전무했다. 방을 청소하면서 리코가 미리 다 치워 버린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도움이 될 물건도 없었고. 그냥 시간만 날렸다. 진이 다 빠진 채로 소파에 누워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까 리코가 말했던 사람이 온 것 같았다.
“들어와.”
하녀가 눈을 내리깔며 몸을 반으로 접어 인사했다. 기강 한번 제대로 잡혔네….
“이름은?”
“헤, 헤이즐이라고 합니다. 온실에서는 무척 실례가 많았습니다.”
헤이즐이구나. 말하는 걸 보니까 낮에 온실에 있던 하녀 중 한 명인가 보다. 천을 걷어 냈던 그 사람은 아니네.
헤이즐은 엄청 겁을 먹었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못 마주쳤다. 아닌가? 얼굴도 새파란 게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어디 아프니?”
“아니요, 전혀요!”
헤이즐이 고개를 도리질을 치며 부정했다.
“식은땀을 이렇게 흘리면서?”
“이건, 그 긴장해서 그만….”
헤이즐이 강하게 부정했다. 절절히 매달리는 게 엄청 수상한데…. 딱 봐도 뒤가 구렸다. 리코가 내 곁에서 무엇을 하는지 잘 보고 듣고 내 행적을 전부 보고하라고 명령한 거 아닐까?
“아프다면 다른 하녀를 불러와도 상관없어.”
“정말로 괜찮습니다! 로한슨 영애님을 보필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정도예요. 멀쩡하니까 부디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 말아 주세요!”
역시 그랬나 보다. 하녀를 붙여 주는 게 아니라 감시를 붙여 놨네. 뭐, 사람을 바꿔 봤자 똑같은 명령이 내려질 게 뻔하니 굳이 하녀를 바꿔 달라고 행패 부릴 이유는 없었다.
“그래. 잘 부탁해.”
마침내 내가 수긍하자 헤이즐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어쭈, 좋아? 안심하는 게 괘씸해서 약간 심술을 부리기로 했다.
헤이즐의 어깨에 손을 얹어서 소파에 앉혔다. 헤이즐은 내가 닿은 부분을 어찌할 줄 모르며 계속 흘끔댔다.
“집사가 간식을 많이 챙겨 줬으니 너도 같이 먹자.”
“저도요? 아니요. 괜, 괜찮습니다.”
“아직 저녁도 안 먹었잖아. 나만 먹기 외로워서 그래.”
내 눈치를 살피던 헤이즐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푸딩이랑 먹으려고 부탁한 간식이긴 했는데 푸딩이 돌아올 기미가 안 보여서 먼저 먹어도 괜찮겠지 싶었다.
헤이즐이 왔으니 이제 방을 뒤지지도 못한다. 보나 마나 리코가 날 감시하라고 일렀을 게 분명했다. 숨겨진 비밀 공간이 있나 나머지는 다음에 찾아보는 거로 하고, 이제 얌전히 간식이나 먹으며 있어야겠다. 푸딩은 언제 오려나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