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10)
“마리크 주교님. 호사퀸 공작저의 소식을 물어다 주는 아이가 오늘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공작 부인의 상태는 이미 전해 들었으니까요.”
사라카가 상냥하게 대답하였다. 손녀와는 연을 끊고 살던 공작이 왜 갑자기 로한슨 영애의 편을 들었나 궁금해 공작저 근처에 눈을 여럿 붙여 놓았다.
돈에 매수되어 쉽게 입을 여는 자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정보는 볼품없었다. 의외로 쓸모 있는 내부 사정은 집사의 딸이라던 어린아이에게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사라카는 아이들의 증언이라도 가벼이 넘기지 않고 존중하는 자비로운 사제였기에, 아이의 말을 전부 전해 들었다. 호사퀸 공작이 왜 갑자기 나섰나 했더니 전부 공작 부인이 원인이었다. 공작 부인이 망령에 씐 것이다.
다른 죄만큼 무겁지는 않지만, 충분히 이단이라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정보였다. 가족들이 전부 삿된 것들이라니, 공작도 참으로 불쌍하지 그래. 공작이 사라카처럼 가족을 버리고 살아갈 수 있다면 삶의 끝을 영예롭게 장식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공작이 직접 신을 저버리려 하니, 사라카가 바른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수밖에. 공작의 비밀을 알았으니 호사퀸 공작가는 순조롭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의 일을 그리던 사라카는 호사퀸 공작가의 일을 잠시 뒤로 하고 눈앞에 집중하기로 했다.
“주교님. 죄인들을 구속하였습니다.”
기사의 말에 사라카는 손발이 묶이고 바닥에 무릎 꿇려진 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죄인이라 하였지만 세 사람이 저지른 죄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세 사람은 요즘 주술이 성행하자 그에 약간 호기심이 들었는지 부모의 충고를 무시한 채 작당을 하여 주술사라 자칭하는 자를 몰래 들여와 점을 보았다.
성기사들이 주술사를 몰래 미행하여 현장을 급습하지만 않았어도 한순간의 호기심이었다고 넘어갔을 터였다.
“아리아….”
구석에 얌전히 서 있던 레구르 백작이 허망하게 딸의 이름을 불렀다.
세 사람은 몹시 대담하게도 티 파티에 주술사를 불러들였다. 영애들의 소규모 친목회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리란 걸 역이용한 것이다.
성기사들이 백작가에 들이닥치자 레구르 백작은 감히 성기사가 신의 이름을 빌려 월권을 행사한다고 호통을 쳤다. 만약 마리크 주교의 이름값이 없었다면 결코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을 터였다.
레구르 백작은 사라카에게 자신의 식솔들은 결단코 이교도와 관련이 없다며 재차 강조하였으나, 딸아이가 주술사를 데리고 점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어머니! 이자들이 저를 겁박하고 있어요! 어서 절 구해 주세요!”
아리아는 갑자기 검을 찬 기사들이 티 파티에 난입하여 자신들을 결박하자 주술사를 불러들인 것이 찔려 숨죽이고 있던 차에 레구르 백작을 보며 반색을 표했다.
사라카는 사특한 짓을 벌여놓고도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고 백작이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 아리아를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구르 백작님. 아무래도 레구르 백작 영애께서는 주술에 단단히 현혹되신 것 같군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시니 말입니다.”
사라카가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뒤집으며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성기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한창 주술로 점을 보던 중이었다. 무엇을 점치던 중이었는지 카드 뭉치 중에서 석 장만이 따로 골라져 있었다.
영애들에게 점을 쳐 주던 주술사는 이미 목이 잘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사실 즉결로 참수할 것이 아니라 신전으로 호송해 가 화형에 처해야 마땅했으나, 눈앞의 주술사는 애초에 사라카 쪽에서 준비한 패였다.
미행하고 있었다고 하여 곧바로 주교가 나타날 리 없지 않은가. 괜히 입을 놀릴까 봐 바로 목을 자른 것이다.
사라카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태양신을 위해서, 사라카가 마리크 주교로 완성되기 위한 행위였으므로 죄의식 따위 느껴질 리가 없었다.
사라카는 인생에 구제할 구석이 없는 남자에게 넌지시 주술로 빠져들 길을 제시한 것뿐이었다. 사실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충동에 빠져든 것은 그였다. 사라카는 대리인을 통해 남자에게 레구르 백작가가 부유하다고 일러주며 백작 영애에게 접근하라고 지시했다.
귀족들 사이에 남자에 대한 소문을 흘려, 주술 점에 관심이 있는 아리아 레구르가 남자를 불러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주술 점을 봐준 대가로 받을 금화를 기대하고 있었겠지.
바보같이,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사라카는 곁에 삿된 아자젤을 두고서도 한 치도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죽은 남자가 본받아야 마땅했다.
사라카는 테이블 위에 올라간 카드 중 하나를 뒤집었다. 뒤집힌 카드에서 사슬에 묶인 악마의 그림이 나왔다. 작은 어린아이들이 소머리를 가진 거대한 악마가 앉은 의자를 숭배하듯이 들고 있었다.
“틀림없는 주술의 일종이로군요.”
레구르 백작도 그림을 보았다. 불쾌한 것을 꾹꾹 눌러 담은 그림은 척 보기에도 사특하고 불길해 보였다.
“사람의 생애는 오로지 태양신께서 정해 주시는 것이니, 그것을 엿본 것은 금기이자 신을 향해 반기를 드는 행위입니다.”
사라카는 그렇게 말하며 다음 카드를 뒤집었다. 사람과 개구리 그리고 고양이로 이루어진 삼 두를 가진 악마가 횃불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어머니! 그저 호기심이었어요! 이자가 진짜 주술사인지는 몰랐다고요!”
“마리크 주교님…! 제 딸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백작 영애의 말에 레구르 백작이 거세게 동조했다. 그러나 무지 역시 죄었다. 사라카가 원하는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매한 자들을 위해 사라카가 운을 띄웠다.
“백작 영애께서 아무것도 모르셨다면 누가 주술사를 불러들인 걸까요?”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백작 영애가 다른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크게 소리쳤다.
“로, 로엔그린 영식이에요! 저 악독한 이단이 날 현혹했어요!”
그 말에 눈치를 보던 다른 한 아이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로엔그린 영식이 주술사를 데려왔어요!”
“전, 전 아닙니다! 아리아 레구르! 네가 데려왔잖아!”
“조용히 해, 더러운 이단 자식아! 주교님…, 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사라카는 하마터면 마리크 주교의 본분을 잊고 크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주술사를 감시하고 있었기에 누가 점치는 것을 주도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주술사를 불러들인 것은 그리 억울하다고 외치는 레구르 백작 영애였다.
“…주교님. 저희 딸애는 안타깝게 휘말린 것에 불과합니다. 부디 너그럽게 봐주신다면 반드시 신께 보답하겠어요…!”
사라카는 환하게 웃었다. 레구르 백작은 재무 장관의 누이동생이었다. 다른 하나는 부호의 자식이었고. 그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것은 지금 억울하게 몰리고 있는 로엔그린이었다. 아니, 주술에 가담하였으니 억울할 것도 없지.
사라카는 마지막 카드를 넘겨 보았다. 잘린 목과 창을 들고 불 속에서 화형당하는 사람의 그림이었다. 그야말로 이단에게 어울리는 죽음이다.
“로엔그린 영식과 주술사의 시신을 신전으로 옮기세요. 그리고 눈알, 뼛조각까지 재도 남지 않도록 불사지르세요.”
“네, 주교님.”
사라카의 말에 기사들이 죽은 주술사의 머리와 몸을 챙기고, 로엔그린 영식을 일으켜 세웠다.
“주교님! 주교님! 전 아니에요, 주교님!”
로엔그린의 죽음은 이곳에 자리한 재무 장관의 누이와 대부호에게 빚을 지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단의 죽음은 어차피 보잘것없을 테니 사라카에게 조금의 이득이라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이 옳았다. 이것으로 로엔그린의 죄가 조금은 덜어질 것이니 그에게는 오히려 영광이 아닌가?
로엔그린은 발광하며 성기사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들었다. 그러나 곱게 자란 귀족 영식이 기사들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결국, 로엔그린은 기사들에게 제압당하여 흙바닥에 질질 끌려 연행되었다.
살려 달라며 빌고, 아리아에게 폭언을 퍼붓는 로엔그린의 추한 모습은 그의 신분을 가늠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였다. 더불어 성기사들의 거친 손길 또한 꼭 귀족 도련님이 아니라 꼭 빈민을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처참한 광경이 어린 로엔그린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깨달은 레구르 백작은 몹시 심란해졌다. 딸애를 위해 무고한 아이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인가….
아니면, 푸른 피를 타고난 고귀한 혈통마저도 세 치 혀를 눌려 단죄할 수 있는 마리크 주교의 권위를 눈앞에서 실감했기 때문일까.
“아버지, 아버지를 불러 주세요…. 아버지가 제 무죄를 증명해 주실 거에요! 주교님!”
로엔그린은 꼭 부친이 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그러나 레구르 백작이 안뜰을 침범하는 마리크 주교를 막지 못하고 딸아이가 무릎 꿇려지는 수모를 견뎌야 했듯이 로엔그린 또한 아들을 위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을 것이다.
“이단이 하는 말은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답니다. 그가 간악한 혀로 신자들을 계속 희롱하도록 둘 생각인가요?”
마리크 주교의 지적에 성기사가 로엔그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길이 얼마나 우악스러운지 로엔그린의 입뿐만 아니라 코까지 틀어막혀서 곧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축 처진 로엔그린은 이전보다 쉬이 옮겨졌다.
로엔그린은 이대로 곧장 신전으로 끌려간 후 처형받게 될 것이다. 그의 가족들은 사후 통첩만 받을 뿐, 시신조차 넘겨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황제의 묵인하에 신전의 권세는 도를 넘었다. 이단을 징벌한다는 명목은 신전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무차별적인 학살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신의 뜻이 있다.
마리크 주교가 저지르는 학살을 지적한다면 그 자신조차 이단으로 몰릴 것이다. 황제나 공작들조차 나서지 못하는 가운데 감히 누가 마리크 주교를 저지할 것인가.
하물며 마리크 주교는 항상 그럴듯한 물증 위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진실로 마리크 주교가 옳아 보였다.
세간에서 보는 마리크 주교는 태양신의 대리자와 다름없었다.
악마의 불이 주교님의 신앙심을 질투하여 그녀를 불태워 죽이려 하였으나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의 숨을 앗아가지 못했다. 이단을 처형하는 것은 손에 피를 묻히는 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이단의 죄를 대속하며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숭고함이다.
태양께서 그녀를 지켜보고 계시기에 마리크 주교의 발밑에는 그림자도 지지 않으리라.
태양신은 마리크 주교에게 진실을 보는 안목을 내렸으니 그녀가 지목하는 자들이 바로 신의 배반자였다.
레구르 백작은 어찌하여 부친이 과거의 이교도 학살을 회상하기 끔찍해하였는지 피부로 느끼는 중이었다.
무수히 죽어 나간 자들을 동정하기에 앞서, 자신이 그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몹시 섬뜩했다. 더군다나 이제 레구르 백작에게 마수가 뻗칠 차례였으니….
“다른 신도분들의 구속을 풀어 주세요.”
명령을 들은 기사들이 아리아를 잡아두고 있던 구속을 풀었다. 몸이 자유로워지자 아리아는 마리크 주교를 피해 레구르 백작의 뒤로 숨어들었다.
방금 거짓말로 로엔그린을 주동자로 내세우지 않았다면 지금 끌려갔을 것은 바로 아리아였다.
“잘못했어요, 어머니….”
“아리아….”
레구르 백작은 주술사를 끌어들여 점을 친 철없는 딸을 내려다보았다. 전부 레구르 백작의 잘못이었다. 딸을 너무 귀하게 키운 탓이다. 그나마 영악한 구석이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단으로 몰려 숙청당할 수도 있었다.
“두 분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목이 달아나지 않았을 뿐, 마리크 주교에게 목줄이 잡힌 것과 다름없었다.
레구르 백작은 딸을 제 뒤로 숨긴 이후 마리크 주교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조금 전의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교님.”
“어머니!”
아리아는 마리크 주교에게 허리를 굽히는 어머니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한창 이교도 학살이 자행되는 시기에 간 크게 주술 점을 칠 정도로 사위를 보는 눈이 어두운 소녀는 레구르 백작이 주교에게 이토록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고작 심심풀이로 한 유흥거리였다. 마리크 주교가 과하게 나오기는 했으나 이미 주동자가 로엔그린으로 밝혀진 상황이었고, 아리아는 잘못 휘말렸을 뿐이지 큰 죄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어머니가 호통을 쳤으면 쳤지 왜 마리크 주교에게 자비를 구해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아리아를 이단이라 생각해 제압한 마리크 주교가 어머니와 자신에게 사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레구르 백작은 철없는 딸을 무시한 채 계속 사과를 이어 나갔다.
“주교님께서 친히 내림해 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제 안뜰에서 딸아이가 주술사에게 놀아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감히 주교님의 저의를 의심하였으니 신벌을 받아도 모자라지 않겠으나, 주교님께서 그동안 제가 신전에 헌신하였음을 봐서라도 부디 관대히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레구르 백작의 감언을 찬송가라도 듣는 것처럼 감상하던 주교가 입을 열었다.
“내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사라카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게 태양신의 이름을 빌려 월권을 행사한다며 윽박지르던 레구르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복종하는 모습을 매우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사라카는 마리크 주교와 신장이 같아 그리 키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카가 보는 세상에선 항상 남들의 머리 위가 보였다. 모두 사라카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기 때문이다. 마치 태양이 바라보는 시점 같지 않은가.
마리크 주교님께서 꿈꾸듯이 말씀하셨던 과거에는, 이렇듯 모두가 주교님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제 마리크 주교님의 이름을 이어받은 사라카가 앞으로 이어받아 당연히 받게 될 대우인 것이다.
사라카는 레구르 백작의 어깨에 손을 얹어 그녀가 더욱더 몸을 숙이게 했다. 그 손길이 가뿐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자비로운 마리크 주교의 손길에 레구르 백작이 감읍하여 더욱 몸을 숙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레구르 백작께서 훌륭한 신도이심은 이 마리크가 보장하지요.”
멍청하게 주술에 현혹된 아리아 레구르는 몰라도 레구르 백작은 쓸만한 사람이었다. 재무 대신의 누이라는 점만 보아도 얼마나 쓸모가 많은가.
“내 이름이 비호하는 한, 레구르 백작과 백작 영애께 신전의 그 누구도 오명을 씌울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은 사라카의 눈 밖에 나면 단번에 내쳐질 목숨이라는 뜻이었다. 레구르 백작은 사라카의 말에 숨은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다.
주교 하나의 말에 충성스러운 개처럼 굴복하고 따라야 한다니, 앞으로 겪을 일들이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참담한 심정이 레구르 백작의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
다행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덕분에 표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레구르 백작은 울분을 삼킨 채 입을 열었다.
“주교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두려움과 수치에 얼룩진 채 어깨를 떨지언정 입 밖에 나오는 것은 자비에 감사하다는 인사말이었다.
레구르 백작의 어깨에서 사라카의 손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라카가 고개를 들라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계속 자세를 유지해야겠지.
사라카는 레구르 백작이 보이는 복종의 형태가 몹시 기꺼웠다. 주술사 하나를 심어 놓아 덫을 친 보람이 있었다.
사라카는 레구르 백작에게 목줄도 걸어놨기에 가장 큰 목적이 달성된 이상 백작저에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주교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마침 성기사가 로엔그린을 호송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사라카가 떠날 것처럼 보이자 레구르 백작이 크게 안심하였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것 같았다.
레구르 백작이 수치를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사라카는 여전히 레구르 백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천 아래 가려진 얼굴에는 멸시가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항상 머리 위에 태양이 떠 있다는 사실을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사라카는 떠나기 전까지 경고 섞인 인사말을 건네고 레구르 백작저를 빠져나왔다. 마차까지 가는 짧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사라카를 호위하는 자들은 경계를 허물지 않았다.
전에 미치광이 이단 하나가 사라카에게 달려든 이후로 항시 주변을 주의하는 것이다. 심지어 신전에 다다라서도 언제든지 검을 뽑아 들 수 있도록 준비 태세였다.
“신전에선 나를 해칠 사람이 없으니 경계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사라카가 괜히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하자 기사 하나가 반박을 했다.
“…하지만 주교님. 여긴 그치들이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파라로스 기사단 놈들이 마녀에게 홀려서 주교님을 해하려 들려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빈정거린 기사는 고개를 획 돌려 한쪽을 노려보았다.
그 방향에는 면목이 없다는 듯 푹 고개를 숙인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라로스 기사단에 있던 사람이었다. 가브리엘에게 큰소리로 호통까지 치며 파라로스 기사단을 떠나 왔으나 그는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다.
“태양신의 은혜도 모르는 더러운 놈들.”
“저것들이 어째서 이단이 아닌지 이상합니다.”
그들은 가브리엘이 마녀의 치마폭에서 놀아난다며 침을 뱉어 댔다.
마치 천칭과도 같이 사라카가 빛을 발할수록 파라로스 기사단의 명성은 점점 쇠락해갔다. 파라로스 기사단에서 나와 마리크 주교의 휘하로 들어왔다고 해도 꼬리표가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그만 하세요. 같은 형제들을 욕해서 무엇합니까. 무엇보다 가브리엘 기사단장은 지금 이단을 벌하기 위해 물심양면 노력 중이지 않습니까.”
사라카는 일부러 가브리엘을 두둔하였다. 상급자가 감쌀수록 더욱 반발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흥. 자기들도 저지른 죄가 두려워 주교님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며 이단을 정죄하는 흉내만 내는 거죠.”
사라카와 달리 가브리엘은 주술을 부렸다 의심되는 주범만을 잡아 오거나, 주술로 벌어진 참상만을 정리했다. 모든 근원을 불태워 정화하는 사라카의 작업과는 궤를 달리하니 사라카를 따르는 처지에서 가브리엘의 처치는 다소 미흡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라카는 올바른 시선을 가진 기사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가브리엘 기사단장에게도 신의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태양신께서 굽어살피시는 신전에서 내게 해를 가할 인물도 없을 것이고요.”
사라카는 그렇게 말하며 사라카의 방 앞에 보초를 서겠다는 기사들을 물렸다.
“맞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라헬 님의 뜻을 지상에 대신 펼쳐 주실 분이 아닙니까. 불민자들이 아니고서야 주교님을 감히 해하려 들지는 못하겠지요.”
그에 응수하던 기사는 그래도 사라카가 걱정스러운지 발을 떼지 못했다.
“…아스타로트 경만 계셨어도 한시름 놨을 텐데 말입니다.”
발이 안 떨어진다는 듯 미적거리던 기사 하나가 한탄을 했다. 아자젤 아스타로트, 마리크 주교가 중히 부리는 기사는 실력이 몹시 뛰어났다.
마리크 주교가 신전 밖을 돌아다닐 때도 그 하나만 호위로 데리고 다녔을 정도로 신뢰가 깊은 자였는데 지금은 무슨 일인지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물론 사라카가 아자젤만을 데리고 다닌 것은 남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기 용이하기 때문이었지만 이들이 이유를 알 리는 없다.
“아스타로트 경에게 혹시 우환이 생긴 건 아니겠지요? 말없이 사라지실 분이 아닌데….”
“언제나 신께서 지켜봐 주시니 아스타로트 경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그렇지요…?”
사라카는 아자젤이 죽었음을 알리지 않았다. 마리크 주교님께서 악마가 단죄되었음을 일러주신 후 아자젤이 죽었음을 공표하려고 하였으나 그것의 죽음을 더 유용하게 쓸 구석이 있지 않을까 싶어 차일피일 발표를 미루는 중이었다.
존재부터 삿된 것은 오로지 사라카에게 이용되기 위해 존재해야 했고, 죽어서도 그리 사용되어야 했다. 그리고 사라카를 위해 안배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로한슨 저택 근처에 심어 둔 첩자가 보낸 편지를 보내왔다.
‘로한슨 저택에서 머무른다고.’
죽었어야 하는 악마가 로한슨 저택에 웅크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저택의 누구도 쉬이 발견할 수 없게, 에반젤린 로한슨의 방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가두어져 있어, 에반젤린의 내밀한 측근이 아니고서야 아자젤이 로한슨 저택에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라고도 함께 덧붙였다.
사라카는 마리크 주교가 죽음을 확신한 악마가 어째서 로한슨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지는 몰랐다.
주교님께서 생을 마감하기 위해 사라카에게 거짓을 뱉은 것일 수도 있고, 에반젤린이 아자젤을 사로잡은 것일 수도 있지.
어쩌면 아자젤이 사특한 에반젤린에게 끌려 복종하기 위해 사라카를 배신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셋 중 어느 것이 정답이든 상관없었다. 그보다 아자젤을 어떻게 이용할지가 중요했다. 에반젤린 로한슨은 아자젤을 사라카를 찌를 비수라고 생각해 숨겨 두고 있었을 것이다. 사라카는 그것을 미리 알게 된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에반젤린이 준비한 비수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라카가 마련한 것은 여전히 에반젤린 로한슨의 턱밑에 도사리고 있었다. 로한슨의 배신자도, 호사퀸 공작도, 가브리엘의 신분마저도 사라카의 체스 말이었다.
아니다. 애초에 에반젤린 로한슨의 존재 자체 역시 사라카를 위해 안배된 것이었다. 에반젤린은 마리크 주교가 이뤄낼 업적을 공고히 다져 줄 재료로서 나타난 것이다.
에반젤린은 사라카가 세운 계획을 장식해 줄 화려한 장식과도 같았다. 아자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최후의 날이 머지않았다. 태양신을 위하고 있으니 승자는 당연히 마리크 주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