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14)
공작한테 수조에 있는 쥐 사체들을 전부 치웠다고 보고하러 갔다. 공작은 그걸 하루 만에 처리할 줄 몰랐다면서 굉장히 놀라워했다.
“그럼 오찬 후에 뵐게요.”
밥은 같이 먹으면 체할 것 같았다. 그 전에, 주방 부엌에서 쥐들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냥 공작가에선 금식하기로 했다. 마브카도 그렇고, 리코도 그렇고 둘 다 부엌에서 사람이 쥐 먹는 걸 봤다잖아.
난 그런 데서 지어진 밥 같은 거 먹기 싫어. 배고프면 푸딩이랑 젤리가 로한슨 저택에서 퀵 서비스로 배달해 줄 건데 뭐 어때.
아마란스의 방을 뒤지면서 기다리고 있으니 리코가 날 데리러 왔다.
공작은 서류를 처리하면서 나랑 대화도 나눌 모양이다. 진짜 어떻게 행동하는 거 하나가 다 후회를 위한 떡밥 같지, 이제?
“성수도 소용없는 걸 처리할 줄은 몰랐구나. 어떻게 했지?”
그냥 불태웠는데요.
애초에 짐만 되고 부피도 나가는 거 왜 진작 안 태우고 성수 아깝게 수조에 담가 놓기만 했는지 내 쪽에서 묻고 싶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는 없지.
알고 나면 쉽지만 대단한 방법이 있는 것처럼 과장해야 내 입지가 올라갈 거 아니야.
“공작님께서는 절대 못 쓸 방법으로요.”
“…그래?”
공작은 굉장히 못마땅해했지만 처리 방법이 생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듯했다. 어차피 전부 나한테 시킬 거라서 방법은 궁금하지도 않나 보다. 칫!
“약속은 약속이니 네게 시간을 내어주마. 하지만 너에게 내어 줄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보다시피 일이 많아서.”
공작은 말하면서도 나한테 눈길 한번 안 줬다.
“그리고 너 같은 것과 아마란스의 추억을 나누고 싶지도 않아.”
후회 2 스택 적립 축하드립니다. 흥. 아마란스 이야기를 안 할 거라고? 그럼 그냥 다른 거 물어보지 뭐.
“공작님께서는 신전에서 공작가를 염탐하고 있다는 걸 아셨나요?”
“뭐?”
설마 모르고 있었나?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공작도 정보력이 별거 아니네….
공작이 빡쳤는지 작업하고 있는 서류를 구겼다. 이 할아버지는 왜 중도가 없고 항상 급발진하실까. 나보고는 방해하지 말라고 서류 작업이 세상 중요한 것처럼 굴더니 말 한마디에 종이를 그냥 구겨 버리네.
“집사의 딸인 마브카에게도 사제가 접근해서 내부 사정을 캐묻는다고 하더군요. 아이한테도 접근했으니 다른 하인들에게도 권유가 가지 않았겠어요?”
“반대로 말하면 다른 하인들이 모두 거절했기에 어린애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난 거겠지.”
호사퀸 공작이 내 의견을 무시하며 빈정거렸는데 굉장히 말이 되는 소리였다. 원래 어린애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잖아.
다 눈치 있게 쳐 내서 사제들이 마브카한테 접근한 건가? 보안 짱이다. 이러니까 가브리엘이 로한슨 저택에 있는 걸 반대하고 여기로 보낸 거구나.
“호사퀸 공작가에 주술이 사용된 걸 알고 접근하는 걸까요?”
“글쎄. 굳이 파고들 것도 없이 네 존재만으로 충분한데 말이다.”
나름 걱정해서 한 말이었는데 공작이 날 보며 으르렁댔다. 진짜 개 너무하네. 자기가 무죄 사면 시켜 놓고 범죄자 취급하는 것 봐! 부글부글 화가 끓어오르는 걸 참아 내렸다.
참자, 참아. 나에게는 가족 후회물이라는 사명이 있다. 연회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작을 긁으면 안 된다. 후. 심호흡해서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다음 물어볼 게 진짜 내가 알고 싶었던 거였다.
“공작님. ‘쥐’들은 누가 불러낸 건가요? 리코는 공작님께서 설명해 주실 거라고 했어요.”
“리코가….”
어제 리코한테 물어봤는데 리코는 자기는 말할 자격이 없다고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거나 본인한테 들으라고 했다. 기왕 독대 시간도 얻어 냈는데 공작이 직접 설명해 주는 게 좋잖아.
리코의 이름이 나오자 공작이 눈을 감고 감상에 젖었다. 진짜 차별 대우 하는 것 끝내준다.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리코가 호사퀸 손녀딸인 줄 알겠네. 영원히 침묵을 지킬 것 같던 공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게라가 그랬다.”
네? 잠시 내 귀가 잘못된 것 같았다.
“주술을 부린 것이 아게라다.”
아니었다. 평생 그런 적 없던 공작이 친절하게 2회차 공지를 띄워 줬다. 공작은 아게라의 이름을 꺼내고 손으로 얼굴을 거세게 쓸어내렸다. 후회와 미련이 가득해 보였다.
“아게라 님이요…?”
공작은 그 뒤의 자세한 내용은 리코에게 들으라면서 나를 쫓아냈다. 나는 머릿속에 ‘아게라’와 ‘주술’만 동동 띄워진 채로 공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난 다른 세력이 호사퀸 공작가를 음해하려고 하는 줄 알았지, 진짜 내부자 소행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공작 부인? 에반젤린 할머니가 범인이라고?
실화야?
마리크 주교가 이대로 쳐들어오면 그냥 호사퀸 공작가와 나까지 묶여 화형당하게 생겼다.
가브리엘 구해 줘! 여긴 아닌 것 같아!
충격적인 소식을 마지막으로 공작에게 쫓기듯이 응접실을 나왔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어안이 벙벙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푸딩을 챙기고 로한슨 저택으로 튀고 싶었다. 아니 주술 부린 게 아게라라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데?
공작은 그것만 딱 말하고 날 쫓아내면 어쩌잔 거야! 황당해하고 있는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코와 눈이 마주쳤다.
“일찍 나오셨네요.”
“차를 들이지 않았으니까.”
보통 귀족들은 상대를 떠보거나, 예의를 차린답시고 빙빙 돌려 말해서 담소 시간이 길었다. 그래서 긴 시간 동안 말하면서 목이나 축이라고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편이었고. 차를 내오지 않았다는 건 대화가 길어지지 않을 거라는 예고와도 같았다.
공작이 차를 내오라 하지 않고 서류를 계속 붙잡고 있길래 나랑 오래 말을 섞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폭탄 발언 하나 듣고 내쫓길 줄은 몰랐지만….
리코는 내게 뭘 묻고 싶다는 듯 머뭇거렸다. 아마 공작한테 사건 설명을 들었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조부님께서 리코 네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라 하시더군.”
리코는 공작한테 허락받고 오라 하고, 공작은 리코한테 가서 자세한 사정을 캐물으라고 하고. 아주 자기들끼리는 신뢰가 돈독하다 이거지. 당장 리코를 탈탈 털어서 자세한 내막을 캐묻고 싶었지만, 공작의 응접실 근처라서 듣는 귀가 많았다.
“공작님께서 허락하셨다면 제가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 방으로 가실까요?”
“굳이 자네의 방에?”
나도 방 있는데? 물론 아마란스가 지내던 방이긴 했지만.
“…송구스럽습니다만, 마브카가 꼭 영애님께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요.”
리코는 마브카를 거론하며 다른 이유는 없다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한테 아마란스의 방을 내주기 싫어했던 적도 있고, 굳이 아마란스의 방을 피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으니 딱히 리코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방에 초대하는 걸 보니 리코와 조금 친해진 것 같다. 공작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어제 리코랑 같이 캠프파이어 한 보람이 있네.
“그래 좋아.”
리코는 마브카를 엄청나게 아끼는 것 같았고, 리코의 호의를 사기로 한 이상 딸한테 잘 대해 주면 나쁘지 않을 거다. 원래 상대를 공략하려면 주변 인물부터 공략하는 거라잖아.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리코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마브카가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눈을 비비며 마중을 나와 나를 폭 껴안았다.
“다녀오셨어요.”
헤실헤실 애교를 부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날 리코라고 헷갈린 모양이다. 아무리 잠에서 덜 깼다고 해도 나랑 리코가 헷갈릴만한 존재감은 아닌데, 얜 진짜 내가 안 무서운가? 어제 스스럼없이 다가올 때부터 범상치 않긴 했다.
“마브카!”
리코가 화들짝 놀라며 마브카를 내게서 떨어트렸다. 마브카는 자기가 안고 있는 사람이 리코가 아니라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는 파랗게 질려서 숨을 힉힉 들이켰다.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끌어안아서 놀란 것 같았다. 무서워하는 건가? 어제는 우느라 정신없어서 말도 편하게 했다지만, 사실 평범한 꼬마애가 악명높은 귀족 영애인 에반젤린한테 달라붙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제는 나한테 잘만 들러붙어 놓고는 오늘은 내외한다 이거지? 뭔가 줬다 뺏긴 기분이라 억울하긴 하네.
마브카가 호흡이 부족해져서 딸꾹질이라도 올까 서둘러 안심시키려 인사를 했다.
“어젠 잘 잤니?”
“히끅.”
마브카는 기어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내가 말을 건 게 역효과로 작용한 것 같았다. 난 그냥 안심시키려 한 건데….
“힉, 죄송, 합니다, 로한슨 영애님…. 히끅.”
어제에 비해 날 대하는 태도가 한껏 조심스러워진 데다가 천사가 아니라 로한슨 영애님이라고 제대로 부르는 걸 보면 리코한테서 나에 관한 이야기를 주의받은 것 같았다.
마브카는 곧 펑펑 울 기세였다. 어제 온종일 울어 놓고는 아주 탈수가 오게 생겼다. 우는 애 달래는 건 쥐약인데, 어제와 다르게 입에 넣어 줄 단것도 없어서 그냥 마브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브카는 그대로 굳어서 동공 지진이 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죄송하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이 듣고 싶구나.”
“아…. 아! 감사, 어제 감사했어요!”
“그래.”
내가 인사를 받아 주자 마브카가 눈물을 매달고 있으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방금까지 겁먹어서 딸꾹질이나 하던 게 내가 인사를 받아 줬다고 들떠서 입이 귀까지 걸린 걸 보면 역시 애는 애다.
리코는 딸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 했다는 명목으로 날 데려오더니 막상 내가 마브카한테 친절하게 대하자 못 볼 꼴이라도 본 것처럼 벙쪄 있었다.
“로한슨 영애님께서는…. 보기와 다르게 아이들에게 친절하시군요.”
“그럼 내가 소문처럼 아이들에게 못된 짓을 저지를 줄 알았어? 심지어 네 딸에게?”
왜? 내가 소문처럼 인사불성 악당이 아니라 불만이야? 차마 직접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하고 그냥 리코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겠지. 물론 공작은 침을 뱉는 대신 와인 잔을 던진 전적이 있었다.
“대화가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차를 준비할까요?”
“아니, 괜찮아. 뭘 먹을 기분이 아니구나.”
쥐들이 범람하는 곳에 있는 식기를 쓰기 싫었다. 이유를 말해 주면 유난히 깔끔한 체한다고 면박 받을 것 같아서 그냥 식욕이 없다고 일축했다. 내가 유난 떠는 건 아니고, 혹시라도 쥐한테서 병이라도 옮아 봐. 성수가 안 통하는 나는 그대로 운명하는 거다.
전에 아자젤이 휘둘렀던 칼을 맨손으로 막았다가 상처 난 손도 낫기까지 보름이 넘게 걸렸는걸. 빙의자 특혜인지 다행히 회복 속도가 빠르기는 했지만, 성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건 엄청나게 큰 약점이었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진짜 조심해야겠네. 만약에 먹는 거에 독이라도 들어 있으면 성수 치트 키가 안 통하니까 그대로 사망일 거 아니야. 앞으로 먹을 걸 주의해야 하는 이유가 쥐 말고도 하나 더 생겼다.
물론 마리크 주교는 나를 독살할 게 아니라 끄집어내서 다른 명분을 내세워 사형시킬 사람이긴 했지만.
내가 차가 필요 없다고 하자 리코는 다시 권하지 않고 냉큼 자리에 앉았다.
“그럼 어디부터 설명해 드려야 할까요….”
리코가 서두를 열었다. 응? 근데 아직 마브카가 같이 있는데?
“아이의 앞에서 해도 되는 이야기인가?”
“마브카는 영특한 아이입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고작 여섯 살이지. 굳이 모든 걸 알 필요는 없어.”
하물며 어제 기이한 현상을 잔뜩 겪은 아이였다. 나는 애들한테 필요한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말해 줘야 한다는 편이긴 했으나, 그게 자기가 몸담고 있는 가문에 대한 비설이라면 좀 다르지.
심지어 우리가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주술에 관한 거기도 하고. 아무래도 어린아이가 듣기에는 심각한 이야기지. 게다가 신전에서 마브카한테 또 언제 접근해올지 모르니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마브카….”
리코는 머뭇거리면서 마브카를 밖으로 내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어제 하루 종일 찾아다닌 전적이 있어서 마브카를 혼자 내보내기 망설여지는 것 같았다.
“혼자 두는 게 무섭다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되겠지.”
“하지만…. 누가 또 니겔라와 같은 처지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지금 상황에 누굴 믿을 수가 없어요.”
리코가 불안해하며 내 말에 대꾸했다. 하긴 주술 부린 사람은 아게라에 같이 일하던 하녀는 쥐를 먹질 않나, 이 와중에 믿을게 외부인인 나뿐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하겠지.
그럼 같은 외부인에다가 믿음직스러운 보디가드를 붙여 주면 되지.
“푸딩.”
내 말이 끝나자마자 푸딩이 소리소문없이 나타났다. 한순간에 무릎이 묵직해졌다. 리코는 무릎 위에 고양이가 있는 걸 보고 눈을 크게 떴으나 어제처럼 자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을 뿐 원래 있었다고 여기는 듯했다.
“또 고양이가….”
리코가 손을 벌벌 떨며 입을 틀어막았다. 뭔가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혹시 고양이 털 알레르기라도 있나? 아니면 그냥 무서워하는 걸지도 모르고. 리코 앞에서는 푸딩을 덜 불러야겠다고 다짐했다. 리코와 다르게 마브카는 푸딩을 아주 많이 반겼다.
“어제 봤던 고양이님이다!”
“마브카, 푸딩이랑 잠시 밖에서 놀아 주겠어?”
“네! 고양이님 이름이 푸딩이에요?”
“그래.”
“이름 귀엽다! 키키만큼은 아니지만!”
마브카는 푸딩을 꽉 끌어안았다. 리코한테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나랑은 거리감이 생긴 것 같긴 한데 고양이는 죄가 없지.
“고양이가 있으면 쥐들이 접근하지 못하겠지. 이러면 안심할 수 있지?”
내 말에 동조하며 마브카가 눈을 빛내며 리코를 바라보았다. 절찬리 눈빛 공격이다. 나도 어제 당해 봐서 아는데 저 눈빛을 이겨 내는 게 쉽지가 않더라. 리코도 결국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다른 사람들을 주의하렴. 니겔라는 물론이고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도 경계, 또 경계해야 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고양이님이랑만 같이 놀게요.”
리코는 몇 차례 주의를 시키고 나서야 마브카를 밖으로 보냈다. 푸딩이 자길 이런 용도로 불러냈냐고 서러워하며 냥냥 울어 댔지만, 열심히 회피했다. 미안, 푸딩. 나에겐 무거운 사명이 있다.
귀여운 아이와 고양이가 나가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벌써 겨울인 줄. 이럴 줄 알았으면 손이라도 녹이게 차라도 부탁할 걸 그랬다. 하지만 기차는 이미 떠나갔다. 이제 와서 마시지도 않을 차를 내와 달라고 하는 건 매너 없는 행동이니까 어른스럽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타파하기로 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앗, 실수했다. 하도 공작이랑 본론만 이야기하는 게 버릇처럼 굳어 버려서 그냥 냅다 본론으로 진입해 버렸네. 그래도 리코도 빨리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공작님께서… 어디까지 말씀하셨나요?”
리코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말만 떨리는 게 아니라 손도 떨고 있었다. 내 시선이 리코의 손에 향하자 리코가 자신의 양손을 꽉 잡아 아래로 내렸다.
“아게라 님께서 주술을 부렸다는 것만.”
“가장 핵심만 이야기해 주셨네요….”
핵심은 무슨, 그냥 공작이 전부 너한테 떠넘긴 거야. 둘을 이간질하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았으나 인내심으로 내리눌렀다.
“그럼 말씀드릴게요. 부디, 로한슨 영애님께서 모든 경위를 아신 후에도 아게라 님을 용서하고 포용해 주시기를 바라요.”
리코는 내가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아게라에게 충실할 수 있는 관용을 바랐으나, 나는 태연하지 못했다. 리코가 말해 주는 과거사를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물음표만 맴돌았다. 아니, 아니, 뭔데 이게!
아게라가 주술을 부렸다는 단편적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이 모든 게 마리크 주교가 뒷공작을 벌인 거라고 애써 행복회로를 돌렸었다.
평생 나랑 절연하고 살 것 같던 호사퀸 공작이 내 우군이 되어 주니까 마리크 주교가 수를 써서 공작을 끌어내리기 위해 술수를 쓴 줄 알았지, 그냥 스스로 불러온 재앙일 줄은 몰랐다고!
“아게라 님은 아마란스 님을 무척이나 사랑하셨어요.”
그건 나도 잘 안다. 문득 해사한 낯의 날 닮은 노인이 떠올랐다. 날 아마란스라고 불렀었지. 오죽하면 치매에 걸린 노인이 자기의 나이도 망각한 가운데 딸만은 선명하게 그릴까.
공작 때문에 불가피하게 절연하게 되었으나 내심 딸을 많이 아꼈고, 그 아래에 죄책감이 그득 차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사랑은 집착과도 같아서 아게라 님은 선을 넘고 마신 겁니다. 주술을 써서 아마란스 님을 불러내려고 한 거예요.”
예?
죽은 사람을 불러내려고 했다고? 미친 거 아냐? 아니, 속된 말로 제정신이 아니기는 하시지…. 아무래도 치매에 걸리셨으니까 주술의 위험성 같은 건 인지하지 못하셨을 거다….
리코는 주술을 써서 ‘무언가’를 소환해 냈다고 이야기했으니 강령술보다는 인체 연성에 가깝나 보다. 머리 아프네, 아게라가 인체 연성을 시도했다고? 아니, 주술도 문제지만 인체 연성이야말로 정말 금기잖아!
이건 다른 세상 이야기인가? 아무튼, 물론 주술 자체가 악마를 소환하는 사악한 짓이었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둘 다 거기서 거기일 거다.
“공작님께서는 아게라 님이 소환해 낸 것을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찐 손녀인 나도 배척하는데 갑자기 주술로 소환해 냈다고 들이밀면 공작이 퍽이나 자기 딸이라고 받아 주겠어. 그 결벽증 같은 성격에 죽이려고 들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그래서 소환해 낸 것을 죽이려고 하셨죠.”
내가 뭐랬어. 그럴 줄 알았다. 이 정도면 나한테 공작 분석 학과 학위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것은 죽지 않았습니다.”
오호라. 상대가 막강했다. 본격적으로 ‘판타지!’ 하면서 자기주장 심한 사연에 사건의 심각성도 잠시 망각하고 흥미가 돋았다. 불사신이래, 이거 완전 소설 같잖아! 소설 맞지만. 리코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것은 죽지 않고 계속해서 분열되어 살아남았습니다. 반으로 자르면 잘린 채 살았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없앨 방도를 궁리하다 아예 존재조차 하지 못하게 잘게 갈아 동물에게 먹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리코가 푹 내리깔았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지 않냐는 투였다. 그 말대로 동물이라고 하니까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쥐?”
수조에 가득 잠겨 있던 쥐, 마브카를 찾으며 사람 말을 하던 쥐, 니겔라라는 하녀가 잡아먹었다는 쥐 말이다. 저택에 있는 동물이라고 해 봤자 그 쥐뿐이잖아.
리코는 조용히,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다가온 현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듯한 망설임이 몸짓에 가득 배어 있었다.
“네, 맞아요. 쥐에게 그것을 먹였습니다.”
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까지는 음유시인이 읊어 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로웠다면 지금은 예의 장면을 생각하기도 소름 돋았다. 죽이는 것까지는 넘어갈 수 있다. 인권이건 뭐건, 내가 빙의한 후에 죽은 사람을 못 본 것도 아니고, 시대상이라는 게 있으니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만 먹이는 건 좀 다르지. 아게라가 ‘딸’이라고 소환해 냈던 걸 고작 쥐한테 먹였다는 사실이 구역질이 났다.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은 걸 참아냈다.
“하지만 저희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아게라 님은 ‘주술’을 사용하셨고, 범인이(凡人)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요. 쥐에게 먹인 후 모든 일이 일단락되는 줄 알았으나, ‘주술’은 저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예상하는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난 어제 겪었던 일들이 어떤 경위로 벌어진 건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주술이랑 관련된 거라 짐작은 했지. 근데 ‘쥐’들의 정체가 이런 것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을 먹은 쥐들은 마찬가지로 그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아게라가 소환해 낸 게 분열 생식하는 플라나리아였는데, 심지어 기생충이기도 해서 동충하초 매미 유충처럼 숙주를 잠식했다는 거지? 어제 마브카를 찾던 거나, 자길 먹으라고 하던 걸 보면 사람을 현혹해서 자길 먹게 만드는 모양이다.
니겔라는 주술사가 아니라 거기에 넘어간 불쌍한 피해자였네. 범인은 제일 무고하다고 생각했던 아게라였고. 범인이 제일 의심이 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법칙이 여기서도 통용될 줄은 몰랐지. 맞아, 내가 잊고 살았는데. 이곳은 어디까지나 창작물이다, 이거지?
하…. 웃음도 안 나온다 진짜.
이거 가족후회물 아니었나요? 갑자기 장르가 로판에서 아포칼립스가 됐는데요?
좀비한테 물리면 감염되는 것도 아니고 쥐를 잡아먹으면 감염이 된다니, 뭐 이딴 설정이 다 있냐? 하지만 이게 내게 닥친 현실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 줄 알았으면 공작한테 내가 처리한다 호언장담 같은 거 안 했을 거다. 이게 뭐야, 퇴마사를 불러야 하는데 세*코가 온 상황이잖아. 하다못해 난 벌레 퇴치사도 아니고 그냥 고양이 주인이다.
리코는 내 정신이 반쯤 나가 있다는 걸 무시하고 계속 자기 할 말만 이어 나갔다.
“원래였다면 신전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불가능하죠.”
리코가 말을 흐렸다. 지금은 신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렇다. 안 그래도 주술을 시도한 당사자가 공작 부인인데, 신전에 알리면 그냥 멸문을 자초한 것과 다름없었다.
“가브리엘 경께서 성수를 공수해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택은 그 ‘쥐’의 소굴이 되었을 겁니다.”
이제 왜 공작이 수조에 쥐들을 쌓아 놨는지 알겠네. 그냥 물이 아니라 성수였구나…. 그 정도 양이면 대체 얼마지? 그런 대가를 받으면 날 무죄 사면 시켜 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겠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럼 내가 쥐들을 불태워서 가루가 됐는데, 그 가루도 사람이 섭취하면 감염되는 건가? 난 이미 감염된 거 아니야?
캠프파이어하고 나서 남은 재들을 청소하다가 잿가루들이 엄청나게 흩날려서 조금 흡입한 것 같은데…. 어쩐지 어제 캠프파이어 할 때 리코가 거리 두기 하더라!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멱살 잡고 짤짤 흔들려고 했는데 리코가 선수를 쳐서 고개를 숙였다.
“이게 모든 전말입니다.”
리코는 설명을 끝냈다. 내 라이프도 0이 됐다.
“로한슨 영애께서는 어제 수조에 있는 쥐들을 처분하시면서 이미 자격을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발 영애님께서 호사퀸 공작가를 구해 주세요.”
리코는 아주 깊이 고개를 숙였다. 당장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차마 리코한테 일어나라는 이야기도 못 하고 그냥 리코 정수리만 보고 있었다. 진짜 괘씸하네. 심지어 이런 이야기를 마브카 앞에서 하려고 했다는 것까지 괘씸했다.
애 앞에서 무거운 이야기는 자제하란 말이야! 앞으로 리코가 아니라 리괘씸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먹으면 감염되는 플라나리아 악마를 나보고 없애라는 거지?’
공작이 내 구명줄인 줄 알았는데 오판이었다. 가족 후회물? 이 장르가 피폐라는 걸 망각한 내 잘못이다. 피폐에 가족 후회 같은 게 어디 있어. 아니지, 가능하긴 하다. 그래, 나 같아도 골칫거리인 ‘쥐’를 없애주면 그냥 어화둥둥 내 새끼 하면서 다니겠다.
공작은 그 와중에도 콧대 높게 날 버려 두고 있었고. 아니지, 공작은 애초에 나한테 큰 기대를 걸지도 않았으니까.
여기 있다가는 그냥 공작가랑 같이 한 번에 썰려 가게 생겼다. 지금 당장 로한슨 백작가로 돌아가자. 출생의 비밀이건, 로한슨 저택에 배신자가 있던 중요한 게 아니다. 그냥 여기 있으면 죽을 판이야.
마브카한테도 접근했을 거면 공작저 사용인들한테도 접근했을 거잖아. 공작은 매수된 사람이 없으니 마브카한테 접근한 거라고 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마리크 주교가 공작가를 주시하고 있다는 게 제일 쟁점이지. 구실이야 만들면 그만이고, 심지어 공작저에는 진짜 주술의 말로가 나타나고 있잖아. 마리크 주교가 공작저를 공격해도 누명이 아니란 말이다.
호사퀸 공작가를 정리하고 나서, 주술을 사용하면 이렇게 된다고 교과서에 예시로 박제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좋아, 도망치자. 고개 숙이고 있는 리코를 뒤로하고 문을 열었다.
“영애님?”
“…마브카.”
마침 문 앞에 서 있던 마브카만 아니었어도 바로 도망갔을 거다. 마브카가 벌써 돌아왔다. 문을 열려고 했는지 높게 치들은 손이 내 눈치를 보며 뻘쭘하게 뒤로 숨었다.
“엄마가 왜 인사하고 있어요? 영애님 이제 가세요?”
마브카가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푸딩이 마브카의 품을 박차고 나한테 안겼다. 재촉하듯이 꾹꾹이를 하는데 솜 같은 발길에서 당장이라도 호사퀸 저택과 마브카의 곁에서 떠나자는 절실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반대로 나는 마브카를 보며 흥분이 싹 가라앉았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바짝 들었다.
어제 마브카를 애타게 찾던 목소리들 때문이다.
‘내가 지금 호사퀸 공작가랑 엮이기 싫다고 가 버리면 마브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세상이 떠내려가도록 울던 어제의 모습과 지금 방실방실 웃는 마브카가 겹쳐 보였다. 집에 있는 금쪽같은 메리랑 데이지 동생들, 킨더 부인의 안타깝게 절명한 아들 생각까지 번갈아들었다. 하….
‘쥐’가 마브카를 노리고 있으니 내가 도망가면 마브카는 틀림없이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겠지? 그리고 신전 측에서도 마브카를 주시하는 상황이잖아. 마브카를 두고 나 혼자 돌아가 버리면 내가 딸을 버리고 혼자 살자고 튀어버린 로한슨 백작 놈이랑 다를 게 뭐겠어.
“아니, 내가 어딜 가겠어? 마침 마브카 네가 돌아올 것 같아서 문을 연 거야.”
이건 어린애들한테 약한 내 잘못이다.
다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리코. 고개를 들어.”
리코가 머뭇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죄책감이라도 드나? 어제 자기는 쥐에 감염되기 싫다고 나랑 거리 두기도 했는데, 나는 꼼짝없이 공작가에 묶여서 엑소시스트 노릇이나 해야 하니까 미안하긴 하겠지.
“도와주지.”
“로한슨 영애님!”
리코가 감격하여 소리쳤다.
“감히 내 ‘어머니’를 자처하는 걸 가만둘 수 없으니까 말이야.”
리코는 내가 아마란스의 이야기를 꺼내자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삼스럽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로한슨 영애님은 어머니를 정말 좋아하시네요.”
내가 아마란스한테 갖는 건 죄책감밖에 없는데? 자의는 아니었지만 빙의해서 에반젤린 몸을 쓰고 있으니 로한슨 백작은 몰라도 아마란스한테는 미안하긴 했다. 아무래도 공작한테 아마란스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아마란스의 방을 달라고 한 것 때문에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
“나도 엄마가 좋아.”
마브카가 나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리코를 껴안았다. 내가 좋다고 한 건 리코가 아니거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어쩔 수 없지. 눈 딱감고 엑소시스트 일 한번 해보자고. 공작한테 아마란스 이야기도 들어야 하고, 로한슨 저택에는 누군지 확실하지 않은 배신자가 있다고 했으니 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이라 딱히 갈 곳도 없었다.
게다가 이미 공작한테 쥐를 박멸해 주겠다고 약속도 했잖아? 난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 살기도 퍽퍽한데 어린애한테 휘둘려서 공작가 퇴마나 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이렇게라도 합리화를 해야지 어쩌겠어.
“대신 내게 최대한 협조해 줘야 할 거야. 어제처럼 방관해선 안 돼.”
“네, 영애님. 감사드립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리코가 내 경고에 굳은 얼굴로 다짐했다.
흥. 나는 굳이 대꾸해 주지 않고 푸딩이나 열심히 만지작거렸다.
푸딩의 배를 꾹꾹 눌렀다. 다행히 홀쭉했다. 푸딩이 혹시라도 쥐를 먹었다면 나는 마브카건 아게라건 상관할 것 없이 그냥 공작가를 뒤로하고 돌아갔을 거다. 그래도 푸딩은 아직 쥐를 먹지 않은 모양이고, 나도 멀쩡하니까.
진작 말해 주지, 하여튼.
사춘기인 푸딩이 내 손길을 부끄러워하며 손길을 뿌리치고 몸을 웅크렸다. 그런데도 내 무릎에서 내려가지 않는 게 퍽 귀여웠다. 심신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 푸딩의 머리를 열심히 쓰다듬었다.
리코와 대화를 나눈 당일부터 본격적으로 ‘쥐’ 색출 작업을 시작했다.
“푸딩, 저택을 돌아다니면서 쥐들을 잡아다 주겠니?”
저택에 돌아다니는 쥐들은 푸딩한테 처리를 맡겼다. 눈에 보이는 족족 잡아만 두고, 절대로 먹지 말라고 엄포를 놨다. 물론 우리 푸딩의 원래 모습이 황자 뺨치는 미소년인 건 잘 알지만, 나한테는 한창 사춘기인 고양이일 뿐이었다.
수인이긴 해도 고양이가 쥐를 먹는 건 거의 본능이잖아? 주의하라고 경고하지 않았다가 푸딩이 쥐를 잡아먹고 아게라가 소환한 악마의 숙주가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해….
‘확 다 엎어 버릴까 보다.’
물론 내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었다. 푸딩은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푸딩이 물어 온 쥐들은 리코가 말했던 대로 보통 방식으로는 죽지 않았다. 쥐는 공작이 썼던 방법처럼 성수에 담그거나 바로 불을 질러 처리해야만 죽었다.
성수도 다 돈이다 싶어 한번은 눈 딱 감고 산채로 불태웠는데 쥐가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지르는 걸 들으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살려 줘! 아파, 뜨거워! 어머니!”
“어머니! 구해 주세요! 뜨거워, 제발 살려 주세요!”
화마에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치 내가 마리크 주교가 된 것 같았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희대의 둘도 없는 악역의 일상을 엿본 기분이었다는 말이다.
마리크 주교는 일가족을 태워 죽였다는데 어떻게 밥은 잘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나는 쥐의 본체가 악마라는 걸 알아도 처리하는 것도 양심 아프고 손이 벌벌 떨리면서 악몽까지 꾸는데.
이래서 광신도가 무섭다는 거다. 물론 ‘충격! 태양신 실존!’ 이런 캐치프레이즈가 붙은 세계라서 사이비는 아니지만….
“에반젤린, 너는 네 엄마를 죽이고 있는 거야! 난 아마란스라고! 어서 불을 꺼줘. 날 꺼내줘…. 아니야, 널 똑같이 태워 죽여주마. 널 밧줄에 묶고 산채로 불을 질러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기쁘게 감상할 거다! 네가 죽고 나면 분명 어머니도 다시 내게 돌아오시겠지.”
“바로 태우면 안 되겠구나.”
덜덜 떨고 있던 리코가 열심히 동조하며 쥐를 성수에 수장시켰다. 성수를 사는데 드는 비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다가 내 정신이 피폐해지고 말거다.
내 손으로 쥐를 죽이는 것도 심적 소모가 큰데 비명을 지르며 날 저주하면서 죽어가니 진짜 저주라도 걸릴 것 같아 오싹했다. 그래. 가성비를 따질 때가 아니다. 돈 주고 정신 건강을 산다고 생각하자.
호사퀸 공작이 괜히 수조에 쥐들을 넣어 놓은 게 아니었다. 영감탱이 취향이 고약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이미 다 겪어 봐서 그런 거였어. 그로테스크한 광경도 성수를 아끼려고 쥐들을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성수가 부족해지겠는데?’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천부적인 사냥꾼의 재능을 가진 푸딩이 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오는 바람에 수중에 가지고 있는 성수가 금세 동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온실에 있는 수조들을 정리할 때 물을 부어 버리지 말 걸 그랬다.
‘그때는 그게 성수인지 몰랐지.’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일찍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해 주지 않은 공작 탓이다.
“로한슨 영애님. 성수는 어떻게 할까요? 분명 대량으로 구하면 신전에 기록이 남고 이상하게 여길 텐데요….”
“저택에 있던 성수를 구해 준 사람이 누구지?”
“…가브리엘 경이요.”
“그럼 이번에도 가브리엘 경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생각해 보니 가브리엘도 너무했다. 공작한테 성수를 제공해 준 걸 보면 가브리엘도 사정을 진작 알았을 텐데 편지에도 일언반구 없었고. 물론 남의 집 사정에 굳이 가타부타 말 얹지 않는 게 진중한 가브리엘답긴 했다. 그래도 귀띔이라도 해 주지.
“편지를 보내야겠다.”
성수가 부족하면 쥐를 처리할 수도 없으니 가브리엘한테 성수를 공수해 줄 수 있겠냐고 도움을 요청했다.
대량의 성수를 구해다 주면 누가 봐도 호사퀸 공작가에 무슨 일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다른 우회책을 써야겠다.
마리크 주교의 눈을 피해서 대량의 성수를 반입하기 어려우니 명목상 다른 이유를 들먹였다. 전에 휘켈 자작이 기부로 착복했다는 데서 힌트를 얻었다. 호사퀸 공작이 빈민들에게 성수를 지원할 거라는 명분이다.
그러고 보니 공작이 아프다는 소문은 이런 안전장치 없이 성수를 구하다가 급속도로 퍼진 거 아닐까?
본론은 ‘성수 좀 왕창 보내 줘라.’ 이게 전부였다. 하지만 혹시 누가 몰래 뜯어 볼 수도 있으니까 말을 빙빙 돌려서 사족을 잔뜩 붙였다.
로한슨이나 호사퀸 공작가에서 보내면 검문에서 걸릴 게 뻔하니까 하는 수 없이 다른 이름을 썼다. 가브리엘이 이럴 때를 대비해서 편지할 일이 있으면 미샤의 이름으로 보내라고 언질 주었다. 수신인은 미샤의 동생인 미쉘이었다. 물론 명목상으로만 그렇지 실제로 받아 보는 건 가브리엘이다.
“알테미시아?”
리코는 내가 발신자와 수신인에 엉뚱한 이름을 쓰는 걸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잘못해서 호사퀸 공작가의 정보가 다른 사제들에게 넘어가면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잘 아는지 캐묻거나 트집은 잡지 않고 넘어갔다.
편지를 리코에게 맡기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푸딩, 고생했어. 가브리엘에게 답이 올 때까지 쉬도록 하자.”
푸딩은 성수가 올 때까지 잠시 휴식하자는 말에 눈에 띄게 기뻐했다. 내가 애를 너무 부려 먹었나?
푸딩은 오랜만에 사냥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놀아 달라 졸랐다. 나는 손으로 간지럼을 태우면서도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쥐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데….’
가브리엘이 성수를 보내 주면 쥐들은 여태껏 해 왔던 방식대로 처리하면 될 테지만, 문제는 쥐를 먹은 사람들이었다.
‘숙주가 누가 있을까?’
쥐를 집어 먹은 사람이 도대체 누구누구 있는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숙주인 게 확실한 니겔라를 예시로 들어 보자. 니겔라는 언제 이상 행동을 보였냐는 듯 아주 평범하게 굴었다. 마브카와 리코의 목격담이 아니었다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을 거다.
고로 니겔라처럼 쥐의 숙주가 된 다른 사람들도 대충 봐서는 티가 안 난다는 소리였다. 대체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리코랑 둘이 머리를 싸매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운다더니….
괜히 마리크 주교가 방화를 저질러서 일가족을 몰살시킨 게 아니었다. 그게 제일 편하고 확실한 방법이라서 채택한 거였나 보네. 나름대로 이 세상에서는 올바른 대처법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마리크 주교처럼 사람을 학살하는 취미는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악마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이거다 싶은 아이디어가 안 떠올랐다.
그러니 푸딩한테 푸념이나 하는 수밖에. 그래도 푸딩은 수인이니까 일반인보다 지식이 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푸딩, 좋은 방법 없을까?”
“악마를 잡을 방법이라면…. 생각나는 게 있어요.”
어느새 사람으로 돌아온 푸딩이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빛에 부서질 것 같은 금발이 천 자락 너머로 다리를 간질였다.
“성기사가 성수를 가져온다면 그걸 먹이시는 거예요.”
“저택의 모든 사람에게?”
“네.”
푸딩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성수는 태양신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는 모든 것을 정화해요.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다면 태양신의 힘을 가져다 쓰면 돼요.”
우리 애는 천재인가? 푸딩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푸딩이 말한 대로 저택의 모든 사람에게 성수를 먹이면 될 일이다.
멀쩡한 사람들은 성수를 마신다고 해서 해가 되지 않을 거다. 문제는 동충하초 매미 유충 상태인 사람들인데…. 악마랑 혼연일체가 됐다고 같이 녹아서 죽는 건 아니겠지? 불안하긴 했는데 그래도 저택을 통째로 불태우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애초에 그렇게 합체가 된 상태면 이미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테고.
그럼 이제 가브리엘이 부디 성수를 많이 가져와 주길 바라야지.
남은 비상금을 탈탈 털 때가 된 것 같다. 사람을 치료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니 정량으로 나온 한 병을 한 사람에게 전부 먹일 필요는 없어 다행이다. 그래도 생각만큼 성수의 양도 많이 안 들어갈 거다.
“에반젤린 님, 계속 쓰다듬어 주세요.”
곰곰이 생각에 잠겨서 손이 멈췄나 보다. 푸딩이 계속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재촉했다.
“네? 어서요.”
기특해서 평생 동안 어화둥둥 해 줄 수도 있겠다. 손을 다시 움직였다. 가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부들부들했다.
음…. 모질이 가늘면 탈모가 오기 쉽다는데 혹시 우리 애가…?
가브리엘한테 편지를 보내고 3일이 지났다. 아직 답장은 오지 않았고, 마리크 주교가 공작가로 쳐들어올 기미도 없었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마리크 주교가 호사퀸 공작가에 관심을 보인 이상, 때가 된다면 언제든지 공작을 이용하려고 들 테니까.
밖을 주시하면서도 나도 차츰 공작저의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이제 아마란스의 방도 꽤 익숙해졌고.
“로한슨 영애님, 저 리코입니다.”
“들어와.”
리코랑도 꽤 친해졌다.
날 전담으로 맡은 헤이즐이 따로 있긴 하지만 누가 숙주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밤낮으로 쥐를 잡아야 하는데 그게 악마라서 성수로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알리긴 뭐해서 헤이즐이 내 시중을 든 건 공작가에 온 첫날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리코가 나를 맡았다. 집사 일도 하고, 나랑 공작의 시중도 들고, 같이 쥐도 잡고 바쁘다 바빠.
리코가 방에 들어와서 고개를 숙이며 아침 인사를 했다.
“공작님께 영애님을 모시고 오라는 전갈을 받고 왔습니다.”
공작과 만나는 시간은 점심 식사 이후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을 확인해 보니 2시가 넘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늦은 감이 있네. 오래간만에 푹 잠들어 늦잠을 잤나 보다.
바로 준비하겠다고 말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옷 시중은 리코가 손을 거들어 줬다.
“오늘도 식사는 거르십니까?”
“응. 입맛이 없네.”
거짓말이다. 눈앞에 먹을 게 있으면 한입에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시장했다. 리코도 이제 내가 말하는 게 변명이라는 걸 잘 알 거다.
“…먹는 것을 저어하시니 이러다 쓰러지실까 염려됩니다.”
“쓰러지지 않을 테니 괜찮아.”
리코의 염려를 덜기 위해 한마디 얹었다. 푸딩이 배달의 고양이로 활동하며 로한슨 저택에서 식사 거리를 옮겨다 주니 절대 쓰러지진 않을 거다. 리코는 내가 따로 음식을 공수해 온다는 사실을 몰랐고, 매번 식사를 거부하기만 하니 걱정되긴 하겠지. 하지만 쥐가 가득한 부엌에서 조리되는 요리는 먹기 싫은걸!
“영애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리코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내 주장을 굽히지는 못하고 수긍했다.
“하오나, 영애님. 보통 사람들은 식사를 매일 끼니마다 챙겨 먹는다는 사실을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다른 자들이 날 기이하게 볼 거란 말이구나.”
갑자기 리코가 왜 식사 이야기를 물고 늘어지나 했더니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내가 유난히 깔끔한 체한다고 뭐라 뒷담이라도 했나 보다. 다들 쥐가 범람하는 걸 걱정하면서도 나처럼 깔끔한 체하면서 금식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완전 결벽증처럼 보이겠네. 성수가 통하지 않으니까 조심하는 것뿐이거든요. 이걸 밝힐 수도 없고.
“내가 그들의 시선을 하나하나 세심히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로한슨 영애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리코는 친해지면 상대방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전적으로 맞장구쳐 주는 편인가 보다. 역시 마브카를 구해 주길 잘했어. 아, 그러고 보니 마브카는 좀 괜찮나?
“마브카는 어때? ‘쥐’들이 접근하지는 않고?”
“네. 영애님의 고양이 덕분에요.”
지금은 성수가 부족해서 푸딩이 사냥을 줄인지라, 남은 시간에는 마브카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푸딩이 자기 역할을 잘해 주고 있나 보다.
드레스를 입고 나서 리코가 이끄는 대로 화장대에 앉았다. 리코가 자고 일어나서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빗겨 내려 갔다. 손길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빗질이 갑자기 멈췄다.
거울을 통해 보니 리코가 사색에 잠겨 있었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리코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궁금한 것이 생겨서요.”
“어떤 것인지 말해 줄래?”
내 권유에 리코가 망설였다.
“영애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실 문제는 아닙니다.”
“그건 내가 판단할게.”
“…….”
“리코.”
단호하게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리코가 꼬리를 말았다. 사실 이렇게 부끄러워할 정도면 예상외로 큰일이 아닌 경우가 많다. 진짜 고민은 더 진득하게 혼자서만 고민하고 있었겠지.
리코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쥐들이 왜 마브카를 노렸던 건지 궁금해서 말이에요.”
“마브카를?”
…그러게? 그건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네.
예상외의 물음이었다. 그러나 한번 고민해 볼 만했다.
리코의 말대로 여태껏 많은 쥐를 잡아서 처리해 봤지만, 그것들이 찾는 사람은 기껏해야 소환자인 아게라뿐이었다. 쥐들은 무슨 이유인지 아게라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마브카를 향해 엄청난 집착을 보였단 말이지.
“제 딸이긴 하지만…, 마브카는 고작 여섯 살이지 않나요? 마브카에게 딱히 집착할 이유도 없을 텐데….”
그 말을 끝으로 리코가 말을 삼켰다. 내가 캐물은 것뿐이고, 리코 역시 딱히 정답을 얻기 위해 꺼낸 말은 아닌지 우리 사이에 대화가 더 이어지지는 않았다.
리코가 머리 손질을 해 주는 내내 마브카에 대한 정보를 되새겨 봤다. 마브카가 남들과 다른 거…. 남들보다 특별한 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브카는 별다를 거 없는 천진한 어린아이였다.
기껏 해 봐야 저택에서 드문 어린아이라는 것과 리코의 딸이라는 걸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쥐’가 굳이 마브카를 찾아다녔던 점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이지.
“로한슨 영애님, 손질이 끝났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리코의 말에 상념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 더 ‘쥐’에 대해 알아낸 후라면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만 가자. 조부님을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공작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하루 정도 안 가도 신경도 안 쓸걸.
리코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해 리코가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공작님, 리코입니다. 로한슨 영애를 모셔 왔습니다.”
“들어오도록.”
공작은 오늘도 서류 처리에 전념 중이었다. 일국의 공작 정도 되니까 잠시의 쉴 틈도 없이 무척 바쁜가 보다. 로한슨 백작도 맨날 서류 작업 하느라 날 제대로 만나 주지도 않았지.
서류 처리할 시간에 집안일이나 좀 신경 쓰지는. 불만을 곱씹었다가 관대한 내가 너그럽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좋은 오후예요.”
공작이 앉으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파에 착석했다.
공작저에 머무르면서 파악한 결과, 호사퀸 공작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 허락을 받으려는 수동적인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리코도 자기 선에서 허락되는 일들은 자율적으로 처리하는 편이었다. 그 점은 나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다소 건방진 구석이 있어도 의외로 나무라지 않았다.
‘조금 유해졌나?’
처음 봤을 때 성질 좀 긁었다고 와인 잔을 던졌던 게 거짓말 같았다. 하긴, 내가 신세에 없는 엑소시스트 역할까지 하면서 저택 방역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대가가 없으면 섭섭하지.
“오늘은 물어볼 것이 없더냐? 그럼 괜히 내 시간을 뺏지 말고 나가지 그래.”
공작이 비아냥거렸다. 유해지긴 무슨, 내 착각이었네.
묻고 싶은 말이야 많지. 지금 물어볼 타이밍이 아닐 뿐이다. 공작이 자기 속내를 터놓고 나서야 물어볼 수 있는 것들이 가득했다.
그동안 난 공작에게 아마란스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다. 아마란스를 언급하면 질색해 대며 노기를 띠니 쉽게 주제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겨우 얻어 낸 담소 시간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공작가에서 ‘쥐’를 몰아낼 수 있는지 하는 건설적인 이야기나 나눴다.
전에 니겔라가 쥐를 잡아먹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공작 표정은 진짜 웃겼는데. 다시 생각해도 우습네.
“제가 묻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요. 조부님을 괜스레 심려케 할까 말을 고르고 있었을 뿐이에요.”
기름칠한 대답에 공작이 콧방귀를 꼈다.
곰곰이 질문거리를 생각하다가 조금 무리를 해 보기로 했다. 공작이 이런 미적지근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죽도 밥도 안된다. 지금은 마리크 주교가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언제 마수를 펼칠지 몰랐다.
“마리크 주교는 언제 자신이 쥐고 있는 약점을 흔들려고 할까요?”
“무슨 소리냐?”
“언제 호사퀸 공작가를 단죄하겠다 들지 짐작이 가시나요?”
“네 입으로 그것을 막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이제 와서 못하겠다 포기하려는 모양이지?”
“진전이 없다면 그러겠지요. 여긴 저의 집이 아니니 버리고 로한슨 저택으로 돌아가면 그만인걸요.”
공작은 내가 괜한 협작질을 한다 생각했는지 관심도 주지 않았다. 조금 세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마리크 주교는 아게라 님을 이단이라 공표할 거에요. 정화한다며 아게라 님과 함께 공작가를 통째로 몰살시키고 불살라 죽이겠지요. 어머니의 이름인 ‘아마란스’는 앞으로 아게라 님이 소환한 악마의 것으로 남겠네요.”
과장이 아니라 이대로 쥐를 박멸하지 못하고 마리크 주교가 한발 빠르게 쳐들어온다면 저렇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이에요. 적어도 누명은 아니잖아요?”
사각사각. 종이 위를 유려하게 헤엄치던 펜이 뚝 하고 멈췄다.
“조부님께서는 왜 아게라 님이 주술에 손을 댔다고 생각하시나요?”
공작의 집무실에 들락거린 이래, 처음으로 공작이 날 인상 쓰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왜 그런 아게라 님을 계속 곁에 두시나요?”
참 신기한 게 나는 가족 취급도 안 하고, 아마란스는 혼외자를 낳았다는 이유로 절연했으면서 아내는 치매에 걸리고 광증에 시달리며 주술을 부려 공작가를 위험에 빠트리게 되었어도 절대 놓지 않는다는 거다.
“어머니는 버리셨으면서.”
눈빛에 날이 존재했다면 나는 방금 목이 떨어졌을 거다. 예전 같았다면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다트처럼 던졌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못 할 거다. 공작은 내가 필요하니까.
“사갈 같은 것…!”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혀를 잘라 버리고 싶다는 것처럼 소리쳤다. 여태 쌓은 호감도 다 깎였겠네. 가족 후회 물의 꿈이 이렇게 멀어지는구나….
“아게라가 주술에 손을 댄 것은 너 때문이다! 내가 아마란스를 내친 것도, 다…!”
“다?”
공작이 내게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다 호흡이 가빠졌는지 숨을 들이켰다. 밖에서 경호하던 기사들이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공작 전하? 무슨 일이 있습니까? 들어갈까요?”
“시끄럽다! 별일 아니니 썩 꺼지거라!”
큰소리를 쳐서 바깥을 조용히 만든 공작은 심호흡하며 다시 주저앉았다. 그 짧은 사이에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공작은 주름진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이미 말라 버렸으나 분명 울고 있는 것이다.
“그래. 너 때문이다….”
후회가 득한 어조였다. 발음이 뭉개져 ‘너’라는 말이 꼭 ‘나’처럼 들렸다. 공작은 분명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눈앞에서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보며 할 말은 아니었지만, 쾌재를 부르고 싶었다. 그동안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웠던 공작이 껍질을 한 겹 벗기고 속내를 드러내는 중이지 않는가. 남한테 날을 세우는 건 공작의 방어 기제였다.
“조부님 때문이 아닌가요?”
“더는 입을 자유분방하게 눌린다면 방자한 혀를 도려낼 것이다.”
“어머니는 제가 아니라 조부님을 원망하셨어요. 결벽적으로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어 내고 버린 것이 누군가요? 아게라 님이 이토록 어머니를 그리게 한 것은요?”
세뇌하듯이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방에 목소리가 울려서 그런지 꼭 내 목소리가 두 갈래로 나뉘어서 들리는 것 같았다.
“누구 때문인가요?”
“나다…. 나로구나….”
마침내 공작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죄책감을 인정했다.
“네가 빌미를 주었을 뿐, 상황을 몰아간 것은 내가 맞다. 나는 죄인이야….”
내 생각도 그렇다. 공작이 절연을 선언하지만 않았어도, 아게라가 딸이 보고 싶다면서 인체 연성을 했을 리가 없잖아.
이 기회를 틈타 공작의 말랑해진 머리를 조금 주무르려 했는데 바깥에서 방해가 또 들어왔다. 이번에는 기사가 아니라 리코였다.
“공작님, 손님이 오셨는데 응접실로 안내할까요?”
“…그러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멀어지는 굽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누가 왔대?
달갑지 않은 손님의 정체를 헤아리는데 공작이 내게 명령을 내렸다.
“에반젤린 로한슨, 네가 가서 손님을 맞이하거라.”
내가? 난 공작가 사람도 아닌데?
“제겐 손님을 응대할 자격이 없는걸요.”
“아니다. 넌 객이 아니니 자격이 있지.”
뭐?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건가? 객이 아닌 데다가 손님을 맞는 위치면 날 손녀라고 인정하겠다는 거랑 마찬가지 아니야.
“응접실로 안내해 주어라.”
공작은 하인 하나를 불러 안내를 일렀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날 적대하거나 한편을 먹거나 뭘 하든 포지션을 제대로 하라고 있는 힘껏 공작을 긁어 댔다.
그렇다고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곧바로 태도를 바꿀 줄은 몰랐다. 공작은 까탈스럽고 고집스러운 성격이니 죽기 전에야 날 인정하거나, 츤데레처럼 굴 줄 알았지.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길래 날 인정했는지 모르겠네.
“안내하겠습니다, 영애님.”
하인의 뒤를 따르면서도 이해가 안 가서 속으로 계속 물음표만 띄웠다.
혹시 이번에 오는 손님이 위험한 사람이라서 날 칼받이로 내세운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