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22)
칸나는 치트 키인가?
역시 소설 속 여주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칸나가 내 전속 하녀로 공작가에 신세를 지게 된 지 사흘이 지났다. 그 짧은 사흘 동안 공작가 사람들은 칸나한테 함락당하고 말았다. 칸나가 태양을 가리켜 달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을 지경이었다. 혹시 나 빼고 다들 시간과 공간의 방에 갇혀 있다 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친해져 있는데 완전 비상식적인 속도였다.
전에도 생각했던 건데 역시 칸나는 악녀인 날 제치고 호사퀸 공작가의 양녀가 될 운명이었던 거 아닐까? 내 추론이 틀리지 않았던 거지. 소설 속 인물이라면 누구나 칸나를 호감 넘치게 보게 만드는 특별한 유전자가 흐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공작가 사람들이 날 보는 시선도 완전히 변했다. 이전에는 날 공작의 유산을 뺏으러 온 약탈자 내지는 소문처럼 악독한 악녀 정도로만 생각하더니 이젠 친절하고 상냥한 칸나의 아가씨라고 생각하더라. 칸나의 부속품이 되어버렸지만, 평판은 오히려 좋아졌다.
첫날 날 보고 겁먹었던 하인은 리코를 통해 오해해서 죄송하다면서 말을 전해 달라고까지 했단다. 대체 칸나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한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날 천사 같다며 칭송하는 말을 듣자 무섭기까지 했다. 이렇게 확 변할 수가… 있나?
“칸나, 대체 나에 대해 어떻게 말했길래 사람들 반응이 저래?”
“약간의 오해를 풀고, 그냥 아가씨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일들을 말했어요. 절 구원해 주시고 먹여 주시고 보살펴 주셨다고 말이에요.”
아하. 악독하게만 생각했던 사람이 뒤에서 선행을 베풀고 있었다는 걸 알았구나. 원래 사람이 그렇다. 착한 사람이 선행을 베풀다가 딱 한 번 죄를 저지르면 천하의 못된 놈, 저 사람 인성이 드러났다면서 욕을 해 대지.
반대로 아주 악독한 사람이 알고 보니 비가 오는 날에 고양이에게 우산을 씌워 줘 봐, 완전 뻑가는 거다. 이 원리랑 같은 경우인가 보다.
“제가 아가씨께 도움이 됐나요?”
“물론이지.”
“사람들이 아가씨의 찬란함을 알아줘서 정말 기뻐요! 처음에는 다들 눈깔은 제대로 달려 있는 건가 싶었어요.”
우리 애가 입이 좀 험해진 것 같은데, 말이 험한 젤리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젤리한테 손해 배상 청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걸 눈치 못 챈 칸나가 활짝 만개한 채로 두 손을 모았다. 꼭 날 향해 기도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모두가 아가씨의 진면목을 깨닫고, 아가씨를 숭배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가씨는 이 세상의 지표이시니 망설이지 않고 아가씨만을 따라야 하는걸요.”
…혹시 우리 애가 사이비로 전직했나? 날 좋아하는 게 도를 넘은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우상숭배라고 봐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마리크 주교가 이단이라고 썰어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칸나가 어떻게 사람들을 구워삶았는지 알겠다. 그래, 사이비가 영업을 잘 뛰긴 하지.
내가 여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구나…. 그래도 여주가 날 썰어 버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칸나, 내가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헤나, 네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서 미안! 가브리엘도 비슷한 결로 미안!
작은 회개 타임을 가진 후 방을 나섰다. 공작이랑 잡담 나눌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공작도 칸나를 마음에 들어 할까 싶어서 공작과의 면담 시간에 칸나도 데려가기로 했다. 저번에 공작이랑 한바탕 말싸움을 한 이후로 공작은 무척이나 유해진 탓도 있었다.
“로한슨 놈의 저택에서 데리고 왔다는 네 하녀구나.”
“칸나라고 해요.”
칸나가 천진한 낯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 애는 내보내지 않는 거냐?”
남들이 알아선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할 때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는데 칸나한테는 나가라고 하지 않았다. 공작이 칸나를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신뢰하는 아이거든요.”
“네가?”
“가장 아끼고 있어요.”
대출혈 립서비스였다. 칸나가 기뻐서 죽으려 하는 게 보였다.
“네. 아가씨께서는 절 굉장히 아껴 주세요. 전 아가씨께 아주 특별한 존재거든요.”
칸나가 자부심에 가득 차 답했다.
물론 내 애정은 얄팍하고 처세술에 능해서 가브리엘 앞에선 가브리엘이 최고고, 푸딩 앞에선 푸딩이 제일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일하러 갔고, 푸딩은 마브카 돌보는 중이니까 지금 여기선 칸나가 최고지.
“에반젤린에 대해선 알고 있는 건가?”
공작이 떨떠름해하며 칸나에게 물었다. 내 소문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가씨께서 보여 주신 것이라면 전부 알아요.”
“…알면서도 곁에 있다니 참으로 신기하군.”
공작은 칸나를 굉장히 놀랍다는 듯 바라보며 감탄했다. 뭔가 칸나를 인정한다는 투였다. 역시 여주인공. 나는 공작의 인정을 받으려고 쥐 사체까지 정리했는데 그냥 말 몇 마디로 호의를 사 버리네.
공작은 칸나에게서 눈을 돌렸다. 집무실에서 나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걸 허락해 준다는 암묵적인 표현이었다.
좋아, 칸나도 소개했고.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하지? 슬슬 아마란스에 대해서 직접 캐 볼 때인가? 아게라가 주술진을 사용한 걸 보면 분명 아마란스 일기에 끼워져 있던 주술진도 출처가 이곳일 거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으니 공작이 서류를 첨삭하면서 나는 펜 소리만 방을 채웠다. 그러다 페이지가 넘어가고, 공작이 먼저 서두를 꺼냈다.
“그래. 성수를 나눠 준다지?”
공작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오늘 말하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리코한테 말한 적 있으니 그쪽으로 들은 것 같았다. 리코! 내 편이 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첩자 노릇을 하고 있던 거였어? 물론 난 어른스러우니까 네 편 내 편 따지지 않고 너그럽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네. 성수를 마시게 하면 쥐를 먹은 사람들을 구분해 낼 수 있으니까요.”
개쩌는 아이디어지?
푸딩이 일러준 방법이었다. 우리 애가 이렇게 똑똑하다니까. 완전 영재 아니야?
성수를 쓴다면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해도 가지 않을 테니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마시면 100% 확률로 식별과 함께 처리 가능. 혹시 들킬까 봐 성수 마시는 걸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오면 숙주일 확률이 높기도 하고.
“그리 확신하는 걸 보니 이미 시험해 본 모양이구나.”
공작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자기 허락 없이 저택 사람한테 미리 시험해 봐서 그러나? 하지만 상대는 숙주가 확실한 니겔라였다고!
“니겔라를 사용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리코에게 들으시면 되겠네요.”
헛! 나도 모르게 빈정대 버렸다. 리코가 공작한테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하는 게 배신감이 느껴져서 그만….
성수를 마시게 한다는 발상이 떠오르자마자 리코를 통해 니겔라를 데려왔다. 여러 방법을 시험을 해 봤는데 피부에 뿌리는 게 아니라 먹여야지만 효과가 있더라고 전해 들었다.
물론 내가 직접 확인한 건 아니었다. 나도 직접 참여해 돕고 싶었는데 칸나가 무슨 돌발 현상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어떻게 날 동석시키겠냐고 과보호를 해서 얌전히 있었다.
성수 근처로도 가지 말라면서 얼마나 주의하라고 경고하던지. 아니, 내가 성수에 닿으면 녹기라도 해? 칸나는 날 솜사탕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미 쥐들 사체를 정리하면서 성수에 스무 번도 넘게 닿았다.
하지만 늘 상냥했던 칸나가 싸늘하게 정색하면서 부탁하는 통에 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말았다. 원래 착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서운 법이었다.
내가 빠지는 대신 리코가 칸나를 도와서 보조하기로 했다.
“효과를 증명했으니 이해해 주시겠죠.”
난 못 봤어도 리코가 봤으니 공작한테 설명해 주겠지. 아니면 이미 들었을 수도 있겠네.
“…다음부턴 절대 내게 허락받기 전에 식솔들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넘어가는 건 니겔라 하나뿐이야.”
네이, 네이. 절연한 손녀보다 하녀가 더 중요하다 이거지. 말끝을 잔뜩 늘리며 비아냥댈 것 같아서 그냥 웃는 거로 답을 대신했다. 공작은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안 통할 걸 알았는지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게 엄청나게 유해진 게 맞았다. 드디어 가족 후회물이 성큼 다가왔다.
대충 니겔라의 건은 넘어간 듯했다. 더 할 말이 있나 싶었는데, 공작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굉장히 긴장되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 성수 말이다…. 아게라에게도 먹일 셈이냐?”
갑자기 성수 이야기를 꺼낸 건 아게라의 얘기를 하려는 빌드업이었다는 듯 무척 진지했다.
“아게라 님이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리코한테 들었던 이야기를 조합해 보면 ‘쥐’가 표방하는 건 어디까지나 아마란스였다. 애초에 걔는 아게라의 딸의 자리를 채우려고 만들어진 거란 말이지. 그럼 아게라가 필요하니까, 아게라를 감염시키진 않았을 거다. 저택에서 가장 성수를 마실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아게라였다. 반대로 말하면 제일 위험한 건 바로 나고.
“아게라 님은 드실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대답해 주니 공작이 눈에 띄게 크게 안도했다. 공작이 내 앞에서 이렇게 누그러진 건 또 처음 보네.
근데 왜 굳이 걱정한 거지?
“아게라 님이 성수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너도 알다시피 아게라에게 망령이 씌지 않았느냐?”
공작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탄하듯 이야기했다. 말하면서도 자신의 아내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투였다. 아게라를 위해서 쥐를 잡으며 신전에 대립하고, 그토록 싫어하던 나를 데려와서 말 상대를 시킬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면서 그게 부끄럽다고? 더럽고 치사한 영감탱이.
저러니까 딸인 아마란스도 냅다 버리고 절연했지.
당장 저 썩어 빠진 생각을 고쳐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조부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아게라 님은 성수를 마셔도 아무런 이상이 없을 거예요.”
“헛소리다. 아게라는 망령이 씐 데다가 주술까지 부렸지. 태양신의 분노를 샀음이 당연해.”
약간 열이 받았다. 이건 절대 절대 아게라한테 정이 들어서 화가 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해 봐. 아게라는 치매를 앓는 와중에도 딱 두 사람 정확히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아마란스랑 공작이다. 아게라가 기억하는 시간은 몇십 년 전인데도, 기억보다 훨씬 늙어 알아보지 못할 법한데 공작을 알아본단 말이야.
근데 정작 공작은 저러고 있으니 화가 안 나고 배겨?
“공작 전하.”
거리감 있는 호칭으로 공작을 불렀다. 공작의 신경을 긁어 댈 겸 매번 굳이 조부님이라고 부른 탓에 입 밖으로 꺼내니 약간 낯선 감이 있었다.
“공작 전하께서는 무엇을 아시나요? 아무것도 알지 못해 아게라 님이 소환해 낸 그것을 갈라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드셨으면서. 주술에 대해 저보다 잘 안다고 자신하실 수 있나요?”
공작저를 방문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사태를 진정시키기 시작한 내 앞에서 으스댄다는 건 번데기에 주름잡는 꼴이지. 공작도 잘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아게라 님은 망령이 들지 않으셨어요. 그저… 아프신 것뿐이에요.”
“성수로 치료되지 않는 병이다.”
“세상에는 그런 병도 존재해요.”
진짜 더럽고 치사한 세상. 성수가 안 통한다고 저주받았다느니, 망령이 들었다느니…. 안 그래도 아파서 서러운데 사람을 아주 죄인으로 몰고 갔다. 하필 내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많아서 더욱 씁쓸해졌다. 당장 라이더만 생각해도 그랬다.
그 어린애가 저주를 받을 일이 뭐가 있다고 저주받았다느니 하면서 욕을 해대는지 모르겠다. 라이더가 죽고, 멜렉이 빙의해서 멀쩡히 움직이니까 저주받았다는 말이 싹 사라진 걸 보면 참 우습기만 했다. 그 몸에 들어가 있는 건 멜렉이니까 오히려 지금이 망령이 든 상태인데도 말이다.
“주술을 사용했다고 악마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성수를 마셔도 죽지 않죠.”
실제로 주술을 사용해서 아자젤의 몸에 예레미아의 영혼을 심어 둔 전적이 있는 나도 성수 마셨다고 죽지는 않았다. 아자젤이 휘두른 칼에 맞았던 상처를 치료한다고 헤나가 내 손에 성수를 들이부었지만, 효과가 없을지언정 죽지는 않았단 말이다. 성수가 통하지 않는 건 원래 에반젤린이 원래 그런 체질이었던 거지 저주 받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공작은 내 말을 부정했다.
“…내가 아는 상식과 다르다.”
그야 당연하지. 신전에서 블러핑한 거니까. 신전 측에서 자기들 권위 살린다고 거짓말한 게 분명하다. 마리크 주교가 빌런인데 신전이 깨끗할 리가 있나. 그리고 대체로 창작물 속 종교는 다 나쁜 놈들이다.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공작 전하의 상식은 얄팍하다고.”
“…그럼. 네 말대로 아게라는 신께 버려진 것도 아니고 망령이 들린 것도 아니라고…?”
“네. 맞아요.”
“웃기는 소리!”
공작이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책상을 엎었다. 처음에 나한테 와인 잔 던지던 성질 어디 안 가지. 그래, 이제야 좀 공작다웠다. 갑자기 손녀 취급해 주길래 딴사람인 줄 알았잖아. 그동안 많이 봐줬다 싶었다.
칸나가 다급하게 내 앞을 막아서며 날 보호했다.
종이가 마구 날리며 바닥에 흐트러졌다. 잉크병까지 함께 날아가 공작에게 먹물 같은 잉크가 튀었다. 잉크병은 바닥에 나뒹굴며 종이 위로 검은 궤적을 그리다 내 발밑까지 굴러왔다.
공작은 당장 내 멱살이라도 쥐어 잡을 기세였다. 칸나를 툭툭 치곤 옆으로 나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칸나가 미적거리길래 이번엔 육성으로 말했다.
“비켜, 칸나.”
“하지만 아가씨….”
“괜찮으니 어서.”
칸나에게 명령조로 말하기 싫었지만 칸나가 날 보호하다가 공작한테 다칠까 걱정돼서 어쩔 수 없었다. 칸나는 떨면서도 내 명을 거역하진 못하겠는지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공작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멱살잡이를 할 기세였는데 참고 있나 보다. 확실히 전에 한바탕한 후에 나한테 조금 누그러진 게 맞았다. 대신 내가 공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공작의 손을 꾹 잡았다. 공작이 또 뭘 던질까 봐 미리 막는 거다. 공작이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난 힘이 꽤 센 편이었고, 그동안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위력은 성인 남성을 웃도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악녀 버프인지 뭔지. 역시나. 공작은 내게 손이 잡혀 옴짝달싹 못 했다.
“왜 화가 나셨어요? 제가 진실을 이야기해서? 또 제 혀를 도려내겠다 하실 건가요?”
“닥치거라! 내가 그 말을 못 지킬 것 같더냐? 이번에야말로 다시는 그런 소리를 못 하게 혀를 잘라 주마!”
솔직히 공작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도 모르겠다. 전에 자기 잘못인 걸 다 인정한 거 아니었어? 아게라를 탓하기보다는 자기를 탓하는 게 맞잖아. 전에 ‘나는 죄인이다.’ 뭐 이런 식으로 지껄였으면서.
“알고 계시잖아요. 공작 전하는 그냥 제게 화풀이하시는 것뿐이에요.”
“시끄럽다!”
백날 입으로 시끄럽다고 소리쳐봐라, 내가 그만두나. 공작의 두 손은 나한테 붙들려 있어서 내 입을 막을 수단도 없었다.
“공작 전하는 아게라 님을 사랑하시잖아요.”
“…….”
아, 이건 굳이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는 게 또 신기했다. 그래도 아게라를 사랑하는 건 진짜다 그거지. 이 무슨 망그러진 로맨티시스트냐.
“사랑하신다면 믿으세요. 아게라 님은 괜찮으세요. 조금 아프신 것뿐이고, 성수로 치료할 수 없는 건 아게라 님이 저주받았기 때문은 아니에요.”
“…….”
“어머니를 걸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습관적으로 엄마를 걸어 버렸다. 이건 다 툭하면 ‘엄마 걸고?’를 묻는 못된 것들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란스를 거론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공작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이제 내 목을 조이려 들것 같진 않아서 손을 놓아줬다. 예상대로 공작은 내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말을 외면하듯이 회피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공작은 종아리에 소파가 닿자마자 그대로 허물어져 소파 위에 쓰러졌다. 엎어진 탁자, 흩어진 서류 더미와 난장판이 된 집무실의 풍경, 눈물 없이 우는 노인. 하나같이 완전 엉망이었다.
공작이 침묵하자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조금 차분해졌다. 뒤늦게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공작 전하! 안에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번에는 공작의 꺼지라는 답이 없어서인지 밖에서 문을 열려고 하며 문고리가 돌아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문은 열리지 않았다.
칸나가 기세등등해져서 날 보며 문 잠그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쩜 좋아, 센스도 넘쳐 우리 칸나. 이어서 칸나가 문에 대고 꺼지라고 소리쳤다. 역시, 젤리랑 칸나는 떼어 놓는 게 좋겠다. 천사 같은 우리 애가 말이 너무 험해졌어.
이제 좀 대화할 수 있을 만한 분위기가 잡힌 것 같아 공작의 건너편에 착석했다.
저번에는 방해가 들어와서 아쉽게 마무리하지 못했는데, 지금이 기회였다. 공작의 머리를 마음껏 주무르며 가스라이팅을 펼칠 때였다.
아니, 사실 직시라고 말을 고치자. 지금부터 에반젤린의 상담 센터, 영업 시작합니다. 야매지만 뭐 어때.
“바깥은 신경 쓰지 마시고, 오로지 제게만 집중하세요.”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내게 주의를 돌렸다. 그 사이에 칸나가 무어라 말을 덧붙인 건지 밖에서 나는 소리도 죽은 듯이 멈췄다. 시계 초침 소리도 나지 않는 적막이 방안을 메웠다.
너무 조용해서 그런지 공작의 심장이 뛰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역시, 버린 딸의 이름값으로는 공작 전하의 신뢰를 얻기 부족한가요?”
그래서 일부러 공작의 심기를 거스르는 단어만 쏙쏙 골라서 긁어 댔다. 겨우 진정한 공작이 다시 열을 올릴법한 발언이었으나 진이 빠진 공작은 나를 노려봤을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날 보는 눈빛마저 평소보다 표독스럽지도 않고 독기가 빠져있었다.
“…아마란스의 이름값이 내게 그리 중요할 것 같으냐?”
공작은 진이 빠져 축 처진 채로 물었다.
나왔다. 팩폭 당하면 나타나는 네거티브 모드. 이거 참, 가스라이팅이 아주 잘 먹힐 것 같은 상태였다.
중요하고말고. 공작은 애써 합리화하고 있었지만, 사실 아마란스와 절연한 과거에 매여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공작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지나온 삶을 철저히 외면한 사람이었다. 그래놓고는 제일 나은 선택을 했다며 과거에 한치의 후회도 없다고 자신을 속이고 있다.
그러니 공작을 공략하는 데는 속내를 끄집어내 죄책감을 되새겨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난 아마란스를 똑 닮은 손녀니까 효과가 더욱 좋았다. 이른바 살아 있는 트라우마였다.
“적어도 제게는요.”
공작은 내 얼굴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나지만, 마음으로 그리는 것은 아마란스일 것이다.
한참 나를 바라보던 공작이 눈을 감았다. 공작의 집게손가락이 까딱이며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과거를 그리는 것일까? 아마도 두 사람이 가장 마지막으로 본, 아마란스와 절연하던 날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믿어보마.”
공작이 조용히 눈을 뜨며 나를 응시했다.
“무엇보다 네가 나보다 주술에 관하여 잘 알 테지.”
역시 회피와 변명의 달인다웠다. 이렇게 끝까지 변명을 내세우네. 솔직히 아마란스한테 미안해한다고 드러내도 좋을 텐데.
“믿어 주셔서 기뻐요. 조부님께서는 아게라님이 혹여 성수로 해를 입을까 걱정하신 거지요?”
“그래. 아게라가 삿된 존재가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신전에게 들키지 않으려 입막음에 힘을 쓰고 있었다.”
앞으로도 힘은 계속 써 주십시오. 마리크 주교한테 걸리면 공작저까지 통째로 화로구이 될걸.
네거티브 모드의 공작은 굉장히 수용적이었다. 사실 화내느라 진이 쏙 빠진 건데 누가 보면 최면이라도 걸어 놓은 줄 알겠네. 이때 내가 손녀로 인정해 달라고 하면 흔쾌히 해 줄 정도다. 아닌가? 다혈질이니만큼 다시 정신 차리고 불같이 화를 내려나…. 궁금하지만 묻지는 말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성수가 아게라 님을 해하지 않을 테니까.”
“…….”
답이 없는 게 차마 아게라한테 성수를 먹이려 들지는 못하겠나 보다. 하여간에…. 내가 아마란스를 들먹이면서까지 호언장담했는데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하겠나 보다.
“왜 그렇게 인정하기 싫어하시는 건가요?”
내 물음에 공작은 독주를 마시듯이 침을 삼켰다. 입안에 가시가 돋쳤는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답을 내뱉었다.
“…내가 아마란스를 그렇게 버렸기 때문이다.”
잔뜩 무장한 가시를 깎아내고 드러난 것은 곧 부서질 것 같은 내면이다.
“아마란스가 주술을 부렸단 이유로 내쫓았지. 그 아이가 죄인이었으니 그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어. 그런데 만약 아게라가 죄인이 아니라면, 그 아이 역시 죄인이 아니게 되지 않느냐?”
뭐? 그런 이유였어? 내 엄마가, 아니 아마란스가 사생아인 날 낳아서 절연한 게 아니라?
“저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기도 하지.”
뭐야 둘 다 중첩됐네. 여하튼 내 존재에 더해서 아마란스도 주술을 사용해 공작이 절연을 선언했나 보다. 이제야 슬슬 내막이 밝혀지나 보다.
주술을 사용했다기에 놀랐는데, 생각해 보니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란스 일기장에서 주술진을 발견했을 때부터 뭔가 찝찝하긴 했다. 그냥 가지고만 있었을 리 없잖아. 아마란스는 주술진을 사용했고, 그래서 공작은 아마란스와 절연한 것이다.
“그럼 조부님께서는 죄 없는 어머니를 버린 매몰찬 아버지가 될까 봐, 아게라 님까지 한데 묶어 이단으로 몰고 가신 거군요.”
왜 그렇게 아게라가 저주받은 거 바르다고 우겨대나 했더니 다 자기 양심 때문이었다.
“…….”
저 할 말 없을 때 침묵으로 회피하는 버릇도 이번 기회에 확 고쳐 주고 싶다.
“조부님께서는 이미 죄인이시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죄 하나 더 얹는다고 별다를 게 있나요.”
그리고 확인 사살로 회심의 말을 덧붙였다.
“이미 어머니는 조부님을 미워하시는걸요.”
이럴 때는 잘못한 거 없다면서 포용해 주는 게 가족 후회물의 정석 아니냐고? 나도 머리로는 그게 정통적인 후회물 루트라는 걸 인지하고 있기는 한데 괘씸해서 옹호해 주기 싫었다.
이성을 벗어난 본능적인 분노가 차올랐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공작이 하는 짓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작이 자기 위안을 위해 아마란스를 내친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하긴, 바로 앞에 아마란스 이야기를 할 때도 자기한테 아마란스가 가치 있어 보이냐고 묻는 것도 사실 꼴 보기 싫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게라만 중요하고 아마란스는 한 치의 고려도 안 해 주는 걸 보니 갑자기 왜 이렇게 분노가 끓어오르는지 모르겠다. 그냥 어머니를 버린 걸 사과하면 안 되는 거야?
내 분노를 느꼈는지 공작이 악몽에 시달리듯 끙끙 앓았다.
“…나는 미움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했으면서, 사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건 공작이 회피형 인간이라서 그렇다. 집 안에 악마가 돌아다니는데 다 뒤로하고 서류 처리에만 매달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마음 같아서는 공작한테 아마란스를 버린 죄를 묻고 싶었으나 혀를 씹으며 참아냈다. 로한슨 백작이 날 저버린 가운데, 공작의 호의가 없으면 나한테 믿을 구석이라곤 가브리엘 하나만 남게 되는 거니까.
휴…. 진정하고 나니까 조금 전까지 내가 왜 공작한테 불같이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내가 유교 DNA가 깊이 새겨져 있었나 보다. 에반젤린 몸을 쓰고 있으니 습관처럼 반응한 걸지도 모르지. 만약 그랬다면 에반젤린은 엄마를 많이 사랑했나 보다.
나는 공작의 덜덜 떠는 손을 맞잡았다. 공작은 반사적으로 내 손을 내치려고 했으나 힘이 빠졌는지 날 뿌리치지 못하고 그냥 잡혀있었다. 이번 건 공작의 손버릇을 막으려 든 게 아니었다. 그냥 연출이다.
“괜찮아요.”
내가 새롭게 써나갈 후회물을 위한 연출.
공작이 홀린 듯이 나를 바라봤다.
“어머니는 공작 전하를 미워하겠지만 전 아니에요. 제가 미워하지 않을게요. 저는 용서할게요.”
공작이 내심 듣고 싶었을 이야기를 아마란스와 똑 닮은 내가 속삭여 줬다. 물론 진짜 에반젤린이었다면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난 다른 사람이니까.
아까 불쑥 치솟았던 분노가 아직 잔여물처럼 남아 있긴 하지만, 내가 역할극에 너무 몰입했었기 때문일 거라고 애써 치워 냈다. 내가 겪은 거야 와인 잔에 맞을 뻔한 것뿐인데, 그것도 가브리엘이 구해 줬잖아.
“정말이냐…?”
공작의 목소리에 떨렸다. 낚싯줄이 팽팽해졌다.
“네. 정말이에요.”
최대한 초상화 속 아마란스와 비슷한 웃음을 그려냈다. 창고 방에서 무수히 그려졌던 아마란스의 초상화 속 얼굴이다.
“공작 전하는 제 ‘할아버지’시잖아요?”
“그랬지….”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그렇게 날 받아들였다.
가족 후회물? 로판 애독자한테 그딴 건 누워서 떡 먹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