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30)
헤나에게 급보를 전달받은 사라카는 급한 대로 무제타와 기사들을 이끌고 곧장 로한슨 저택으로 출발하였다.
“서두르세요.”
“예, 마리크 주교님.”
사라카는 마부를 재촉했다.
헤나가 보낸 것은 오늘 밤에 에반젤린을 이용해 로한슨 저택에 불을 지를 테니 그 죄목으로 그녀를 잡아 달라는 편지였다. 저택과 식솔들을 몽땅 태워 정화하는 작업을 누구에게서 기인하였는지는 아주 뻔했다. 사라카의 학살을 참고한 것이었다.
“성급하기는.”
한창 마리크 주교와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방해를 받은 탓에 사라카의 기분은 무척 저조하였다. 하여 사라카는 헤나의 경솔함을 질책했다.
사라카는 방화를 저지르라 부탁하지 않았다. 굳이 불을 지르지 않아도 에반젤린을 몰아갈 죄목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헤나가 이리 급하게 나온 것은 칸나라고 하는 동생 때문일 것이다.
사라카는 에반젤린의 정보를 얻기 위하여 측근인 헤나를 회유하여 밀정처럼 심어놓았다. 그 덕분에 아자젤의 행방이나 에반젤린의 필체 등 꽤나 이득이 되는 정보를 여럿 얻었으나 사라카가 가장 많이 전해 들은 것은 칸나에 관한 이야기였다.
에반젤린 로한슨이 총애하는 하녀인 칸나. 그 아이는 헤나의 역린이었다.
얼마 전 헤나와 크게 싸운 후 칸나가 저택을 나갔다고 들었다. 광적으로 집착하던 동생이 자리를 비우자 헤나의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그 탓인지 어서 동생을 되찾고 싶다고 조급하게 굴더니 결국 사라카가 지시하지 않은 방화를 제멋대로 벌인 듯했다.
아니면 헤나에게 먹이던 약의 부작용일 수도 있다. 헤나는 사라카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쯤은 망가진 상태였다. 사라카는 헤나를 더욱 부추겼다. 아자젤이 있었다면 꿰어내 조종하는 것이 더 수월했을 텐데 곁에 없어 하는 수 없이 다른 도구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약효는 무척이나 잘 들었다. 성수도 함께 챙겨 주었으니 중독 증세도 없었다. 헤나는 환각과 광증으로 에반젤린 로한슨처럼 제 동생의 껍질을 괴물이 뒤집어썼다고 맹신하게 되었다. 에반젤린 로한슨이 장례식에서 되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사라카도 전해 들은 적 있는 말이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헤나를 세뇌할 수 있었다.
물론 사라카에겐 에반젤린이 악마인가 아닌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존재이건 사라카를 마리크 주교로서 완성해 줄 것이라는 사실만이 의미 있었다. 에반젤린은 가장 악독하고 흉악한 존재가 되어 숙청당해야 했다. 그래야 마리크 주교의 위업이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주교님. 도착했습니다.”
사라카는 성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건….”
사라카가 도착하자마자 목격한 것은 거세게 타오르는 건물과 불길에서 겨우 빠져나와 헐떡이는 하인들이었다.
아직 불이 타오르는 저택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남아 있는데도 기사 중 그 누구도 불길을 진압할지 묻지 않았다. 대신 거세게 불길이 치솟는 저택의 주위를 포위하였다.
“뼈도 남지 않을 것 같네요.”
누군가 격정적인 어조로 눈앞의 장면을 서술하였다.
사라카는 성기사들의 뒤에 서서 지옥의 단면을 옮겨놓은 듯한 황홀한 장면을 감상했다. 악을 징벌하는 성화였다. 맨눈으로 보았다면 더욱 즐거웠을 텐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시야를 가리는 면사포가 무척이나 아쉬웠다.
헤나가 사라카의 지시 없이 멋대로 굴어댄 것은 무척이나 못마땅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이런 명화와도 같은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나쁘지는 않은 셈이다.
사라카가 방관하는 사이, 로한슨 저택의 사람들을 구해 내는 것은 흑발의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얼굴과 몸은 독을 뒤집어쓴 듯 피부가 녹아내려 붉은 속살이 드러났고, 불길 속을 몇 차례나 들락거린 탓에 옷은 타들어 가고 연기를 뒤집어써 거뭇거뭇한 꼴이 죽기 직전이었다.
그나마 멀쩡한 것이라고는 두 눈뿐이었다.
이질적인 금색의 눈이 이 상황을 즐겁게 구경하는 외부인을 알아보고 사납게 번뜩였다. 남자는 사라카의 시선에서 보호하듯 어린 것들을 제 뒤로 보냈다. 악마가 감히 인간을 보호하는 척을 하다니.
헤나에게서 미리 신상을 전해 듣지 못했다면 얼핏 잔정이 많아 보이는 저자가 태양신을 거스르는 마귀라는 사실을 잊었을 것이다.
악마 주제에 구명을 이어나가는 남자의 행동이 마치 촌극을 보는 듯해 사라카는 불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로한슨 저택으로 발을 들였다.
주인이 부재한 탓에 사라카를 막는 자는 없었다. 저택에 남아 있던 태양신의 신도들은 마리크 주교가 화마에서 자신을 구해 주기 위하여 친히 방문하셨다고 생각하여 사라카를 향해 손을 모으고 기도하였다. 인파 사이에서 헤나가 튀어나왔다.
“…주교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사라카의 앞을 막아서며 헤나에게 칼을 겨누었다가 사라카가 손짓하자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면서도 검에서 손을 놓지 않는 게 사라카의 명령만 떨어진다면 당장 헤나의 목을 내리칠 기세였다. 상대가 고작 어린 소녀라는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 맹목적인 순종이었다.
요즈음 들어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 목숨을 앗아갔는지를 생각해 보면 희생된 시체들의 위로 못 하나 더 얹는다고 저울이 더 무거워지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살인이 신의 이름으로 죄목이 변제되는 데다가 신전의 명예를 드높이기까지 하는데 거리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사라카가 당장 신경을 써야 할 것은 기사들이 아니라, 검에 목이 겨 뉜 하녀였다. 헤나는 사라카의 옷자락을 잡으려 들었다.
“마리크 주교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우선, 저는… 에반젤린 로한슨의 하녀, 헤나 그린우드라고 합니다.”
에반젤린의 측근 시녀라는 말에 기사들의 눈이 더욱 매서워졌다. 황태자를 시해한 용의자로 몰린 전적이 있고, 파라로스 기사단의 단장인 가브리엘을 홀려 신전의 명예를 실추시킨 에반젤린에 대해 적의를 가지지 않는 자가 더 드물었다. 게다가 세간에 흘러나오는 에반젤린의 소문이 워낙 독했어야지.
“로한슨 영애의 하녀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요. 무슨 말을 하시려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사라카가 말하라는 듯 손짓했다.
“네. 자매님.”
보는 눈이 많았기에 사라카는 자비로운 신도처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주교님, 바닥이 더럽습니다!”
기사들은 사라카를 만류하였으나 고작 하녀를 위해 자세를 낮춘 주교를 존경스럽게 바라보기도 하였다. 사라카는 그 시선이 무척이나 기꺼웠다.
“주교님. 불을…, 제가 불을 질렀어요….”
헤나가 말을 더듬으며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작아 사라카에게만 들릴 정도였다. 정작 남들에게 밝히기는 싫은 것이다.
사라카는 헤나를 비웃어주고 싶었다. 주인을 배신하고 불을 지른 주제에,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누가 크게 다쳐 제 손에 피가 묻을까 봐 잔뜩 겁을 먹은 꼴 좀 보라지. 웃음이 마르지 않았다.
사라카는 헤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척 잘하셨어요.”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베여 나왔으나 정신을 놓은 하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말인가요? 제가 주교님께, 태양신께 도움이 되었나요?”
헤나가 사라카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사라카는 헤나가 무슨 답을 원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간혹 이단을 학살하는 데 참여한 이들은 악몽을 꾸며 밤잠을 설치곤 했다. 그들은 죄책감에 못 이겨 사라카를 찾아와 죄를 고하였다.
사라카는 그럴 때마다 한결같이 친절히 대응해 주었다. 그들이 괴로워하는 것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단은 사람처럼 대우해 줘선 안 되는 추악한 것들이다.
이리 나약하게 고뇌하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 전해지는 태양신의 총아이자 자비로우신 마리크 주교의 위로는 무척이나 깊게 박혀 들어갔다. 위로를 받은 자들은 더 이상 이단의 죽음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사라카는 하녀를 다독였다. 증언을 서야 하는데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처럼 보여선 안 됐기 때문이다.
마리크 주교는 잠시 시간을 들여 헤나에게, 그녀가 듣고 싶어 했던 다디단 말들만 골라 해 주었다.
“헤나 님께서 신실하게 라헬 님을 따르는 만큼, 칸나 님의 죄가 덜어질 겁니다.”
그러니 네가 죄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사라카의 말에 헤나가 크게 안도했다.
그렇게 헤나를 붙들고 다독이는 사이, 방해꾼이 들이닥쳤다.
“주교님, 파라로스 기사단이 왔습니다.”
사라카는 미간을 구겼다. 다행히 면사포 덕분에 험악한 얼굴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로한슨 저택을 주시하고 있던 건지, 사라카의 뒤를 쫓은 건지 몰라도 참으로 이른 등장이었다. 파라로스 기사단이라고 하였으나 그 수는 가브리엘을 포함하여 고작 열 명 남짓했다.
“개새끼들…. 우릴 미행한 거겠지?”
“신전의 수치가 따로 없어!”
사라카 곁에 있는 기사들이 파라로스 기사단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따가운 눈총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브리엘은 말에서 내려 태연히 로한슨 저택에 입성했다. 가브리엘이 몇 차례 로한슨 저택을 방문한 탓인지 안면이 있는 하인들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우선 저택 안에 조난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대피를 돕도록.”
“네, 단장님.”
가브리엘의 지시로 그를 제외한 기사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리엘처럼 체력이 받쳐주는 몇 사람은 몸에 물을 끼얹고 망설임 없이 불타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남은 사람은 다른 기사들의 견제를 무시하고 저택 사람들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라파엘라는 데이지에게 향했다.
사라카는 그 뻔뻔한 꼴을 지켜보다 가브리엘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기사 단장께선 내가 보이지 않나 봅니다?”
“실례했습니다. 주교님. 화마가 거세어 피해가 큰 상황이라 미처 주교님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가브리엘은 고의가 아니었다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눈앞에 불타는 저택이 있는데 다른 게 눈에 들어오겠냐는 말이었다. 이는 저택을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던 사라카를 비난하는 것과 같았다.
“마리크 주교님께서도 시선을 빼앗기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화마를 가만 지켜만 보고 계셨을 테죠.”
제 주제도 모르고 참으로 건방진 태도였다.
사라카에게 있어 가브리엘은 유용한 패였다. 자바니야 주교가 사용하는 도구, 황제를 농완할 수 있게 만드는 비운의 사생아. 이것이 바로 가브리엘이 맡은 배역이다.
가브리엘이 저주를 받은 것은 사라카에게 사용당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 시의적절하게 사라카가 꾸미고 있는 무대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자바니야 주교의 아래에 있을 때는 말 한번 얹지 않고 무척이나 순종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에반젤린과 필요 이상으로 농밀이 엮이며 사라카에게 반기를 들고 있었다.
“제가 주교님께서 조난자를 구하는 데 손을 보태도 되겠습니까?”
“우선 그리하라 명하시고 다음으로 내 허락을 구하다니, 순서가 바뀌었군요.”
“마리크 주교님께서 당연히 허락해 주실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주교님께서도 구명이 우선이지 않습니까.”
성수가 들지 않는다는 사실만 밝혀져도 당장 산채로 화형당할 버러지 주제에 하등 무서울 것 없다는 듯이 사라카를 막으며 나서지를 않는가. 에반젤린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태도였다.
저런 믿음이 태양이 아닌 에반젤린 개인에게 향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불순하게 다가왔다. 신실했던 성기사를 매혹하여 이렇게까지 타락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일 줄이야. 아자젤을 회유해 간 것도 그렇고 에반젤린의 수완이 실로 감탄스러웠다.
“이 늦은 시간에 지나가다 들리시진 않았을 테고,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가요?”
“혹시 악마라도 나타나 화마라도 일으키는 건 아닐지 순찰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불길이 거세어 온 것뿐입니다.”
“그런가요? 우연이라….”
가브리엘은 사라카를 주시하고 있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일전에 주교님께서 일가를 전부 태워 죽여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으신지라 걱정되어 찾아왔습니다.”
“기사 단장처럼 안일한 대처를 하는 것보단 나은 일 아닐까요.”
가브리엘은 수십의 사람을 통째로 태워 죽인 사라카를 욕했고, 사라카는 제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며 선수 쳐 이단 한 명만을 잡는 가브리엘을 비꼬았다.
“나는 기사 단장께서 밤 중에 사모하는 분과 밀회라도 하실 예정이 있는 줄 알고 착각했지 뭔가요.”
사라카는 지금까지 보여 준 적대감을 싹 지우고, 우연히 길을 걷다 만난 사람을 반기듯 여상스럽게 말했다.
“아쉽게도 늦으셨네요. 조금만 일찍 왔다면 만나 뵐 수 있었을 텐데….”
“무슨 말씀입니까?”
“그야 이 불을 지른 건, 당신이 우려한 ‘악마’가 아닌 당신의 정인이거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라카와 가브리엘 둘 다 에반젤린이 공작 저에 머무르고 있음을 잘 알았다. 가브리엘이 대꾸하였으나 사라카는 이를 무시하며 헤나를 앞으로 내놓았다.
“로한슨 영애의 하녀가 증언했답니다.”
가브리엘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헤나 씨.”
그토록 찾던 배신자의 정체를 알게 된 가브리엘이 참담한 심정으로 헤나의 이름을 불렀다.
“하하. 사모하는 분의 측근이니 기사 단장께서 알아보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군요.”
사라카는 몹시 유쾌해 했다. 그러면서도 어조와 태도는 마리크 주교의 자애로운 모습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불에 지져지며 학습한 덕분이었다.
“…헤나 씨. 대체 왜 거짓 증언을 하는 겁니까?”
헤나가 가브리엘의 시선을 피했다. 물론 가브리엘은 데이지의 전적을 고려해 에반젤린과 두 악마를 제외한 모두를 의심하고 있었기에 큰 충격을 받진 않았다.
다만 이 사실을 전해 들을 에반젤린이 걱정될 뿐이었다. 헤나는 에반젤린이 아끼는 것과 엇비슷한 대우를 받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에반젤린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싶어 아양 떠는 칸나마저도 제 자매가 그토록 숭배하는 아가씨를 배반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거짓 증언이라니요. 기사 단장께서는 정에 눈이 멀어 진실을 보여드려도 외면하시는군요.”
가브리엘이 사라카를 거대한 꿍꿍이속을 가진 양 노려보아 그녀는 몹시 억울해졌다. 사실 결과만 놓고 보면 만족스럽긴 하다만, 따지고 보면 사라카가 계획하여 주도하에 벌인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헤나 님. 방금 제게 무슨 말을 했는지 다시 설명해 주시겠어요?”
“저…. 누가 저택에 불을 질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로한슨 영애님께서 저택에 불을 지르셨습니다.”
헤나가 심호흡을 하곤 이어 말했다.
“저 말고도 목격한 사람이 여럿 있을 거예요.”
그 목소리는 유독 뚜렷했다.
“맞아…. 나 영애님이 불 지르는 걸 봤어…!”
처음은 겁에 질린 채 내뱉는 한마디. 그리고 누군가의 동조로 이어졌다.
“나도! 저도 봤어요!”
“마, 맞아. 나도 봤어. 말리려고 했지만, 영애님이 너무 무서워서 잠자코만 있었어….”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며 가담하는 사람이 나왔다. 다들 ‘쥐’가 돌아다니는 걸 에반젤린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몇 사람은 흐름에 따라 에반젤린을 본 적 없음에도 자신도 목격했다며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로한슨 영애님이….”
사라카가 짐짓 충격을 받은 듯 침음했다.
“일전에 로한슨 영애에게 삿된 기운을 느낀 적이 있지요. 그때 확실히 로한슨 영애를 잡아들였다면 이런 피해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을….”
사라카의 말에 사나운 눈총이 가브리엘을 향했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그 당시 가브리엘이 에반젤린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무척이나 열과 성을 다했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경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저는 이단을 극도로 혐오하는 자입니다. 신께 반기를 든 존재를 사제 된 도리로서 어떻게 눈감을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저는 악마가 몸담고 있던 보금자리마저 정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라카는 자신이 직접 일가족을 태워 죽였음을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집사가 나눠주는 금화에 눈이 팔려 에반젤린 로한슨의 존재를 묵과한 자들은 자신들의 처우가 어찌 될지 두려워 벌벌 떨었다.
“이자들을 전부 죽이는 것이 좋을까요?”
무제타가 검을 뽑았다. 날 선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그 소리보다 사감 없이 죽음을 묻는 목소리가 더욱 매서웠다. 그 뒤를 이어 다른 기사들도 발검했다. 가브리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열 명으로는 마리크 주교의 기사들을 막기는 무리였다.
“흐읍…!”
하녀 하나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사라카가 불길에서 그들을 구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던 의미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사라카와 눈이 마주치자 경기를 일으키려 들었다. 에반젤린 로한슨의 하녀치고는 겁이 많았다. 그 아가씨가 식솔들에게는 퍽 유하게 대했나 보다.
“글쎄요….”
사라카는 뜸을 들였다.
원칙대로라면 가차 없이 죽여야 마땅했다. 사실 사라카는 생사가 아닌 목을 자를지 불에 태워 죽일지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물론 악마에게 홀린 이단들은 모두 극형에 처해야 마땅하지만….”
사라카가 고민하며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더러운 바닥에 꿇어앉아 올려다보는 시선들은 사라카를 더 이상 사제가 아닌 학살자로 보고 있었다.
사라카는 사람들의 쓰임새를 셈하여 보았다. 살려두는 게 더 이득일까? 에반젤린 로한슨을 잡아들이는데 이들의 목숨이 유용할 것인가? 사라카는 헤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헤나 님은 로한슨 저택 사람들이 인질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번에도 헤나에게만 들릴 무척이나 작은 속삭임이었다. 사라카는 저택 사람들의 생사를 헤나에게 맡겼다. 헤나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대답에 다른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있다. 불을 질렀을 때보다 훨씬 직접 다가오는 죽음의 무게에 헤나가 살짝 겁을 먹었다.
“살, 살려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요? 전부 죽이고 로한슨 영애가 식솔들을 학살했다고 전하는 편이 조금 더 극적이지 않나요? 어차피 저들은 악마에게 홀린 이단들이니 죄책감 같은 건 가지실 필요 없답니다.”
헤나는 사라카가 정말로 사람들을 전부 죽일 것만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로한슨 영애님은 맡은 배역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세요. 저택의 사람들은 로한슨 영애님을 묶어놓는 족쇄가 될 거에요.”
헤나가 거짓을 고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에반젤린은 꼭 주박이 걸린 사람처럼 ‘에반젤린 로한슨’을 흉내 내는 것에 노력했다. 진짜 에반젤린의 식성을 따라 하고, 행동거지나 말투도 마찬가지였다. 에반젤린은 칸나가 아닌 다른 하인들을 그리 아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한슨 영애’ 답게 그들을 내치지도 않을 것이다.
사라카는 가늠하듯 헤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인질의 가치가 있다면 죽이는 대신 저택을 포위하고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라카는 헤나가 답한 대로 이들을 살리기로 했다. 죽였다가 되살릴 수는 없고, 산목숨을 죽이는 일은 쉬우니 유예를 두기로 한 것이다.
칼을 빼든 기사들은 사라카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카는 가브리엘이 신이 아닌 에반젤린을 숭배하는 것을 불경하다 여긴 주제에, 사제들이 사라카 자신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여겼다. 그야 사라카는 자비롭고 헌앙한 마리크 주교였으니까. 마리크 주교님께서는 신의 총아였기 때문이다.
사라카는 조용히 운을 뗐다.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카에게 집중하여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한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태양이 아니라 태양을 등진 자를 모신 것은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죄입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신의 뜻에 따라 오직 한 번의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 두 번은 없을 겁니다.”
사라카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로한슨 영애의 세뇌에서 벗어난 헤나 님처럼 깨어나신 분께는 오히려 찬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헤나 님. 용기를 내어 진실을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라카는 두 손을 기도하듯이 모았다.
“태양신께서 헤나 님의 정의로운 행보를 귀히 여기실 겁니다.”
사라카의 말을 끝으로 헤나를 겨누고 있던 검이 거두어졌다.
헤나는 사라카의 입에 발린 말에도 눈에 띄게 좋아했다. 이 역시 칸나에게 도움이 되리라 여긴 것이다. 사라카는 진짜 제 동생도 알아보지 못하고 에반젤린을 적대하는 헤나가 무척이나 우스웠다.
이것은 연극이었다. 마리크 주교의 역할을 받은 사라카가 자행하는 연극.
에반젤린 로한슨의 최측근이 단죄를 받기는커녕, 에반젤린에 대해 용기 있게 증언했다며 찬사까지 받자 사람들은 무척이나 놀랐다. 그리고 서로 눈치를 보다가 앞다투어 에반젤린에 관해 고발하기 시작했다.
“주교님, 제 말도 들어주세요! 저, 저도 로한슨 영애님에 대해 증언할 말이 있습니다!”
“로… 로한슨 영애님은 악마예요!”
“맞아, 괴물이야!”
“로한슨 저택은 이미 악마의 소굴이에요. 불에 타야 마땅해!”
사라카가 살짝 터준 구멍을 보고,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살길을 찾아낸 것이다.
뒤늦게 가브리엘의 수하에게 구출 받아 저택의 밖으로 빠져나온 집사는 그사이에 일어난 참상에 미간을 짚었다. 그동안 돈과 에반젤린에 대한 공포로 입을 막았던 것들은 신의 이름값과 자신들의 안위 아래 쉽게 허물어졌다.
저택에 접근했던 자들이 로한슨 저택의 하인들은 입이 무거워도 너무 무겁다고 불평하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특히 직접 로한슨 저택의 하인들을 매수하려 했던 전적이 있는 무제타가 사라카의 수완에 감탄했다.
하인들은 그동안 우물 속에만 터놓던 말들은 전부 전하려는 듯 속닥였다.
당장이라도 기사들이 자신들을 불길 속으로 다시 집어넣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게 아니면 칼에 찔릴지도 몰랐다. 비록 에반젤린을 팔아먹는 듯해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저택에 불을 지른 사람이 누구인지 떠오르자 한 줌 남아 있던 죄책감마저 사그라들었다.
“이, 이 사람도 악마가 틀림없어요!”
심지어 자신들을 구해 준 젤리를 악마라고 매도하기까지 했다.
“저, 저 상처를 봐요!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죽었어야 한다고요…!”
그가 자신들을 구하려다 상처 입었음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배은망덕한 발언이었다. 젤리는 자신이 구해 낸 사람들을 다시 불 속으로 집어처넣고 싶다는 얼굴을 했다.
사라카는 그동안 그토록 찾아다녔던 에반젤린에 대한 정보를 만끽하였다. 비록 대부분은 헤나를 통하여 미리 접한 이야기긴 했다. 하지만 사라카가 고른 선택지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받는 순간인데 기껍지 않을 리가 있는가.
“그건 되살아난 악마예요…. 로한슨 영애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로한슨 영애의 장례식에서 괴물이 깨어났어요.”
그 말마따나 에반젤린의 장례식에 참여했다는 사람도 여럿 나왔다.
“데이지 너도 장례식에 있었지? 그래서 도망갔었잖아.”
“하지만 영애님께서는 이후에 오히려 우릴 도와….”
“개소리하지마! 너 전에는 분명 로한슨 영애가 끔찍하다 했잖아.”
데이지가 무어라 반박하려 했으나 겁먹은 동생들이 겁을 먹고 데이지의 품에 파고드는 데다가 당장 기사들이 칼을 빼 들고 있어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젤리가 불 속에서 구해다 넘겨준 율마가 데이지의 품에 있었다. 젤리와 에반젤린의 편을 들고 싶었으나, 여기서 에반젤린을 옹호했다가는 당장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그 광경을 가브리엘이 참담하게 바라보았다. 사라카가 가브리엘을 불렀다.
“기사 단장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라카의 목소리가 향하는 곳을 따라 시선이 일제히 한곳을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꼭 일렬로 세워진 긴 죽창 같아 가브리엘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경께서도 신실하신 로한슨 저택의 사람들이 갸륵하지 않나요?”
사라카는 부러 가브리엘을 긁어댔다. 숭배하고 애정하는 에반젤린을 욕하는데 그런 감정을 느낄 리가 없었다.
“경이 항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답니다. 이번에도 그걸 위해 오신 거지요?”
사라카의 말이 맞았다. 가브리엘이 급히 사라카를 쫓아온 데에는 에반젤린의 영향도 있겠지만, 사라카가 또 학살을 저지를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사라카는 그것을 무척이나 잘 알았다.
자바니야 주교에게서 가브리엘의 성정에 대해 전해 들은 덕분이다. 사감을 제하고 보면 가브리엘은 에반젤린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청렴한 기사였다.
“기사 단장께서는 늘 죄가 가장 깊은 한 명만을 희생시켰지요. 이번에도 그러시겠죠?”
“로한슨 영애님은 죄인이 아닙니다.”
가브리엘이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곤 사라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사람을 학살하는데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마리크 주교보다야 에반젤린이 훨씬 이상적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질을 하는 신도보다 가브리엘의 기도에 구원을 베푸는 에반젤린 로한슨이 훨씬 결백했다. 에반젤린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한없이 무심하더라도 그랬다.
“아랫것들의 증언이 믿기지 않나요? 이 마리크 주교가 사람들을 핍박하여 거짓 증언을 내뱉게 하기라도 했다고요?”
사라카가 어차피 사람들을 죽이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음에도 가브리엘을 괴롭히는 건 단순한 화풀이였다.
“경께서 로한슨 영애만을 희생시키지 않겠다 하시면 난 이들을 전부 단죄할 겁니다.”
가브리엘의 마음은 에반젤린에게 향했다. 에반젤린을 신뢰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선택이 저택의 수십을 학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사라카는 그저 허풍을 떠는 게 아니었다. 당장 말을 번복해 저택 사람들을 몰살시켜도 하등 거리낄 것이 없었다. 가브리엘은 한동안 마리크 주교의 학살을 뒤쫓으며 사라카가 과장하는 게 아님을 잘 알았다.
“어서, 고르세요.”
사라카는 가브리엘을 독촉했다.
“전….”
“하하. 결정이 어렵다면 도움을 드리지요.”
언젠가 악마가 가브리엘더러 태도를 확실히 밝히라며 질책하던 일이 떠올랐다. 젤리가 정신이 멀쩡하고 푸딩이 있었다면 왜 에반젤린을 바로 선택하지 않느냐며 가브리엘을 닦달할 것이 분명했다.
가브리엘이 단번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대자 사라카는 가브리엘이 수월하게 결정을 내리는 걸 돕겠다고 친절을 베풀었다.
사라카는 가브리엘을 뒤로하고 저택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화상을 입어 다른 사람에게 응급조치를 받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에게서 삿된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사라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목이 잘렸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던 여인은 눈이 깜빡할 사이에 눈앞의 사람에게서 목 위가 사라졌다는 걸 알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여인은 얼굴에 뜨거운 것이 튀어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인식했다. 경악해 비명을 흘리며 바닥을 끌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제 얼굴의 액체를 닦았다 묻어나오는 붉은 것에 졸도할 기세로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의 목을 자르는 것은 의외로 굉장히 힘이 들어가는 행위였다. 그러니 다분히 보여주기 용 퍼포먼스에 가까운 것이다. 실제로 저택의 하인들은 사람의, 그것도 면식 있는 동료가 단숨에 죽는 모습에 공포를 느꼈다. 폐부가 죄었다.
“무슨 짓입니까!”
“가만히 두었다간 삿된 기운이 다른 분들께도 전염이 될까 봐 가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아, 이런. 피 때문인지 그분께도 옮고 말았군요.”
가브리엘이 사라카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그녀의 호위가 가브리엘을 막아섰다. 그 사이에 또다시 목이 하나 더 떨어졌다. 고작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두 명이 죽었다.
사라카는 또 다른 희생자를 가리켰다. 이번에는 하녀가 허물어졌다. 베일을 쓴 지휘자는 손끝으로 죽음을 가리켰다. 다시 한번 더. 다행히 네 번째는 유리엘이 검을 뽑아 들고 기사를 막아섰다.
유리엘이 기사에게 반격하려는 걸 같은 파라로스 기사단인 세라프가 말렸다.
“유리엘. 네가 저 사람을 다치게 하면 단장님이 곤란해져.”
유리엘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평소에도 세라프의 말을 잘 들어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기사의 숨통을 끊어놓지는 않았다. 만약 유리엘이 마리크 주교의 호위를 해한다면 그들도 에반젤린에게 현혹된 이단으로 전락해 추살의 대상이 될 것이다.
사라카는 마지막 사람을 죽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단순히 가브리엘에게 실제로 로한슨의 것들을 죽일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데 의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이단을 살리기로 했는데, 이러다 전부 사악한 기운이 전염되어 제 자비가 무용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겠군요.”
사라카는 가브리엘이 답을 줄 때까지 저택 사람들을 전부 도륙할 셈이다. 일종의 초읽기인 셈이었다. 가브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로한슨 저택으로 급히 온 탓에 가브리엘이 대동한 기사는 고작 열이었다. 수적으로 불리하게 짝이 없었다.
“불쌍하신 분들. 가브리엘 경은 여러분을 구원할 생각이 없나 봅니다.”
사람들은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으나 자신들이 죽어가는 이유가 가브리엘에게 있음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죽음을 코앞에 둔 인간은 가끔 이토록 영민해지곤 했다.
“불길에서 도망쳤더니 이젠 목이 잘려 죽으라고? 난, 난 죽기 싫어!”
“살, 살려주세요.”
“기사님이시잖아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가브리엘에게 동정을 살지도 잘 알았다. 사람들은 가브리엘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가브리엘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도움을 원하는 자들을 잘 거절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어린 자신과 죽어가는 친우를 겹쳐보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가브리엘의 얄팍한 신념을 선(善)이라 불렀었다.
“단장님…. 로한슨 영애님의 험담을 한 것들인데 그냥 죽게 두면 안 되나요?”
“닥쳐, 미쉘!”
라파엘라가 이 상황에서까지 정신 놓고 헛소리를 하는 미셸에게 윽박지르며 가브리엘의 어깨를 잡았다.
“단장님. 지금 이들을 택한다 해도 로한슨 영애님께선 이해해 주실 겁니다. 자기 선 안의 존재들에겐 특히 무르신 분이잖습니까.”
라파엘라의 말은 듣기 좋게 꾸며놓은 것에 불과했다. 리본 끈으로 몹시 잘 포장된 설득이었다. 정작 그 내용물이 어떨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는 게 흠이었다. 정말 에반젤린은 가브리엘의 선택을 이해해 줄 것인가?
“단장님. 원하시는 대로 사람들을 구하셔도 괜찮아요.”
라파엘라의 목소리가 마리크 주교의 것과 겹쳐 들렸다. 가브리엘은 숨이 막혀왔다.
어째서지? 자신의 충직한 부관은, 꼭…. 꼭 가브리엘이 에반젤린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을 선택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라파엘라는 가브리엘이 영애를 저버린 데에 혹시라도 죄책감을 느낄까 위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파엘라에게는 미안하게도…. 가브리엘이 고르고 싶은 선택지는 에반젤린이었다.
그래. 가브리엘은 조금 전 세 사람이 죽었음을 목격했음에도 에반젤린을 택하고 싶었다. 가브리엘이 쌓아온 신념은 그녀의 앞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에반젤린은 가브리엘의 새로운 지침이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에반젤린을 고르면 그것이 자신을 정답으로 인도해줄 것 같았다. 그녀가 제게 뻗어준 손이 구원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은 제가 미쳤다는 평을 받는 미쉘과 별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가브리엘은 에반젤린이 이해해 준다고 하더라고 그녀를 배반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사라카는 가브리엘의 침묵에서 답을 읽어내렸다.
“여태까지 봐 온 가브리엘 경이라면 오랜 고민 없이 다수의 사람을 골랐겠죠.”
그리고 몹시 감탄했다. 정말이지 에반젤린 로한슨은 어떤 수를 써서 가브리엘을 이토록 매료시켰단 말인가. 과연 사라카가 고른 대적자 다웠다.
“아! 그 흔들림 없는 신앙이 라헬 님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당신이 만약 축복받는 몸이었다면 그 숭앙은 신께 닿았을까요?”
그러나 곧 스스로 답을 내린다. 사라카의 신념을 지배하는 마리크 주교님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아니야. 전능하신 라헬 님께서는 일찍이 당신이 로한슨 영애를 택할 것을 알고 축복을 지우신 거겠죠.”
사라카는 비난의 의도로 내뱉었으나, 가브리엘에겐 의외의 찬사로 다가왔다.
에반젤린을 만날 운명이라 가브리엘이 저주를 받았다니, 우습게도 그 말은 무척이나 운명적으로 들렸다. 가브리엘의 달갑지 않은 과거가 에반젤린에게 구원 당하기 위해 존재한 거였다면….
어쩌면 버려지기만을 반복했던 가브리엘의 인생에 조금의 가치가 생긴 것 같았다.
가브리엘은 침묵으로 에반젤린을 택하였다. 그러나 저택의 사람들을 외면하지도 못했다. 비록 그들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사라카가 기사들에게 몰살을 명한다면 가브리엘은 기꺼이 목숨을 바쳐 막아서리라.
사라카는 가브리엘의 한결같은 태도에 흥미가 떨어졌다.
“재미없네.”
순간 드러난 것은 사라카의 본성이었다. 사라카는 제가 잠시였지만 마리크 주교의 탈을 벗었다는 사실을 질색하며 빨리 자리를 떠나려 들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스스로가 용납되질 못했다. 역시, 아직 에반젤린을 죽이지 못해서, 마리크 주교님만큼의 위업을 쌓지 못해서 완벽하게 의태 하지 못한 것이다.
“경의 의사를 존중해드릴게요.”
그리고 가브리엘에게는 무척 다행으로, 사라카는 정말로 저택 전부를 몰살할 생각은 없었다. 헤나의 말대로라면 가브리엘은 아니어도 에반젤린에게는 유용한 인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반젤린이 악마임을 증언하는 데도 쓸모가 있었고.
“경께는 다른 선택지를 드리도록 하지요.”
대신 사라카는 이번에 가브리엘에게 벌을 내리겠다 말했다. 가브리엘이 에반젤린을 악마라고 증언하게 해서 둘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에반젤린에게 가브리엘이란 조력자를 쥐여주지 않을 셈이었다.
이간질이 실패했으니 적어도 가브리엘이 방해할 수 없도록 제압해두어야 하긴 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의 핏줄에 쓸모가 있기에 죽이지는 못했다. 황제를 뒤흔들 좋은 수가 아닌가.
“조금 과하게 제압해도 괜찮습니다. 가브리엘 경은 성기사이니 얼마나 다치던 치료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가브리엘에게 성수가 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 말했다.
가브리엘은 마리크 주교의 기사들에게 손목과 발목의 신경이 끊긴 채 제압당했다.
다행히도 가브리엘에게 이번의 선택은 훨씬 수월했다. 세상의 모든 그것 중에서 가브리엘 자신이 가장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