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37)
“에반젤린 님은 너무 상냥하세요.”
응. 나도 알아.
푸딩의 말에 칸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할 필요 없었어요, 아가씨. 저 사람이 뭐라고 한 줄 들으셨잖아요?”
“차라리 그 자리에서 목이 뎅강 잘리면 더 좋았을 텐데.”
“푸딩.”
아무래도 푸딩은 코키아의 험담에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가 코키아를 살려준 게 불만인가 보다.
하지만 봐, 코키아가 한 몸 희생해 준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기사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고자질하지는 않았잖아. 마리크 주교의 기사들이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거지.
“코키아. 내게 자비를 구하고 싶다면 조용히 있어야 해.”
코키아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사람들을 지나쳐서 데이지랑 라파엘라가 있는 구석 쪽으로 향했다. 옆에는 데이지의 동생들도 함께였다.
“데이지. 라파엘라 경.”
“…로한슨 영애님. 하하. 저 기사 놈들은 영애님을 보지 못하는 것 같은데 제가 실성한 건가요?”
라파엘라가 헛웃음을 치며 물었다.
“약간의 수작을 부려 기사들이 절 보지 못하게 했을 뿐이에요.”
“그럼 저 자식들이 미친 거란 얘기군요.”
미친 거 아니고 인식 저하라니까. 그리고 저들 눈에는 나를 보는 사람이 미친 걸로 보이겠지. 아까 보니 내 말소리도 안 들리는 것 같더라. 하지만 라파엘라는 자기가 정상이라는 데 중점을 두었다. 눈을 끔뻑거리며 날 보던 메리가 날 발견하고는 뛰어나와 내게 푹 안겼다.
“영, 영애니임….”
메리가 내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죄송해요. 영애님. 메리가, 메리가 잘못했어요.”
“아니야, 메리. 넌 잘못한 거 없어. 헤나가 잘못한 거지.”
메리가 세상 서럽게 울어대는데 데이지가 바로 반박을 했다. 헤나의 이야기가 나온 걸 보면 문맥상 헤나가 메리를 시켜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나 보다.
그냥 마리크 주교한테 붙은 게 아니었어? 방화에 한 몫 거들었나? 라파엘라는 미리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묘한 눈으로 칸나를 바라보았다.
“칸나 씨와 함께 오셨군요.”
“제 하녀니까요.”
헤나가 배신했다는 사실이 아주 멀리 퍼졌나 보다. 칸나가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데도 경계하는 티가 역력했다. 데이지가 칸나를 노려보며 비꼬았다.
“칸나. 네 언니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봐.”
데이지야… 왜 죄 없는 애한테 그러니? 원래 너도 날 신전에 고발하려고 했었잖아. 앞장서서 고발을 실천하고자 가브리엘한테 찾아가기도 했고.
가브리엘이라서 다행이지 마리크 주교한테 갔다고 생각하면 진짜 끔찍했다. 남들은 다 헤나를 욕해도 너만은 이해하고 넘어가 줘야지.
하지만 데이지가 끔찍이 아끼는 동생들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것도 사실이라서 무어라 반박을 하기도 난처했다.
“데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들려줄래?”
우선 나도 상황 파악부터 해야겠다.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데이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푸딩은 사이코메트리 같은 건 못하더라고.
데이지는 울먹이는 메리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요. 영애님께서 아끼시던 하녀가 메리를 이용해 영애님의 애완 개를 해쳤다는 이야기요?”
헤나가 메리를 이용했다고? 젤리가 다친 건 메리 때문이고?
젤리가 어쩌다 인질이 됐는지 궁금했는데 헤나가 메리를 이용한 거였다. 헤나가 메리한테 수상한 물을 뿌리게 시켰다는데, 물을 맞은 젤리 피부가 바로 녹았단다.
헤나야…. 너 어린애한테 염산 같은 독극물을 들려 준 거야? 칸나한테 호기롭게 헤나를 봐주겠다며 선언했는데 진상이 밝혀질수록 헤나의 죄가 무거워만 졌다. 그런데 진짜 염산이라니, 그리고 그걸 어린아이 손에 쥐어 줬다니… 너무 간 거 아니야?
데이지가 헤나한테 반감을 표현하는 것도 메리를 이용했기 때문일 거다. 데이지가 이어 말했다.
“아니면 불이 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리크 주교가 들이닥쳤고 저희가, 제 동생이 불타 죽는 모습을 구경거리 삼다가 끝내 저희를 악마의 하수인으로 낙인찍었다는 사실이요? 아니면 저 사람들이 로한슨의 녹을 받아먹다가 목숨을 위협받자 영애님을 저버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 전부 말씀드릴까요?”
데이지는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점점 화가 쌓이는지 마지막에는 언성을 높였다.
헤나한테 쌓인 화가 전가된 것 같았다. 데이지는 분을 삼키지 못해서 헤나와 저택 사람들, 그리고 나까지 깎아내리는 모두 까기 인형이 되어 버렸다. 데이지가 저택 사람들이 몰려 있는 방향으로 삿대질을 하자 사람들이 흠칫거리며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인들은 코키아가 녹다운 된 모습과 내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렸는데, 그중 불같은 사람 하나가 벌떡 일어나서 대꾸했다.
“난, 난 거짓말 따위 안 했어. 진짜 로한슨 영애가 불 지르는 걸 봤다고!”
“또, 거짓말!”
데이지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반박했다. 데이지가 날 믿어 줘서 정말 고맙다. 고맙긴 한데…. 하인들 입장에서 보면 거짓말 하는 게 데이지긴 했다.
“로한슨 영애의 앞잡이 같으니,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맞아! 지금도 로, 로한슨… 아무튼 옆에 딱 붙어 있는 꼴 좀 봐. 우리가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군중심리라는 게 참 신기하지. 코키아의 전례를 봤으면서 먼저 나서는 사람이 있자 금세 입이 여럿 달라붙었다. 그럼에도 기사들의 칼날이 무섭긴 한지 내 이름은 묵음 수준으로 작게 언급하는 꼴이 우스웠다.
지금 보니까 내 모습을 한 쥐새끼가 저택에 불을 지른 모습을 목격한 사람의 수가 꽤 되나 보다. 데이지는 그 모습을 못 봐서, 방화를 저지른 게 헤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고.
하필 내 모습이라니, 아무래도 쥐는 나를 곤경에 빠트리고 싶은 게 분명했다. 내가 아마란스인 척 아게라와 친근하게 지내는 것도 눈꼴사나웠을 텐데, 자기가 감염시킨 숙주들과 쥐들까지 없앴으니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내 곁에는 자기 천적인 푸딩이 항상 붙어 있어 손을 쓸 수 없으니, 나 대신 로한슨 저택에 화풀이하러 온 거겠지. 내가 아끼는 것들이 이곳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로한슨 저택에 남아있는 푸딩의 기운을 쫓아오기라도 한걸까?
인질들이 소란스러워지자 기어이 성기사들마저 이쪽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무슨 소란이야?”
“진짜 단체로 미친 건가? 조용히 안 해!”
아까 코키아를 배려했던 기사가 설욕하려는 듯이 다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학습 능력 더럽게도 없네. 게다가 성기사라는 것들이 왜 이렇게 사람을 못 죽여서 안달이야?
불만스럽게 기사들을 보고 있으니 푸딩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조용히 시킬까요?”
꼭 깡패가 자기네 보스한테 묻는 말 같아서 얼떨떨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사들이 억, 윽소리를 내면서 고꾸라졌다.
…죽, 죽인 건 아니겠지? 그냥 인식 저하의 범위를 늘려서 아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게끔 마법을 부리려나 했는데 진짜 깡패처럼 물리적으로 처치한다는 말이었구나…. 뒷수습을 어찌 해야 할지 걱정됐지만, 속이 시원하긴 했다.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거예요.”
푸딩이 내게 화사하게 웃으며 보고했다.
기사들만 조용해진 게 아니라 저택 사람들까지 전부 조용해졌다. 이게 바로 공포정치? 언론 탄압?
좌중에 침묵이 도는 가운데 푸딩이 칭찬을 바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뭘 바라는지 뻔히 보여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하…. 내가 버릇을 잘못 들인 탓이다. 푸딩에게서 손을 떼고 데이지를 불렀다.
“데이지.”
“네…, 영애님.”
데이지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톤으로 답했다. 이제 데이지에게 사실을 말해줘야 할 때다. 네가 틀리고 저 사람들이 맞다고 하면 왜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냐며 화내는 거 아니야?
아니다. 난 데이지를 믿어. 내 말 만큼은 들어 줄 거다. 그렇게 믿으며 진실을 꺼냈다.
“저들이 허언을 내뱉는 게 아니야.”
“무슨, 무슨 소리세요.”
데이지가 당황하며 내게 되물었다.
“날 음해하려는 쥐새끼가 내 모습을 훔쳤단다. 그러니 저들이 본 것은 내가 아닌 그 쥐새끼의 모습일 테지.”
데이지는 호사퀸 공작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해 들은 적이 없어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내가 방화범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수긍하는 듯했다.
“그걸 어떻게 믿나요…?”
대신 신뢰가 바닥을 기는 저택 사람들에게는 반발이 일었다. 안 그래도 빙의 전 에반젤린이 온갖 횡포를 저지르고 다니는 악녀 포지션이었는데, 빙의 후엔 마리크 주교한테 찍혀서 괴소문까지 나돌다 보니 날 믿을 수 없는 듯했다.
“내가 너희를 죽일 이유가 없잖니.”
“…마리크 주교님이 하신 말처럼 저희를 죽여 제물로 쓰시려던 거 아닙니까?”
어쩐지 안구가 촉촉해진 기분이다. 마리크 주교보다 날 더 경계하는 거 실화야? 나름대로 악녀 탈피한다면서 저택 사람들한테 잘해 준 것 같은데 내 노력이 휴지 조각이 된 기분이었다.
그럼 설득 가능한 다른 변명거리를 찾아야겠다. 때마침 고꾸라진 기사들이 보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공포정치 콘셉트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지.
“제물로 쓰려 했다고? 저기 쓰러진 기사들을 보렴. 나는 너희를 굳이 불 속에 집어넣지 않아도 쉽게 죽일 수 있단다. 번거롭기 짝이 없는 짓을 왜 내가 저질렀다고 생각하는지 오히려 되묻고 싶구나.”
“정말 불을 지른 게 로한슨 영애님이 아니세요?”
“그래.”
이번에는 설득이 조금 통한 것 같았다. 의리는 안 통하더니 공포가 먹힌다는 게 좀 서러웠다.
“그리고…. 내 집을 어찌 불태우겠니.”
기분이 울적해서 그런지 목소리도 조금 아련하게 나온 것 같다.
“…집.”
누가 내 말을 되새기는 듯했다. 그렇지? 생각을 해 봐. 세상에 자기 집에 불 지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완전 상식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인들이 미심쩍게 날 바라보는 듯했다. 응, 어디 있겠냐고 했는데 여기 있구나? 다시 한번 안구가 촉촉해졌다. 우리 집 하인들 눈에는 내가 자기 집에 불 지르는 미친 인간으로 보이나 보다. 다 집어치울까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사?”
데이지의 동생인 라넌의 부축을 받으며 집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도 한 고생 했는지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이 플록스, 오랜만에 귀환하신 주인께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비우신 동안 제대로 저택을 지키지 못했음을 사죄드립니다.”
집사는 기침하면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로한슨 저택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빙의한 이래로 집사한테 이렇게 정중한 대접을 받은 건 처음이다. 집사는 몸을 접어 깊이 경애를 표현한 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들은 뭣들 하는 건가? 주인이 오셨는데 어서 인사를 드리지 않고!”
집사가 하인들에게 크게 호통을 쳤다. 그 말에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던 하인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다친 사람들도 곁에 있던 동료의 도움을 받았다. 내 다리에 매달려 있던 메리도 분위기를 살피더니 도도도 달려가 데이지의 옆에 반듯이 서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덧 모두가 제자리에 기립했다.
사람들은 눈치를 살피며 하나, 둘하고 박자를 세고는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영애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영애님, 잘 다녀오셨어요.”
꼭, 외출했다 돌아온 나를 반기는 것 같은 인사였다. 제대로 인사말도 통일되지 않았고, 저마다 박자도 달라 엉망이긴 했다. 불타 버린 저택과 다치고 엉망이 된 사람들, 심지어 사상자까지 있는 암울한 상황에 받는 엉망인 인사였다. 그런데 참으로 같잖게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문득 속이 울렁거렸다. 낯설었으나 싫지 않았다. 정말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실제로 로한슨 백작가에 돌아온 것이 무척 오랜만이긴 하였으나, 그 이상으로 굉장히 오래 자리를 비웠다가…. 그래, 정말 ‘나’의 집에 돌아온 것 같았다.
집사는 라넌의 부축을 받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 편을 들어 줄 줄은 몰랐는데.”
난 집사가 로한슨 백작 따까리라서 내 뒤통수를 칠 줄 알았다. 헤나마저 떠난 상황에 집사가 내 편을 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짜 미래는 어찌 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다.
“저는 누가 저택을 지킬 수 있는지 헤아려 본 것뿐입니다.”
집사가 데이지와 아이들이 있는 쪽을 한번 흘끗거린 후 이어 말했다.
“새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당장 눈먼 사자의 발톱에 죽어 나가게 생겼으니 악마의 뱃속에라도 숨을 수밖에요.”
로한슨 백작이 튀었고, 마리크 주교가 이단 숙청을 핑계로 펼치는 폭정 아래 당장 죽을 판이라 나한테 붙었다는 말이다.
“겪어본바, 아가씨는 당신이 거둔 것들은 버리지 않으시니까요.”
그러니까 저택 사람들도 내 군식구들이니까 버리지 말고 챙겨 달라는 거지? 하이고, 날 경계하면서 백작한테 접근도 못 하게 할 때는 언제고. 그나저나 호칭이 좀 달라진 것 같다.
“아가씨?”
매번 나보고 로한슨 영애님, 영애님 거리면서 거리 두기를 시전하던 집사가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날 도끼눈으로 보며 견제하더니 웬일이래? 저택에서 날 아가씨라 부르는 건 칸나 혼자였기에 무척이나 낯선 호칭이었다.
“예전에는 로한슨 영애님을 아가씨라고 불렀었습니다.”
아하. 에반젤린도 태어날 때부터 악녀는 아니었을 테니까, 좀 순수했던 시절에는 집사랑도 친해서 아가씨라고 불렸나 보다. 그러다가 점점 악녀가 돼가면서 거리 두기를 하면서 호칭이 변했나 보네.
이제 와 다시 호칭이 변한 이유는, 아마도 내가 회심하고 저택 사람들을 챙기는 모습에서 감명받은 게 아닐까?
그래도 이제 날 인정하려는 것 같다. 뒤늦긴 하지만 충성을 마다할 주인은 없을 것이다.
집사가 먼저 나서서 하인들을 선동해 준 덕분에 사과는 아니었지만, 그에 따르는 인사는 받은 셈이다. 덕분에 푸딩은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 이때다 싶어서 푸딩한테 공작저에 있는 성수를 좀 가져와 달라고 했다. 내 험담을 한 사람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신조를 지닌 푸딩도 기분이 풀렸는지 군말 없이 성수를 운반했다.
그나마 체력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성수로 부상자들을 치료하느라 한창이었다. 칸나도 헤나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겠다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나는 데이지랑 아이들의 상처를 살폈다. 돌리네는 지쳐 잠이 들어 있긴 했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다. 데이지도 괜찮았는데 율마의 상태가 제일 심각했다. 데이지는 울먹이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하마터면 율마를 잃을 뻔했어요. 그런데… 젤리 씨가 율마를 구해 주셨어요.”
젤리는 기특하게도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저택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해 줬다고 한다.
“맞아요. 멍멍이가 우릴 구해 줬는데, 근데 사람들은 멍멍이보고 악마 같은 놈이라 그랬어…!”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데이지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
“그런데, 그런데 난 멍멍이를 다치게 하기나 하고….”
화를 못 이긴 메리가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기는 치료받을 자격도 없다며 성수 병을 보고 기겁을 하기도 했다.
꺼이꺼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 대서 넌 잘못한 거 하나 없다고 달래 주었다. 어른들 여럿이 둘러싸서 잘못이 없다고 계속 반복하니 메리가 곧 수긍하며 진정했다. 젤리는 다쳤지만 그래도 자기의 선행을 알아봐 주고 편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기쁠 거다.
그나저나, 들어보니까 다들 젤리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하는데…, 괜찮으려나? 하루빨리 젤리를 구출해 내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이 영 마땅찮았다. 그냥 신전으로 순간 이동해서 젤리만 빼 올까? 분명 감시하는 사람이 있긴 하겠지만, 푸딩 능력을 활용하면 어려운 일은 아닐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젤리가 사라지면 내가 바로 범인으로 몰릴 거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에반젤린 님. 저희는 쉽게 죽지 않으니 염려 마세요.”
신전에서 젤리를 치료해 주진 않을 것 같아서 걱정하느라 한참 속을 끓이고 있었는데 푸딩이 내 마음을 읽었는지 조곤조곤 달래 줬다. 그렇지? 적어도 수인이 사람보다야 튼튼할 거 아니야.
“그리고 죽으면 뭐 어때요. 쓸모없는 놈. 에반젤린 님께 폐를 끼칠 바에야 죽는 게 나아요.”
푸딩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데 정작 내용은 무척이나 험악했다. 물론 젤리와 친하니까, 푸딩도 진심으로 말하는 건 아닐 거다. 어디까지나 젤리는 멀쩡할 테니 걱정 놓으라는 위로 같았다. 걱정하지 마, 젤리야. 내가 어떻게든 구해주마.
젤리도 염려스러웠지만, 한 사람 더. 여태 계속 마음 한쪽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의 안부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입에 침이 말랐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신경 쓰고 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내 놓았다.
“…가브리엘 경도 많이 다치셨니?”
“네….”
데이지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나도 같이 착잡해졌다. 가브리엘은 괜히 나랑 엮여서 계속 다치기만 하는구나 싶어 미약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때 바쁘게 돌아다니며 부상자를 돕는데 손을 보태던 라파엘라가 가브리엘의 이름을 들었는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단장님 이야길 하시던 중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다치셨다기에 걱정이 되어서요.”
“…로한슨 영애님이 걱정하셨다는 말을 들으면 단장님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라파엘라가 가브리엘이 쾌차하면 꼭 그 말을 전달하겠다며 약속했다.
“단장님은 마리크 주교가 아니라 저희 기사들과 함께 돌아갔습니다. 수하들이 최선을 다해 치료를 도울 테니 로한슨 영애님은 우선 자신의 안위에 신경 써 주세요. 영애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단장님은 나을 상처도 곪을 게 분명하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건 가브리엘은 파라로스 기사단과 함께 돌아갔으니 젤리와 다르게 곧바로 치료받을 확률이 높다는 거다. 만약 가브리엘이 나처럼 성수가 들지 않는 체질이었다면 끔찍했을 거다.
“그런데 라파엘라 경은 함께 돌아가시지 않고 왜 혼자 남아계시는 건가요?”
라파엘라에게 아까는 미처 하지 못한 질문을 했다. 라파엘라가 어깨를 으쓱댔다.
“마리크 주교님이 자기 기사들만 두고 가면 못 미덥지 않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더니 감시도 할 겸 지켜보라면서 절 지목하시더군요.”
아하…. 라파엘라도 인질 비슷한 거였구나. 마리크 주교는 진짜 난 사람이다.
“전 내놓은 자식이라 해도 바알 공작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로한슨 저택에 두면 분명 쓸모가 있겠다고 생각한 거겠죠.”
제국에는 공작가가 딱 셋이었다. 첫째는 개국공신이나 지금은 명성이 옅어진 호사퀸 공작가, 둘째가 라파엘라의 모친 되시는 바알 공작. 마지막이 타국의 왕이었다가 제국에 편입되면서 공작으로 봉해진 메이필드다.
호사퀸 공작가는 나랑 묶어서 숙청하고, 바알 공작가는 라파엘라랑 묶어서 보내 버릴 생각인가 보다. 제국에 셋밖에 없는 공작 가문 중에서 둘을 말아먹을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는 것 같다. 메이필드는 워낙 외진 데다 유사 타국 취급을 받는지라 굳이 신경 쓸 이유도 없을 테니 살려두는 거겠지.
테네브레이를 황위에 올리고, 공작가까지 꿀꺽 삼키면 그냥 제국이 마리크 주교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셈이다. 역시 흑막이라 그런지 수완이 장난 아니었다.
“저 꼴을 보면 마리크 주교님께서 예언이라도 하시는 모양입니다.”
라파엘라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것처럼 푸딩한테 당한 기사들을 보며 키득거렸다.
기사들은 조금 전처럼 고꾸라져 있지 않고 한치의 틀어짐 없이 바르게 서 있었다. 누가 보면 각이 예술이라면서 성기사의 군기에 엄지를 치켜들지도 몰랐다. 물론 정신이 돌아온 건 아니었고, 푸딩이 염동력을 써서 일어나 있는 것처럼 세운 상태였다. 누가 돌아다니다가 기사들이 쓰러져 있는 꼴을 발견해 신전에 고할까 봐 겉보기만 그럴듯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라파엘라가 기사들에게서 눈을 떼고 분위기를 환기하듯 주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조금 전에 대단하던데요? 저는 로한슨의 일원도 아닌데 같이 고개 숙인 거 아세요?”
아니, 너는 또 언제 고개를 숙였냐고…. 하긴 그 상황에서 혼자 우뚝 서 있기 좀 껄끄럽긴 했겠다. 원래 군중심리가 다 이런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