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44)
가브리엘이 성수가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를 빼돌리는 게 더욱 시급해졌다. 가브리엘에게 눈을 떼자 뚱한 눈으로 날 보고 있던 푸딩과 눈이 마주쳤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방치한 탓인지 푸딩은 꼭 주인이 외간 고양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볼을 부풀리다가 획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얼마 가지도 못해 다시 내 쪽을 돌아봤지만.
그 모습이 귀여워 푸슬푸슬 웃음이 나왔다. 역시 힐링 토템답다. 푸딩의 기분이 풀린 듯해 바로 리코에게 복제를 부탁했다.
“리코, 가브리엘 경의 모습을 흉내 내줘.”
“네, 영애님.”
리코는 바닥에 촛대를 내려놓은 후, 한 번 더 모습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리코의 모습이 가브리엘처럼 변했다.
“이건….”
가브리엘이 눈이 드물게 크게 뜨였다. 가브리엘에게 리코를 소개한 적이 없음을 깨닫고 설명을 해주었다.
“로한슨 저택에 불을 지른 에반젤린 로한슨의 정체예요.”
“…호사퀸 공작가의 집사가 말입니까?”
“정확히는 리코의 안에 들어 있는 악마가 불을 질렀다고 해야겠네요. 악마는 타인의 얼굴을 빌릴 수 있거든요.”
가브리엘도 공작저에 방문한 적이 있으니 리코와 안면이 있었나 보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해하는 듯 보였으나, 지금 사정을 다 설명해 주기에는 장소가 적절치 않았다.
리코는 자신을 알아보는 가브리엘에게 꾸벅 인사했다. 가브리엘이 가브리엘에게 인사하는 광경이라,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볼 괴상쩍은 장면이었다.
그래도 둘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말마따나 가브리엘과 리코를 세워두고 누군지 맞추어보라고 한다면 고민도 하지 않고 가려낼 수 있을 정도였다.
리코가 훔친 모습이 원본과 다르게 이질감이 있다는 건 알았으나, 가브리엘과 대놓고 비교해 보니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 꽤 다른 느낌이네.”
작게 중얼거리자 가브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소름이 끼치도록 빼닮은 것 같은데요.”
제삼자의 입장에선 다른 점이 보이는데 당사자가 보기에는 놀랍도록 닮아 보이나 보다. 생각해 보면 리코가 칸나로 변했을 적에도… 나는 이질감을 느꼈으나 정작 칸나는 소름 끼쳐 하고 무서워했지.
유일무이함을 깨트리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완벽히 똑같이 생긴 것에게 자신을 강탈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까?
하여튼 도플갱어를 마주치면 죽거나 미쳐 버린다는 괴담이 괜히 떠돌던 게 아니다.
“다르다고요? 잠시, 잠시만요….”
닮지 않았다는 말이 리코에게는 심각하게 들렸나 보다. 리코의 ‘가브리엘은’ 가브리엘을 파헤치듯이 주시하다 정답을 깨달은 사람처럼 팍 고개를 치켜들었다.
대체 뭘 알아챈 거지? 궁금해 보고 있으니 리코는 가브리엘이 입은 상처들을 그대로 따라 옮기기 시작했다. 발목부터 시작해 서서히 위로 타고 올라가 얼굴에 이르기까지.
살이 베이고 말라붙은 핏자국이 생겼다. 가브리엘의 고생한 흔적을 타임랩스 영상으로 시청하는 기분이었다. 저게 다 날 만나고 난 후에 생긴 상처들이라 이 말이지…. 어쩐지 나 하나 살자고, 가브리엘을 나락으로 밀어 넣는 느낌이라 폐부가 옥죄었다.
“이제 어떤가요…? 가브리엘 경처럼 보일까요?”
리코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바로 답을 주지 않으니, 리코가 푸딩에게 눈을 돌렸다. 푸딩은 리코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꽤 수준급인데? 이 정도면 신의 종들도 알아보지 못할걸?”
푸딩에게도 인정받을 정도이니 리코도 내 답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상처를 재현해 낸 리코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발견한 둘의 차이점은 부상의 여부가 아니었다. 한 번이라도 가브리엘이 날 보는 시선을 정면에서 맞닥트린다면.
숨이 막힐 정도로 숨김없이 드러나는 감정의 편린을 엿보았다면, 극명한 차이에서 괴리를 느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 간지러운 사실을 설명하려고 해도 입이 떨어질 리 없었다.
그러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리코의 의태가 가진 이질감뿐이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는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원본에 비하면 조잡해 보인다는 말을 잘 순화시켜 이야기했다. 리코는 아쉬워하며 한탄했다.
“더 잘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로한슨 영애님을 따라 하는 것보단 수월했는데….”
“나를?”
“네. 그게… 숙주였을 때의 감각이 남아있거든요. 영애님을 따라 하려고 하면 꼭 이치를 어기는 것 같은 거부감이 들어서 조금 힘들었어요.”
그럼 자칭 내 엄마인 쥐새끼는 나한테 엿을 먹이고 싶어서 거부 반응이 오는 걸 꾹 참아가면서까지 방화를 저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횡포를 부리고 다녔다 이 말이지.
“그런데 어째서 제 모습으로 변하신 건가요?”
가브리엘이 리코를 흘끔거리다 뜸을 들이며 물었다. 사정을 제대로 전해 듣지 못해 리코를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가벼운 농담으로라도 가브리엘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었으나, 지금은 미남이 둘이면 기쁨도 두 배 같은 헛소리를 지껄일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리코가 가브리엘 경을 대신해 감옥에 남아있을 거예요.”
가브리엘을 데리러 오기 전, 리코에게는 미리 허락을 구했다. 쥐의 능력을 사용해 가브리엘의 대타로 있어 달라고.
사실상 권유가 아니라 강요에 가까웠다. 리코는 자신이 로한슨 저택에 불을 지른 것도 아니면서, 마땅한 속죄를 한다는 양 기꺼이 제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경은 저와 함께 돌아가요.”
가브리엘이 돌아갈 곳은 신전이던가? 우리는 호사퀸 공작저로 향할 테니 함께 돌아간다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행선지가 어디든 간에 가브리엘이 있어야 할 곳이 햇빛 한점 들지 않는 음습한 지하 따위는 아니었다.
“영애님과 함께….”
가브리엘은 내 말을 음미하듯 곱씹었다. 몸 상태는 엉망이고, 성수가 들지 않아 어쩌면 상처를 치료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한발 늦게 찾아와 뒷북치는 내 말이 뭐가 그리 감동적이라고….
가브리엘이 나를 올려다봤다.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왜 날 저리 다정하게 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브리엘은 달콤한 말에 빠져있다가 퍼뜩 꿈에서 깨어난 듯 현실을 자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만약 마리크 주교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매우 위험할 겁니다.”
가브리엘이 리코를 염려하며 말했다. 자기는 손발도 제대로 못 움직이면서 누굴 걱정하는 거래.
그리고… 마리크 주교에게 걸리면 리코가 위험해진다는 사실 정도야 나도 잘 알았다.
가브리엘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까. 어차피 죽여야 하는 리코의 목숨을 더 유용하게 쓰는 것뿐이라고? 시간 벌이일 뿐이니 들켜도 상관이 없다고?
하나 사람의 목숨을 귀히 여기는 가브리엘에게 사람의 생명을 도구처럼 쓴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내가 가브리엘과 리코를 저울로 재보았을 때, 추가 기우는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에겐 목숨을 저울질한다는 가정조차 거북할 것이다. 저택 사람들을 지키려 망설이지 않고 제 몸을 내놓을 정도로 희생적인 사람이니까.
“다쳐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기사님보다는 사지가 멀쩡한 제가 훨씬 더 안전할 거예요.”
내가 답이 정해져 있음에도 침묵하고 있자 리코가 대신 입을 열었다.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있습니까?”
“기사님께서 다치신 것도 다 제가 빌미가 되어 벌어진 일이니까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다치는 건 저 혼자로도 충분….”
“기사님. 감옥에 남아계신다면 그게 바로 로한슨 영애님의 발목을 잡는 일이에요.”
리코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가브리엘은 내가 언급되자마자 약점에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가 변명처럼 대꾸했다.
“전…. 영애님의 족쇄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영애님께 저는 그런 가치조차 없고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말하는 모습이 아주 가련했다. 가브리엘의 자조적인 말을 듣고 있자니 양심이 날카로운 흉기에 푹 찔린 듯 따끔거렸다.
무가치하다고. 분명 그리 생각했던 때가 있긴 했다.
이 세상의 전부가 그렇듯, 가브리엘 역시 내게 소설 속 등장인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외모부터 행동, 말투, 신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조형된 캐릭터라고 여겼다. 백지에 검은 선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꾸물꾸물 기어 나와 내게 감정을 느낀다고 전해 봤자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내 가치가 폄훼되며 같은 신세로 전락하는 기분이라 오히려 매스껍고 거슬렸었지.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난 꽤 가브리엘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가브리엘이 다쳐 감옥에 구금되어있다는 편지를 받고 분노했을 때 깨달았다.
잃고 나서야 감정을 자각하다니, 내가 무슨 여주도 아닌 로판 남주라도 되는 거냐고 나 자신에게 따지고 싶었다.
눈치 빠른 리코는 그 일을 근거로 삼았다.
“로한슨 영애님께서…. 기사님이 갇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화를 내셨어요. 저라면 의미 없는 사람에게 그리 감정을 쏟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제 입장에서는요.”
내 입장에서도 그랬다. 그나저나 내가 조금 전에 가브리엘을 아낀다며 간지러운 말을 하지 않았나? 분명 가브리엘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전부 내 기억에 착란이 온 거야?
왜 내 말을 안 믿지? 젤리가 옆에 있었다면 벌써 젊은 나이에 치매가 온 거냐며 웃어댔을 거다.
“아끼신다는 게…. 절 위로하려고 하신 빈말이 아니셨군요.”
아. 애초에 내 말을 신뢰하지 않았구나. 그저 다친 자기를 위한 입바른 말인 줄 알았나 보다.
가브리엘은 나를 떼놓고 보아도 분명 빛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가브리엘은 내게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내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서라도 가브리엘은 가치 있는 사람이다. 올곧고, 선을 향하며, 남을 위해 기꺼이 제 몸을 희생하는 존재가 가치 있는 게 아니라면, 다른 누가 귀하겠어.
다행히 리코의 말은 어느정도 수긍한 듯 했다. 나보다 리코를 더 신뢰하는 것처럼 느껴져 살짝 기분이 묘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대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브리엘은 리코의 말을 듣고서도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도 리코를 저 대신 희생시키는 건 싫나 보다.
“저는 이미 사람이 아니니 괜찮아요. 악마의 숙주가 되어 보시다시피 이런 마술을 부릴 수도 있으니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기사님보다야 안전하겠죠.”
리코는 가브리엘이 반박할세라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무엇보다 공작가에 있다간 언제 의식을 잃고 제 딸을 해칠까 두려우니 차라리 멀리 떨어져서 갇혀있는 게 마음이 편해요. 그러면서 기사님과 로한슨 영애님께 도움이 된다면 더 좋고 말이에요.”
결국, 리코는 자신이 이미 악마의 숙주가 되었으며, 지금은 악마에게서 주도권을 잠깐 탈환한 상태라 언제 금 다시 의식을 잃을 수 있다며 사정을 밝혔다.
가브리엘은 겨우 수긍했지만, 내심 자신은 구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결국, 리코의 희생을 받아들인 것은 그편이 훨씬 이점이 크다고 판단 내렸기 때문일 거다.
리코를 희생시키는데 가브리엘을 설득하는 것마저 리코가 하게 만들었네. 양심이 제발 그만 좀 괴롭히라고, 아프니까 좀 챙겨 달라며 자기주장을 해댔다. 좁은 감옥에 사람이 셋 있는데, 그중 나쁜 건 나 혼자였다.
“이제 묶어도 되나요?”
푸딩이 사슬을 덜그럭대며 리코를 구속해도 되겠냐며 물어왔다. 어쩐지 안심이 됐다. 한 마리 있는 고양이도 반려 인간을 닮아서 그런 것인지, 사춘기라 그런지 아무튼 성격이 꽤 나빴다. 다행이다. 인간성이 바닥을 치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
리코에게 사슬을 채우는 푸딩은 왠지 모르게 무척 흥겨워 보였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닌지 가브리엘이 푸딩에게 즐거워 보인다고 하자 대리 만족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대리만족? 순간 잘못들은 줄 알았다. 혹시 우리 애가 조금 이해하기 힘든 취향이 있는 걸까? …이게 다 사춘기라서 그런 거다.
푸딩의 달갑지 않은 취미생활은 금방 끝이 났다. 사슬에 묶여 있는 리코는 감옥에 처음 들어왔을 때 마주한 가브리엘의 모습과 똑같았다. 사람이 바뀌었지만, 지하가 어두운 만큼 발각되는 일이 늦을 것이다.
가브리엘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영애님.”
“네. 가브리엘 경.”
부르길래 답을 했는데도 이어지는 말이 없어 가브리엘 쪽으로 돌아봤다. 처참한 상태로 구속된 자신의 형상을 보고 있던 가브리엘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가브리엘은 머뭇거리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절 구분하기 위한 상흔이 있습니다. 단순히 다쳐서 생긴 흉터가 아니라, 표식과도 같은 겁니다.”
“표식이요?”
“…네.”
가브리엘은 제 수치를 꺼내어 보여주기 부끄럽다는 듯 눈을 감았다. 다시 뜨인 눈에는 체념의 빛이 어려 있었다.
가브리엘이 느릿하게 팔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하려고 하는 행동이 엇나가기만 했다. 가브리엘은 헛손질하며 말을 이었다.
“황족을 구분하기 위한 표식이라더군요.”
“황족이라니…!”
가브리엘의 말에 멀찍이서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코가 사슬에 묶인 채 경악을 금치 못하고 소리친 모양이다. 다시 말해 놀란 것도 리코뿐이라는 말이었다.
“이미 알고 계셨었군요.”
가브리엘은 황족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태연한 내 태도를 보고 그렇게 추론한 모양이었다.
외모가 그리 닮은 데다가 나이도 똑같은데 오히려 황족인 걸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였다. 오히려 왜 못 알아보는 건지 묻고 싶었다. 뭐, 변신할 때까지 다들 애써 기다려 주는 마법 소녀적 연출, 이런 거야?
계속 말을 섞는 내내 가브리엘은 셔츠 위에서 손을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표식을 보여 주려 단추를 푸려는 듯했다.
부상을 입은 지 오래되지도 않은 손으로 세심한 움직임이 가능할 리 없다.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빠를 것 같아 표식의 위치를 물었다.
“표식이 어디 있나요?”
보통 옷깃이나 머리카락에 가려질 수 있게끔 목 뒤에 있지 않나? 대수롭지 않게 물었으나
가브리엘은 눈을 내리깔며 수줍게 답했다.
“심장 부근에 있습니다.”
“…심장 쪽이군요.”
하마터면 허튼소리를 할 뻔했다. 평정을 가장하며 가브리엘의 말을 따라 읊었다.
내 손가락이 갈 길을 잃고 허공만을 가리키고 있자 가브리엘이 가져다가 정확한 위치를 집어 주듯 자신의 심장 위로 콕 찔렀다. 손이 아니라 팔을 움직이는 데는 제약이 없던 탓이다.
손가락 끝에 온기가 닿았다. 가브리엘은 원래 나와 비교하면 체온이 높았다. 그런데 몸이 아픈 탓일까 더욱 열이 뜨겁게 느껴졌다. 난 내 손가락이 가브리엘의 가슴을 뚫고 피부 아래 있는 심장을 찌른 줄 알았다.
서둘러 손을 뗐다가, 단추를 풀려면 다시 가브리엘에게 손을 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여러 의미로 울고 싶었으나 내 위신을 생각해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난 하늘을 나는 까마귀도 떨어트린다는 악명높은 에반젤린 로한슨이다. 가브리엘이 다친 모습을 봤을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이런 일로 울까 보냐.
“그럼 부탁드립니다.”
가브리엘은 내가 단추를 수월하게 풀 수 있게 배려해 주는 건지 목을 뒤로 젖혔다. 나야말로 부탁이니 그런 배려는 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
눈앞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 맹수 같은 거였다면 목덜미가 물어 뜯겼을 거다. 왠지 지금의 가브리엘이라면 반항할 수단도 없다며 목을 물게 허락할 것 같기도 했다.
가브리엘이 내게 바짝 붙어 있기에 맞닿은 몸에서도 열감이 느껴졌다. 자세가 바뀌자 가브리엘의 체중이 내게 쏠렸다.
난 최대한 가브리엘의 살결에 닿지 않으려 노력하며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손길은 조심스럽게. 목부터 시작하여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단추 네 개를 내리 풀고 손을 뗐다. 영겁 같은 시간이 끝났다. 단추를 전부 다 풀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표식이 명치나 아랫배에 있는 게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할 일을 끝내고 리코 쪽을 바라보았다. 어서 상흔인지 표식인지를 복사 붙여넣기를 하고 나를 곤궁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좋겠다.
그런데 정작 리코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봤다. 푸딩은 한 손으로 리코의 눈을 가리며 매서운 눈으로 가브리엘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푸딩의 표독스러운 얼굴을 마주한 것은 아주 잠시였다.
푸딩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구김을 없애고 천사 같은 얼굴로 변모했다. 여태껏 봐왔던 푸딩이라면 ‘감히 에반젤린 님께 시중을 들게 해!’ 하며 속으로 발을 구르고 있을 것 같았다.
가브리엘의 가슴께에는 그 말대로 표식이 남아 있었다. 문양을 가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흉터에 불과했다. 가브리엘이 상흔이라 말한 까닭을 이해했다.
“황족은 태어날 때 둥글게 몸을 만 용의 문양을 새깁니다. 제 몸에 새겨져 있었으나, 저조차도 의미를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꼬리를 먹는 용? 신화에 나오는 우로보로스? 아무리 봐도 용이 아니라 뱀 같은 거로 보이는데. 아마 가브리엘이 말하지 않았다면 용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황족한테 영원을 의미하는 우로보로스라…. 대충 무한한 영광을 위하여 뭐 이런 의미 아닐까.
가브리엘은 이어 설명했다.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도 저는 태어날 때부터 성수가 들지 않았을 겁니다. 표식을 새기던 중 황제 폐하가 제 부정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셨을 테지요. 그것이 제가 겪은 불행의 시초일 겁니다. 제 이상을 알아차린 폐하께서는 갓난쟁이였던 절 난산 끝에 죽었다고 발표하시고 존재를 지우셨다고 합니다.”
혈육인 걸 알게 되었으면서도 가브리엘의 호칭은 달라지지 않았다. 거리감 있는 호칭에서 가브리엘이 자신의 신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가 이어졌다고 하나, 버림받았으니 온전히 마음을 두지 못할 거다. 가브리엘은 한발 더 나아가 제게 남겨진 표식을 흉측해 하기까지 했다.
“낙인처럼 찍힌 것이 흉물스럽지 않으십니까?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정상적인 형태라면 저처럼 흉으로 남을 게 아니라 색이 다른 피부 일부로 보인다고 하더군요.”
아마 예레미아에게서 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브리엘은 어리광을 피우며 중얼거렸다.
“당신을 만난 이후로, 성수 따위는. 신의 사랑 같은 건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서…. 태어난 순간에 신의 축복을 갈구했다는 것이, 그런데도 신에게 외면당했다는 흔적이 남아 있는 게 싫었는데….”
가브리엘의 말을 들으며, 어째서 가브리엘이 성수를 빼돌려 토텐 부인에게 지원해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신이 실존하고, 신전의 권력이 막대한 이 세계에서 성수가 들지 않는 건 죄악이었다.
심지어 가브리엘이 몸담고 있던 곳은 신의 총애가 적나라하게 다가오는 신전이었다. 그 와중에 만난 라이더 토텐은 가브리엘이 조우한 최초의 같은 부류가 아니었을까?
그럼 그 뒤를 이어 나타난 나는? 동질감을 느꼈을까? 그래서 가브리엘은 날 처음 봤을 때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 말한 걸까.
죽음에서 되돌아와, 성수가 통하지 않는 자들에게 다른 방법으로 생을 연명할 수 있게 만들어 준 나는… 가브리엘에게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가브리엘은 신을 숭배하지 않았다. 모두가 태양을 숭앙하며 신에게 기대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가브리엘은 대체 무엇에게 의지했을까. 신 대신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았으려나.
가브리엘은 안식을 구하려는 듯 내 품으로 더욱 파고들어 어깨에 기대었다. 목덜미에서 가브리엘의 더운 숨이 느껴졌다. 가브리엘은 속삭이듯 고백했다.
“영애님을 만나기 이전의 흉 같은 건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브리엘은 자신의 얼굴 역시 보이기 싫어했다. 목덜미로 눈물이 떨어지지도 않았으나 가브리엘이 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손으로 눈을 가려줬다.
눈을 깜빡이는지 긴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가브리엘은 내 손이 시원한지 열을 식히려 손길을 마음껏 누렸다. 그러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가브리엘이 눈을 감았음을 알아차렸다.
가브리엘의 숨은 꺼질 듯이 미약해지다 작고 일정하게 바뀌었다. 시야가 가려져 있어서인지 기절하듯 잠에 빠진듯했다. 이런 몸으로 지금까지 멀쩡히 대화를 나누고 버티고 있던 것이 기적이다.
“가브리엘 경?”
확실히 깊은 밤에 빠졌는지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감옥에서 여태껏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던 몸이 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에 도달하자 한 번에 무너진듯했다.
가브리엘의 등에 손을 얹어서 달래듯이 토닥였다. 기왕이면 가브리엘이 잠들기 전에 해 줄 것을 하고, 잠시 아쉬워하다 미련을 버렸다. 깨어나고 해 주면 될 일이다.
아차. 가브리엘이 잠들고 나니까 이곳에 있는 게 둘 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남사스러운 짓은 안 했으니 망정이지. 하지만 푸딩이 ‘감히 누구한테 기대서 잠들어!’ 하며 성을 낼 게 분명하다.
‘어라? 아니네.’
여전히 흉흉하게 가브리엘을 노려보고 있을 줄 알았던 푸딩은, 내 예상과 달리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버릇없이 누구한테 기대서 자는 거람.”
내가 했던 예상과 똑같긴 했으나, 훨씬 누그러진 어조였다. 푸딩은 부러 툴툴대며 가브리엘을 나무랐으나, 은연중에 대우가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굳이 따지자면 칸나를 대하는 태도와 비슷했다.
방금 가브리엘을 보고 동정심이라도 생긴 걸까? 사춘기 한정으로 공감 능력이 하향 선을 찍어 버린 우리 푸딩이…? 아쉽게도 사춘기의 심리를 읽어내는 법을 몰라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푸딩. 일단 리코의 눈을 가리는 손은 좀 치워주면 안 될까…? 마음속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다행히 수신상태가 양호한지 푸딩이 손을 치워줬다.
대체 왜 리코의 눈을 가리고 있던 거냐고 물어보자 푸딩은 자기 자신이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답했다.
“저 자식이 자기 흉을 남에게 보이기 싫다고 해서 그만….”
그러니까 가브리엘이 자신의 흉터를 끔찍하게 생각해서 보여주기 싫었다는 말에 무심코 리코의 눈을 가렸다는 말이다. 푸딩이 나름대로 가브리엘에게 신경을 써주기 위해서 그런 거였다.
기특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우리 애가 언제 이렇게 다 자라서 다른 사람도 생각해주는 배려심 넘치는 아이로 자란 거지? 애들은 진짜 빨리 크는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푸딩의 손에서 벗어난 리코는 수월하게 가브리엘의 표식을 복사해 냈다
푸딩의 말이 맞았다. 가브리엘이 지금 잠들어있어서 다행이다. 가브리엘은 손발에 난 상처보다, 어려서 기억나지도 않은 시절 남은 흉터를 더욱 불쾌하게 여겼다. 깨어있었을 때라면 자신과 같은 몸에 원치 않던 낙인이 다시 새겨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리코, 부탁할게.”
마리크 주교라면 예민한 감각으로 감옥에 있는 사람이 가브리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리코에겐 악마가 깃들었고, 고로 마리크 주교에게 걸린다면 리코는 단순한 방법으로 죽지는 못할 거다.
“…고마워.”
나는 잠시 머뭇대다 리코에게 감사를 전했다. 리코는 대체 왜 내가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 이렇게나마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네요.”
리코를 가브리엘의 대신으로 삼으며 내가 들먹였던 것과 비슷한 변명이었다. 하필 리코가 망가진 가브리엘의 모습을 하고 있어 죄책감이 더욱 배가됐다.
하지만 계속 감옥에 있어봤자 가브리엘의 치료 시간만 늦춰지고, 내 양심만 더 아파질 뿐이다. 그만 호사퀸 공작저로 가야겠다.
“로한슨 영애님, 잠시만요.”
리코가 떠나려던 날 불러세웠다. 리코는 손을 꾸물대더니 푸딩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뭘 주는 건가 했더니, 아주 충격적이었다. 리코가 준 것은 손가락이었다.
“…우웩.”
푸딩이 구역질이 난다는 듯 잘린 손가락을 쓰레기 집듯 잡았다. 대체 손가락은 왜 준거지…? 의아해하기를 잠시, 손가락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부피가 점점 커지다 털이 돋아나며 곧 쥐로 변했다. 공작가에서 질리게 본 그 쥐였다.
푸딩이 아자젤의 몸에서 본체인 뱀을 꺼냈던 게 생각나, 이 쥐도 악마의 본체인가 잠시 고민했으나 아니었다. 리코가 곧바로 손가락 쥐의 용도를 밝혔다.
“데리고 가세요. 만약 일이 생긴다면 그걸 통해 전달 드릴 수 있어요.”
리코의 말을 듣고 보니 전화기 대용이란 말이었다. 푸딩은 싫어하는 티가 역력하면서도 쥐를 차마 내게 쥐여주긴 싫은지 자기가 쥐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와 내게 기대어 있는 가브리엘도 부축해 안아 들었다.
나는 원체 힘이 좋았고, 성인 남자 정도야 가뿐히 들 수 있었지만, 나에게 유독 헌신적인 푸딩은 날 고생시키는 법이 없었다.
로판 1호 공주님 안기는 푸딩과 가브리엘이 차지했다. 푸딩도 수인인지라 힘이 좋은지 가브리엘을 들고서도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 속임수였다.
보니까 손과 가브리엘 사이가 띄어 있었다. 염력으로 가브리엘을 띄우고 있는 거였다. 그럼 굳이 공주님 안기 자세를 할 필요가 있나?
대체 왜…? 혹시 가브리엘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