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45)
가브리엘을 데리고 호사퀸 공작저로 돌아왔다. 공작은 돌아온 면면 중에 리코가 없다는 걸 보고 잠시 침음했다. 가브리엘을 대신해 사지로 들어갔다는 걸 실감하니 그답지 않게 안타까운 마음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리코를 죽음에 몰아넣은 데에 일조한 것 같아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아니면 그저 내가 느끼고 있는 불편한 심정을 공작에게 대입하고 있을 뿐일지도 몰랐다.
공작에게 가브리엘이 머무를 방을 내어 달라고 했다. 공작가의 사람들에게 굳이 가브리엘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없기에, 될 수 있으면 인적이 없고, 접근이 어려운 곳이면 좋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공작은 내 옆방을 추천했다. 하긴…. 공작저에 막 왔을 때는 세기의 악당 취급을 받으며 피해졌고, 성수를 펑펑 뿌리고 나서는 예의를 차린다며 내 앞에 알짱거리지 않았으니 가장 접근이 어려운 곳이긴 했다.
가브리엘은 잠시 정신을 차렸다가, 공작저에 온 것을 확인하고 다시 쓰러졌다. 열이 잔뜩 올라 몸이 불덩이였다. 여태까지 감옥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가브리엘이 식은땀을 흘리며 앓아대자 가만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치료사가 필요해요.”
호사퀸 공작을 찾아가 의사를 요구했다.
공작은 내 말을 듣자마자 당장 치료사들의 프로필을 쫙 뽑아 넘겨주었다. 꼭 미리 찾아놓은 것 같아 상상 이상의 재빠른 일 처리에 감탄하며 고맙다고 하자 공작이 덧붙여 말했다.
“…아게라를 위해 찾았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말하는 공작의 얼굴이 굉장히 묘했다.
“하나같이 아게라를 치료할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던 놈들이다. 하나, 네 기사에게는 쓸모 있을 수도 있겠지.”
의사들이 아게라를 치료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성수가 없던 원래 세계에서도 치매는 완치할 수 없는 질환이었다.
이 세계에는 성수라는 치트키가 있었고, 그만큼 의사들의 입지도 적었다. 의사들은 주로 성수를 사들이기 어려운 평민들을 진찰했고, 대부분 전문적으로 다루는 분야도 외상이었다.
그런 의사들이 아게라의 치매를 치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입이 무거운 자들이 있다. 그자들을 불러주마.”
공작은 그중에서도 유능한 사람 몇 명을 꼽았다.
아게라를 진찰하고도 병증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고 다니지 않은, 입이 무거운 자들이니 가브리엘을 보여 줘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그들의 입이 무겁다기보다는, 애초에 공작부인이 광증을 앓는다며 말한 사람들은 지금 세상에 없지 않을까 싶었다. 있었다면 진작 공작이 손을 썼겠지. 아무튼, 공작이 베푼 뜻밖의 배려가 놀라웠다.
“…조부님께서 당장 가브리엘 경을 내쫓으라 엄포를 놓으실 줄 알았어요.”
로한슨 저택 사람들을 숨길만 한 장소를 알려 달라 했을 때도 날을 세웠던 공작이 아닌가. 이렇게 의사를 바로 소개해 줄지 몰랐다.
더군다나 공작은 성기사를 성수로 치료하면 되는 일인데 굳이 의사를 찾는 이유에 대해 사정을 캐묻지 않았다. 원래의 공작이었다면 아게라와 공작가가 위험에 처할만한 빌미를 제공할 가브리엘을 당장 내쳤을 텐데….
혹시 전에 가브리엘에게 쥐를 제압할 방법과 성수를 제공받은 은혜 때문인가? 아니, 그렇다기에 공작은 은원과 계산이 까다로운 작자였다. 가브리엘과의 거래는 나를 공작저로 데려와 보호해 주는 것으로 충분히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내가 의아해하자 공작은 뜸을 들이다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네가…. 꼭 과거의 나 같구나.”
“…….”
그러니까 가브리엘에게서 아게라를, 내겐 공작 자신을 겹쳐보았다는 말이다. 결코, 날 아끼지 못할 것 같다면서 자기를 겹쳐보는 건 참 잘하시네.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부끄러웠는지 금방 말을 돌렸다.
“더군다나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정당한 대가를 내놓으라고.”
대가? 내가 공작이 흔쾌히 내게 협조할만한 일을 했나? 혹시 쥐를 전부 처리해서 그런 건가? 하지만 그 대가는 로한슨 저택 사람들을 빼돌릴만한 장소를 알려 주는 거로 끝나는 거 아니었어? 의문을 토하기도 전에 공작이 설명을 시작했다.
“네가 가브리엘 경을 데리러 갔을 때…, 아게라를 찾아갔다.”
아게라를 미끼로 써 쥐를 잡았으니 아게라가 무사한지 확인해 보러 간 것이 분명했다.
공작은 날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늘 기저에 벽을 세워놓고 있던 사람에게서 은근한 호의가 느껴졌다. 아니, 날 사랑할 수 없을 거라면서 츤데레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아게라에게 무슨 변화가 생기기라도 한 건가?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게라의 기억이 조금 돌아왔더군.”
아. 공작이 말을 한순간 잠들기 전에 리코를 알아보았던 아게라가 떠올랐다. 아게라가 기적적으로 리코를 알아본 게 한순간의 꿈은 아니었나 보다. 온전히 기억이 돌아온 건가? 나조차도 이유를 잘 모르겠으나, 공작은 아게라가 기억을 되찾은 것이 내 수완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지금 공작 안에서 내 입지는 딸에게 기생했던 악마 같은 손녀가 아니라, 아내의 은인으로 격상한 모양이다. 핏줄보다 은인이 대우가 좋다니 이것 역시 공작다웠다.
나는 딱히 아게라를 치료하기 위한 일은 한 적이 없으나 공작의 오해를 정정해 줄 이유는 없었다.
“기억은 어느 정도로 되찾으셨나요?”
“대부분의 일은 희미하지만 어렴풋이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아마란스가 죽은 것도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잠시 걱정이 되었다. 아게라는 원래도 정신력이 약해 보였다.
기억을 되찾고, 죽은 딸을 그리워해, 되살리려다 악마를 불러냈고. 그 악마가 수십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갔음을 깨닫고 다시 정신을 놓지는 않았을까? 공작은 몰라도 어쩌면 아게라에겐 프릴 가득한 드레스를 입고 양산 아래서 정원은 노니는 것이 훨씬 행복했을지도 몰랐다
망각은 축복이니까.
“…아게라가 네가 보고 싶다더구나.”
“제가 아마란스가 아닌 에반젤린 로한슨이라는 걸 아시면서도요?”
“그래. 아마란스의 딸을 보고 싶다고 했어.”
아니면 한차례 앓았다 내성이 생겼을 수도 있고. 공작은 당장 내가 아게라를 만나주길 바라는 투였다.
“…나중에요.”
약간 망설여졌으나 만남을 미루었다. 여태 아게라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인 척하며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상대가 기억을 되찾았다면 상황이 달라지는 법이다. 공작도 처음에 내게 와인 잔을 던졌는데, 아게라라고 딸인 척 연기했던 날 반길까?
공작은 내 고집을 들어주었다. 아게라가 보고 싶다고 강압적으로 끌고 가지 않고 내 핑계를 봐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우선 가브리엘 경부터 치료하고 싶어요.”
공작은 그날 밤 당장 의사들을 납치하듯 데려왔다. 공작의 부름에 응한 사람은 세 사람이다. 중년의 여인, 노년의 남자,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
셋은 전에도 공작에게 휘둘린 전적이 있어 자세한 설명도 없이 끌려왔는데도 여유가 넘쳤다. 그 여유도 날 앞에 두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헉! 로, 로한슨 영애님.”
공작을 앞에 두고서도 떨지 않더니 내가 더 무섭나 보다. 그나마 중년의 칼미아라는 사람은 날 보고도 흥미로워하며 눈을 빛냈다.
“오…. 정말 소문의 로한슨 영애님이신가요?”
“그래.”
괴짜 같았으나, 클리셰대로라면 저 전두엽이 어설퍼 보이는 칼미아가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을 거다. 그래서 나무라지 않은 것인데 나 대신 다른 의사들이 칼미아를 말렸다.
“…돌았나, 자네? 입조심 해!”
“왜요? 혹시 무섭나요? 저희가 필요해서 부르셨을 텐데, 쓸모 있는 사람을 죽일 리 없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
쓸모가 없어도 죽이진 않는데…. 그래도 칼미아의 튀는 행동 덕분에 다른 둘도 긴장을 푼 것처럼 보였다.
의사들을 데리고 가브리엘이 머무는 내 옆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의사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경고했다.
“여기서 본 것은 절대 밖에서 이야기하지 말렴.”
셋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미아도 긴장이 되는지 장난 같은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서서히 문을 열고, 의사들은 방 안에 있는 가브리엘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우와…. 어떻게 살아계시는 겁니까?”
칼미아는 능숙하게 가브리엘을 진단하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다른 반응도 있었다. 환자가 가브리엘이라는 걸 알아차리자 어린 의사는 불만을 금치 못하고 툴툴대기 시작했다.
“아니, 기사단장이라면 저희에게 맡길 필요도 없이 성수를….”
칼미아가 저래 보여도 눈치는 있는지 어린 의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애초에 성수가 통했다면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을 거다. 어린 의사는 곧 그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공작부인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치매는 생각보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평민 사이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다.
하지만 지금 상대는 신전의 기사, 하물며 기사 단장이다. 기사단장이 태양신을 속이고, 저주받은 몸으로 신전에 들어간 것은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는 극중한 죄였다.
의사들은 자신들이 신을 속여먹는 역천의 기사를 치료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어린 의사는 불경함을 견디지 못하고 짐을 챙기고 나가려 들었다.
“저, 저는 못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성수를 써서 치료하지 않는다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거기에 확인사살을 날리라고요? 그것도 이단 학살이 한창인 지금요? 전 죽기 싫습니다.”
어린 의사가 방을 나서려 들자 푸딩이 문을 막아섰다.
나이스 어시스트. 푸딩에게 마음속으로 엄지를 척 세웠다. 그냥 보낼 수는 없지. 방비 없이 내보냈다간, 이 의사가 신전을 찾아갈지도 몰랐다.
애초에 가브리엘을 치료하는데 손을 보탤 사람을 내보낼 생각도 없었지만. 이렇게 사전에 싹을 도려내는 건 공작이 했던 짓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건가. 이상한 걸 닮아버렸다.
어린 의사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내 손이 닿자 겁을 먹은 듯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래도 내가 무섭기는 하나 보네. 좋아, 그럼 이대로 가자. 오랜만에 악녀다운 면모를 잔뜩 보이기로 했다.
“이름이 뭐지?”
한차례 소개를 들었으나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칼미아뿐이었다. 이름을 다시 묻자 어린 의사가 이를 악물며 답했다.
“…히솝입니다.”
“그래, 히솝.”
손에 힘을 주어 히솝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당장 사람을 주저앉힐 정도로, 하지만 정말 쓰러지지는 않도록 꽉 힘을 줬다. 그리고 눈을 파헤칠 듯이 뻔히 바라보았다.
히솝은 공포에 질린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지 고개를 숙이지도 못했다. 간헐적으로 사시나무 떨리는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신전으로 가서 파라로스 기사단의 단장인 가브리엘이 호사퀸 공작저에 있다 고해할 셈인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지만 방금 네 입으로 신전에 가서 일러바치겠다고 고백한 거 아닌가?”
“제가 언, 언제 일러바치겠다고 했나요…!”
“방금 그렇게 말했잖니.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거기에 확인사살을 날리라고요? 그것도 이단 학살이 한창인 지금요? 전 죽기 싫습니다.’라며. 참 이상하지. 이단으로 몰려 죽는 것은 무서워하면서, 난 두렵지 않니?”
고저 없이 히솝이 내뱉었던 말을 그래도 읊어 주며 협박을 덧붙였다. 히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애초에 가브리엘 경이 앓아누우신 걸 아는 건 우리뿐인데, 누가 말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신전의 귀에 들어가 이단으로 몰려 죽겠어?”
“전 결코 그럴 마음은 없었습니다! 전 환자의 사생활을 내다 파는 놈들이랑은 다르단 말입니다!”
히솝은 억울해하는 투였다. 그 말을 들어보면 의사 중에서는 환자의 병증을 정보로 취급해 팔아먹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보나 마나 이단이라며 신전에 정보를 주었을 게 분명했다.
히솝은 딱 보니 그런 자들을 혐오하는 듯했는데, 같은 부류로 묶이니 화를 낼 만했다. 히솝이 무고하다는 건 나도 잘 알았다.
공작이 알선해 주었고, 아게라의 일도 비밀로 잘 지키고 있던 의사였으니까.
“우리 사이에 신뢰가 없는데 그걸 어떻게 믿지?”
하지만 가브리엘이 감옥을 벗어났다는 걸, 하물며 성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자를 밖에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히솝이 벗어날 수 있는 건 가브리엘이 낫거나, 마리크 주교가 몰락한 다음이다.
“멋대로 데려와 놓으셔 놓고…!”
“말은 바로 해야지. 너흴 데려온 건 조부님이시지. 게다가 문을 열기 전 나는 분명 경고를 했고, 그때까지 자리에 남아 있던 건 바로 너였어.”
히솝은 말을 잃었다. 그 말대로 난 나름대로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벗어나고 싶다면, 가브리엘 경을 살려. 무조건.”
히솝은 입을 다물었다. 공작가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가브리엘을 치료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제가 만약 기사단장께 수를 쓰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대에 대한 신뢰는 없지만, 히솝, 네가 치료사라는 건 잘 알아. 긍지를 아니 환자에게 괜한 수를 쓰지는 않을 테지.”
물론 이것 역시 히솝에 대한 신뢰라기보다, 히솝을 알선해 준 공작에 대한 신뢰에 가까웠다. 공작이 아게라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은 종자를 살려둘 리 없지 않은가.
히솝은 개인에 대한 신뢰는 없으나, 의사로서는 믿는다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입꼬리를 올려대는 이상한 얼굴을 해댔다. 그리고 끝내 고개를 주억였다.
“만약… 기사단장을 치료해 낸다면 제게 사, 사, 사과를….”
“사과 대신 감사를 전하지.”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히솝은 고맙다는 말을 듣는 걸로도 충분한지 수긍하고 꼬리를 말았다.
히솝은 내게 눈을 돌리고 본업에 전념하려는 듯 가브리엘을 살피기 시작했다. 배턴 터치를 하듯 히솝에게 자리를 넘긴 칼미아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방금 언쟁을 한 걸 보고서 내가 무섭지도 않나 보다.
“히솝을 길들이신 건 잘하셨습니다.”
칼미아가 간신배처럼 달라붙어 내 선택을 추켜세웠다.
“그래 보이진 않아도, 저희 중 가장 실력이 좋은 게 히솝입니다.”
그건 꽤 놀랄 말이었다. 클리셰적으로는 괴짜인 칼미아가, 연륜으로는 노인이 가장 의학적 지식이 뛰어날 줄 알았다.
“아니라면 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어요.”
처음엔 반신반의했으나 치료하는 걸 지켜보니 칼미아의 말이 맞았다. 히솝은 실력이 좋았다. 특히 약초로 약을 제조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왜 신전에서 이단이라는 소리를 하면서 히솝을 몰아세우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신만이 하사할 수 있는 은총인 성수에 히솝의 제조약이 도전장을 던지는 것으로 보였을 거다. 성수만이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는 위업에 금이 갈 테니까.
셋이 달라붙어 밤을 꼬박 새운 덕에 다음 날 아침에는 가브리엘의 열이 떨어졌다.
한시름 돌렸으니, 이제 가브리엘을 핑계로 눈을 돌렸던 것들을 마주할 차례였다.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한 아게라와 어제 하루 종일 바닥을 구르며 울부짖었다는 마브카 말이다.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으나 가브리엘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내 방문 앞에 서 있는 마브카를 마주쳤다.
헤이즐이 낭패 봤다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 하필 옆 방이라. 마브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문짝을 노려보고 있다가 날 발견하고 냉큼 달려들었다.
“마브카!”
헤이즐은 여전히 마브카를 말리지 못했다.
“영애님이 엄마를 데려간 거죠!”
마브카는 옴팡진 손으로 나를 마구 때렸다. 서럽게 우는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솜방망이와 다를 바 없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이를 매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어딨어? 엄마…!”
서글프게 리코를 찾는 아이에게 리코가 가브리엘을 대신해 감옥에 갇혀있다는 설명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엄마 돌려줘…. 마브카 엄마 돌려주세요….”
날 때리는 힘이 점점 약해지더니 마브카는 결국 내 드레스 자락을 꽉 붙잡고 내게 매달려 눈물을 펑펑 흘렸다. 푸딩이 애가 우는 모습을 질색하며 보고 있다 물었다.
“기억을 지울까요? 슬퍼할 거라면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망각은 축복이었다.
푸딩의 말에 잠시 솔깃한 것도 사실이나 고개를 저었다. 마브카를 이 이상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마브카는 내가 공작저에 남기로 한 이유였다.
그러나 외람되게도 저택에 있는 사람 중에서 마브카가 가장 불행해졌다. 어머니의 부재를 대체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과연 보상할 수는 있는 건지 고심에 빠질 때였다.
푸딩의 품속에서 작은 덩어리가 바스락거리더니 마브카에게 달려들었다. 리코의 손가락이 변했던 쥐였다.
뭔가 감이 오는 듯해 푸딩이 쥐를 제압하려 드는 걸 막았다. 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마브카의 다리를 콕콕 찔렀다.
“쥐?”
쥐에 대해 좋은 추억이라곤 없는 마브카가 겁을 지체 먹고 내게 안아달라는 듯 매달렸다. 그러다 쥐가 말을 꺼내자 마브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 브카….”
“…엄마!”
쥐에게서 나온 소리는 분명 리코의 목소리였다. 전화기 대용이라더니 진짜 의사소통이 가능한 거였네. 심지어 리코의 신체 일부라서 그런가, 시야까지 공유가 되나 보다.
마브카는 쥐를 보고서 리코라며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이의 상상력인지, 아니면 쥐를 아마란스라고 여겼던 아게라처럼 리코가 마브카에게도 능력을 쓴 건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리코는 마브카의 몸을 올라타 어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브카의 귓가에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를 했다.
“마브카. 영애님을 곤란하게 하면 안 돼. 왜냐하면, 엄마는 엄청나게 비밀스러운 작전을 위해 숨어있거든.”
“비밀스러운 작전?”
“응. 예전에 마브카가 한 것처럼.”
신전에서 공작가의 정보를 빼돌리려 마브카에게 접근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마브카는 리코의 말에 속절없이 넘어갔다.
“그러니까 엄마가 없다고 해서 마브카가 막 울고 그러면 안 돼. 마브카가 울면 엄마는 걱정돼서 비밀 작전에 실패할지도 몰라.”
“비밀 작전은 절대 실패하면 안 되는데….”
마브카가 어느덧 눈물을 그치고 훌쩍이며 답했다.
“그럼 엄마가 비밀 작전에 성공하려면 마브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울지 말고, 영애님 말씀 잘 들어야 해!”
“그래. 잘 아네. 착하지, 내 사랑하는 딸.”
리코의 속살거림에 마브카가 햇살처럼 웃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어른들은 날 포함해서 그 누구도 웃지 못했다.
쥐는 그 작은 발로 마브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방울에 털이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그럼 엄마는 언제 돌아와?”
혀에 기름칠한 것처럼 유연하게 나오던 답이 뚝 멈춘 것은 마브카의 질문이 끝난 이후였다. 리코는 잠시 망설였고, 그 대답을 한 건 나였다.
“열 밤만 자면 돌아올 거야.”
마브카가 제 양손을 쫙 펴서 내게 뻗었다. 숫자 열이 제 양손을 펼친 손가락만큼의 수가 맞냐는 물음이었다.
“맞아. 손가락 열 개만큼.”
리코는 죽으러 간 저를 두고 돌아온다고 답한 내가 이해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딸에게 괜한 허풍을 떨며 기대를 하게 만든다며 원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마브카의 어깨에 올라와 있던 쥐가 후다닥 내려와 내 위로 올라가려 들었다.
“이게, 어딜.”
푸딩이 눈을 찡그리며 쥐의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쥐가 낑낑대자 푸딩이 한숨을 내쉬며 쥐를 손바닥에 올리고 내 귓가에 가져다 댔다. 쥐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을 거예요.”
거짓말이라…. 양손을 접어대며 수를 세느라 쥐가 내려갔는지도 모르는 마브카를 눈에 담으며 말을 돌렸다.
“아게라 님의 기억이 돌아오셨어.”
“…아게라 님이요? 그게 정말인가요?”
“그래.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조부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확실하겠지.”
“그럼….”
리코가 잔뜩 기대에 차 말끝을 흐렸다.
“아게라 님이 리코 널 기억하고 있는 이상, 네가 쥐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일은 없어. 그러니 죽을 필요도 없다는 거지.”
물론 공작과는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내 독단적인 선택이었다.
“…….”
리코는 말을 잃었다. 죽이려 들었다가, 쓸모 있게 이용한다면서 사지로 밀어 넣어놓고 이제 와 살아남으라고 하니, 리코 입장에선 변덕스러운 내가 원수가 따로 없겠지.
“다시 데리러 갈 테니 버티고 있어, 리코.”
리코는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쥐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리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칸나가 노크도 안 하냐며 핀잔을 주기도 전에 히솝이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로한슨 영애님! 가브리엘 경이 눈을 뜨셨습니다!”
“가브리엘 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히솝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히솝이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고마워, 히솝.”
약속한 대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어깨를 두드려 주려 했는데 히솝은 전혀 예상 못 했는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는 히솝이 굳었거나 말거나 바로 옆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침상에 누워 있는 가브리엘이 보였다.
“가브리엘 경, 정신이 드나요?”
“…에반젤린 영애님.”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더니 그 아래 숨어 있던 푸른빛 드리워졌다.
“여긴, 여기는 호사퀸 공작저인가 보군요.”
가브리엘은 주변을 살피고 재빠르게 상황 파악을 한 후, 쉴 공간을 제공해 준 공작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죽다가 살아난 주제에 무리를 한다며 의사에게 된통 혼났다.
내 입장도 같았다. 공작은 그냥 거래한 것뿐이니 감사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정신이 들었다곤 해도 아직 가브리엘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손은 팔정도야 움직일 수 있을 뿐, 손가락의 정밀한 컨트롤은 무리였다.
완치가 가능하냐 묻자 가능하다는 대답이 아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가브리엘이 깨어났으니 마리크 주교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추측과 대비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환자니 그냥 누워있어도 되는데 가브리엘은 굳이 몸을 일으켜 앉으려 들었다. 가브리엘과 거리감이 줄어든 푸딩이 질색하면서도 가브리엘이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의사들을 물리고, 푸딩이랑 칸나가 함께 자리했다. 리코도 함께였다.
“그 쥐는….”
“리코에요.”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기사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가브리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쥐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다며 인사했다. 리코가 그에 질세라 같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쥐랑 마주 인사하는 가브리엘이 귀여워서 하마터면 환자를 두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가브리엘과 감옥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공작이 일러준 마을로 로한슨 저택 사람들을 빼돌릴 거라 말하자 가브리엘은 내게 면목이 없다는 투로 휘하의 기사들도 함께 대피시켜 줄 수 있겠냐 물었다.
“제 단원들은 토텐 후작가에 있을 겁니다.”
“토텐 후작가요?”
파라로스 기사단의 행방이 묘연하다 했더니 마리크 주교가 아니라 가브리엘이 먼저 선수를 친 거였다.
기사단원들과 함께 돌아갔다는 가브리엘이 혼자 황실의 지하 감옥에 있던 까닭도 함께 설명해 주었다. 가브리엘은 성수가 통하지 않는 체질이었고, 그 사실은 휘하의 기사들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원래 제 몸에 대해 아는 건 라파엘라뿐이었습니다.”
저주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둔갑시켜 기사 단장으로 만든 데에는 라파엘라가 지대한 공헌을 했음이 자명했다. 라파엘라는 공작 아들에다 성기사면서 후환이 두렵지도 않나?
남주의 부관을 하려면 그 정도 담력은 있어야 한다는 건가…. 역시 로판 속 제일 극한직업인 게 남주의 부관이다. 아직 로한슨 저택에 남아있을 라파엘라를 생각하며 박수를 보냈다.
가브리엘은 마리크 주교가 흔쾌히 치료를 하라 권한 것이 자신의 체질을 알고 있기 때문임을 눈치챘단다.
마리크 주교 말대로 그대로 기사들과 함께 신전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는다면, 그런데 믿고 의지했던 기사 단장이 성수가 통하지 않는다면, 가브리엘의 위신은 나락으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지지기반마저 박살이 나겠지. 그래서 가브리엘은 토텐 후작가를, 특히 어린 소후작을 보호해 달라는 명분으로 기사들을 빼돌렸다.
몸을 멋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가브리엘을 두고 부하들이 남아있으려 들자 명령과 명분으로 협박했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자자한 소후작이 아닙니까. 마리크 주교가 그 어린아이를 노리고 있다고 했지요.”
멜렉을 말하는 거다. 제 단장을 닮은 정의로운 기사들은 아이의 위험을 외면하지 못했다. 남아있으려는 사람마저 모조리 전부 보냈다.
대외적으로 보면 파라로스 기사단은 단장을 두고 도망친 것이다. 눈엣가시들이 내분 되었다고 생각했겠지. 거기다 가브리엘이 남아있기에 성기사들은 굳이 파라로스 기사단을 뒤쫓지 않았다.
토텐 부인으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멜렉은 저주받은 수준이 아니라 시체의 몸을 빌린 악마가 맞았으니까, 마리크 주교에게 사로잡힌다면 후작가도 통째로 전소될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파라로스 기사단의 보호가 기꺼웠을 거다.
토텐 부인께 연락이 없었으나, 둘이 나누었던 편지를 통해 내 필체가 빼돌려진 전적이 있으니 경계를 하며 조심했던 게 분명했다. 멜렉이 먼저 연락할 방법도 없었고. 혹시 모르니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긴 했다.
나는 가브리엘에게 파라로스 기사단도 함께 대피시키겠다며 약속했다.
“그럼 경은 왜 신전으로 가지 않고 감옥에 있던 건가요?”
마리크 주교의 애초 목적은 가브리엘이 저주받은 몸이라는 걸 만천하에 드러내는 거다. 파라로스 기사단이 없더라도, 다른 기사나 사제들에게 가브리엘이 성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면 그만 아닌가?
가브리엘은 머쓱한 듯 눈을 굴리며 답했다.
“…몸도 성치 못한 채로 신전에 남아있다가 마리크 주교에게 이용당할 수는 없으니, 제 신분을 밝혔습니다.”
“황자라는 걸요?”
“네.”
이용당하기 싫다고 더 이용가치 넘치는 비밀을 알려 줬구나…. 아니지, 마리크 주교라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
“마리크 주교가 저주를 받은 저를 몰래 빼돌려 황제 모르게 키웠다고 고했습니다. 마침 절 데려온 자바니야 주교님께서도 알고보니 이미 마리크 주교의 수하였고요. 제 말이 틀리다면, 저는 황족의 신분을 사칭한 중죄인이니 감옥에 가야 마땅하고, 맞다고 해도 황족의 신분이니 제 신상은 황실에 귀속되어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가브리엘의 출생이 밝혀진다면 마리크 주교는 신실하다는 평을 잃고 고결한 주교님도 결국 권력에 굴복했다는 평을 듣게 될 거다.
마리크 주교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뻔했다. 자신이 황자를 몰래 빼돌려 키운 사람이 되기보다, 가브리엘을 황족 사칭범으로 만드는 것이 더 이득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게 가브리엘은 황족 사칭죄로 감옥에 들어가 있던 것이다. 물론 황자 본인이긴 했지만, 황족을 사칭한 일이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마리크 주교가 끝내주게 입막음을 한 모양이다.
가브리엘의 이야기가 끝나자, 다음은 내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대체로 예레미아가 목숨 걸고 빼내온 정보들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젤리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대목에서 가브리엘이 서글퍼하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참나,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거람.
마리크 주교가 사라카라는 하녀와 동일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외형을 설명해 주자, 가브리엘은 화상 흉터를 가진 하녀를 기억한다고 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 하녀에게 제 상체를 보인 적이 있습니다.”
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브리엘의 가슴께로 향했다. 가브리엘은 당황하며 말을 얹었다.
“영애님, 결단코 불순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알아. 순간 놀라서 그랬다.
가브리엘은 황태자의 탄신일 날, 와인에 물든 옷을 환복할 때 시중을 들어준 하녀가 마리크 주교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때 제 흉터를 보고 알아챈 걸 수도 있겠군요. 제 낙인을 찍는 과정에는 마리크 주교도 함께했을 테니 말입니다.”
사실 흉터까지 가지 않아도 생긴 거만 봐도 가브리엘이 황실의 핏줄인 건 알아볼 수 있을 거다. 누가 봐도 닮았던데 왜 아무도 못 알아챈 걸까. 내가 빙의자라서 나만 알아챈 건가?
그래. 26년 전에 마리크 주교가 가브리엘에게 황족의 표식을 남겨놔서 황자라는 걸 알아차린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치자.
새로 떠오른 의문은 20대밖에 안 되어 보이는 젊은 외모였다. 마리크 주교는 적어도 50대 이상의 중년이어야 했으나, ‘사라카’의 외형은 확실히 젊어 보였다.
아자젤도 있겠다, 마리크 주교가 악마를 소환해 불로불사의 소원을 빌기라도 한 걸까? 그래놓고 구국의 성자 노릇을 한 거면 진짜 대국민 사기극이 따로 없었다.
가브리엘은 나보다 그럴듯한 답을 찾았다. 신전에 안치된 고서에서 읽어본 적 있다며 과거 태양신의 영향력이 컸을 때는, 신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 불멸에 가까운 오랜 생을 누렸다며 이야기해 주었다.
마리크 주교의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신의 총아였다. 그 말대로 신의 축복을 한몸에 받아 늙지 않는 걸 수도 있다.
마리크 주교가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까닭도 노화하지 않는 걸 숨기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긴 했다.
“그런 총애를 받는 사람이 어째서 학살을 저지르는 것인지….”
곁에서 귀를 기울이던 칸나가 참담한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한탄을 내뱉었다. 말 속에 은근한 질투가 엿보였다.
몸져누워 평생을 앓았던 칸나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마리크 주교의 행보가 퍽 기만적일 터였다.
“오히려 그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요?”
“되려 총애를 증명받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이단은 신의 자식이 아니니, 그들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살육을 저질렀음에도 변화가 없다면, 그만큼 선명한 총애의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참 신실한 분이시네요.”
칸나가 감탄하듯 마리크 주교를 비꼬았다.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마리크 주교는 여러모로 신전에 헌신적인 사람처럼 보이죠. 이단을 학살하는 것도, 황족에게 손을 대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신전의 이름값을 드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가브리엘이 꺼내는 이야기는 아주 오랜 기간을 쌓아 올린 해석처럼 보였다.
그 실례로 신전에서 보유한 성수의 양이 급증했다. 이단을 죽이면 죽고 싶지 않은 자들이 더 큰 믿음을 보낸다. 믿음이 늘면 성수가 는다.
그 성수를 통해 치료받은 자들이 더 큰 믿음을 보여 준다. 꼬리를 물고 순환이 이어져 신전은 근래 들어 20년 만의 부흥을 맞이했다.
“마리크 주교의 행적은 사리사욕이 없어 보이기에 더욱 두려운 것입니다.”
가브리엘의 말이 맞았다. 대의란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었다. 마치 마리크 주교가 저지른 살인과 행적들이 정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더 우스운 것은 마리크 주교와 신전에 입장에서 처분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내 곁에 모여있다는 것이다.
마리크 주교가 말하는 마녀, 에반젤린 로한슨.
성수가 통하지 않아 버려졌는데, 신전을 속이고 성기사가 된 가브리엘.
악마의 숙주인 괴물 고양이.
칸나는 마녀의 하녀인 데다가, 목에 있는 흉터 때문에 목이 잘렸다 다시 붙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듀라한도 아니고….
파티를 짜도 어떻게 이렇게 마리크 주교에게 극적으로 대항되게 구성되었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마리크 주교는 상징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뛰어난 극본가이죠. 황태자의 사살일을 그의 탄신일로 정했듯이, 기념비적인 날에 일을 저지를 확률이 높습니다.”
가브리엘은 오늘 날짜를 물었다. 답해 주자 수를 세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때마침 우연찮게도 열흘 후. 아주 의미 있는 행사가 있습니다.”
“어떤 건가요?”
열흘 후라면 생각보다 훨씬 가깝고 촉박한 날짜였다. 그런 행사가 있는데 난 들어본 적 없다는 것도 이상했다. 가브리엘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희생제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불길해 보이는 행사였다.
희생제란 태양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행사라고 했다.
“제물이요?”
나는 제물이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로판 소설 맞긴 하지…?
“실제로 죽이는 것은 아니고, 정확히는 죽는 배역을 맡은 사람입니다.”
아하. 다행히 진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게 아니라 행사를 위해 제물 역할을 맡는 것뿐이라고 했다.
가브리엘이 말한 희생제는 고서에나 나올법한 과거부터 이어져 온 행사로, 오히려 일종의 연극에 가까웠다.
태양신은 세상의 온 생명을 사랑하지만 그중 인간이 가장 특별하게 여겼다. 특히 신이 아끼는 사람은 불로불사에 가까울 정도로 오랜 생을 영위하기도 했다. 그중 가장 신이 아꼈다고 전해지는 게 레아라는 소녀였다.
신이 사랑하는 아이는 과연 총명하고 사랑스러웠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레아는 태어나던 순간 신의 눈에 들었다.
레아를 낳은 모친은 눈과 귀가 멀고, 말도 못 하는 아자(啞者)였으나, 아이의 탄생을 기뻐한 신이 레아의 모친에게도 축복을 내려 모든 병증이 깔끔하게 사라졌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레아가 태어난 마을에는 무려 백일동안 해가 지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신의 축복을 받아 레아의 마을은 몹시 비옥하고 풍요로웠다. 지금의 제국의 터가 바로 그 마을에서 시작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질 정도였다.
신은 레아를 제 자매라고 부르며, 레아에게 신의 권능을 떼어주었다. 레아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신에 필적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레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방자해졌다.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살고 신의 총애를 받으니 세상 모든 것이 우스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태양신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태양신이 없다면 그가 가진 모든 권력을 제가 누릴 것이라며 으스댔다.
결국, 오만의 끝에 다다라 신을 죽이고 그 자리에 자신이 서고 싶어 했다. 레아는 태양신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신은 아끼는 아이에게 차마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런 신을 대신하여 레아를 처형한 것이 인간들이었다.
사람들은 신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레아를 질투하였고, 혹시라도 레아의 만행으로 인해 실망한 신이 인간에게 축복을 거둘까 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그래서 총애를 이어나갈 수단으로 신을 향해 반기를 든 레아를 제물로 바쳤다. 레아는 목이 잘려 죽었다.
태양신은 몹시 슬퍼하며 직접 시신을 수습하였다. 다만 레아에게 죄가 없던 것은 아니었기에, 레아의 영혼을 자신의 그림자에 가두는 형벌을 내렸다.
그리고 레아가 만들고, 레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모든 축복을 거두고 축복에 닿으면 오히려 살갗이 녹아내려 고통스러워하는 벌을 내렸다.
“축복이라는 게 성수를 말하는 건가요?”
“네. 그자들이 지금 와서 악마라 불리는 것들입니다.”
희생제는 바로 그 일을 기리는 의례였다.
레아의 목을 내리쳤던 자가 바로 제국의 시조였고. 그러니 희생제는 제국의 건설과 함께 쭉 이어져 내려온 셈이다. 제국에게도, 신전에게도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특히 마리크 주교를 필두로 신전의 위세가 극강한 지금에는 무척 중요한 행사일 것이다.
지금 안 것이 이상할 정도로 큰 행사였다. 하지만 모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로한슨 백작은 내게 희생제의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고위층들의 행사이니, 안 그래도 병약해 병석에 누워있기만 하던 칸나가 자세히 알 리도 없었고.
매년 있는 행사도 아니고, 유난히 제국에 사고가 많을 때마다 열리는 비정기적 의식이었다.
지금 와서는 암묵적으로 새로운 권력자가 나올 때 이 사실을 널리 알리고, 공고히 하기 위해 불순한 의도로도 쓰인다고 했다. 제물을 참수하는 역할을 맡는 자가 곧 황좌에 오른다는 게 하나의 정설이 되었다고.
“이전의 집행인 역할을 맡은 자가 바로 지금의 황제입니다.”
“그럼 이번의 집행인 역할은 테네브레이 황녀가 맡겠군요.”
“네. 그럴 겁니다.”
제국의 시조의 역할을 자신이 맡으며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상징성을 갖는 것이다.
“집행인의 역할이 차대의 황제라면, 제물의 역할은 누가 맡나요?”
단순한 연극이라기에 파급력이 거셌으니, 제물의 역할 또한 아무나 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마리크 주교가 거슬려 하는 나나, 가브리엘이다.
“제물의 역할을 선정하는 기준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영애님께 역할이 갈 겁니다.”
가브리엘은 내가 제물로 선정될 거라 추측했다. 설마 마리크 주교는 황태자 탄신연부터 그 역할에 나를 찜해놓은 건가?
이전부터 마리크 주교가 내게 눈독 들였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제물이라고 해놓고 연극이 아니라 ‘어머, 손이 미끄러졌네!’ 이러면서 진짜로 목을 뎅강 할 속셈인 거지.
“영애님께서 응하시도록 저를 미끼로 쓸 속셈이었겠지요.”
깊고 푸른 눈에는 내 발목을 잡는다는 죄책감이 그득했다. 새삼스럽게 가브리엘의 표정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처연하게 짝이 없었다.
“영애님께서는 저를 아, 아끼, 아끼시니까…. 물론, 젤리 씨도 미끼로 쓰이겠지만요.”
가브리엘은 내가 자신을 아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부끄러운지 볼을 붉히고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저건 일부러 저러는 건가?
“이젠 제가 경을 아낀다는 사실을 알아주시네요.”
“물론 저뿐만이 아니라 푸딩 씨나, 칸나 씨도 계시고 또 토텐 부인도….”
놀리듯이 이야기하자 가브리엘은 횡설수설하며 내가 아낄 것이 분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계속 거론했다.
그래, 푸딩은 반려동물이니 아낄 수밖에. 칸나도 내가 거두었으니까. 그렇게 하나씩 듣고 있다가 토텐 부인까지 등장해 이마를 짚으며 가브리엘의 말을 막았다.
“그만 하세요.”
말리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간 내 사람들의 목록을 끝도 없이 읊어댈 기세였다.
가브리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은 더 상기되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붉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눈이 촉촉해, 하다못해 눈물까지 맺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마 가브리엘은 제 외모의 파급력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눈치 없는 여주 같은 거였다면 가브리엘의 얼굴이 붉어진 걸 보고 아프냐는 소리나 하고 있겠지.
아니, 가브리엘은 환자니까 아픈 게 맞지만.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불쾌하기만 했던 이전과 다르게 나까지 같이 부끄러워지며 덩달아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다.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열흘 후면 상당히 촉박하네요.”
“예. 그렇지 않아도 급하게 잡힌 일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신전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대략적인 길일만 잡았을 뿐, 제대로 공문도 떨어지지 않았었고요.”
가브리엘이 신전에 있을 때라면, 로한슨 저택이 불타기도 전이다. 지금쯤이라면 참석을 요구하는 서신이 왔을 것이다.
“조부님께 편지가 왔는지 여쭤보러 다녀올게요. 경은 조금 더 쉬도록 해요.”
가브리엘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브리엘이 눕는 것을 도와주고 이불도 잘 덮어주었다. 가브리엘은 또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는데, 내가 못 참을 거 같아 눈 위에 손을 얹었다.
“영애님…?”
가브리엘은 갑작스럽게 시야가 가려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불렀다.
당황해하며 눈을 깜빡였는지 손바닥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자기가 나비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왜 이렇게 팔랑거리는 거야….
날갯짓에 꽃가루라도 날아온 건가, 아니면 누군가 간을 보듯 붓질로 나를 간질여대는 걸까.
어쩐지 견딜 수가 없어져 입술을 깨물었다.
어린아이를 재우듯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가브리엘은 순응하듯 눈을 감았다.
얼마 안 가 가브리엘은 아픈 몸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가브리엘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방 밖에 서 있던 의사들에게 가브리엘을 부탁하고 공작에게 향했다. 괜히 아픈 사람 고생시킬 수는 없으니, 가브리엘이 잠들어있는 사이 내가 할 일을 해야겠다.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면서도 조금 전의 기묘한 감정이 계속 불쑥 튀어나왔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가닐거려 꽉 주먹을 쥐었다.
신경이 계속 거슬리는데 대체 이게 무슨 감정인 거야?
그러나 곧 눈앞에 보이는 집무실에 생각을 뒤로했다. 난 모르겠다.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그것만 신경 쓰지 말고 다른 문제부터 풀어야 하는 법이다. 나도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겠다.